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46~50

2020. 1. 12. 10: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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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46


12-2 모든 것이면서 모든 것이 아니다

 

道流야 山僧說法은 說什麽法고 說心地法이니 便能入凡入聖하며 入淨入穢하며 入眞入俗하나 要且不是儞眞俗凡聖이라 能與一切眞俗凡聖 安著名字요 眞俗凡聖이 與此人安著名字不得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설법은 무슨 법을 설하는가. 심지법(心地法)을 설한다. 그래서 범부에게도 들어가고 성인에게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며, 진제(眞諦)에도 들어가고 속제(俗諦)에도 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그대들의 진(眞)·속(俗)·범(凡)·성(聖)이 아니면서 모든 진·속·범·성으로 더불어 이름을 붙여 준다. 그러나 진·속·범·성이 이 사람[참사람,心]에게 그런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강의 ; 임제스님의 설법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종지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며, 일심(一心)이다. 그 일심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다. 그래서 곳곳에 다 들어간다. 그러나 그 일심은 일심대로 있다.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고 모든 곳에 다 들어간다고 해서 결코 뒤섞여 분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참사람은 차별이 없이 가만히 있는데 온갖 이름들을 다 붙여 차별된 사람을 만든다. 설사 진·속·범·성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런 진속범성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규정지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르므로 변화무쌍한 세상의 차별상을 보지 말고 차별 없는 진짜 사람을 보라. 금 불상이나 금 되지를 보지 말고 금을 보라는 말이다. 전단 나무로 중생의 모습과 불보살의 모습과 동물의 모습으로 천만 가지 형상을 조각하지만, 그 나무의 향기를 맡아보면 모두가 전단향의 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의 마음은 언제나 오늘 이 순간 보고 듣는 분명한 이 사람이다. 일체 진·속·범·성의 차별은 없다. 이 단락의 중요한 구절은 심지법(心地法)이다. 보살계를 설하는 내용도 심지법문이 그 종지(宗旨)가 된다. 불교는 마음을 빼 버리면 아무 것도 없다. 삼라만상과 일체만유는 모두가 이 마음이 만든 것이다. 삼계가 오직 마음이다[三界唯心].

임제록 47


12-3 쓰게 되면 곧 쓴다

 

道流야 把得便用이요 更不著名字니 號之爲玄旨니라 山僧說法은 與天下人別하니 祇如有箇文殊普賢이 出來目前하야 各現一身問法하되 纔道咨和尙하면 我早辨了也니라 老僧穩坐에 更有道流하야 來相見時 我盡辨了也니 何以如此오 祇爲我見處別하야 外不取凡聖하며 內不住根本하야 見徹更不疑謬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玄旨]이라고 한다.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바로 눈앞에서 각각 한 몸을 나타내어 법을 물으려고 막 ‘스님께 묻습니다’라고 하면 나는 벌써 알아버린다.

 
노승이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나를 만날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린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나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않고 안으로는 근본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견해가 철저해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의 ;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 보게 되면 보고 듣게 되면 들을 뿐이다. 그 듣고 보고 하는 것을 달리 이름 붙일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인가 하면 듣는 것이다. 듣는 것인가 하면 손으로 잡는 것이다. 잡는 것인가 하면 어느새 걷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조사·보리·열반·진여·불성·자성·법성 등등이라고 구태여 옳지도 않은 이름을 붙일 것이 아니다. 쓸 일이 있으면 그대로 쓸 뿐이다.

 
또 임제스님은 자신의 뛰어난 안목을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오더라도 그들의 경지를 다 알아 보며, 어떤 수행자가 오더라도 역시 그들의 경지를 다 알아본다. 그 까닭은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차별상에 떨어져 있지 않고, 그렇다고 근본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지에도 자신을 메어 두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경지의 사람이 오더라도 다 적응하여 간파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임제스님의 견해는 없다. 없는 견해이기 때문에 모든 견해에 적응하여 다 상대하여 알아본다는 것이다.
파득변용(把得便用)이 중요한 말이다.





임제록 48


13-1 수처작주(隨處作主)하라

 

師示衆云, 道流야 佛法無用功處요 祇是平常無事니 屙屎送尿하며 著衣喫飯하며 困來卽臥라 愚人笑我나 智乃知焉이니라 古人云, 向外作工夫는 總是癡頑漢이라하니라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불법은 애써 공을 드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아무 일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 라고 하였다.”


강의 ; 우리나라 스님들은 임제가풍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사람이 죽었을 때 영결사나 조사나 추모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할”을 한다. 임제가풍을 쓰고 싶어 몸살이 난 사람들이다. 몸살이 나지 않고서야 간절히 애도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 같은 “할”을 할 수 있겠는가. 큰스님들의 영결식에 가서 보면 얼마든지 만나는 광경이다. 그런대 그 외의 불교에는 실로 거품이 너무 많다. 위와 같은 임제스님의 올곧은 가르침은 어디 갔는가. 위의 글에서 불교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불교는 애써서 공을 드려가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일없이 인연 따라 살면 된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는 공연히 쉬운 불교를 어렵게 만들지 말고 정통 불교로 돌아가서 이와 같이 쉽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지름길이다. 성불의 지름길이다. 옛 사람도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불교의 거품을 모두 걷어내고 바른 불교 쉬운 불교 간단한 불교로 가야한다. 참으로 옛 것이 새로운 것이다. 한국불교가 기왕 임제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면 이 임제록으로써 한국불교 개혁의 선언서로 삼았으면 한다.
기억해 둬야 할 구절이다. 불법무용공처 지시평상무사(佛法無用功處 祇是平常無事). 불교를 아주 쉽고 편안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儞且隨處作主하면 立處皆眞하야 境來回換不得하야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하야도 自爲解脫大海니라 今時學者는 總不識法하고 猶如觸鼻羊이 逢著物安在口裏하야 奴郞不辨하며 賓主不分이라 如是之流는 邪心入道하야 鬧處卽入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이요 正是眞俗家人이니라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을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며, 손님인지 주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佛敎]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의 번잡스런 일에 곧바로 빠져버리니 진정한 출가인 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바로 속 된 사람[俗人]이다.”

강의 ; 임제록에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구절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구절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상황에 끄달리지 말고, 주체적 인간으로 살면 무엇을 하든 그 하는 일과 그 있는 자리가 모두 진실한 진리의 삶이다. 상황과 처지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고, 상황과 처지의 주체적 역할을 하라. 어떤 일도 주체적 역할을 할 때 그 일은 곧 온전한 내 일이고, 온전한 나의 삶이다. 이것이 철저히 살고 철저히 죽는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며,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삶이다. 실로 천고의 명언이다. 이 한마디로 임제는 저 넓은 태평양이고, 허공이다. 수미산 꼭대기고, 히말라야 정상이다. 비상비비상천이고, 수 만 광년 저 바깥이다.

 
그러나 백보 끌어내려서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 “어디에 가건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다. 그러므로 현재의 위치가 아닌,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를 바라고 꿈꾸지 말라.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상황이든 만족하고 행복하라.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어 행복을 누리라.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 언제나 배고픈 아귀가 되지 말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하고 넉넉하게 부자로 살아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되면 설사 옛날에 익힌 업장과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즉 부모를 죽인 일이나, 성인을 죽인 일이나, 부처님의 몸을 헤치거나, 청정한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거나 하는 따위의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대해에 노니는 것이 된다. 설사 인간이 저질을 수 없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대로 해탈이라는 뜻이다.

 
어떤 상황에 있든 주인이 되라[隨處作主].는 말은 타인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든 자신은 거기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타인이 나를 때리고 욕하고 비방하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질투하고 내 것을 빼앗아 가고 큰 손해를 입히고 훼방하여 큰 곤경에 처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고 자신은 그것에 동요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 타인이 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주체자가 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행복하다. 그것이 진정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다. 자신에게 불이익과 손해가 돌아오고 비방이 돌아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다 받아드리고 그것에 따라 반응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손님에게 맛난 음식을 잘 차려 대접하더라도[비방과 손해를 가하더라도] 손님이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 음식은 결국 음식을 차려 대접한 사람에게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런대 요즘 공부하는 이들은 이러한 마음의 법을 알지 못한다. 마치 양이 풀이고 나무고 가시고 간에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처럼 아무런 말이나 다 받아드린다. 삿된 말과 마군이의 말을 잘도 받아드린다. 비방과 손해와 때리고 욕하는 일들을 잘도 받아드린다. 분별력이 전혀 없다. 방편과 진실을 전혀 가리지 못한다. 정법과 사법을 전혀 모른다. 그 말 많은 불교를 잘 변별해서 이제는 거품을 걷어내고 정확한 불교를 공부할 때다. 진정견해가 참으로 요구되는 때다.


좀 더 부연해서 말한다면 이런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불교에 들어와 있다. 이해득실과 시시비비 등등 정치적이거나 불교 외적인 것들에 열을 올리고 빠져들어 가위 박사가 되어 있다. 불교 외적인 일들을 열거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 정치문제 사회문제, 경제문제 환경문제, 명성과 이익, 학위나 운동이나, 예술이나 문필이나, 먹 거리 마실 거리 등등 종류도 너무 많다. 이런 것들에 정신이 빠져 있으면서 불교를 운위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과 같다. 임제스님은 이런 이들을 “참다운 출가인 이라 할 수 없다. 참으로 속된 사람이며 저질이며 속물 그 자체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또는 영웅호걸의 큰 그릇이라 하더라도 불법지견(佛法知見)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임제록 49


13-2 참다운 출가인


夫出家者는 須辨得平常眞正見解하야 辨佛辨魔하며 辨眞辨僞하며 辨凡辨聖이니 若如是辨得하면 名眞出家니라 若魔佛不辨하면 正是出一家入一家니 喚作造業衆生이요 未得名爲眞出家人이니라 祇如今에 有一箇佛魔하야 同體不分흠이 如水乳合이라 鵝王喫乳요 如明眼道流는 魔佛俱打하나니 儞若愛聖憎凡하면 生死海裏浮沈이니라


“대저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상 그대로의 참되고 바른 안목을 잘 가려내야 한다. 그리하여 부처와 마군을 구분하고 참됨과 거짓을 구분하며 범부와 성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가려낼 수 있다면 참된 출가라고 할 것이지만 부처와 마군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저 한 집에서 나와 또 다른 집으로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이는 업을 짓는 중생이지 진정한 출가인 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한 개의 부처인 마군이가 있어서 같은 몸이 되어 나눌 수 없는 것이 마치 물과 우유가 섞여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위의 왕은 우유만 먹는다. 눈 밝은 도인이라면 마군과 부처를 함께 쳐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강의 ; 출가하여 불문(佛門)에 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별한 조작이 없는 평상 그대로의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가려내는 일이다. 또 무엇이 부처며 무엇이 마군이지도 가려내야 한다. 진실과 거짓, 범부와 성인도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능력이 없다면 출가란 단지 한 집에서 나와 다시 한 집으로 들어가는 일에 불과하다. 업장을 소멸하려 와서 다시 업장을 짓는 중생일 뿐이다.


일개의 부처인 마군이[佛魔]가 있다고 한다. 때로는 부처라고도 하고 때로는 중생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부처인 마군이라고 하였다. 부처인 아귀도 가능하고 부처인 아수라도 가능하다. 인간은 본래로 수많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황을 따라서 수시로 그 하는 짓이 다르다. 하지만 눈이 밝은 사란은 부처도 마군도 한꺼번에 쳐 없앤다. 그 사람 앞에는 성인도 범부도 존재할 수 없다. 범부와 성인을 나눠놓고 싫어하고 좋아 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출몰하는 것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 안에 중생이 새롭게 새롭게 부처를 짓고, 중생의 마음 안에 부처님이 순간순간 진리를 깨닫는다.”라는 말도 있다.


임제록 50


13-3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問, 如何是佛魔오 師云, 儞一念心疑處가 是箇魔니 儞若達得萬法無生하면 心如幻化하야 更無一塵一法하야 處處淸淨是佛이니라 然佛與魔는 是染淨二境이라 約山僧見處하면 無佛無衆生하며 無古無今하야 得者便得하야 不歷時節이요 無修無證하며 無得無失하야 一切時中에 更無別法하니 設有一法過此者라도 我說如夢如化하노니 山僧所說이 皆是니라


“무엇이 부처인 마군입니까?”
“그대의 의심하는 그 한 생각이 바로 마군이다. 그대가 만약 만 법이 본래 태어남이 없는 이치[萬法無生]를 통달하면 마음은 환영과 같아지리라. 다시는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어딜 가나 청정하리니 이것이 부처다. 그러나 부처와 마군이란 깨끗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 경계다.


산승의 견해에 의한다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어서 얻을 것은 바로 얻는다. 오랜 세월을 거치지 않는다.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모든 시간 속에서 더 이상 다른 법은 없다. 설사 이보다 더 나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은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산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것이다.”

강의 ; 흔히 하는 말로는 ‘한 생각 의혹이 일어나면 곧 마군이다. 그리고 일체 삼라만상이 본래로 생멸이 없는 이치를 알아서 마음이 환화(幻化)와 같이 되어, 먼지 하나 일 하나 없이 텅 비어 버리면 이것이 부처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임제스님의 견해에 의한다면 부처도 중생도 없다. 예도 지금도 없다. 만약 얻을 것이 있다면 곧 바로 얻는다. 시간은 필요치 않다. 노력도 필요치 않다. 참선이니 간경이니 기도니 주력이니 육도만행이니 하는 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사 그러한 것을 통해서 얻었다 손치더라도 옛날 그대로의 그 사람일 뿐이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없다. 본래 그 사람이다. 만약 달라진다면 그것은 머리위에 머리를 하나 더 얻는 것이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낸 것이다.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산승이 할 말은 이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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