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36~40

2019. 12. 28. 17:1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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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36


시중(示衆)



강의 ; 시중이란 대중들에게 보이다. 대중들을 위하여 가르치고 훈시하다. 라고 한다. 또 상당시중도 있다. 소참시중도 있고 대참시중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시중은 상당(上堂)과는 격을 좀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과 시중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다. 임제록에서의 예를 쉽게 설명하면, 형식도 상당은 반드시 법상에 높이 올라가서 한다. 시중은 책상을 놓고 의자에 앉아서한다. 칠판에 판서도 해 가며 강의 하듯이 하기도 한다. 그래서 법상에 올라가서 하는 법어는 극치의 법을 드러내어 드날리는, 종지를 거량하는 식이어야 한다. 대중들이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다. 종사(宗師)가 당신이 드날릴 법을 드날리면 그 다음은 청중의 책임이다.


그러나 시중은 좀 더 친절하고 자세하게 풀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시중에도 상당법어 같은 법문이 있긴 하지만 대개는 친절하게 설명하여 일러준다. 청중이 이해를 못하면 설법자는 안타까워한다.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도 맞춰야 하므로 그만치 청중이 못 알아듣는데 대한 책임도 있다. 성철스님의 법어집 중에서 본지풍광(本地風光)은 상당에 해당되고 백일법문(百日法門)은 시중에 해당된다. 세존이 영산회산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은 상당법문이고, 경전을 설하신 것은 시중법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임제록 37


10-1 사료간(四料揀)

 

師晩參에 示衆云, 有時奪人不奪境이요 有時奪境不奪人이요 有時人境俱奪이요 有時人境俱不奪이니라 
임제스님이 저녁법문[晩參]에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때는 사람[주관]을 빼앗고[부정함], 경계[객관]를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고,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강의 ; 만참이라는 저녁법문은 아침에 하는 조참(早參)과 시간에 구애 없이 자유로운 시간에 하는 소참(小參)과 같이 별다른 형식이 없다. 매우 간소하다. 그러나 진지하고 알차다. 아주 길게도 한다. 임제록의 중심이 되는 법문이다. 강의나 경전해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사료간은 시중법문의 서론에 해당한다. 사료간이란 사람들을 제접할 때 법을 쓰는 네 가지 방법이다. 전광석화 가운데서 일기일경(一機一境)을 드날리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을 드려 헤아리고 사량하고 조작하고 건립하는가. 평지에 풍파를 일으킨 격이다. 하지만 부득이 해서 자비를 베풀어서 펼쳐 보인 것이다. 잘 살펴볼 일이다. 상당법어가 끝나고 시중법문에 들어서면서 여러 근기의 학인들을 제접하면서 전계될 몇 가지 경우들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어쩌면 양해를 얻자는 뜻도 있다. 상당법어에서는 전광석화 속에서 바늘을 꿰지만 시중에서는 촘촘한 그물을 드리워 크고 작은 고기들을 많이 건져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선지식이 찾아오는 학인의 입장은 부정하고 모든 경계는 그대로 두면서 그를 깨우친다.

둘째는 경계는 부정하고 학인은 그대로 두면서 그를 깨우친다.

셋째는 학인도 경계도 다 부정해 버리고 그를 깨우친다.

넷째는 학인도 경계도 다 인정하면서 그를 깨우친다. 아래에 일문일답이 있다.

時에 有僧問, 如何是奪人不奪境고 師云, 煦日發生鋪地錦이요 孾孩垂髮白如絲로다 僧云, 如何是奪境不奪人고 師云, 王令已行天下徧이요 將軍塞外絶煙塵이로다 僧云, 如何是人境兩俱奪고 師云, 幷汾絶信하야 獨處一方이로다 僧云, 如何是人境俱不奪고 師云, 王登寶殿하니 野老謳歌로다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이 떠오르니 땅에 비단을 편 듯 하고, 어린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희구나.”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의 명령이 이미 떨어지니 천하에 두루 시행되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는 전쟁을 할 일이 없어 졌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소식을 끊고 각기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은 보배 궁전에 오르고 시골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강의 ; 첫째, 주관[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객관을 살리면, 다시 말해서 나를 완전히 비우고 상대를 모두 인정해 주면 세상은 더 없이 아름답다. 아주 좋은 세상이다. 살만한 세상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막 태어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보는 듯하다. 거기에 무슨 시시비비가 있겠는가.


둘째, 남을 부정하고 나를 내 세우면 일인독제(一人獨制)다. 나라에는 임금 한 사람이 있고 절에는 주지 한 사람이 있다. 요즘은 아니지만 요순시대에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래서 왕의 명령 하나로 전쟁까지도 멈춘 상태다.


세째, 너를 부정하고 나를 부정했을 때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대통령은 대통령이고 국민은 국민이다. 각자 따로 따로 유아독존이다. 그래서 변두리 지방에서는 중앙과 절교하고 딴 살림을 사는 꼴이다. 조정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다. 어떤 특별한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꼭 나쁜 법은 아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다.


네 번째, 너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므로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격이다. 그래서 왕은 궁중에서 정치를 잘하고 백성은 백성대로 태평가를 부른다.


네 가지가 나름대로 다 일리가 있다.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사람을 제도할 때 근기와 상황에 맞춰서 법을 쓰는 표준이 된다. 명안 종사에게 지나치게 일구법문이나 방, 할 같은 것만을 기대할 것이 아니다. 만약 한결같이 최상승 법문만을 거량하면 법당 앞에 풀이 한 길이나 자랄 것이다. 아마도 고용을 해서 풀을 뽑아야 하리라. 그러나 요즘은 너무 지나치게 세속적인 대중들의 요구를 따르고 있다. 비불교적요소가 너무 많다. 불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너무 지나치다. 잘 살펴보고 반성해야할 일이다.


임제록 38


10-2 생사에 젖지 않는다 

 

師乃云, 今時學佛法者는 且要求眞正見解니 若得眞正見解하면 生死不染하야 去住自由하야 不要求殊勝이나 殊勝自至니라 
임제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요즘 불교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구하는 일이다. 만약 참되고 바른 견해만 얻는다면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가고 머무름에 자유로워 수승함을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온다.” 

강의 ; 참되고 바른 견해는 임제스님이 자주 강조하는 말씀이다. 간절하게 가슴깊이 새겨주고 싶은 법문에 들어서면서 하신 첫 말씀이다. 가장 먼저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살림에는 눈이 보배고 불교공부에는 바른 소견이 무엇보다 우선한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은 그동안 없었던 그 무엇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부처와 조사를 강조하지만 참되고 바른 견해만 있으면 이미 우리들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생사에 물들지 않고 영원히 해탈한 경지에서 대 자유를 누리는 일도 역시 우리들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참되고 바른 안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가장 훌륭한 삶, 최상의 인생,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인생이란 것도 달리 구하지 않아도 바르고 참된 견해만 갖추어지면 그 모든 것이 저절로 돌아온다. 

道流야 祇如自古先德은 皆有出人底路니라 如山僧指示人處는 祇要儞不受人惑이니 要用便用하야 更莫遲疑하라 如今學者不得은 病在甚處오 病在不自信處니 儞若自信不及하면 卽便忙忙地하야 徇一切境轉하야 被他萬境回換하야 不得自由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부터 선지식들은 모두가 그들만의 특별한 교화의 방법[路]이 있었다. 예컨대 산승(山僧)이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은 다만 그대들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는 것이다. 작용하게 되면 곧 작용할 뿐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라.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병이 어디에 있는가? 병은 스스로를 믿지 않는 데 있다. 그대들이 만약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곧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일체 경계에 끌려 다닌다. 수만 가지 경계에 자신을 빼앗겨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강의 ; 선지식들마다 그들 나름대로 사람들을 교화하고 가르치는 독특한 가풍(家風)이 있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53 선지식들을 다 친견해 봐도 역시 모두 다르다. 일개 사찰을 운영하는 방식도, 한 집안을 이끌어 가는 방식도 모두가 다르다.

 
임제스님은 불수인혹(不受人惑)이라는 유명한 말씀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교화방법을 삼았다. 즉, 다른 사람이 자신을 미혹하게 하고 헷갈리게 하는 일들을 받아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또 어떤 경계에도 속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훌륭한 법에도 속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작용하게 되면 곧 작용할 뿐[要用便用]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할” 
풀어서 자세히 설명하자면, 보게 되면 보고 듣게 되면 들어라. 손을 움직여 보고 걸음을 걸어 보라. 견문각지(見聞覺知)하고 시위동작(施爲動作)하는 사실 외에 달리 무엇이 있는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 외에 다른 것에는 미혹하거나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통묘용이며 무량대복이다. 부처님 백 명을 한 곳에 모아놓은 일이다. 그 외에 어떤 불보살과 조사의 경계에도 끄달리지 말라. 자신이 작용하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라. 이것이 임제스님만이 사람들을 지시하고 가르치는 특별한 노하우다.

 
불교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또한 성불을 하기위해서 참선, 염불, 기도, 주력, 간경 등등을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무결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미 대 해탈인이요, 대 자유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가 없고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경전의 말씀과 어록의 말씀들과 그 외의 수많은 경계[수행방법]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므로 부처님에게 속박 당하고, 조사들에게 속박 당하고, 일체 경계에 속박을 당하는 관계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끌려 다니는 노예나 다를 바 없다. 여기까지를 요약하면 진정견해(眞正見解), 불수인혹(不受人惑), 요용변용(要用便用)이다. 꼭 외어야 한다.

임제록 39


10-3 일 없는 사람

 

儞若能歇得念念馳求心하면 便與祖佛不別이니라 儞欲得識祖佛麽아 祇儞面前聽法底是니 學人信不及하고 便向外馳求하며 設求得者라도 皆是文字勝相이요 終不得他活祖意니라 莫錯하라 諸禪德아 此時不遇하면 萬劫千生을 輪廻三界하야 徇好境掇去하야 驢牛肚裏生이로다


“그대들이 만약 능히 생각 생각에 찾아 헤매는 마음[馳求心]을 쉴 수 있다면 곧 할아버지인 부처님[祖佛]과 더불어 다름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할아버지인 부처님을 알고자 하는가? 다만 그대들이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철저하지 못하고 곧 자신 밖을 향해 내달리면서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설사 밖에서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훌륭한 문자일 뿐이다. 마침내 살아있는 할아버지의 뜻은 얻지 못할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여러 선덕(禪德)들이여! 지금 이런 이치를 만나지 못하면 만겁천생을 삼계에 윤회하여 좋아하는 경계에 이끌려 다니느라 나귀나 소의 뱃속에 태어날 것이다.” 

강의 ; 기억해야할 말이 또 나왔다. 헐득치구심(歇得馳求心)과 청법저인(聽法底人)이다. 보고 듣고 하는 자기 자신 외에 밖을 찾아 헤매는 마음만 쉬어 버리면 그대로가 할아버지 부처요, 그대로가 할아버지 스승[祖師]이다.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익숙한 말로 부처님이니 조사님이니 하는 사람들이란 무엇인가? 보고 듣고 할 줄 아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가. 자신 속에 무한한 생명과 한량없는 공덕과 신통묘용이 있어서 이렇게 보고 들을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밖을 향해 찾아 헤매지 않는 사람이다.

 
조사와 부처를 알고자 하는가? 내 면전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聽法底人].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 밖을 향해서 부단히 찾아 헤매고 있다. 실은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설사 밖에서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문자로 쓰인 아름답고 훌륭한 이름들뿐이다. 이를테면 석가모니·아미타불·미륵불·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관세음보살·지장보살 그리고 무슨 부처님, 무슨 보살님 천불(千佛) 만불(萬佛)등등 대단한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진정으로 살아서 피가 튀고 맥박이 뛰고, 웃고, 울고 할 줄 아는 그런 부처는 만나지 못한다.


임제스님이 특별히 여기에서 할아버지 부처님[祖佛]이라고 하는 이유는 경전상에서나 볼 수 있는 아득히 먼 부처님을 바로 곁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의 기억이 어떻든가? 바로 그렇게 우리들 마음에 쉽게 다가서는 그런 분이 부처님이다. 조사란 말도 이미 많이 멀어져 있다. 할아버지 스승님이라고 풀어서 불러야 쉽고 가깝게 가슴에 와 닿는다. 보고 듣고 하는 살아있는 사람 외에는 그 무엇도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에서 눈을 떼지 말라는 뜻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면 별의별 삶의 길로 흘러 다니게 된다. 하필 삼계윤회이겠는가. 그래서 나귀나 소가 되어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욕심 채우는 일이다. 물과 풀, 그 외에는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리라[但念水草 餘無所知]. 사람으로서 사람의 자리에 있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사람의 모습을 한 체 축생의 삶이요, 아수라나 아귀나 곤충이나 미물의 삶이다. 법화경의 말이다.

 

道流야 約山僧見處인댄 與釋迦不別이라 今日多般用處가 欠少什麽오 六道神光이 未曾間歇이니 若能如是見得하면 祇是一生無事人이니라


도를 배우는 여러 벗들이여! 산승의 견해에 의지한다면 그대들도 석가와 더불어 다름이 없다. 오늘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곳에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섯 갈레(眼·耳·鼻·舌·身·意)의 신령스런 빛이 잠시도 쉰 적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다만 한평생 일 없는 사람일 뿐이다[一生無事人].”

강의 ; 임제스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그대들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모두가 석가와 다르지 않다. 지금 이렇게 보고 듣고 하는 온갖 작용이 무엇이 부족한가? 석가보다 모자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석가도 볼 줄 알고 그대들도 볼 줄 안다. 석가도 들을 주 알고 그대들도 들을 줄 안다. 석가도 피곤하면 자고 그대들도 피곤하면 잔다. 석가도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그대들도 배고프면 먹을 줄 안다. 육근을 통해서 활발발하게 작용하는 이 무위진인은 한 순간도 쉰 적이 없다. 신통과 묘용이 어디 별것이랴. 육근을 통해서 보고 듣고 하는 이 작이다. 이 사실을 알면 단지 한평생 일없는 사람일 뿐 달리 부처다, 조사다. 라고 할 것이 없다. 인연을 따라 소일하면 된다. 구태여 애쓸 것이 없다[隨緣無作].


이것은 성불의 지름길이다. 불교의 지름길이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순식간에 석가와 같지 아니한가. 이보다 더 쉽고 더 빠르고 더 간단한 길은 없다. 이보다 더 쉬운 불교가 어디 있는가? 임제록은 불교의 제1의 교재다. 임제록은 조계종의 제1의 소의경전이다. 불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지식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이렇게 가르칠 줄 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불교를 꿰뚫어 보고, 사람을 꿰뚫어 보고, 부처와 조사를 꿰뚫어 본 임제만이 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꼭 외워야 할 말이 또 있다. 금일다반용처 흠소십마(今日多般用處 欠少什麽). 육도신광 미증간헐(六道神光 未曾間歇). 일생무사인(一生無事人).

임제록 40


10-4 밖에서 찾지 말라

 

大德아 三界無安이 猶如火宅이라 此不是儞久停住處니 無常殺鬼가 一刹那間에 不揀貴賤老少니라 
“대덕아! 삼계가 불안한 것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이곳은 그대들이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무상(無常)이라는 사람을 죽이는 귀신[殺鬼]이 한 찰나 사이에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늙은이, 젊은이를 가리지 않는다.” 

강의 ; 말씀이 좀 늘어지고 일반적이다. 소참법문답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우 불안하여 마치 불타는 집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은 법화경의 유명한 화택(火宅)의 비유를 인용한 것이다. 불교공부를 하게 되는 동기는 대개 세상과 인생에 대한 부정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세존이 늙고 병들고 죽은 모습을 보고 발심(發心)한 것이 그 모델이 된다. 세월이 빠르게 흐르고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세속적 부귀영화가 인생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게 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인생무상은 그대로가 사람을 죽이는 귀신이다. 순식간에 죽음이 찾아온다. 누구도 어찌하지 못한다. 만금을 주고도 하루의 시간을 연장할 수가 없다. 특별한 사람만을 선택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과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정말 공정하고 평등하다. 이런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긴다면 안이한 생각으로 세상을 살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 의미 있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질 것이다. 그것이 발심(發心)이다.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불교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儞要與祖佛不別인댄 但莫外求어다 儞一念心上의 淸淨光은 是儞屋裏法身佛이며 儞一念心上의 無分別光은 是儞屋裏報身佛이요 儞一念心上의 無差別光은 是儞屋裏化身佛이니 此三種身은 是儞卽今目前聽法底人이라 祇爲不向外馳求하면 有此功用이니라


“그대들이 할아버지 부처님과 더불어 다르지 않고자 한다면 다만 밖으로 구하지 말라.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의 청정한 빛은 그대들 집안의 법신불(法身佛)이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분별없는 빛은 그대들 집안의 보신불(報身佛)이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차별 없는 빛은 그대 집안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이 세 가지의 몸은 그대들이 지금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다만 밖을 향해 헤매면서 찾지만 않으면 이런 공용(功用)이 있다.” 

강의 ; 그대들 성불하고자 하는가? 별다른 공부가 없다. 다만 너 자신 밖에서만 찾지 말라. 너 자신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없다. 부처님에게는 세 가지의 몸이 있다고 경전에서는 설명을 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그대들의 지금 이 순간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그 외에 달리 법신이니 보신이니 화신이니 하는 것은 없다. 한 마음에서 이리 저리 나누어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임제스님은 “한 마음 청정한 광명[작용]이 법신불, 한 마음 분별없는 광명[작용]이 보신불, 한 마음 차별 없이 평등한 광명[작용]이 화신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누어서 약간의 설명을 붙이자면, 청정한 광명이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아서 허공과 같은 입장을 말한다. 적멸한 성품의 신령스런 광명이다. 분별없는 광명이란 하루 종일 수용하는 일이다. 보고 듣고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먹는 일, 추우면 옷을 더 입고 더우면 부채질을 하는 평상심의 작용이다. 차별 없는 광명이란 하루 중에 아무리 작용해도 끝이 없고 간단이 없고 차별이 없는 작용이다. 마치 하늘에 달이 떠 있으면 일 천강에 달빛이 모두 비치는 것과 같다.

 
또 “이 세 가지의 몸이라는 것도 그대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서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이다. 다만 밖을 향해서 쫓아다니며 구하지만 않는다면 법신, 보신, 화신불의 공덕 작용이 거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손이 필요하면 손을 쓰고 발이 필요하면 발을 쓴다. 이것이 법신, 보신, 화신의 공덕 작용이다. 무량공덕이다. 신통묘용이다. 무량대복이다. 이 능력을 천하를 준들 바꿀 수 있으랴. 황금으로 사람을 수미산 만하게 만들어 놓았다 하드라도 울고 웃을 줄 알까. 무슨 신통이 있겠는가. 과연 임제록은 불교 최고의 경전이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일개 나라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법신이니 보신이니 화신이니 하는 바싹 마른 언어들을 피가 돌고 맥박이 뛰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려 놓았다. 욕을 하며 화를 내고, 웃으며 즐거워하는 바로 그대 자신으로 바꿔놓았다. 바꿔놓은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바로 그대자신이었다. 보살, 나한, 조사, 도인이 모두 그대 자신이다. 그대 한 생각 일으켜 우주만유를 만들고, 그대 한 생각 잠재워 삼라만상을 없애버린다. 이보다 더 위대한 부처가 어디 있으랴. 이보다 더 뛰어난 신이 어디 있으랴. 그대는 모든 부처와 조사의 어머니며, 일체만유의 주인이며 창조자다. 다시 한번 기억할 말은, 조불불별 단막외구(祖佛不別 但莫外求). 즉금목전 청법저인(卽今目前 聽法底人).

據經論家하면 取三種身하야 爲極則이나 約山僧見處不然이니 此三種身은 是名言이며 亦是三種依니라 古人云, 身依義立이요 土據體論이라하니 法性身法性土는 明知是光影이니라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經論家]에 의하면 이 세 가지 불신(佛身)을 취하여 궁극의 경지를 삼으나 산승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불신이란 이름과 말이며 또한 세 가지 의지인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몸[佛身]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의하여 세운 것이고, 국토는 바탕에 의거하여 논한 것이다. 법성신 법성토는 이 빛의 그림자인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강의 ; 교리에서는 이 법신, 보신, 화신을 최고의 경지라고들 한다. 그러나 임제스님의 견해에서는 전혀 아니다. 앞의 단락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한 마음의 그림자다. 이 세 가지 몸이란 이름에 불과하다. 말에 불과하다. 그 이름에 의지하게 하는 일에 불과하다. 옛 사람도 말했다. “법신, 보신, 화신이란 의미에 따라서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삼신에는 각각 의지하는 국토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삼신의 본체인 마음에 의해서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성신(法性身)이니 법성토(法性土)니 하는 것은 모두가 마음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은방울자매 옛가요메들리 30 곡 ♬
 

01. 향수의 젖어
02. 하동포구 아가씨
03. 목화꽃 고향
04. 추억의 백마강
05. 추풍령
06. 인생역
07. 님계신 동작동
08. 영산강 처녀
09. 타이완 아가씨
10. 해변의 여인
11. 소양강 처녀
12. 아주까리 등불
13. 세상은 요지경
14. 고향은 내사랑
15. 신라의 북소리
16. 여수처녀
17. 비노는 포구
18. 눈물겨운 두자매
19. 목련화 필때
20. 도둑맞은 행복
21. 순풍에 ?을달고
22. 흘러가는 흰구름
23. 리라꽃 비련
24. 대전부르스
25. ?잊을 그리움
26. 눈물젖은 두만강
27. 삼천포 아가씨
28. 넋두리 20 년
29.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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