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1 유산(遺産)|…… 혜천스님설교

2019. 4. 28. 09: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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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천(嵇瀳)스님의 일요 특강 1 : 불기2556년3월4일 

유산(遺産)

 

 

오늘 주제는 유산(遺産)입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신 지 12년 만에 모국인 카빌라로 돌아가셨죠. 지난 수요일(2월 29일)이 부처님 출가일입니다. 12년 만에 고국에 돌아가니까, 부처님의 부인인 야소다라가 아들 라훌라를 불러 말했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 그래라." 그러자 라훌라는 아주 애기 때, 아버지가 출가했으니까 아버지를 처음 보는 거죠. 라훌라는 처음 보는 아버지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가 시킨대로. "유산을 주십시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죠. "라훌라가 나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네.  라훌라에게 유산을 주게 "  그랬더니 사리불존자는 라훌라 존자를 출가시켜 주었죠. 부처님이 주신 유산은 영원한 생명인 다르마였어요.  

 

다르마는 영원한 생명의 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사(不死)의 세계이기도 하죠. 라훌라는 아버지에게 요구했던 유산은 아마 왕권이었을 거예요. 아버지가 출가를 안했으면, 자기가 왕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출가했기 때문에 왕위계승권이 멀어졌죠. 그래서 야소다라는 아이에게 유산을 달라고 그랬던 거는 왕권에 대한 거였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힘인 다르마를 유산으로 줬죠.  

 

부처님을 법왕이라고도 부릅니다. 다르마의 왕. 부처님이 다르마의 왕이니까, 그에게 다르마를 유산으로 주는 것이 가장 합당하겠죠. 라훌라는 부처님에게 유산으로 다르마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에게서 어떤 유산을 증여받았습니까? 우리 또한 라훌라와 함께 부처님으로부터 유산을 받았죠. 부처님은 평상시에 이렇게 제자들을 불렀어요. 나의 아들, 딸들아! 부처님의 혈육이자 동시에 다르마의 자식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르마의 아들, 딸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부처님으로부터 유산을 증여 받았죠. 바로 라훌라에게 증여했던 다르마를 우리도 유산으로 증여를 받았죠.  

 

부처님이 우리에게 준 다르마의 유산은, 시대가 흘러가며는 잃어버릴까봐 금고에다 넣어 두셨죠. 우린 다르마를 금고 채 유산으로 증여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르마를 열 수 있는 열쇠, 그 다르마를 저장하고 있는, 다르마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그 금고의 열쇠는 '네 마음'이라고 했죠. 오직 네 마음만이 너에게 증여된 유산인 다르마의 금고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다르마의 금고를 니 대신 열지는 못한다. 니 마음으로 열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부처님으로부터 증여받은 유산인 다르마가 든 금고의 문을 열어야 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다르마의 금고를 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청정심(淸淨心)입니다. 청정심은 탐진(貪瞋痴) 세 가지가 없는 마음이죠. 

 

첫번째는 탐이 없는 마음입니다. 탐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탐욕이라고 하는 것은 집착과 탐착입니다. 그게 탐욕입니다. 우리는 보통 욕심을 탐욕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욕심이 탐욕이 아니라 집착과 탐착이 탐욕입니다.  

 

두번째는, 부처님은 증오를 버리라고 이야기를 하셨어요. 우리는 남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는 자기와 다른 사람은 용납하지 못하죠. 오죽하면 공자님께서도 소정묘를 죽이고서야 끝이 났겠어요. 증오를 버리라는 것은 나와 다름을 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치를 버리라고 그랬죠. 어리석음말이예요.  어리석음은 미망(迷妄))이죠. 미망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요? 잘못된 것을 옳다고 고집하는 겁니다.

 

이 세 가지를 딱 하나의 캡슐에 담으며는 '고정된 편견의 마음'입니다. 고정된 편견의 마음. 우리의 청정심은 고정된 편견의 마음에 의해서 물들죠. 고정된 편견은 모든 진실을 가려 버리죠. 나는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진실이 다르마라고. 내가 생각하는 다르마는 진실이예요. 다른 분들은 다르마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요. 내가 생각하는 다르마는 진실이예요. 진실이기 때문에 다르마죠. 다르마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 나는 진실이기 때문에 다르마라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셨죠.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진실을 본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우리는 고정된 편견의 마음에 의해서 진실을 보지 못하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해군 장병 3만명이 각기병으로 죽죠. 3만명의 병사가 각기병으로 죽습니다. 각기병은 비타민 B1이 결핍되어서 생기는 병이죠. 그건 나중에 밝혀진 것이고, 그 당시에는, 각기병은 굉장히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병사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가죠. 3만명이 죽었으니까 죽지않고 살아난 사람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해군 군의관 다카키 가네히로(高木兼寬)는 여러가지로 각기병을 치료할려고 했지만, 치료하지 못했어요. 나중에는, 혹시 영양 결핍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죠. 다카키 가네히로가. 그래서 이것 저것 멕이다가, 보리밥을 먹이게 되었는데, 보리밥을 멕이면서 해군에서는 각기병이 사라졌죠. 바로 보리에는 비타민 B1이 많으니까요.

 

그 당시에, 해군만이 각기병에 시달린 것이 아니라 일본 육군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2만명이 죽었죠, 각기병으로. 일본 해군은 육군에게 보리밥을 먹이라고 권했죠. 그러나 일본 육군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일본 육군 군의부장이었던 모리 오가이(모리-오우카이(森-鷗外)는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고 생각했죠. 세균에 의한 전염병말이예요. 그는 오직 세균을 찾는데만 골몰했죠.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와중에서 2만명이 죽어갔죠. 수없는 병사들이 각기병에 시달렸고. 나중에는 각기병은 비타민 B1의 결핍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것이 밝혀졌죠. 그러나 모리 오가이는 각기병이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고 하는 고집을 꺾지 않았어요. 그는 일본 육군의 군의부장이었습니다. 의사였어요. 그런데도 그는 각기병이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 아니라,  영양결핍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발표되었는데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주장했던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고 하는 것을 접지 않았어요.

 

모리 오가이의 고정된 편견은 모리 오가이 스스로의 눈을 가려 버린거죠. 이미 모든 사람들이 각기병은 비타민 B1 의 결핍에 의해서 생기는 병이라는 것이 다 밝혀졌는데도, 오직 그만이 고정된 편견에 의해서 스스로의 마음과 눈을 가리고 세균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그 고집을 죽을 때까지 꺾지 않았죠.

 

그런데 모리 오가이만 그럴까요? 모리 오가이만이 그런 건 아니죠. 어쩌면, 우리에게도 모리 오가이 같은 성향이 있죠. 고정된 편견에 의해서 진실을 보고도 그 진실을 믿을려고 하지 않는 거죠. 나는 모리 오가이가 각기병은 세균에 의한 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몰랐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왜 몰랐다고 생각하지 않냐고요? 그는 일본 육군의 군의부장일 정도로 능력있는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그걸 몰랐을까요? 몰랐다기 보다는, 그는 자기가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고 주장했던 것을 접고 싶지 않았던 거죠. 

 

왜 접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거를 인정하게 되며는 어떻게 될까요? 그는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는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을 거예요. 모리 오가이를 괴롭힌 것은, 내가 그 자신이 아니래서 그의 심리상태를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인정했을 때, 그의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과 공포가 더 컸을 겁니다. 군의부장이라고 하는 권위, 그리고 그가 그 동안 쌓아온 명성과 명예. 그는 진실보다 두려웠던 것이, 각기병이 영양 결핍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진실조다 그가 두려웠던 것은 자기의 세계가 깨지는 것이었을 거예요.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세계가 깨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 하죠. 그러기 때문에 모리 오가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진실을 보고도 그 진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죠.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라고 말이예요. 우리 마음에 그것이 자리잡게 되면, 어떠한 진실도 그에게는 진실이 아니게 되죠.

 

어느 날 수학자 목갈라나가 부처님을 찾아오게 되죠. 왜 수학자라고 앞에 붙였냐며는 목갈라나라고 하는 제자가 부처님 제자 중에는 여럿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이 사람은 특별히 수학자라고 하는데, 그것을 그의 이름 앞에 접두사로 붙였어요. 수학자 목갈라나가 찾아와서 말하죠.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열반을 성취합니까? " 그러니까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죠. "성취하는 사람도 있고,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자 수학자 목갈라나는 또 이렇게 질문하죠. "열반이 있고, 열반의 길이 있고, 열반에 인도하시는 부처님이 계시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은 열반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열반에 이르지 못합니까?"

 

나는 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의문을 갖고,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바로 수학자 목갈라나가 그 3단계를 이야기하고 있죠. 첫째는 의문을 갖고, 둘째는 질문하고, 세번째는 답을 구하고 있죠. 오늘날 불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세 가지가 없다는 거예요. 의문도 없고, 질문도 없고, 답도 구하지 않고. 의문이 없으니 질문할 수 없고, 질문하지 않으니 답을 구하지 못하죠. 오늘의 불교가 바로 이 세가지가 없는 3무의 시대에 지금 놓여 있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이와 같이 답하시죠. "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열반에 이르지만, 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고 그랬어요. 이게 무슨 뜻인가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고정된 편견을 버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열반에 이를 수 있지만, 고정된 편견을 가지고 자기의 틀을 고집하는 사람은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거죠.  

 

내가 여러 번 말씀 드렸죠. 어떤 수행자가 부처님의 소문을 듣고,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으나, 어느 집에서 부처님과 하룻밤을 잤지만, 그는 붓다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다음 날 붓다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그 수행자가 만나고자 하는 붓다는 풍문의 의한 붓다, 정확히 말하며는 그 수행자가 상상하는 붓다죠. 그 수행자가 상상하는 붓다였기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는 그 붓다를 같은 집 아래에서, 같은 방안에서 봤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죠. 왜? 그가 상상하는 붓다가 아니었으니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와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는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는 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죠.

 

고정된 편견에 사로잡히면, 모리 오가이처럼, 조금 전에 말한 붓다를 만나고자 했던 수행자처럼, 설사 진실을 봐도 그 진실을 부정하게 되죠. 두렵기 때문이죠. 진실을 인정하게 되면, 자기의 모든 세계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그 두려움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가 이걸 아셔야 됩니다. 우리가 다르마의 세계에 들러갈려면, 행복을 얻을려면, 그 진실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 아마 모리 오가이가 그 진실을 받아들였더라면, 더 추앙받는 의사가 되었을 겁니다. 왜 그러냐며는 모리 오가이가 그것을 고집할 때만 해도, 어느 누구도 그것이 비타민 B1결핍에 의한 병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거는 모리 오가이는 무죄라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모리 오가이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리 오가이는 그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그거를 고집했다는 거예요. 그것이 그의 죄죠.

 

모든 사람이 몰랐을 때, 그것을 몰랐다고 해서 부끄러워 해야할 이유가 있던가요? 나는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정말 부끄러워 해야할 것은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죠. 우리가 진실하면, 그 진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안온(安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안온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셨어요. 안온이라고 하는 말은 마음이 편안하고, 아주 평화로운 거를 말하죠. 행복이라는 것이 별 거든가요. 내 마음이 편안하고, 평화로우면 그게 행복 아닌가요?  설사 내가 부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다며는 그것을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안온한 것입니다. 편안하고 아주 평화로운 것이죠.    

 

우리가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가장 안온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아무 근심도 없고, 아무 걱정도 없고, 슬픔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고, 오직 안온하고 행복했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는가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아로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죠. 어머니의 자궁 속에 태아로 있을 때, 나는 근심도 없었습니다. 나는 걱정도 없었죠.  불안도 없었고, 공포도 없었습니다. 오직 편안하고, 오직 평화로왔죠. 어머니의 자궁 속의 양수 속에서, 그저 나는 활기차게 헤엄만 쳤으면 되었으니까요. 안온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것입니다. 내가 마치 어머니 자궁 속에서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보호 되죠. 그 때 그 마음처럼, 내 마음의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안온입니다. 우리가 안온하지 못한 것은 고정된 편견에 포로로 잡혀 있기 때문이죠.

 

부처님은 영원한 진리의 생명을 이야기 하셨죠. 영원한 진리의 생명은 불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르마죠. 우리는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습니다. 소중한 것이라 금속 속에 단단히 보호되서 물려 받았죠. 우리는 그 금고의 문을 열고, 꺼내서 내가 써야 합니다.

 

금고 속에만 있다면, 물려받은들 무엇 하겠어요? 내가 쓸 수 없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몬하죠. 없으면 아예 포기합니다. 안 되는 거는 아예 포기를 하죠. 그런데 있는 것을 가질 수 없을 때, 우리는 더 고통스럽죠. 어차피 없는 거를 가질 수 없을 때는 아쉽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습니다. 왜냐구요? 어차피 없으니까.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고문이 뭔 줄  아세요. 내가 3일을 굶었습니다. 앞에 맛있는 피자, 치킨, 닭강정 등을 시켜 놓고 먹을라고 하는데, 살찐다고 먹지 말라고 입을 때리는 거. 그거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예 없으면, 우리는 배가 고프지만 심적으로 고통스럽진 않습니다. 그러나 있는 것을 못 먹게 한다며는 고통스럽죠. 속된 표현으로 눈에 뵈는 게 없어지죠. 설사 그것을 물려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차라리 없는 것이 낫죠. 

 

우리는 그 금고의 문을 내 마음의 열쇠로 열어서 내가 써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내가 영원한 생명이 되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죠. 금강산이 아무리 경치가 좋다 해도, 굶고는 그 경치를 감상할 수 없다는 거죠. 오직 그 금고를 열 수 있는 것은 고정된 편견이 없는 마음입니다. 고정된 편견이 없는 마음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진실을 가장 두려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죠. 그러나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마는, 그 진실을 확인하는 거는 두려워 합니다. 진실을 확인했을 때,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올지를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진실을 확인하는 것을 두려워 하죠. 

 

코흐가 처음으로 콜레라 균을 발견했을 때, 어떤 학자는 콜레라균 때문이 아니라고 그랬죠. 그래서 그는 일부러 콜레라균을 몽땅 마시기도 했어요. 코흐가 발견한 콜레라균이라고 하는 그 병원체를 부정하기 위해서, 그와 경쟁적이던 학자는 그걸 마셨죠. 물론 그는 죽을 고생을 했죠.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고정된 편견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기를 파멸시킬 정도로 무섭습니다. 어쩌면 코흐가 콜레라균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 사람은 죽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는 그걸 마심으로써,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하고 싶어 했어요. 그도 세균학잔데. 단지 그는 고정된 편견 때문에 그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 였겠죠. 그래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가 마셨죠. 참, 인간의 편견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 치사율이 높은 콜레라균을 스스로 들이 마시다니요. 

 

부처님은 고정된 편견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고 그랬죠. 우리 마음이 병드는 것은 누가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가 네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거죠. 고정된 편견에 의해서. 왜 부처님이 고정된 편견을 지적하실까요? 고정된 편견은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정된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미래로 전혀 나가지 못합니다. 그저 제자리에서, 제자리 걸음을 할 수 밖에 없죠. 제자리 걸음이라도 하고 있으면, 다행이죠. 모든 사람이 걸어서 미래로 나아갈 때, 내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래로 향해 걸어갔기 때문에, 나는 사실 과거로 향해 퇴보하고 있는 거죠. 나는 현재를 지킨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과거화된 현재라는 거죠. 내가 지키고 있는 현재는 과거화된 현재라는 거요. 모두가 미래로 가버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2012년 대한민국에 사는데, 나만 임진왜란을 사는 거죠. 나만 임진왜란 때를 살고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2012년 휘황찬란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데, 나는 임진왜란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미래로 떠나가면, 현재를 지키고 있는 나는 과거화된 현재에 갇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고정된 편견의 마음을, 그 마음이 청정한 네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거죠. 오염시킨다는 거죠. 오염원은 과감히 제거해야 됩니다. 하나가 병이 들면, 다른 것도 연쇄적으로 병이 들죠. 귤 박스에 귤이 하나 썩기 시작하면, 그 곰팡이균에 의해서 연쇄적으로 다른 귤도 썩기 시작합니다. 다른 귤을 먹을려면, 썩은 귤은 재빨리 들어 내야죠. 고정된 편견은 썩은 귤과 같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으로부터 라훌라와 같은 다르마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력 있는 불사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받은 게 아니라 금고 속에 넣어진 채로, 금고채로 받았죠. 그러나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금고의 열쇠는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스스로의 마음으로 그 문을 여는 자만이 다르마의 영원한 생명의 힘인 불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아이~잉, 이왕 유산 주시는 김에 쿨하게 그냥 주지, 그걸 왜 금고 속에 넣어 가지고 말이야, 아, 니 마음으로다 열쇠로 열라고,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나? 그냥 쿠~울 하게 던져 주면 될 텐데.  부처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내 힘으로 얻은 것만이 나를 영원한 진리의 생명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이라는 거를 많이 이야기 하죠. 행복도 내가 얻었을 때, 행복이죠. 주어진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요새 삼성가가 재산싸움 하고 있잖아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지금 먹고 살 것이 없어서 그럽니까?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되는데, 돈이 없어서 지금 싸우고 있습니까? 아이 학비가 없어서 지금 싸웁니까?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 분들은 가려운데도 안 긁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 분들은 물질적으로는 어떤 구애도 받지 않을 정도로다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우리는 그 정도 가지고 있으면, 뺨이 가려워도 안 긁을 정도죠. 뺨이 가려워도 안 긁는 이유는 긁을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죠. 근데 그 분들은 싸우고 있습니다. 싸우는 이유는 스스로가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것이지 얻은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얻었다면, 그들은 만족할 겁니다. 내가 이만큼 이뤘어! 아아! 나 대단한 사람이야! 근데 그들은 그저 주어졌을 뿐이예요. 스스로가 선택한 삶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주어진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주어진 삶은 주어지지 않으면 불만족스러워 지죠. 스스로가 선택한 것은, 내가 언제나 선택하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얻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행복하죠. 왜요? 내가 선택해서 얻었으니까요.

 

일본의 어떤 분이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답니다. 먼 친척인 당숙이 돌아가셨는데, 당숙은 자식이 없어요. 가장 가까운 친척이 바로 벼락부자된 5촌 조카 밖에 없어요. 법적으로 그 분의 유산은 5촌 조카가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5촌 조카가 벼락 부자가 되었다는 거죠. 벼락부자가 되니까, 돈 꿔달라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근데 이 분은 쿨한 사람입니다. 어차피 벼락부자 된거, 꿔 달라고 하면 잘 꿔 줬어요. 근데 이 분은 꿔 줄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거예요. 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까요? 돈을 꿔주면서. 돈을 꿔간 어느 한 사람도 고마워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1억을 꿔 줘도 안 고마워해. 왜? 어차피 너 그저 얻은 거잖아. 그 분은 스스로가 말하기를 유산을 받고 불행해졌다 그래요. 전에는 누군가 와서 돈을 꿔 달라 그러면, 조금이라도 꿔 주며는 다 고마워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벼락을 맞듯이, 유산의 돈벼락을 맞은 후로다가는 아무리 돈을 꿔줘도, 어느 누구하나 고맙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고마워 하지 않아. 왜? 어차피 주어진 것이니까. 부처님께서 스스로에게 그것을 얻으라고 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그 금고의 문을 열어서 네가 가지라고 하는 의미는, 거기에 있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그저 주면, 그저 유산을 증여해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힘인 불사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그것을 얻고자하는 과정을 내가 만들어 가야, 그 과정을 내가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성취감을 느끼죠. 그래서 행복한 겁니다. 스스로의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물려주신 그 금고를 여십시요. 오직 금고는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만 열 수 있습니다. 그 문을 열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열쇠는 버리세요. 그 열쇠로는 열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유산이었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어느 분이 기도를 이끌어 주실라는 가요?...... 다함께 합장하시죠.   

 

거룩하신 부처님! 남녘 땅에는 매화향기가 가득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북쪽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남녘의 매화향기가 이 북쪽에도 가득 채우기를 기원합니다. 저희들의 삶이 남녘의 매화향기처럼 향기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북쪽의 찬 바람처럼 내 주위를 써늘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부처님께서 거두어 가시고, 저희들에게는 봄 향기 가득한 선물을 증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싸두 싸두 싸아두. 


흔한 이별 - 송유빈 & 김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