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묘함도 눈 속의 모래이네, 각암도인 조씨 / 릴라님

2019. 6. 9. 21:1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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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묘함도 눈 속의 모래이네, 각암도인 조씨 / 릴라님


중국에서 조사선이 전개되면서 드문드문 여성도인들이 출현했습니다.

선종이 발전하기 시작한 당나라시기에 임제의현과 조주종심 선사를 비롯한 여러

선사들과 선문답을 나눈 여성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여성도인들은 당나라 때를 지나

송나라 때에도 많이 출현하였는데, 사방에 도를 묻기도 하고, 선사들이 주석하는

사찰 인근에 살면서 꾸준히 법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여성도인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당나라 때와 송나라 때가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당나라 때 여성 도인들 중 깨달은 비구니들은 대부분 스승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가 여성 도인들은 어떤 스승 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누구의 법을 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송나라로 넘어오면서 재가 여성도인들일지라도 몇몇을 빼고는 그들의 행적이

비교적 자세합니다. 스승과 인연을 맺어 법문을 듣고 문득 스승의 말 아래 깨달았으며,

오랜 시간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탁마를 하여 활짝 밝아진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선종 역사서에 법제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원오극근 선사에게도 3명의 여성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과 이름 그리고 출신지역뿐만 아니라 원오에게서 깨달음을 얻은 사연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원오극근 선사가 곳곳을 다니며 법을 펼 때 인연을 맺게 된 여성들입니다.

법을 깨닫기 전에는 미혼이거나 과부로서 나름대로 마음공부를 간절히 해왔는데,

원오 선사를 만나고 나서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각암 도인 조 씨 역시 원오 선사가

법을 펼 때 만난 재가 여성 법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각암도인 조 씨는 건녕(지금의 복건성에 속함) 유찰원의 질녀이다.

어릴 때부터 결혼을 하지 않고 불법에 마음을 두겠다는 뜻을 가졌다.

원오 선사가 대중에게 들어 보일 때 말끝에 분명히 깨달았다.
원오가 말했다.
“다시 모름지기 본 바를 날려버려야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조 씨가 게송으로 답하였다.
기둥이 횡골(橫骨)을 뽑고 허공이 발톱과 이빨을 희롱하니,
설사 현묘함을 알았다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눈 속의 모래이네.

覺庵道人祖氏。建寧游察院之姪女也。幼志不出適。留心祖道。於圓悟示眾語下。了然明白。悟曰。更須颺却所見。始得自由。祖答偈曰。露柱抽橫骨。虗空弄爪牙。直饒玄會得。猶是眼中沙.

-우바이지

각암 도인 조 씨에 대한 기록은 <우바이지> 외에도 <오등회원>, <선여인전>,

<속지월록> 등에 똑같은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각암 도인은 어릴 때부터 세속적인

생활보다는 진리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도를 그리워하고 숭상하였는데, 때마침 원오극근 선사를 만나게 됩니다.

각암 도인은 원오 선사의 대중 설법을 듣다가 그의 말 한 마디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떠나지 않았다는 이해를 넘어

문득 말문이 닫히고, 분별이 멈추게 되면서 본성을 체험을 했습니다.

원오 선사는 그가 본래의 마음땅을 밟은 것을 알고는 그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당부의 말을 합니다.
“다시 모름지기 본 바를 날려버려야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참으로 미묘한 말입니다. 본래 마음을 깨달아 현상세계의 분별에서 훌쩍 벗어난 곳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것도 날려버려야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진정 마음을 깨닫고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는 것은 어떠한 분별도 남아있지 않은 경지입니다.

우리는 늘 본래 마음을 벗어난 적이 없고, 이 마음을 부족함 없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환상과 같은 분별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드러난 분별에 사로잡힌 마음이 스스로 분명해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본래마음은 결코 생각의 내용물이 아닙니다. 생각은 우리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데

유용한 도구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필요하기는 하나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생각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 시간,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은 실재도 아니고 항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늘 깨어있는 실재에서 환상처럼 일어난 관념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분별에 사로잡혀 살아왔기 때문에 본래 마음을 체험했더라도 분별심의

정체에 밝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실재를 생각으로 잡으려고 합니다.

 감정이나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본래 마음은 생각과 감정, 감각이 아니라

이것들의 본성입니다. 이런 이해가 철저해야 우리 스스로 생각, 감정, 감각으로 붙잡으려는

시도를 멈추게 됩니다. 분별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다면 온갖 분별이 일어나는 가운데

변함없는 깨어있음이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본래 마음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분별하는 마음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깨달았다는 생각, 알았다는 생각, 벗어났다는 생각에 떨어지기 일쑤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이것이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증거임을

보아야 합니다. 조그마한 분별이라도 마치 환상과 같아서 의지할 것이 못된다는 분명한

자각이 일어나면 저절로 깨달음에 대한 상상과 추구는 자취를 감춥니다. 법에 빈틈없이

계합한 것입니다. 원오 선사는 제자 각암 도인에게 이러한 자유를 맛보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처음 마음을 자각했을 때는 이런 당부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법이 분명하고

더 이상 찾고 구할 것이 없어서 원오 선사의 당부가 쓸데없는 노파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전히 법을 생각하며, 지금 이것이 아닌 더 완전한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법을 상상하고 추구하는 만큼 스스로 체득한 것에 대한

확신이 떨어지고,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시점에서 진정 자신의 공부에 솔직한 사람이라면 스승의 말씀을 되새기고 어떠한

상상도 진실한 법이 아님을 볼 것입니다. 자기 공부의 부족함을 알고 나아갈 것입니다.

기둥(露柱)이 횡골(橫骨)을 뽑고 허공이 발톱과 이빨을 희롱하니,
설사 현묘함을 알았다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눈 속의 모래이네.

기둥(露柱)은 밖으로 드러난 기둥을 말합니다. 선문답에서 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도인들은 기둥에 삼배하거나 기둥을 몇 번 쳐 보입니다. 몽땅 드러난 기둥,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가리켜 보입니다.

횡골은 인간의 신체부위 중 척추와 하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지지대입니다. 횡골은 인간의

중추이고 뼈 구조의 핵심입니다. 깨달음 공부에서 핵심은 법입니다. 즉 횡골은 법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기둥이 횡골을 뽑는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법에는

법이라고 할 요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에는 마음이라고 할 만한 한 물건도 없다는 것입니다.

허공이 발톱과 이빨을 희롱한다고 했는데 발톱과 이빨은 짐승들에게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충직하고 용맹한 신하나 매우 쓸모 있는 사람 혹은 물건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듯 훌륭한 것, 꼭 필요한 도구조차 허공에게는 희롱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깨달음에 간절한 마음을 두고 그것을 추구해왔습니다. 그 힘으로 수많은 분별망상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가장 필요했던 것이 ‘깨달음’이라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것조차 스스로 세운 환상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진실로 얻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모든

분별이 다하는 것이지 달리 깨달음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이 여전히 남아있다면

멀쩡한 눈 속에 들어온 껄끄러운 이물질과 같습니다.

스스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볼 일입니다. 만약 그러고 있다면 추구하는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금방 내려놓고 법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금방 알아차리는 실질적인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진정 모든 추구가 사라진 자리에 온 세계가 다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추구도 사라지고 어두운 구석도 없으며 법에 대한 생각도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실재뿐임이 몸서리치도록 받아들여집니다. 그때서야 새삼 스승의 자비심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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