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마음의 작용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눈에 있을 때는 본고, 귀에 있을 때는 들으며,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맡고, 입에 있을 때는 말을 하며, 손에 있을 때는 잡고, 발에 있을 때는 걸어 다닌다. 본래 이 하나의 정밀하고 밝은 것[一精明·一心]이 나누어서 우리 몸의 여섯 가지 부분과 화합하였을 뿐이다. 한 마음마저 없는 줄 알면 어디서든지 해탈이다.
산승의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일체 치구심(一切馳求心)을 쉬지 못하고 저 옛사람들의 부질없는 동작과 언어와 가리키는 것들[機境]을 숭상하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강의 ; 모든 사물에 있어서 형상이 있는 것은 장애가 많아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마음은 모양이나 형상이 없어서 어디든 자유롭다, 하나의 마음이 눈에 있으면 보는 작용을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 작용을 한다.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맡는다. 이와 같이 걸림이 없다. 본래 하나의 마음이지만 육근과 화합해서 일체가 있다. 삼라만상도 마음이 육근을 통해서 존재함을 안다. 그러므로 이 한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 있든지 자유로운 해탈이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모든 수행자들이 밖을 향해서 구하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옛 사람들의 부질없는 말이나 행위들, 즉 기경(機境)들을 높이 받들고 숭상하여 그것이 무슨 실다운 법이나 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꽃을 든 것이나, 가섭이 미소한 것이나, 구지화상이 손가락을 든 것이나, 할을 하고 방을 쓰는 일들을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받들어 모신다. 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말씀들을 귀중하게 여겨서 혹 흠이 갈까하여 애지 중지한다. 거기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으려고 머리를 처박는다. 그들은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 스스로가 속고 있다.
기경(機境)이라는 말은 선가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또 중요한 말이다. 기(機)는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실을 보고 듣고 겪으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사실이나 경지가 인격화, 또는 체(體)화 된 것이다. 경(境)은 밖에 있는 것이다. 보여주고 들려주고 경험하게 해주는 어떤 사실이다. 예컨대 세존이 꽃을 든 것은 경이다. 그리고 가섭이 미소한 것은 기다. 또 멀리 연기가 일어나는 것은 경이다. 연기를 보고 불이 있는 줄을 아는 것은 기다. 불자를 들거나 방을 쓰거나 할을 하거나 선문답을 던지거나 하는 따위는 모두가 경이다. 그런 사실에 따라 반응하는 것, 상대의 마음의 작용에 따라 표현하고 답하는 것은 모두 기다. 모든 선문답은 흔히 일기 일경 일언 일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기 일경 일언 일구에서 깨닫기를 도모하는 것은 마치 아무런 탈이 없는 살갗을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다. 또 미망의 경계에 깊이 빠져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따르고 받드는 것을 임제스님은 크게 경계하고 있다. 오늘의 공부는 심법무형 관통시방(心法無形 通貫十方)이다.
道流야 取山僧見處하면 坐斷報化佛頭라 十地滿心은 猶如客作兒요 等妙二覺은 擔枷鎖漢이요 羅漢辟支는 猶如厠穢요 菩提涅槃은 如繫驢橛이니 何以如此오 祇爲道流不達三祇劫空일새 所以有此障礙니라 若是眞正道人인댄 終不如是니 但能隨緣消舊業하고 任運著衣裳하야 要行卽行하며 要坐卽坐하야 無一念心希求佛果니 緣何如此오 古人云, 若欲作業求佛이면 佛是生死大兆라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견해를 취할 것 같으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를 앉은자리에서 끊는다. 십지보살[十地滿心]은 마치 식객과 같다. 등각·묘각은 죄인으로서 칼을 쓰고 족쇄를 찬 것이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뒷간의 똥오줌과 같다. 보리와 열반은 당나귀를 매는 말뚝과 같다. 어째서 이러한가? 다만 도를 배우는 이들이 3 아승지겁이 공(空)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도인(道人)이라면 마침내 이와 같지 않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구업(舊業)을 녹인다. 자유롭게 옷을 입고 가게 되면 가고 앉게 되면 앉아서 한 생각도 불과(佛果)를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오히려 생사의 큰 징조가 된다.’고 하였다.”
강의 ; 부처님의 설법은 활과 같이 우회하여 말씀하시고, 조사들의 설법은 활줄과 같이 직선으로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그 표현이 아름답고 부드럽다. 그러나 조사들의 표현은 직설적이고 때로는 매정하고 비정하다. 혹독하다. 부처님이고 보살이고 전혀 안중에 없다. 보통 사람들은 종이에 불(佛)이라는 글자만 써져 있어도 그 종이를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그런 마음으로 신행생활을 하는 후손들은 때때로 임제스님의 말씀을 입에 담기가 민망할 때가 있다.
임제스님의 견해는 이렇다. 매우 특별하다. 경악할 일이며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일이다. 보신불, 화신불을 앉은 자리에서 여지없이 부정해 버리고, 보살로써 최고의 경지에 오른 십지보살을 천한 나그네, 식객, 노숙자라고 하였다. 등각(等覺) 묘각(妙覺)이 어떤 자리인가. 그들을 칼을 쓰고 족쇄를 찬 죄인이라 하였다. 아라한이나 독각(獨覺)을 똥오줌이라고 하였다. 보리 열반은 당나귀를 메어두는 말뚝이라고 하였다.
보살의 수행계위를 아예 부정하지만 경전에서 나열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능엄경에는 57위를, 인왕경에는 51위를, 영락경에는 52위를, 화엄경에는 52위, 또는 41위를, 대품경에는 42위를, 혹은 57위를, 또는 60위를 설하고 있다.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방편이기 때문에 그 설이 구구하다. 열면 많아지고 합하면 적어진다. 그러므로 임제스님의 혹독한 말씀을 시원한 청량수로 받아드려야 한다.
나는 오직 나일뿐이다. 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뚫는 기개가 있고 뜻이 있다.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지 않는다. 무위진인으로서 당당하게 살라는 뜻이다. 불보살의 멍에에서 시원스레 벗어나라는 뜻이다. 조사와 아라한 벽지불,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것도 모두가 본래로 자유로운 사람들을 옭아 묶는 올가미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그곳에 붙들려 사는가. 삼 아승지겁을 닦아야 비로소 성불한다는 그 시간성이 본래로 공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말을 들을 줄 아는 그 사람이 부처고 조사라는 사실을 아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며 무슨 시간이 걸리겠는가. 알려고 하는 자기 자신이 곧 그 사람인 것을. 그래서 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도 부처님이다. 조사님이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인줄 알고 있으나 모르고 있으나 그대로 다이아몬드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 이해하면 공부 끝이다. 일없는 사람이다. 인연 따라 살 뿐 특별히 애쓸 일이 없다[隨緣無作]. 이제 그 헐떡거리는 마음 좀 쉬어라 쉬어. 자신이 지금 그대로 부처요 조사인데 무얼 그리 찾아 헤매는가. 참선을 하든지 간경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반드시 이 이치를 알고 해야 한다.
임제스님은 다시 양나라 보지(寶誌)화상의 대승찬(大乘讚)이라는 글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하면 부처야 말로 생사의 큰 원인[大兆]이다” 업을 짓는다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참선을 하고 6바라밀을 닦고 간경, 기도, 염불 등등의 모든 수행이라는 행위들을 말한다. 그러한 일을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사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큰 원인이 될 뿐이다.
영가스님도 증도가(證道歌)에서 말씀하셨다.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공을 베푼다면 그 부처가 언제 이루어 질 것인가[求佛施功早晩成]. 눈이 밝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부처란 이미 되어 있는 사람이다. 새로 만들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너 모습 그대로다. 배고프면 발을 먹고 피곤하면 쉴 줄 아는 바로 그 사람이다. 거기에서 지금 무엇이 부족한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삼 아승지겁동안 고행(苦行)을 해서 구한들 무엇이겠는가. 뼈만 남은 석가의 고행상을 구하는가. 그 고행상이 부처인가. 부처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슬프면 울 줄 알고 기쁘면 기뻐할 줄 아는 그 사람이 부처님이다.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피곤하면 쉴 줄 아는 그 사람이 부처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나 생명이 없는 언어의 유희에서 눈을 돌려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살아 있는 사람 부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인불사상(人佛思想)이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 임제록은 불교의 제1 교과서이다. 조계종의 제1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성불의 지름길이다. 우리나라의 불교가 모두 임제스님의 법을 이은 불교이며 임제스님의 법손임을 입만 열면 자랑을 하면서 왜 이 임제스님의 가르침을 모르는가.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불교를. 이제 우리 한국의 불자들도 이러한 본래의 불교로 돌아갈 때이다. 임제스님의 사상으로 돌아가서 당당하게 임제스님의 법손임을 자랑할 때이다. 참으로 천고의 일서(一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