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의 윤회설--② 업(業 : karman)|****@생명공학과윤회@

2019. 9. 28. 17:34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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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업(業 : karman)

   

 

불교는 생명의 발생과 그 유지의 문제를 ‘업이론’으로 설명한다. 업이란 중생들이 짓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업에는 육체적으로 짓는 행위인 신업(身業), 언어로서 짓는 행위인 구업(口業), 그리고 마음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意業)이 있다. 중생들이 짓는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행위가 다 업은 아니다. 

업의 결과인 과보(果報)를 초래할 능력(業力)을 가지고 있는 행위를 말한다.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춘 행위이어야 한다. 의도되지 않은 행동,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동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먼저 마음 속에서 의도하고 그 의도한 것을 육체나 언어나 마음을 통해 바깥으로 구체화한 행동이어야 한다. 윤리적인 행동이란 선하거나 악한 행동을 말한다. 

업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라는 인과법칙 위에 성립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악의 행위라는 윤리적인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업이론은 인과성과 윤리성의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업이론의 인과성은 자연과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그 윤리성은 종교적인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업은 그것이 끝난 후에 우리 존재 속에 반드시 어떤 흔적을 남긴다.

마치 향을 태울 때 향이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남아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업이 남기는 흔적은 일종의 에너지 형태이므로 그것을 업력(業力)이라고 부른다. 이 업력은 잠재적인 에너지로 존재 속에 남아 있다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은 중생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의 모든 것은 과거에 우리가 지은 업의 결과이고, 미래의 모든 것은 현재 우리가 짓고 있는 업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업을 지었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짐승이 될 수 있는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된다. 현재와 미래 생(生)의 모든 조건을 결정하는 것도 업력이다. 중생들의 형태·성격·운명·행과 불행·병, 그리고 수명의 길고 짧음, 육체적인 조건 등은 모두 이 업력의 영향 아래에 있다.

업의 결과는 한 생(生)뿐만 아니라 여러 생에 걸쳐 작용한다. 그래서 중생들의 현재의 운명은 과거에 그들이 지은 업의 결과이고 미래의 모든 것은 현재 그들이 짓고 있는 업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업은 한 존재가 과거 생으로부터 받아 현재 생을 살게 하고, 역시 미래 생을 결정하는 정보체와 같은 것이다. 생명공학에서 말하는 DNA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업은 개체(個體)의 의지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적(個的)인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거나 다른 존재가 지은 업의 결과를 자신이 대신 받을 수는 없다. 역시 어떤 외부적인 존재나 힘도 업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자신이 짓고 자신이 그 결과를 받아야 한다. 중부경전에서는 이것을 “이 악업을 지은 것은 너 혼자서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과보도 너 혼자 받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업이 일단 이루어지게 되면 그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법구경》에서는 이것을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업은 틀림없이 과보를 맺지만 그 결과가 산술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두 개의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된다. 예를 들면 똑같은 내용의 보시(布施)를 하더라도 그 보시가 행해진 대상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음식물을 짐승에게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그 결과가 더 크고, 범부에게 주는 것보다는 수행자에게 주는 것이 더 큰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은 농부가 동일한 양의 종자를 동일한 넓이의 밭에 심어도, 그 밭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수확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그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행하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전은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의 물 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잔 속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 그릇 속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어떤 업에 대해서 다른 업으로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로 말하자면 업이론은 기계론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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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런 여자 어디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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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지금도 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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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춤추는 밤
39.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