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형(平衡)|…… 혜천스님설교

2019. 4. 21. 12:3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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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강론 : 불2556226

평형(平衡) 

 

 

마, 오늘은 추울거라 하더니 그래도 봄기운이 좀 있습니다. 마, 지난 여름에 아~ 일요강론을 그만둘라고 좌선만 한다고 내가 그때 그랬었는데, 마 우리 좌선만 한다고 하면 안 오실 줄 알고 내가 그때, 우리 불자님들이 계속 오셔가지고 강론을 재개하게 됐는데, 아~ 봄도 됐고 해서 내 새롭게 맘도 가다듬고 해서 법회도 하고 그럴라고 내가 반야심경 수요날 강독을 시작한 겁니다.

 

오늘 주제는 평형입니다. 평형. 고를 평(平)자, 저울대 형(衡)자 평형(平衡). 저울대가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 것을 평형이라고 그러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는 결핍돼 있기 때문이에요. 행복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죠. 인간은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싶어 하걸랑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걸 채우기 위해서 행복을 추구하죠. 행복이, 인간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평형이 깨졌기 때문이죠. 인간이 행복하려면 평형이 유지돼야 되는 데 그 평형이 깨졌죠. 부처님은 그 깨진 평형을 고(苦)라 그랬어요. ‘두카’. 두카라고 하는 것은 평형이 깨져있는 뒤틀려 있는 상태를 말하죠. 뒤틀려 있다고 하는 것은 평형이 깨졌다고 하는 것을 말해요. 저울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서 저울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걸 뜻하죠. 그게 고(苦)예요. 평형이 깨진 것.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했죠. 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한 이유는 비행기가 상층부를 받아서 이기도 하지만 그 본질적으로 보면은 평형이 깨졌기 때문이에요. 테러리스트도 비행기로다 무역센터를 들여받는다 해서 무역센터가 붕괴하리라고는 생각을 안 했을 거예요. 아니 못했을 거예요. 아무도 무역센터가 붕괴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왜 아무도 무역센터가 붕괴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 단정하느냐구요? 무역센터가 테러를 당하니깐 미국 소방본부는, 뉴욕 소방본부는 무역센터 1층에다가 수습대책본부를 차렸죠. 무역센터 그 1층에 말이에요. 소방관들이 많은 희생이 났던 이유는 1층에다가 대책본부를 차렸기 때문이에요. 왜 그러냐면 소방본부 조차도 그 건물이 붕괴하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비행기가 상층부를 들여받으니깐 비행기 안에 있던 게솔린 60톤이 불이 붙었고 폭발했죠. 그래서 그 골조가 그 열에 의해서 약해졌죠. 상층부의 골조가 주저앉으니깐 전체의 평형이 깨져버린 거예요. 전체의 평형이 깨지니깐 어떻게 됐는가요? 그대로 주저앉은 거죠. 무역센터라고 하는 건물만이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것은 평형이 유지되기 때문이죠. 평형이 깨지면 어떤 건물도, 우주도, 지구도, 인간도 존재하지 못해요. 평형이 유지돼야 만이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평형이 유지되는 것, 그게 바로 고를 벗어나는 열반입니다. 평형이 깨졌다고 하는 것이 뭔가요? 평형이 깨졌다고 하는 것은 동요되는 것을 뜻하죠. 비바람이 몰아쳐도 고층빌딩이 서있을 수 있는 이유는 평형이 유지되기 때문이에요. 100층 높이의 빌딩이 폭풍우에도 견디는 것은 건물 전체가 평형이 유지되기 때문이죠. 그 평형이 깨지면 성냥 까피조차 스지 못하죠. 옛날에는 다방에서 일없는 아저씨들이 성냥을 가지고 탑을 쌓고 심심하면 뿌러트리기도 했죠. 그 작은 성냥조차도 평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스지 못해요. 까페에서 달걀을 세우는 내기를 하고 있었죠. 근데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했어요. 달걀은 세울 수가 없죠. 평형이 유지가 안되걸랑요. 그러자 콜럼버스는 달걀을 탁자에다 쳐서 세웠죠. 달걀 한 쪽은 붕괴됐지만 붕괴됨과 동시에 평형이 됐죠. 그래서 콜럼버스는 외쳤죠. 내가 세웠다고. 그것이 세운 것인가, 안 세운 것인가는 논할 필요가 없어요. 콜럼버스의 행위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느냐며는 평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죠. 아무도 세우지 못한 것을 콜럼버스는 한 쪽 축을 붕괴시켜서 평형을 만들은 거죠. 우리가 행복을 느끼기보다 불만족을 많이 느끼는 이유는 내 삶의 평형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내 뜻였든, 내 뜻이 아니였든 간에 평형이 자체가 깨져 버린거죠.

 

부처님은 5 비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죠. ‘두 가지의 한계를 넘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셨죠. 하나의 한계는 극단적 고행이고, 하나의 한계는 극단적 쾌락이라는 거죠. 극단적인 고행이 됐든,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됐든 간에 그 두 가지의 한계를 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두 가지 한계를 넘어야 평형을 유지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고행을 추구하는 것도,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붓다는 평형이 깨진 상태라는 거예요.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느냐는 것은 각자의 몫이죠. 쾌락을 추구하든 고행을 추구하든 말이에요. 그렇지만 평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그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죠. 평형이라 하는 것은 그 한계를 넘어선 것을 말하죠.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평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한계를 넘어서 가소성을 열 때 평형이라고 하는 것이 유지가 되죠. 우리는 평형을 유지하는 것을 중도(中道)라고 표현 하죠. 중도라고 하는 것은 평형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도라고 하는 것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것이 아니라, 평형을 유지하는 거죠. 평형이라고 하는 것은 대칭을 말하죠. 석가탑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평형을 유지하기 때문이에요. 미학적으로 황금률이라고 이야기하죠. 그 비례가 황금률이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석가탑이 작지만 그 작은 거에서 강한 아름다움을 뿜어낸다는 거예요. 황금률은 평형이걸랑요. 아무리 크고 우람하고, 아무리 높아도 평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미개하게 보이죠.

 

우리는 평형을 잘 유지하지 못합니다. 다른 표현을 하면 인간은 평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취약합니다. 왜 인간이 평형을 유지하는 데 취약하냐면은 인간은 오직 하나의 고정된 패턴으로 밖에 보지 못해요. 내가 보고 내가 느끼는 것은 고정된 하나의 패턴이야요. 그것이 모든 이미지를 구성하죠. 내가 좋다고 느끼는 거, 내가 나쁘다고 느끼는 거, 그 모든 것은 내 고정된 하나의 패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내가 아름답다 느끼는 거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것을 착각이라 그러죠. 부처님은 그것을 전도몽상이라 그랬죠. 전도몽상은 착각이에요. 착각이라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고정된 패턴으로서 사물을 보고 인식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죠. ‘있는 그대로를 보라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쓰는 말이 있죠.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건만 모하단 거예요. 백 번 듣는 것이. 여기서 존재하는 것은 보는 것은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뜻하죠. 그러나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죠. 우리의 눈과 우리의 뇌는 고정된 하나의 패턴으로 보기 때문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데 보지 않은 경우가 있죠. 혹시 느끼지 않습니까? 어느 공간에 들어갔는데 마치 누군가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요? 구름 속에서 어떤 형상을 보지 않습니까? 높은 산 위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무언가를 보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있는 그대로를 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있는 그대로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있는 그대로 봐야 평형이 유지되걸랑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거는 뭐예요? 굴절돼 있다는 걸 뜻하죠. 굴절 돼 본다는 거예요. 굴절돼 본다고 하는 뜻이 뭔가요? 진실이 아닌 왜곡된 것을 본다는 걸 뜻하죠.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데 부처님 세계에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 것을 옛날엔 잘 이해를 몬했어요. 아~ 내가, 언제 있는 그대로 안 본적이 있더냐? 나무는 나무 그대로 있는 대로 봤고, 바위는 그대로 있는 대로 봤고. 내가 언제 있는 대로 보지 않은 적이 있었더냐? 나는 있는 그대로 봤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날 내가 알았죠. 우리의 기억은 고정된 패턴이 있기 때문에 그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보죠. 어디에서 공포를 느끼는 거. 오늘 목욕을 하러 갔더니 TV에서 신과 귀신 나오는 집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들어가 가지고 사람들이 귀신을 보고 덜덜 떠는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이것은 그들의 뇌가 고정된 패턴을 보는 걸 말하죠. 만약에 그 집에 대한 사전적인 인식이 없으면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흉가라고 하는 사전적인 현상.

 

이번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와 성공회 최고 수장이 만나서 ‘신은 존재하는가?’를 토론했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최고의 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와 영국 성공회의 최고의 수장인 대주교가 만나서 공개토론을 했어요. ‘신은 존재하는가?’. 결론은 뭐였을까요? 너무 싱겁게 끝났다는 거예요. 왜서 싱거웠냐구요? 둘 다 자기 말만 하다 돌아갔다는 거죠. 리처드 도킨스도 그렇고, 영국 성공회 수장인 대주교도 그렇고, 당신들 말만 하다 간 거예요. 우리가 흔히 보는 장면 아닙니까? 100분 토론을 하면 거기에 나온 사람들이 자기 말만 하다 가죠. 여기서 영국 성공회 주교는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죠. 영혼이 존재하는 가에 대해서는 좀 더 우리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영혼이 있어서 귀신이 된다고 믿지요. 그래서 흉가에 가서 귀신을 보고 덜덜 떨죠. 그런데 정작 영국 성공회 대주교, 그는 영국 성공회 최고의 성직잡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영혼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성경학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죠. 우리의 호흡으로는 고정된 패턴에서 나오는 거예요. 고정된 패턴에서 나오기 때문에 언제나 평형이 깨질 수 있는 가능성이 굉장히 많죠.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면 언제나 평형이 깨진 상태로 나오죠. 평형이라고 하는 것은 안정돼 있는 것을 말하죠. 대칭이 깨어진 거 말이에요. 대칭이 깨어지게 되면 평형이 유지되지가 않죠. 대칭이 유지되면 평형이 유지되죠. 나비가 날고, 새가 날고, 비행기가 날고, 기차가 달리고, 자동차가 달리고, 우리가 걷는 것은 평형이 유지되기 때문이에요. 평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우리는 걸을 수가 없고, 새는 날을 수 없죠. 왜 부처님께서 중도라고 하는 말씀을 제일 처음에 제자들에게 제시했는가를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돼요. 양변을 여윈 중도다. 이런 식으로다 이해 해가지고는, 아~ 어느 세월에 평형을 유지할 수 있겠어요. 그거는 옛날 사람들이 그거는, 정~말 옛날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이죠.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를 해야 되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이 시대는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되는 시대예요. 그것을 우리는 ‘과학의 시대’라고 얘기하죠. 요새는 참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어떤 현상이 벌어지냐면 종교가 기를 쓰고 과학적임을 강조하려고 한다는 거죠.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기를 쓰고 과학적일, 아니 과학이라고 주장을 하죠. 종교라고 하는 것은 과학적일 필요가 없는 데 말이에요. 내가 과학적일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과학을 부정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학은 과학에게 맡겨두면 돼요. 종교가 그것까지 할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예요. 우리는 이미 최첨단 과학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잖아요.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죠. 왜 종교가 과학일라고 애쓸까요? 아~ 표현을 바꾸겠습니다. 과학처럼 보일라고 위장할까요? 과학처럼 보일려고 위장하는 이유는 평형이 깨졌다는 것을 이야기 하죠. 무언가가 불안하고 무언가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뜻하죠. 이러다가 생존 자체가 어려운 거 아닌가? 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이죠.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으면 어느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내 생존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대상이 누구라고 할지라도 용서할 수가 없죠. 내 생존이 용인될 때만 우리는 그를 용인할 수가 있습니다. 내 생존이 위협받는 데 그를 용인할 수 있다면, 아마 그는 성인이겠죠. 그러나 보통 생명체는 생존을 위협받으면 분노하죠. 뱀이 심심해서 사람을 무는 거 아니죠? 사람은 길을 가지만 뱀에게는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죠. 그러기 때문에 무는 거예요. 나는 별 생각 없이 벌통 앞을 지나갔지만 벌이 봤을 때는 틀림없이 저놈이 도둑놈이기 때문이죠. 자기들을 공격할려고 하는. 그래서 생존에 위험을 느끼기 때문에 공격하는 거죠. 인간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위협받으면 본능적으로 거기에 반응하죠. 그것이 바로 분노예요. 분노의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있걸랑요. 이러한 행동은 사실 평형이 깨져서 나오는 거죠. 평형이 깨지면 우리는 하나의, 하나의 사안에 대응하려고 달려들죠. 평형이 깨지면 불규칙해지걸랑요. 불안정해지고.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강하게 대응할려고 하죠. 아주 소소하고 사소한 것까지. 이것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곳이 가정이죠. 그리고 부부구요. 가정이 평화롭고 부부가 평화로울려면 평형이 유지가 돼야 하죠. 평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그것이 깨지게 되면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죠. 내가 몇 번 말씀 드렸지만, 인간이라고 하는 동물은 굉장히 민감합니다. 과다할 정도로 민감하죠. 그러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깊은 상처를 받죠.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생겼겠어요. 칼로 입은 상처는 아물지만, 말로 인해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칼로 입은 상처는 꼬매면 돼요. 그러나 말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은 굉장히 예민하걸랑요. 인간이 예민해지는 이유는 평형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평형이 유지되지 않으면 민감해 질 수 밖에 없죠. 평형이 깨졌다고 하는 것은 칼집이 칼 밖에 나온 것을 뜻하죠. 아무리 날카로운 칼도 칼집 안에 있을 때는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칼은 일본도죠. 세계적으로 닛벤도보다 더 예리한 칼은 없습니다. 일본 무사들이 쓰던 칼 말이에요. 중세기 영국의 영주들은 일본의 칼을 소장하기 위해 혈안이 됐었죠. 그 칼집과 칼자루의 아름다움,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그 칼의 예리함 때문에. 머리카락을 뽑아서 칼날 위에다 놓고 불면은 머리카락이 끊어지니깐요. 그것으로다 살상을 한다고 쳐보세요. 그래서 중세기의 영주들은 일본의 닛벤도를 갖기를 좋아했어요. 그걸 걸어놓고 자랑스러워했죠. 그 무서운 일본의 닛벤도라 하더라도 칼집에 있을 때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칼이 칼집에 꽂혀 있는 거, 그게 평형이죠. 그 칼이 칼집에서 나오면 평형이 깨집니다. 그 칼을 뺄 때는 심심해서 빼지 않으니까요. 반드시 그 칼이 빠질 때에는 피를 부르죠. 그것이 칼집에 있을 때는 위험하지 않아요. 칼 밖에 나오면 위험해 지죠. 평형이 깨진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거죠. 그래서 우리는 평형이 깨지면 굉장히 심적으로 고통을 느끼고 굉장히 불만족스러워 지죠.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초조와 불안감이 엄습해 오죠. 내가 불안하고 초조한 것은 평형이 깨졌기 때문이에요. 평형이 깨져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와 같죠.

 

부처님께서 5비구에게 평형을 유지하라고 가르쳤던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평형을 유지해야 만이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행복을 느낄 수 있죠. 인간이 80년을 살지만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일주일이라던가요? 일주일도 아마 너무 많이 잡아줬는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행복해서 미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평생을 살면서 과연 얼마만큼 유지되던가요? 우리가 정~말 미칠 것 같은 행복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순간, 순간 그 느낌을 받죠. 그렇지만 그 미칠 것 같은 행복이, 아쉽게도 너무 짧게 끝난다는 거죠. 마치 하루살이처럼. 하루살이는 짧으면 맻 시간, 길면은 하루 정도를 살죠. 하루살이는 물 속에서 맻 년의 세월을 보내죠. 물 속에선 우아해서 나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짝짓기죠. 짝짓기를 하면 그대로 떨어져서 죽죠. 하루살이는 맻 년 간의 물 속에서의 그 생활을 견디는 것은 단 한 번의 짝짓기를 위해서죠. 그 순간을 위해서 3년, 4년을 물 속에서 유충으로다 살죠. 포식자인 물고기의 눈을 피해서, 자갈밭에서 자기 몸을 숨기면서 말이에요. 그 짧은 순간의 행복을 위해서 그 긴 시간을 물 속에서 하루살이는 보내요. 물론 저한테 이렇게 묻는다면 제가 답할 수 없죠. ‘하루살이 유충에게 니가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물어봤냐?’ 뭐 이렇게 얘기하신다면, 뭐 저도 답할 순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고정된 하나의 패턴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지금 이야기 한 거는 인간이 바라보는 하루살이라는 거예요. 하루살이 입장은 다를 수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하루살이는 그래요. 그 짧은 순간에 짝짓기를 위해서 3년간, 4년간 물 속에서 포식자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거죠. 우리가 80년이라고 하는 아니 90년은 앞으로는 살 수 있다고 하니깐, 90이라고 해야 되겠죠. 인간의 평균수명을 백 살을 살 수 있는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고. 인간이 평균적으로 백 살을 살지 않는 시대는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분자는 모든 사람이 백 살을 살 수 있는 그런 분자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나 90살까지는 가능하다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그 정도 살 수 있는. 참 90에서 100살 그 10년 짭아 늘구는 것도 쉽지 않네. 우리가 80을 살든, 90을 살든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극히 짧죠.

 

우리가 극도의 행복을 느꼈을 때에는 내 삶의 평형이 유지될 때에요. 내 삶의 평형이 유지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모든 것이 충족돼 있는 상태죠. 내가 가장 행복하게 느낄 때가 언제예요? 모든 것이 충족될 때. 부족함을 전혀 못 느낄 때죠. 모든 것이 충족됐다고 하는 것이 뭐예요? 평형이 유지되어 있다는 걸 말하죠. 근데 우리는 1년 365일, 80년 항상 모든 것이 충족되지 않는 다는 거예요. 부처님이 쾌락과 고행의 한계를 극복해야, 그걸 넘으라고 이야기한 이유가 거기에 있죠. 인간은 어떤 하나의 방식의 패턴을 영원히 유지하기가 어려워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가 있죠. 조금 전엔 하나의 고정된 패턴으로 본다메?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패턴으로 보죠. 그러나 우리는 가변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죠. 고정된 패턴을 바꿀 수가 있죠. 부처님은 우리에게 그 고정된 패턴을 바꾸라는 거예요. 바꾸어서 평형을 유지해 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특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것은 고정된 패턴 때문이에요. 그러나 인간은 무한한 잠재적인 능력이 있죠. 인간의 무한한 잠재적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 패턴을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붓다가 그것을 바꿨고, 그 고정된 패턴을 바꿀라면 새로운 방식으로 그 패턴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죠. 붕어빵틀에 빵을 꾸면은 백 개면 백 개, 다 똑같습니다. 똑같이 붕어처럼 닮았죠. 제가 근래에 알았는데 그게 붕어가 아니고 잉어라네요. 왜 그게 잉어냐면은 그게 원래 일본에서 나온 거라 그래요. 일본에서는 잉어를 굉장히 어떻게 보면 신성시한다고 할까요? 남자아이들이 태어나면 ‘고이노불’이라고 그래서 반드시 잉어 모습을 한 인형을 매달걸랑요. 고이노불. 왜 그러냐면 잉어가 용이 되잖어. 동양의 전설에 의하면 잉어가 용문폭포를 오르면 용이 되잖아요. 그러니깐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훌륭한 인물이 되고 부자가 되라고 하는 뜻에서 고이노불이를 건다는 거예요. 잉어를. 그래서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붕어빵이라고 그러는데, 그게 본래 잉어라는 거예요. 뭐 잉어든, 붕어든 뭔 관계가 있느냐? 먹으면 됐지. 뭐 이렇게 얘기하면 할 말이 없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잉어빵이 됐든, 붕어빵이 됐든, 그 틀에다 구우면은 백이면 백, 똑같은 모양을 한다는 거죠. 새로운 모양의 빵을 꿀라면 붕어의 틀을 바까야죠. 틀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붕어빵 틀에서 붕어밖에 못 꿉습니다. 붕어빵이 아닌 다른 빵을 구울라면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돼요.

 

고정된 패턴이 아닌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나 평형이 깨어져 있는 상태, 고를 느끼게 되죠. 우리가 행복하려면 평형이 유지돼야 돼요. 다시 반복한다면 우리가 행복을 느낄 때는 모든 것이 충족될 때예요. 우리는 모든 것이 충족하면 행복해요.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이 충족되는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가 평형을 유지해야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죠. 평형을 유지한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가 오면은 우산을 쓰고, 해가 뜨거우면 양산을 쓰면 되죠. 그게 평형이에요. 우리가 고정된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조금 전에 내가 한 말, 그런 인식 때문인지도 모르죠.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되고, 해가 뜨거우면 양산을 써야 한다는 고정된 패턴 말이에요. 비가 왔을 때 양산을 쓴다고 해서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며, 뜨거울 때 우산을 받친다 그래서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아니 우산이 없이 비를 맞은 들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사람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무서워요. 나는 미얀마에서 제일 행복을 느낄 때는 비를 맞으면서 탁발을 나갈 때였어요. 처음엔 비를 맞고 나간다는 기, 하이 비가 오는 데 이 비를 맞고 나가야 되나 싶더라고. 근데 비를 맞으면서 탁발을 나갔는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여기서 비를 맞고 한 번 걷고 싶은 데 못 걸어요. 미친놈 소리 들을까봐. 우리는 누군가가 비를 맞고 걸으면 이상한 눈길로 보죠. 하나의 고정된 패턴 때문이죠. 틀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는 같은 빵을 계속 구워낼 수밖에 없어요. 평형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고정된 틀을 새로운 틀로 바꾸는 거죠. 그게 평형이에요. 평형을 회복해야 만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평형을 회복할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평형을 회복하시면 되죠. 모든 사람이 붕어빵 틀에서 붕어빵을 꾸어 내듯이 같은 방식으로 동일하게 평형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방식도 없구요. 그건 불가능해요.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 세계에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평형을 유지하는 거죠. 어떤 틀을 만들 것인가?, 어떤 틀을 구입할 것인가?는 각자의 취향이에요. 그런 것은 누가 간섭해서도 안 되고 누가 지시해서도 안되죠. 또 그것을 누가 너는 누가 그런 틀을 구했느냐고 비난해서도 안 되죠. 오직 스스로가 평형을 유지하고, 오직 스스로가 평형을 깨트린다는 거죠. 평형을 유지하는 것, 그게 행복입니다. 그게 열반이에요.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오늘은 어느 분이 좀 기도를 이끌어 주실랑가요? 다같이 합장하시지요? 기도를 제가 이끌면서 끝내겠습니다.

 

자비하신 부처님, 오늘도 저희들은 부처님의 법음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사옵니다. 비록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이 땅에서 떠났다 하실지라도 부처님의 법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부처님의 법음을 디딤돌 삼아 한계를 넘어서 영원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고 저희들을 축복해 주소서. 그리하여 부처님의 이끔 속에 저희들이 안전하게 부처님의 다르마의 세계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와 저의 가족과 저와 인연 있는 모든 이들이 저와 함께 그 곳에 이르기를 또한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스님의 강론을 옮기면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사투리나 스님의 발음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맞춤법에 맞지 않는 단어가 있더라도 스님의 말씀이라 생각하시고 읽으시기 부탁드립니다.


 

 
특집 조영남 콘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