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적수도인 / 릴라님

2019. 6. 23. 19:2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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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적수도인 / 릴라님


적수도인(寂壽道人) 역시 원오극근 선사의 여성 제자입니다.

적수도인은 원오 극근 선사가 사천성 성도의 소각사에 머물 때 선사를 참배하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천성 성도는 적수도인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원오극근 선사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원오 선사는 출가 후 경을 배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경 공부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모든 부처의 열반정로(涅槃正路)는 문구 중에 있는 것이 아닌데 나는 이제까지

부질없이 성색(聲色)이나 구했구나."
선사는 탄식하고는 여러 선지식을 참배했습니다. 두루 선지식을 참배하며 얻은 바가

있었는데 선사들은 원오의 법기를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오조법연 선사만은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원오가 아무리 묘한 응대를 해도 수긍하지 않자 원오는 선사에게 불순한 말을

남기고 떠나려 했습니다. 그러자 오조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대가 열반당에 들어가 눈앞의 촛불이 가물가물하게 보일 때 너의 공부를

다시 점검해 보거라.”
오조를 떠난 원오가 금산에 이르렀을 때 오조의 말처럼 극심한 열병에 걸렸습니다.

병이 극에 달하자, 자신의 견처(見處)는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몸소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오조 선사를 찾아뵙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하여 아는 공부, 알음알이가

남아있는 공부로는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원오는 이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그동안 알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조법연 아래에서 실질적인 공부를 하게 됩니다.
오조에게서 깨달음을 얻은 원오가 맨 처음 머문 곳이 고향인 사천성 성도의 소각사입니다.

잠시 이곳에 머무르며 교화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가서 여러 곳에서 교화를 했습니다.

그는 말년이 되어 다시 소각사로 돌아왔는데, 남송 고종 소흥 5년(1135년)에 이곳에서

입적했다고 합니다. 적수도인이 소각사에서 원오 선사를 만난 시기가 원오 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 인지 말년에 다시 소각사로 돌아온 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적수도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오등회원>, <속전등록>, <종문무고>,

<우바이지>,<선여인전> 등을 보면 원오 선사가 소각사에 머물 때 찾아뵈었다고만

나와 있습니다.


적수도인 범 씨는 성도 사람이다. 과부로 오래 살았는데 항상 앉고 눕지 않았다.

원오 선사가 소각사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가르침을 펴보이기(垂示)를 청했다.

원오 선사가 가르치기를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가?’

를 참구하라고 했다. 도인은 가르침과 같이 했으나 오랫동안 계합한 바가 없었다.

다시 원오 선사에게 물어 말했다.
“이것 외에 어떤 방편이 있으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원오 선사가 말했다.
“한 개의 방편이 있으니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도인이 깨달은 바가 있어 말했다.
“원래 이렇게 가까이 있었구나(종문무고).”


寂壽道人范氏 成都人。孀居歲久。常坐不臥。聞圓悟住昭覺寺。往請垂示。圓悟敎參不是心。不是佛。不是物。是甚麽。道人如敎。久無所契。復問圓悟曰。此外有何方便。令我會去。圓悟云。有箇方便。不是心。不是佛。不是物。道人有省。乃曰。元來得甚麽近(宗門武庫)。


-선여인전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는 당나라 때 마조도일 선사가 처음 한 말입니다.

마조도일 선사는 학인들이 도를 물으면 ‘이 마음이 부처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항상 고집한 것은 아닙니다.
한 승려가 물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조가 말했다.
“어린 아이가 우는 것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울음을 그친 뒤에는 어떻습니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 두 종류가 아닌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리켜 줍니까?”
“그에게 어떤 물건도 아니라고 말해 준다.”
“문득 그 속의 사람이 올 때에는 어떻습니까?”
“먼저 그가 대도(大道)를 직접 깨닫도록 해 준다.”


-마조어록


모든 것의 근본이 도입니다. 깨달음 공부의 핵심은 만물의 근본, 모든 것의 본성에

눈을 뜨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대전환입니다. 눈앞의 세계를 포함해, 삶의 모든

국면 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존재자체에서 한결같은 본성에 눈을 뜨는 일입니다.
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마조 선사는 처음에는 ‘이 마음이 곧 도이다’라고

말해준다고 합니다. 마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마음을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고 우리 삶과 떨어져 있지 않은

‘마음’이 도라는 말을 들으면 금방 공부가 될 것 같고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이 듭니다.
이 말을 들으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지금 쓰고 있는 이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밖으로 향하던 행태를 돌이켜 자기에게 돌아오면 모든 것이 여기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각도 자기 마음에서 흘러나오고, 감정도 자기 마음 안의

 일이며,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모든 것이 자기 경험의 산물임을 알게 됩니다.

이전과 다르게 드러나는 현상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마조 선사의 방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도’라는 말은

궁극이 아니라 자꾸 안팎으로 도를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며,

이 불안정한 마음이 멈추어지면 마음도 아니라는 가르침을 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닙니다.

마음이 도라는 이해나 규정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는 방편의 말입니다.
머물 곳이 사라져 공허할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머무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방향성이 사라지고 안주할 곳조차 없어지면 의지하던 습관으로

볼 때 당황스럽고 공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별해오던 습관 때문에 잠시 그리 보일 수 있지만, 진정 어디에도

머물 곳이 없을 때 무한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본래면목입니다.

이 허공성이 나와 남, 그리고 온갖 세계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선사들은 이런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기 위해 그때그때 학인의 공부에 따라

알맞게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의지하는 바가 있으며 훌쩍 벗어난 안정은 없습니다.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분별하는 마음이 있으면, 주객관의 분리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이것이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시야를 방해합니다.

마음공부란 분별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지 달리 도가 있어서

그것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실질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적수도인이 원오 선사에게 깨달음으로 들어갈 길을 물으니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하라고 했습니다.

간화선은 원오극근의 제자인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는데,

그 이전부터 실참지도에 적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당시 널리 퍼져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한물건도 아니다’하니 말문이 막힙니다.

적수도인은 이 말을 곰곰이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자,

다시 원오 선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원오 선사가 말합니다.
“한 개의 방편이 있으니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또 다른 방편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했습니다. 순간 적수도인이 마음의 길이 끊어지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게 됩니다.

똑같은 말을 들었는데, 앞에서는 깨닫지 못하고 뒤에서 깨달았습니다.

이전에는 생각으로 구했다면, 이후에는 그 생각이라는 한 물건마저 놓아버리게 되면서

진정한 본래 자리를 체득한 것입니다. 화두가 바로 이렇게 타파되는 것입니다.

‘뜰앞의 잣나무’, ‘무(無)’, ‘이뭐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의 체험에서 모든 분별심이 더 이상 힘을 못쓰는 게 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평생 분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기에 그 습관성이 지독합니다. 본래의 마음을 체험했다면

이제 분별의 정체를 명확히 보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체험 이후의 공부는 마음에 남아있는 물건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과정입니다.

따로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모두 이 하나의 본성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새롭게

보면서 분별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긴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모든 의심이 사라져 마음에 한 물건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무언가 따로 있다는 망상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분별심이 힘을 못쓰게 되면서 본성을 자각하는 일이 체험이라면,

체험이후의 공부는 따로 있다고 보는 것들이 허상임이 낱낱이 밝혀져서 더 이상

분별에 휘둘리지 않는, 후퇴하지 않는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입니다.

만약 체험을 했더라도 모든 분별의 본성이 텅 빈 하나라는 자각이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크게 휘둘릴 것입니다.


원오 선사가 깨달음을 이해에 의지하여 공부하다가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어지럽고

두렵고 흔들리는 마음을 보고 자신의 공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몸소 느꼈습니다.

이해로 아는 공부와 실질적인 공부는 가려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큰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공부밑천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무상한 경계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마음에 한 물건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리는 어느 결에 큰 난관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이에게 고난은 큰 스승입니다. 공부에 대해 겸손하게 하고 이런 기회를

통해 마음에 의지하는 것이 있으면 이것이 곧 번뇌라는 것을 증명해보입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니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남아있는가,

 진정 스스로 그리되었는가? 삶은 호시탐탐 이 공부가 분명한지 시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