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19. 10:4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 ||
임제록 52
13-5 본래 일이 없다.
道流야 大丈夫兒가 今日方知本來無事로다 祇爲儞信不及일새 念念馳求하야 捨頭覓頭하야 自不能歇하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라면 본래 아무런 일이 없는 줄을 오늘에야 알 것이다. 다만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생각생각 내달려 구하면서 자기 머리는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느라 스스로 쉬지를 못하는 것이다.”
강의 ; 불교에서 대장부란 출가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영웅호걸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진 사란을 뜻한다.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란 편견이나 변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다. 흑백논리에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아주 없다거나 영원히 존재한다거나 하는 단견(短見)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다. 유·무 단·상(斷常)의 삿된 견해에서 시원스레 벗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본래로 할 일이 없음을 안다.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처음부터 없음을 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열심히 자신을 두고 밖을 향해서 찾는다. 마치 자신의 머리를 두고 다른 머리를 찾는 격이다. 설사 3아승지겁 동안 6바라밀을 닦고 참선을 하고 고행을 하여 머리를 찾았다 하더라도 이미 머리가 있는데 그 머리를 어디에다 쓸 것인가. 쉬어라, 쉬어. 본래로 아무런 일이 없느니라. 이렇게 하여 아무런 일이 없는 사람이 대장부니라.
본래무사(本來無事). 사두멱두 자불능헐(捨頭覓頭 自不能歇)은 이 단락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다. 한번 더 되새겨야 한다.
如圓頓菩薩이 入法界現身하야 向淨土中하야 厭凡忻聖이라 如此之流는 取捨未忘하고 染淨心在니 如禪宗見解는 又且不然하야 直是現今이요 更無時節이니라 山僧說處는 皆是一期藥病相治요 總無實法이니 若如是見得하면 是眞出家라 日消萬兩黃金하나니라
“저 원교보살 돈교보살[圓頓菩薩]은 법계에 들어가 몸을 나타내어 정토에 있으며 범부를 싫어하고 성인을 좋아한다. 이런 무리는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종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지 달리 다른 시절이 없다.
산승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병에 따라 그때그때 약을 쓰는 일회적인 치료일 뿐이다. 실다운 법이라고 전혀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참된 출가인이다.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쓸 수 있느니라.”
강의 ; 교리에서 말하고 있는 원교(圓敎)나 돈교(頓敎)의 대승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서 몸을 나타내고, 청정한 국토에 살면서 범부는 싫어하고 성인들만 좋아한다고 한다. 설사 그런 경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유·무·단·상(有無斷常)에서 벗어난 참되고 바른 견해가 아니다. 중도정견(中道正見)이 아니다. 중도정견이 못되면 부처고 보살이고 아무 것도 아니다. 모두 가설이다.
이왕 중도란 말이 나왔으니 좀 더 부연하겠다. 흔히 일체법이 공(空)이기 때문에 연기(緣起)다. 어떤 작은 물질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를 맺을 때에만 존재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연기는 곧 여래(如來), 여래는 곧 공이다. 연기이면서 공이요 공이면서 연기인 모든 존재의 원리가 곧 중도라고 한다. 쌍차 쌍조(雙遮雙照), 쌍민 쌍존(雙泯雙存)이다. 즉 유무 선악의 상대적 견해를 함께 부정하고 상대적 견해를 함께 긍정하며, 상대적 양면을 함께 수용하고, 긍정과 부정을 함께 받아드리는 것이 곧 중도다. 모든 경전과 어록들이 이 중도의 공식으로 설해졌다.
중도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까지만 말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경전의 말씀과 어록의 글들을 이끌어 불조가 모두 중도를 말했다고 증거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좀 부족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선사의 말씀은 매우 구체적이다. 불교인들의 일상 덕목인 육바라밀이나 불공하는 일이나, 불사를 짓는 일이나 예불을 드리는 일 등등을 열거하며 그 일의 중도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자비를 행하되 나와 상대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라.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라. 보시는 베푸는 바 없이 베풀라. 가지는 바 없이 계행을 가지라. 우리들의 육신은 없는 줄을 알고 모양을 잘 갖추라. 법은 본래 설할 것이 없음을 알고 설법하라. 절이란 물에 비친 달빛과 같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절을 세우고 도량을 건립하라. 텅 빈 세계지만 잘 장엄하라. 환영이요 헛것인 공양구를 부처님께 정성 다해 올려라. 그림자요 메아리인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라. 마음의 극락인 줄 알고 왕생을 발원하라. 꿈속의 불사인줄 알고 크게 일으켜라. 모두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알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중도의 원리로 존재하므로 중도적 원리대로 살라는 것이다. 세속적 논리로 보면 모두가 모순된 말이지만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 철저히 중도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 ||||||||||||
임제록 55
13-8 찾을수록 멀어 진다
學人不了하야 爲執名句하야 被他凡聖名礙일새 所以障其道眼하야 不得分明이니라 祇如十二分敎는 皆是表顯之說이라 學者不會하고 便向表顯名句上生解하나니 皆是依倚라 落在因果하야 未免三界生死하나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명칭과 글귀에 집착하여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이름에 구애되므로 훌륭한 식견[道眼]이 막혀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저 십이분교(十二分敎)도 모두 이치를 보여주기 위한 설법인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명칭이나 글귀에서 알음알이를 낸다. 이것은 모두 무엇에 의지하고 기댄 것이라서 인과(因果)에 떨어지며 삼계에서 생사에 윤회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강의 ; 경전을 공부하고 성인의 글을 읽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인품이 모자라고 지혜가 없기 때문에 옛 성인들이나 불조의 가르침으로써 부족한 것을 메우고 어리석음을 밝음으로 바꿔 보려한다. 그러한 뜻으로 출발하여 경전을 공부하다가 오히려 경전의 명자나 글귀들의 장애를 입어 도(道)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안무물(道眼無物)이라는 말이 있다. 도안으로 세상을 볼 때 그 사물에 미혹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에서 텅 빈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경전을 보아도 이름과 글귀에 걸리지 않고 그 말의 낙처(落處)를 잘 안다는 뜻이다.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가르침이 있다. 이것을 달리 삼승(三乘) 십이분교(十二分敎)라고 일컫는다. 모두 이치를 밝히기 위함이다. 그런대도 모두들 말에 의지하고 명칭에 매달려 갖가지 아름아리를 다 내어 집착하고 빠진다. 중생이다 부처다. 생이다 멸이다. 선이다 악이다. 있다 없다 등등의 상대적인 편견에 떨어진다. 편견에 떨어지는 것은 곧 인과에 떨어지는 것이다. 역시 인과를 잘 알고 인과에 미혹하지 않아야 하는데[不昧因果] 반대로 인과에 떨어지고 만다. 이렇게 되어서는 생사에 윤회함을 면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차별적인 견해에 치우치는 일이 곧 윤회다. 그래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서 임제스님은 경전이나 어록들을 ‘똥을 닦은 휴지다.’라는 너무나 혹독한 말씀을 하기도 한다.
사람의 삶은 유무가 아니다. 생도 멸도 아니다. 부처도 중생도 아니다. 선도 악도 아니다. 그래서 육조 혜능스님도 첫 법문에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당부할 때도 서른여섯 가지의 대대(待對)를 제시하면서 부디 상대적 편견을 벗어나서 법을 설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儞若欲得生死去住脫著自由인댄 卽今識取聽法底人하라 無形無相하며 無根無本無住處하야 活鱍鱍地라 應是萬種施設하야 用處祗是無處새 所以覓著轉遠이요 求之轉乖니 號之爲祕密이니라
“그대들이 만약 나고 죽음과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도록 하여라. 이 사람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뿌리도 없고 바탕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수만 가지 상황에 맞추어 펼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작용에도 정해진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할수록 더욱 어긋난다. 그것을 일러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강의 ; 모든 인간은 불교에서 지적하는 것을 들어보면 문제들이 너무 많다. 망상과 미혹과 생사의 윤회와 무명과 삼독을 위시한 팔만사천 번뇌와 가고 오는데 부자유한 것 등등이다. 불교공부나 수행이나 일반적 신행생활들은 모두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자고 하는 것이다. 참선과 간경과 기도와 염불과 주력 등등이 모두 역시 그러한 문제해결을 위한 방편이다.
그런데 임제스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문제해결의 열쇠는 간단하다.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을 아는 것이 답이다.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 사람은 모든 문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문제도 그 삶에게서 일어났고 답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모양도 형상도 없다. 뿌리도 근본도 없다. 어디에 머무는 곳도 없다. 너무나 활발발하다. 그 사람은 세상의 온갖 삼라만상에 다 응하지만 응하여 쓰는 곳도 찾아보면 실은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은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 그 사람은 구할수록 더욱 어긋난다. 비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아는 사람만이 알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가르쳐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은 처음에 스승 황벽스님에게 불교의 대의를 물으러 갔다가 흠신 얻어맞았다. 그 때는 몰랐으나 나중에사 그 때 얻어맞은 자신이 곧 불교의 대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무위진인이다. 절대현재라고도 한다. 큰 기틀 큰마음의 큰 작용, 즉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고도 한다. 전체작용(全體作用)이라고도 한다. 대기(大機)는 진리와 법의 인격화다. 모든 문제의 답은 이 하나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공부의 요체며 수행의 요체인 이 식취청법저인(識取聽法底人)을 명심하라. 그런데 그 청법저인은 멱착전원 구지전괴(覓着轉遠 求之轉乖)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