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걸어라

2019. 6. 15. 22:1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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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걸어라


                 



                완전히 혼자일 때
                완전한 자유가 찾아온다.

                쓸쓸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아무도 없는 곳을 혼자서 걸어 가라.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말고,
                나 자신만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도록
                완전한 혼자로 걸어라.


                기대를 하고 혼자 걷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도리어
                혼자의 충만한 기운을 약화시킨다.


                완벽하지 않은 고독은
                고독이 아니다.

                홀로 있음을 연습하라.

                홀로 외로이 느끼는
                고독 속으로 뛰어들라.

                철저히 혼자가 되어
                그 고독과 벗이 되어 걸으라.


                외롭다는 느낌, 고독하다는 생각이
                모처럼의 홀로있음을 방해하려 들 것이지만,
                결코 그 느낌이나 생각에 속을 필요는 없다.

                그 느낌이 바로 깨어있음의 신호탄이다.

                외로움! 그 깊은 뜰 속에
                우리가 찾고 있던 그 아름다움이 숨쉬고 있다.


                홀로 있음이란 나 자신과의 온전한 대면이다.

                속 뜰의 본래 향기를 은은히
                피어오르게 할 수 있는 소중한 때다.


                자꾸 바깥 세계만을 마주하고 살면
                온전한 나 자신과 마주할 시간을 잃고 만다.

                도리어 그것은 얼마나 큰 외로움이고 고독인가.
                바깥으로 치닫게 될 때
                많은 군중들 속에 깊이 빠져들 때
                사실은 그 때,우리 속 뜨락은 외롭고 고독하다.


                완전히 혼자일 때 우린 완전히 자유롭다.

                완전히 하나될 수 있으며,
                참된 나를 만나고 또한 참된 너를 만나게 된다.
                      -출처미상-

                    뒷모습의 미학

                     

                    일망무제의 구름 바다에 연화좌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돌아 앉은 스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정갈하게 삭발한 머리와 마른 어깨 위에 걸친 청회색빛 장삼에서 평생 고행하며 수행한 선승의 기품이 전해온다. 구름 바다의 굽이치는 동세는 마치 백팔번뇌에 얽혀 고통 받는 중생의 삶을 형상화한 듯한데, 연좌에 앉은 스님의 모습은 미동 없는 바위처럼 고요하다. 마치 그 모습이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한 점 티끌 없이 청정한 연꽃이다.

                     

                    스님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후광은 주변이 좀더 짙은 청회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흔히 수묵화에서 달을 표현할 때, 담묵으로 주위를 어둡게 처리함으로써 환한 달빛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기법이다. 캄캄한 밤길을 가는데 눈 시리도록 청명한 보름달이 막 구름을 벗어나 온 세상을 비추는 것처럼, 이 후광은 오랜 고요와 침묵 속에서 마주하는 홀연한 깨달음의 경지처럼 보인다.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이 그림에 후세의 사람이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라는 제목을 붙였다. 우리 말로 옮기자면 '염불을 하며 서방정토로 향하는 스님'이라는 뜻이다. 흔히 단원은 풍속화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도교, 불교 주제의 인물화)도 적지 않게 그렸다. 만년에는 불교적 주제에 더욱 심취하여 여러 명작들을 남겼는데, <염불서승도>는 단원의 노년 작품으로 조선 후기의 여러 불교화 중 백미로 일컬어진다.

                     

                    관서(款書)란 그림을 그린 후 작가의 이름과 그린 날짜, 장소 그리고 누구에게 헌정하는 것인지 등을 써놓은 글인데, 이 그림의 관서는 짤막하게 단로(檀老, 단원 늙은이)라고만 쓰여 있다. 단로, 단옹(檀翁)이라는 이름은 단원이 노년 시절에 즐겨 썼던 호이다. 단원의 도석화는 호방한 필치로 유장하게 그린 것들도 많다. 특히, 이 그림의 연꽃의 연화대좌는 그 필선의 동세가 마치 구름이 흐르는 듯한 유운선법(流雲線法)으로 표현되어 있어 힘이 넘치나 부드럽고 조화로워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느낌을 준다. 젊은 시절에 왕명을 받고 웅대한 규모의 그림을 자주 그리기도 했던 단원이었지만, 비단도 아닌 성근 모시천에 그린 이 한 자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작품에서는 낙목한천(落木寒天)과 같이 번잡한 세상사를 다 내려놓은 듯한 노년의 삶의 경지가 느껴진다.

                     

                    어찌하여 단원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무렵에 이르러 이러한 뒷모습의 그림을 그렸을까? 사람의 뒷모습, 특히 회화 작품에서 묘사된 뒷모습은 우리에게 독특한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보는 뒷모습은 대개 타인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특정한 그 누구를 가리키지 않는 익명성의 뉘앙스를 가지며, 이를 통해서 작품은 인간의 내면이 지닌 보편적 정서를 환기시킨다.

                     

                    단원의 <염불서승도>처럼, 서양화에도 사람의 뒷모습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작품들이 많다. 덴마크 출신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Vilhelm Hammershøi, 1864~1916)는 고요하고 정돈된 실내에서 뒤돌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여인의 초상을 그려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함메르쇠이는 조용하고 차분한 회색조로 침묵이 흐르는 공간을 과장되지 않은 필치로 그려내어 보는 이들을 사뭇 명상적인 분위기로 이끌고, 그 정돈된 침묵 속에 모델의 말없는 뒷모습을 배치하여 무언의 대화를 우리에게 건네는 듯한 시적인 서정을 전해 준다.

                     

                    서양에서 공예, 시각 디자인, 회화에서 회색조의 색채만을 이용하여 대상의 명암과 농담을 표현하는 기법을 그리자이유(grisaille)라고 하는데, 풍경화와 인물화로 명성이 높았던 휘슬러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함메르쇠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시각적으로 절제된 특유의 표현방식을 정립했다. 물론 서양화와 동양화는 기법과 매체가 판이하기는 하나 절제된 색조와 그에 기인하는 명상적인 아우라로 인하여, 함메르쇠이의 뒷모습 그림과 단원의 <염불서승도>의 느낌은 어쩐지 닮아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그림에서 받은 감명을 깊은 내면의 대화로 표현했다. 장식을 배제한 극단적으로 간결하고 단순한 실내 정경과 뒤로 돌아선 인물의 그림들로 침묵과 명상의 이미지를 전해주는 그의 작품들은 영화 감독, 광고제작자 등 시각적 작업을 하는 현대의 여러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고, 그 작품들에 대한 오마쥬를 불러 일으켰다. 2008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서 전시회의 제목이 "침묵의 시(The Poetry of Silence)"였던 것을 볼 때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작품의 소재로 뒷모습에 천착하였던 또 다른 유명한 화가로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있다. 그의 풍경화에서 전경에 배치되어 대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뒷모습은, 이를 매개로 감상자를 그림 속의 세계에 몰입하게 하는 일종의 중개자적 역할을 하게 한다.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바위산 꼭대기에서 운무로 뒤덮인 장엄한 대자연의 광경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험준한 산의 정상은 흔히 치열하고 고단한 삶의 여정과 그 결과로 얻어지는 하나의 정점을 암시한다. 그 곳에서 마주한 것은 아직도 저 멀리 보이는 다른 바위산들과 그 기슭을 휘감고 도는 자욱한 안개와 구름이다.

                     

                    거대하고 숭고한 대자연이라는 실체 앞에서 한 인간은 단지 나약하고 고독한 존재일 따름이며, 자기가 떠나온 현실 세계, 즉 산 아래의 땅은 저 짙게 꿈틀거리는 운무에 가려 보이지조차 않는다. 그림 속의 이 남자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이 사람의 뒷모습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저 아래 굽이치는 안개의 바다를 헤치고 오른, 험한 바위산 꼭대기에서 멈춰서 생각에 잠겨 있는 숙연한 뒷모습은, 그의 깊은 명상에 동참하도록 이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들의 시선을 이끈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와 함께 작은 책자를 펴냈다. 이 책에는 세상의 모든 뒷모습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여러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상적인 뒷모습의 사진이 실려 있고, 투르니에는 그 각각의 사진에 자신의 감상을 적었다. 투르니에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사람의 얼굴, 앞모습은 인위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윤색되고 꾸며지고 가공된다. 때로는 자신을 좀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때로는 좀더 권위가 있거나 신뢰를 주는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서 치장된다.

                     

                    이른 새벽 바닷가에서 썰물에 갇힌 고깃배를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어부들의 등 짝, 경배하기 위해서 사원에 모인 기도자의 엎드린 등, 사람 많은 기차역에서 군중들에게서 뒤돌아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린 어머니의 뒷모습, 낡은 가죽 가방을 매고 먼 길 떠나는 이의 두 어깨, 방파제 난간에 기대어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연인의 뒷모습,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 이 모든 뒷모습에는 일부러 지어낸 아름다움이나 권위는 없다. 투르니에의 말처럼 뒷모습은 바로 인간존재의 진실을 드러낸다.

                     

                    동서양의 작품에서 만난 인간의 뒷모습은 어느 생에선가 만났던 사막을 건너 온 여행자의 눈빛을, 그저 낯설게 다가오지만은 않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때로는 천천히 잦아드는 청량한 슬픔을 보기도 하고, 거제도 바람의 언덕에서 불어오던 바람 냄새를 맡기도 한다. 가슴 저미는 상실의 순간들, 뒷모습이 있는 그 공간은 어디든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아마도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유는 존재의 무게를 걸머지고 걸어온 그의 삶의 여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단원에 대한 기록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 강세황의 <단원기 檀園記> 등의 문헌에서 읽을 수 있지만, 그의 유년기 시절이나 작고할 무렵의 행적 등은 자세하지 않다. 강세황의 기록에 따르면, 단원은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었으며 노력형이라기 보다는 천재적 재능을 지닌 화가였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 강세황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고 조선후기 경제와 문화가 융성했던 시절,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단원은 세속에 영합하였다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의 노년의 삶은 빈한했고, 때로는 지필묵조차 구하기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1805년 겨울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그는 홀연히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 이후 단원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원은 명시적으로는 자화상을 남기지는 않았다.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의 한 젊은이를 그린 단원의 작품이 그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이 그림, <염불서승도>에서는 세상의 부질없는 번뇌와 애증을 모두 내려놓고 연좌에 앉아 고요히 서방정토를 바라보는 늙은 스님의 뒷모습이 마치, 단원 자신이 그리고자 했던 노년의 자화상은 아니었을까?

                     

                    세상의 모든 뒷모습은 번잡한 삶에 등돌리고 앉아 비로소 마주하는 고요함의 자리, 세상의 약삭빠른 계산법에는 한참 못 미쳐 모자라고 순한 자리, 억울함 가운데서도 굳이 변명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관대함의 자리, 모든 작은 생명들에게 조심스레 다가서는 설레임의 자리, 홀로 있으나 결코 외롭지 않은 충만함의 자리, 그 지극한 마음자리를 바라보도록 만든다.

                     

                    단원의 <염불서승도>,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함메르쇠이의 <실내>는 우리에게 묻는 듯 하다. ‘당신은 삶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느냐?’.

                     

                    수행자는 어떻게 세상을 바르게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말씀하셨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극히 깨끗한 지혜가 있어

                    모든 변화하는 현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으면,

                    그는 바르게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다.

                     

                    <숫타니파타> 중에서

                    분위기 넘치는 추억의 가요 모음 01.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 양수경 02. 나의 사랑 그대곁으로 / 남궁옥분 03. 나 항상 그대를 / 이선희 04. 내 마음은 언제나 / 함현숙 05. 불씨 / 신형원 06. 슬픈 인연 / 나미 07. 꿈 / 김성희 08. 너를 사랑하고도 / 전유나 09. 바람이었나 / 정수라 10. 미소를 띄우며 너를 보낸 그 모습처럼 / 이은하 11. 찬바람이 불면 / 김지연 12. 눈물 한방울로 사랑은 시작되고 / 이유진 13. 물안개 / 석미경 14. 날개 / 허영란 15. 나를 잊지 말아요 / 김희애 16.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 / 장혜리 17. 귀로 / 박선주 18.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 / 민해경 19. 그것은 인생 / 최혜영 20. 한 여름밤의 꿈 / 권성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