여실히 본다란 허깨비처럼 본다는 뜻이다

2019. 5. 5. 19: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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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히 본다란 허깨비처럼 본다는 뜻이다

제3장 모든 빛은 얼룩으로 화하고


1. '올바른 수행'(正修)이란,···
2. '마음'과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 알지 못한다
3. '허공'에는 '방향'도 '위치'도 없다
4. 모든 것은 빛의 얼룩으로 화(化)하고,···
5. 우주 공간에는 <절대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6. 그 '영리한 마음'이 공부에 가장 해롭다
7. 눈앞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
8. '여실히 본다'란, '허깨비처럼 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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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여실히 본다'란, '허깨비처럼 본다'는 뜻이다

 
『거사(居士)는 사는 집이 어디시오?』
『신촌에 삽니다.』
『집에서 언제 출발했어요?』
『아홉 시에 떠났습니다.』
『여기(方背洞)엔 언제 도착했어요?』
『열 시 반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신촌 집엔 거사가 없겠고, 여기엔 거사가 있겠군요.』
『네? ··· 물론이지요.』
『이럴 때 옛날 설봉 대사(雪峰大師)는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

“칠통(漆桶)아!”라고 했어요.』
『? ? ··· 』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어째서 ‘칠통’이라고 했을까? ···

눈만 끔벅이고 있는 걸 보니 이해가 안 되나 보군요.

우리는 이미 인연을 따라서 나(生)는 모든 법은 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머무르는 일도 없으며, 변하면서 사라져 가는 일도 없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즉 모든 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누누이 밝혀내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의 온갖 법은 순전히 망령된 의식(妄識)의 분별

때문에 있게 된 거죠.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안’도 없고 ‘바깥’도 없어서,

실로 티끌 하나 붙을 데 없는 ‘순일(純一)한 허공’ 가운데서, 허망한 정식(情識)이

멋대로 지어낸 게 바로 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겁니다.


따라서 정신적, 물리적 일체 현상은 그것이 모두 저마다의 고유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이 청정한 ‘한 마음’의 변현(變現)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모든 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본래 ‘한 성품’(一性)이요, 따라서 천태만상의

모든 차별법은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평등한 것>임이 밝혀진 겁니다. ···

즉 ‘산’이 그대로 ‘물’이요, ‘물’이 그대로 ‘산’이며, ‘이곳’이 그대로 ‘저곳’이요, ‘저곳’이

그대로 ‘이곳’이며, ‘움직임’이 그대로 ‘고요함’이요, ‘고요함’이 그대로 ‘움직임’인 겁니다.

만약 이렇게만 볼 수 있으면, 이것이 바로 ‘정식’(情識)이 그대로 ‘정식’(淨識)으로 되는

순간이며, 결코 ‘물든 마음’을 바꾸어서 ‘깨끗한 마음’이 된 다음에야 ‘평등한 지혜’가

열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본래 ‘한 마음’일 뿐,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하나’로서의

‘법계 허공계’의 실상입니다. 진실로 생멸도 없고, 가고 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찍이 생멸이 없었던 적이 없고, 가고 옴이 없었던 적이 없는, 실로

<부사의하고 신령스러운 한 마당>(靈臺)입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이 가운데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성과 소멸을 보고, 분주히 오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스스로의 천진한 성품을 늘 어둡히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로만 ‘그렇다’고 아는 것으로는 한갓 난해한 지식만 한 토막 더 보탤 뿐,

우리들의 안목은 전혀 밝아질 수 없다는 걸 절실히 인정해야 할 땝니다.


모든 법이 성품이 없어서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면, ― 그것이 어김없는 진실이라면,

 ― 그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모든 것이 영락없는 꿈이 아니겠어요?

목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이나, ‘일어나는 일’이나, ― 꿈속의 그것처럼 ―

어느 것 하나 빠뜨림 없이, 심지어 바늘끝만한 틈새까지도 ‘마음’ 아닌 게 없지 않겠어요?

이 모두가 ‘참된 하나’에 의지해 존재하는, ‘동일한 것’(法身)의 다른 ‘모습’이고,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인 겁니다. ― 스스로는 정한 ‘성품’도 없고, 정한 ‘모습’도 없고,

 ‘작용’도 없는 ― ‘참된 하나’에 의지해 있는 것이므로 그 모든 현상법들도 모두가

‘성품’도 없고, ‘모습’도 없는, 따라서 스스로는 작용도 없는 겁니다.

그 모두가 오직 ‘마음일 뿐’, 다른 건 진실로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이 그대로 ‘법’입니다.

이제 다시는 ‘마음’으로 ‘마음’을 구하거나, ‘마음’으로 ‘마음’을 알거나, ‘마음’으로 ‘마음’을

닦는 따위 부질없는 일은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진실로 한 법도 볼 만한 법이 없고, 한 법도 알 만한 법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선현(先賢)이 이르기를,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일이 실제로 그런 작용이

일어나는 것인 줄 아는 자는 제도하지 못한다」고 했던 겁니다.


‘나’의 청정한 ‘성품’이 이미 온 누리에 두루해서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오직 ‘한 마음’

뿐인 ‘법계’(法界), 도무지 가(邊)가 없고,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몽땅 없는, 텅 트인 ‘허공계’에서 어떻게 <가고 오고 하는 일>이 있겠어요?

도대체 ‘무엇’이 가고 오고 하며, ‘어디’에서 떠나서 ‘어디’에 당도할 수 있겠어요?

‘안’과 ‘밖’, ‘여기’와 ‘저기’는 오직 ‘한 자리’일 뿐이요, ‘어제’ ‘오늘’ ‘내일’은 진실로

‘한 때’입니다. 그러면서도 진실로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이 모든 <시간?공간적인 차별상>

이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남(生)이 없이 나는 것>임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결코 이것들을 허무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지금처럼 보고 듣고 하면서도 전혀 이 모든

것에 대해 ‘지견’을 세우거나, ‘집착’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겁니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 이르기를, 어느 날 세존이 유리광(琉璃光) 보살에게 물었어요. ···

『선남자여, 그대는 이르러서(到) 온 것인가, 이르지 않고 온 것인가?』하니,

 ‘유리광’이 대답하기를, ···
『‘이름’(到)으로도 오지 않았고, ‘이르지 않음’(不到)으로도 역시 오지 않았나이다.

이 이치에는 도시 ‘온다는 것’이 없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행(行, 有爲行)이 만약

‘항상하다’(常)면 오지 않은 것이요, ‘덧없음’(無常)이라면 이 역시 오는 것이 없나이다.

또한 만약 ‘중생’의 성품이 있음을 본다면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이 있겠거니와,

저는 지금 ‘중생’의 정한 성품이 있음을 보지 않거늘 어찌 오고 오지 않음이 있다고

말하겠나이까.

또한 교만(驕慢; 자아에 대한 집착)이 있는 이면 ‘오고 감’이 있음을 보겠거니와, 교만이

없는 이는 ‘오고 감’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또한 집착이 있는 이면 ‘오고 감’이 있음을

보겠거니와, 집착이 없는 이는 ‘오고 감’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또한 만약 여래는

마침내 열반한다고 보는 이면 ‘오고 감’이 있음을 보겠지만, 여래의 열반을 보지 않는

이면 ‘오고 감’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또한 ‘불성’(佛性)을 듣지 못한 이면 ‘오고 감’이

있겠거니와, ‘불성’을 들은 이면 ‘오고 감’이 없나이다.』라고 했어요.


이것만 보아도 우리들이 얼마나 말만 배우면서, ‘하는 일’은 여전히 옛날 습관 그대로 마구

구정거리면서, 조금도 지혜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미 ‘오고 가는 법’이 없으면 당연히 ‘그치고 머무르는 때(時)’도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또한 ‘존재’로 말미암아 ‘때’(時間)를 세우게 되고, ‘때’를 인해서 ‘존재’를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건데, 온갖 ‘법’이 이미 없는 거라면 ‘때’가 어떻게 혼자서 성립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칠통아!” 하는 소리를 면하기 위해, 달리 올바르게 대답하는 법이 뭘까

하고 궁리한다면 이야말로 진짜 ‘칠통’이 되고 맙니다.

천 갈래 만 갈래의 ‘물결’이 모두가 ‘한 맛’으로서, ‘바다’를 여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물결’이 그대로 ‘바다’요, ‘바다’가 그대로 ‘물결’이어서, 비록 그 겉모양이 출렁이면서

밀려가고 밀려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다’는 일찍이 움직이고 변하고 한 일이 없습니다.

이 실상을 분명히 간파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간’과 ‘세간법’은 그 모두가 ‘진여법성’

(眞如法性)을 여읜 것이 아니어서, <‘성품’도 없고 ‘모습’도 없고 ‘작용’도 없는 ‘법신’(法身)의

이치>를 따르면서 환영으로 나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세간법’이 다 이 청정한 ‘한 마음’ 가운데 두루 가득해서, 이 가운데서 모든

‘세간’과 ‘세간법’을 분명히 보지만, 결코 이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겁니다.

 ‘마음’이 ‘마음’에 집착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형상이 아무리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더라도 이 모두가 ‘법신’의 ‘한 맛’임이 분명하므로, 결코 ‘두 모양’(二相)이 없고,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그림자와 같아서 겹겹이 걸림이 없는 한 세상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집착’과 ‘집착 없음’, ‘번뇌’와 ‘번뇌 없음’까지 몰록 가지런히 다해서,

더는 조작할 일도 없고, 조작하지 않을 일도 없으니, ··· <‘이렇고’ ‘이렇지 않은 것’이

몽땅 다한 자리>에서 잘 살펴야 합니다. 말해 봐요. 무엇을 잘 살펴야 합니까? ···

「 또 고개를 치켜드는구나. 훠어이!!」


화엄경에 이르기를, ···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능히 다음과 같이 깊이 요달(了達)해야 할지니,

··· 곧 ‘마음 법’이 환(幻)과 같고, ‘세간’이 모두 꿈과 같으며, ‘부처’가 세상에 출흥(出興)

하심이 그림자와 같고, 모든 ‘언어와 음성’이 다 메아리와 같도다.

이와 같이 ‘여실(如實)한 법’을 보아서, 이 ‘여실한 법’으로써 ‘몸’을 삼고, 모든 법의 본성이

청정함을 알며, 이 ‘몸’과 ‘마음’이 실체가 없음을 분명히 알아서, 그 ‘몸’이 무량한 경계에

두루하며, ‘부처 지혜’의 광대한 광명으로 모든 보리행(菩提行)을 닦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여실(如實)하게 본다」는 말을 들으면 그저 「진실하게 본다」는 정도로

듣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모든 법의 실상을 밝히고 보니, ‘참되다’느니 ‘허망하다’느니

하는 말들이 다 쓸데없는 분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예요.

즉 모든 법의 ‘본성’은 본래 ‘참된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니었던 겁니다.

도무지 정한 성품도 없고 정한 모습도 없어서 끝내 ‘있고’ ‘없음’에도 속하지 않는, 따라서

일체의 ‘생각’이나, ‘말’로 헤아리거나 짐작할 수조차 없는, 그런 게 바로 모든 법의

‘본래 성품’이었던 겁니다. ··· 이런 말도 물론 용납되지 않구요.

그러므로 ‘여실하게 본다’는 말에 굳이 토를 달자면, ··· 모든 <환과 같은 법>(幻法)이

<환과 같은 인연>(幻緣)으로 말미암아 <환과 같이 나서> (幻生) <환과 같이 머물고>(幻住)

<환과 같이 작용하고>(幻作) <환과 같이 멸한다>(幻滅)는 것을 <환과 같은 지혜>(幻智)로써

<환과 같이 살핀다>(幻觀)고나 해야 할 거예요.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여실하게> 보는 겁니다. 이야말로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지극한

묘용(妙用)이요, 인간적 차원의 어떤 용훼(容喙; 부리를 댐)도 붙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일찍이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었던 이와 같은 기이한 ‘세계관’이 20세기 초엽,

한 무리의 선구적 과학자들에 의해 순전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립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전까지의 세계관은, 일상생활의 경험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실적 체험의 밑바닥에는

그것들을 모두 통일적으로 상호 연관지을 수 있는 어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법칙들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었어요. 이것이 곧 뉴튼의 통찰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量子力學)에 의해 정립된 현대과학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이것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즉 입자물리학의 세계관은 <‘물질’이 없는 세계이며,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사건’이 둘이 아닌 세계>이며, 따라서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제가 일으키는 작용’을

스스로 통제하고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변환 과정이 전적으로

자체의 보존법칙과 ‘확률’에 의해 제어되는 세계입니다>. ― 따라서 관찰자가 거기에 있건

없건, <‘입자’들은 인과율에 따라서 시공 속을 운동하는 ‘실체’라>고 보았던, 지난날의

고전적 물질관과 세계관은 양자역학에 의해서 완전히 반증되었습니다.


입자물리학자들의 첫째 질문은 「‘무엇’이 충돌하는가?」,「‘무엇’이 움직이는가?」하는 겁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연구 대상인 ‘양자’라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런 묘한 존재라는 걸 밝혀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아원자 입자’는 먼지 알갱이와

같은 ‘입자’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관찰자’와의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그 ‘존재’가 드러나는,

즉 다시 말해서 ‘관찰자’의 관찰행위가 없이는 제 혼자서 존립할 수 없는 그런 물건입니다>.

 아니, ‘물건’이라고 지칭할 수도 없는 그런 거지요.

 요는 관찰자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전적으로 관찰자의 뜻에 따라서

나타나는, 그런 존재라는 말입니다. 불자(佛子)들의 말과 너무나 흡사해서 분간이 잘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그들은 전자(電子, electron)의 운동을 관찰하기 위해 ‘안개상자’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그 상자 속에는 고감도의 감광판(感光板)이 장치되어 있는데, ‘전자’가 이 감광판을 지날 때,

 눈에 보이는 흔적을 남깁니다. 이건 <일련의 ‘점’들의 연속>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사실은

‘전자’가 감광판의 원자들과 작용해서 생긴 은(銀)의 결정(結晶)들입니다. 이것을 현미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보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보통, 한 개의 전자가 마치 야구공처럼 감광판을 지나가면서 흔적으로

은결정(銀結晶)을 남겼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거기에 구체적인 에너지의 이동이 있은 게

아니라, 마치 야광 광고판의 콩알 전구들이 연속적으로 반짝일 때, 이것이 마치 무엇인가가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그런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것은 실존적인 현상이 아닌 겁니다. 이때 양자이론에서는 이것을 장(場)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 한량없는(꼭 많다는 뜻이 아니라, 많고 적고, 있고 없고 등을

한정지을 수 없다는 뜻임) 양자를 포함한 장(場) ― 이것은 여래장(如來藏)의 개념과 비슷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법계’는 곧 ‘둘 없는 마음’인데, 이 ‘한 마음’이 인연에 감응해서 이와 같이 생멸하고 왕래하고

하는 듯한 모든 현상을 환(幻)처럼 일으키는 겁니다. 따라서 결국 이 모든 현상들은

전혀 관찰자의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과학자들도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러나 그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기술할 때에는

예전처럼 그렇게 기록합니다. 즉 「하나의 ‘전자’가 감광판 위에 a, b, c ··· 등과 같은 궤적을

그리면서 이동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아무 구체적인 에너지의 이동이 있었던 게

아니니까, 따라서 이 경우, ― 아무 일도 일어난 일이 없으니,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지만, ―

그들이 굳이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오직 「어떤 물체가 공간을 지나간 게 아니라,

다만 은(銀)의 결정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요는 은의 결정이 생겼다」는 거예요.

이것 역시 없던 은의 결정이 새로 생겨났다는 게 아니라, 다만 눈에 뜨이지 않는 상태로

있다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눈에 드러나게 됐다는 거예요.

마치 똑같은 입김이라도 여름철에는 눈에 보이지 않다가, 추운 겨울날에는 하얗게 입김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그들 입자물리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무엇인가가

연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개념은, ―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마저도 ― 그 합리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겁니다.


자! 이쯤 되면 날이면 날마다 <불생불멸 불래불거>(不生不滅 不來不去)만을 호기 있게

외치면서, 막연한 ‘지견’ 가운데 들어앉아서 제멋에 겨워하는 축괴지류(逐塊之類; 남의 말만

좇는 무리)나, 허구한 날 홀로 들어앉아 ‘고요한 자리’만을 탐하면서, 모든 것 다 외면하고,

겨우 선인들의 화두 나부랭이나 들먹이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 발무지호(撥無之狐; 뭐든지

공했다고 배척하는 무리)들은 이제 밀린 밥값이나 물어낼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

 참으로 크게 분발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 일도 없는 가운데 본래 스스로 청정한 제 ‘심성’(心性)을 등지고는 공연히 망상을

굴리면서 밖을 향해 ‘법’을 구하고 ‘부처’를 찾다가, 겨우 몇 마디 알아듣고는, 이번엔 다시

그 모든 탐구행위가 죄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끊고 털고 하기에만

골몰하니, 그 망령된 ‘지견 놀이’가 언제나 쉬겠어요? 그저 ‘있다’고 하면 있는 줄로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로만 알아서, 이쪽 저쪽으로 설치면서 도무지 자재하게 운신(運身)할

줄 모르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풍혈 화상(風穴和尙)에게 어떤 중이 물었어요.

『‘있음’과 ‘없음’,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없을 때가 어떠합니까?』

이에 선사가 대답하기를, ···

『삼월(三月) 꽃길에서 모두들 휘늘어지게 놀건만, 오직 한 집만이 빗속에 근심스레

문이 굳게 닫혔구나.』 했습니다.


나중에 심문분(心聞賁)이 이 이야기를 들고(拈)는 말하기를. ···

『풍혈은 전방(前方)으로는 아직 마을에 이르지 못했고, 뒤로도 아직 안정된 곳에 이르지도

못한, 바로 그 자리에서 홀연히 좌우도 돌보지 않고 단숨에 활구(活句)를 얻어서 평생

경사스럽고 쾌락하였다. ― 지금에 모두들 이 속을 향하여 어긋나고 지나침이 많도다.』 했어요.


-  대우거사님의 <그곳넨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 


작은연못 - 양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