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31~35

2019. 12. 21. 17:4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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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31


6-3 모두가 착각이다

 

 


師乃云, 但有來者하면 不虧欠伊하야 總識伊來處로라 若與麽來하면 恰似失却이요 不與麽來하면 無繩自縛이니 一切時中에 莫亂斟酌하라 會與不會에 都來是錯이라 分明與麽道하야 一任天下人貶剝하노라 久立珍重하라


임제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였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을 나는 조금도 잘못보지 않는다. 그가 온 곳[견해·공부의 수준]을 모두 안다. 만약 그와 같이[석실행자처럼 되어] 온다면 마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고, 그와 같지 않게 온다면 그것은 밧줄도 없이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언제든지 함부로 이리 저리 짐작하지 마라. 
‘안다, 모른다.’ 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나는 분명히 이와 같이 말하거니와, 천하 사람들이 헐뜯고 비방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오래 서 있었으니 돌아가 쉬어라.”

강의 ; 앞서 석실행자의 무심이 된 공부에 대하여 평하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석실행자의 그와 같은 공부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다. 불교공부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목석처럼 만들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선시에 “무심(無心)을 도(道)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이 막힌 상태니라[莫言無心云是道 無心猶隔一重關].라고 하였다.

 
보고 듣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아는 활발발한 무위진인의 삶을 주창하는 임제스님으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공부다. 큰 사람 큰 장용이 대지를 뒤엎고 하늘을 무너트리는 마당에,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는 자리에 목석이라니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천하 사람들이 다 욕하고 헐뜯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얼마나 확신이 넘치는 말씀인가.


만약 공부가 석실행자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밧줄도 없이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그리고 안다. 모른다. 라고 하는 것은 모두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안다면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가 죽은 말이다. 앞서서 내가 그 예를 잘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쯤하고 모두들 돌아가 쉬어라.

임제록 32


7-0 고봉정상과 네거리

 


上堂云, 一人은 在孤峯頂上하야 無出身之路요 一人은 在十字街頭하야 亦無向背니 那箇在前이며 那箇在後오 不作維摩詰하며 不作傅大士하노니 珍重하라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고봉정상에 있어서 몸이 더 나아갈 길이 없고, 한 사람은 네거리에 있으면서 또한 앞뒤 어디든 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이 뒤에 있는가[누가 더 나은가]?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편히 쉬어라.”


강의 ; 말이 있는 것이 옳은가? 말이 없는 것이 옳은가? 길거리만을 지킬 일도 아니고 높은 봉우리만을 지킬 일도 아니다. 쉽게 풀이하면, 높고 높은 봉우리에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사람과 어디든 갈 수 있는 네거리에 있으면서 어느 곳으로도 가지 못하는 사람과 누가 더 나은 사람인가? 라는 말이다. 고봉정상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알겠는데 네거리에서 오도 가도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꿔 해석하면 사실은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교학에 전간문(全揀門) 전수문(全收門)이라는 것이 있다. 일체를 부정하는 길과 일체를 긍정하는 길이다. 고봉정상은 일체를 부정하는 입장이고, 네거리는 일체를 긍정하는 입장이다. 공(空)과 유(有)의 경우다. 공이든 유든 모두가 치우친 견해다. 변견(邊見)이며 편견이다. 그래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 도가 아니다. 중도(中道)가 아니다. 불교가 아니다. 진정한 삶의 길이 아니다. 둘 다 틀린 것이다. 거기서 더 나은 사람을 묻는 것은 장난이다. 덫이다.

 
유마대사는 유마경에서 불이(不二)법문을 말이 없음으로 표현하여 문수보살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말이 없음[杜口]으로써 그를 표방하고 있다. 그는 전간문의 삶이다. 
그러나 부대사(傅大士,497-569)는 그와 반대의 입장이다. 설법을 많이 한 분이다. 그래서 사방에서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왕궁에도 출입하며 법을 설했다. 저서도 있다. 남달리 전법활동을 많이 하여 다 수용하면서 살았다. 그는 전수문의 삶이다.

 
임제스님은 경고한다.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하지만 임제스님의 말씀에 토를 단다면 왈, “유마힐도 되고 부대사도 되거라.” 임제스님은 쌍차(雙遮)로 보이고, 필자는 쌍조(雙照)로 보였다. 그래서 결국은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독자들은 알아듣기 쉬울지 모르나 여운이 없다. 역시 임제스님의 말씀으로 끝나야 한다.

임제록 33


8-0 집안과 길거리

 


上堂云, 有一人은 論劫在途中호되 不離家舍하고 有一人은 離家舍호되 不在途中하니 那箇合受人天供養고 便下座하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영원히 길에 있으면서도 집을 떠나지 않고, 한사람은 집을 떠나 있으나 길에도 있지 않다. 어느 쪽이 최상의 공양[人天供養]을 받을 만한가?” 
하시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강의 ; 앞에서는 치우친 견해를 들추어 그 잘못을 지적하고 이면으로는 바른 길을 제시하였다. 이 단락에서는 보다 조화로운 경우를 말하고 있으나 실은 앞의 사람은 전수문(全受門)의 삶이고, 뒤의 사람은 전간문(全揀門)의 삶이다. 긍정과 부정의 관계다.


본문을 달리 표현하면, 예컨대 한 사람은 언제나 바깥에 있으면서 집안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또 한 사람은 집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다. 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경우가 실은 말은 달라도 그 뜻은 같다. 이(理)와 사(事)의 두 면을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잘 처리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다 치고, 이와 사 어느 것도 관계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사를 한 가지도 관계하지 않는 다면 그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할까? 실은 이와 사에 있어서 어느 면에서도 그와 같이 물들고 집착하지 않은 자세[中道]가 되어야 비로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들의 설법원칙인 중도(中道)에 기준하여 해석한 것이다.


본래 이 내용의 원형은 이렇다. 문수는 언제나 집안일[理·智]을 담당하지만 바깥일[事·行]에도 어둡지 않고 보현은 언제나 바깥일을 담당하지만 집안일에도 어둡지 않다. 좌와 우, 아내와 남편, 이판과 사판, 국민과 정치인, 동양과 서양, 물질과 정신 등등 모든 상대적인 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조화[中道]를 뜻한다.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를 부처님이라고 할 때 그를 문수와 보현의 조화를 뜻하기도 한다.

임제록 34


9-1 삼구(三句)

 


上堂에 僧問, 如何是第一句오 師云 三要印開朱點窄[側]하고 未容擬議主賓分이로다 問, 如何是第二句오 師云, 妙解豈容無著問이며 漚和爭負截流機리오 問, 如何是第三句오 師云, 看取棚頭弄傀儡하라 抽牽都來裏有人이로다

임제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삼요(三要)의 도장[印]을 찍었으나 붉은 글씨는 그 간격이 좁아서 숨어 있으니, 주객이 나누어지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이구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묘해[문수]가 어찌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방편 상 어찌 뛰어난 근기[무착]를 저버릴 수 있으랴.”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삼구입니까?”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무대 위의 꼭두각시 조종하는 것을 잘 보아라.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이 모두 그 속에 사람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강의 ; 이 삼구법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구구하다. 우선 임제스님이 직접 말씀하신 삼구에 대한 설명을 잘 이해하면 구구한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제일구(第一句)[제일의 소식, 제일의 도리]는, 여기에 삼요라는 도장[제대로 갖춘 진리의 도장. 제법실상의 도장]이 하나 있다. 그 도장을 찍었을 때 아직 찍은 도장이 종이에서 떨어지기 직전이라 붉은 글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주관에 해당되는 도장과 객관에 해당되는 붉은 글씨가 아직 나눠지기 전이다. “주객이 나눠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그 뜻이다.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기 이전 소식이다. 음양이전의 태극이나 무극의 경지라고 보면 쉽다. 그러나 무극이나 태극 송에는 이미 음과 양이 잠재되어 있다. 주객이 나눠지기 전에도 주객은 이미 잠재되어 있기는 하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一念不生]의 소식이다. 무생(無生)의 경지다. 마치 도장을 허공에다 찍은 것과 같다 라고도 표현한다. 한 순간도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본래 그대로 여여한 자리다. 부처니, 보살이니, 조사니, 성인이니, 범부니, 중생이니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소리가 아이들의 동화처럼 들리는 경지다. 그래서 제일구의 소식을 알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된다고도 했다. 또 조사선(祖師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제이구(第二句)[제이의 소식, 제이의 도리]는, 무착선사가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장안에서 오대산까지 일보 일배(一步一拜)를 하면서 정성을 다해 갔다. 오대산 입구에서 한 거지노인의 모습을 한 문수보살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이 벽암록 35칙에도 보인다. 이러한 이야기의 사실여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불교에는 거의가 뜻을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알면 그뿐이다.


문수가 무착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남방에서 옵니다.” 
“남방의 불교는 어떤가?” 
“말세의 비구들이 계율이나 조금 지키며 삽니다.” 
“대중들은 얼마나 되는가?” 
“혹 3백 명, 혹 5백 명씩 모여 삽니다.” 
이번에는 무착이 문수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불교가 어떻습니까?”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뒤섞여 있느니라.” 
“대중들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니라.” 
문수보살이 무착의 그와 같이 답지 못한 질문을 받고 방편으로 일일이 대화를 받아 준 것은 무착선사 같은 그 정성스런 근기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객이 나눠지긴 했으나 그렇게 흔적이 오래 남진 않았다. 제이구의 경지를 “물에다 도장을 찍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찍을 때는 찍히는 것이 있으나 도장을 떼면 흔적이 없다. 허공에다 찍은 것과 비교해보라. 또 제이구의 소식을 알면 세상 사람들의 스승이 된다고 했다. 여래선(如來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제삼구(第三句)[제삼의 소식, 제삼의 도리]는, 꼭두각시나 인형을 움직일 때 잘 보면 모두가 무대 뒤에서 사람이 조종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인형으로 된 그 사람은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다. 허수아비다. 사상(事相)과 경계와 사항들에 끌려 다니는 삶이다. 불교라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수처작주, 즉 환경이나 대상이나 경계에 끌려 다니지 말고 어디서나 주제자로 있으라는 가르침이 절실히 요구되는 경지다. 마치 도장을 진흙에다 찍은 것과 같다. 걸음걸음이 상(相) 투성이요. 흔적 투성이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은 것과 물에다 찍은 것과 함께 비교해 보라. 제삼구의 뜻은 알아봐야 자기 자신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의리선(義理禪)의 경지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삼구를 경절문(徑截門)과 원돈문(圓頓門)과 염불문에 비교해 보아도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삼구, 이구, 일구의 차원과는 멀리 벗어난 향상일구(向上一句)가 있다. 무엇이 향상일구인가? “할!”

임제록 35


9-2 삼현삼요(三玄三要)

 


師又云, 一句語에 須具三玄門이요 一玄門에 須具三要니 有權有用이라 汝等諸人은 作麽生會오 下座하다
임제스님이 또 말씀 하셨다. 
“한 구절의 말에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고, 일현문에 반드시 삼요가 갖춰져 있어서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시고는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강의 ; 진실한 자리에는 본래로 먼지 하나 두지 않는다. 그래서 공공적적하다. 이론이나 문자를 세우지도 않는다. 닦고 깨닫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근기를 섭수하고 교화불사를 일으키는 마당에는 한 가지 법도 버리는 일이 없다. 그래서 좀 어수선 하다. 이해하고 참아야 한다.


임제스님은 삼현삼요에 대해서 위의 말씀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구구한 설명이 따라다닌다. 우선 “한마디 말에는 반드시 삼현문이 갖추어져 있다.”라고 했는데 그 삼현이란 현중현(玄中玄)과 구중현(句中玄)과 체중현(體中玄)이다. 현중현은 말의 그 자체로서의 진실이다. 구중현은 말의 인식 위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체중현은 말의 실천 속에 나타나는 진실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경우가 한 마디의 말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 이러한 설명도 가능하다. 한마디 말에 공관(空觀)의 입장과 가관(假觀)의 입장과 중도관(中道觀)의 입장이 있다. 진제(眞諦), 속제(俗諦),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도 있을 수 있다. 한마디 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이 다 가능하다.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세 가지로 현묘하고 유현하게 볼 수 있다. 특히 사람을 만났을 때 또는 제자들을 훈도할 때 말의 활용을 나타낸 것이다. 법문의 깊고 얕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현문(一玄門)에 반드시 삼요(三要)가 갖춰져 있다는 삼요란 세 가지 중요한 것, 세 가지 요점, 즉 본질[體)과 현상[相]과 그 작용[用]이다. 이 본질과 현상과 작용이란 무슨 물건 어떤 말에도 다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을 제접할 때 근기의 활용을 나타낸 것이다. 법문의 얕고 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구 중에 삼현문이 있고, 일구 중에 구요(九要)가 갖추어져 있다.


다시 모르는 말 한마디 더한다. 제 일구를 운문종(雲門宗)으로 치면 다종다양한 부류의 근기들을 단칼에 다 잘라 버린다. 조동종(曹洞宗)으로 치면 바른 위치다. 그리고 소탕이다. 제 이구는 운문종으로 치면 하늘과 땅을 다 덮어 버린다. 조동종으로 치면 치우친 지위다. 그리고 건립이다. 제 삼구는 운문종으로 치면 파도를 따르고 물결을 쫒아 간다. 조동종으로 치면 모든 것을 함께한 가운데 이른 것이다.

 
임제록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삼구와 삼현과 삼요다. 하지만 순전히 엉터리다. 그렇다면 엉터리가 아닌 강설은 무엇인가. 이제 여러 분도 다 아는 “할”이다. “할”을 하는 나다. 활발발한 무위진인이다. 오로지 이 사실만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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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있는 옛노래모음


1.비나리는 항구 - 방태원
2.여인우정 - 백설희,이미자
3.휘파람 - 고복수
4.물새우는 강언덕 - 백설희
5.청춘 부라보 - 도미

6.순애 -박재란,이양일
7.경상도 아가씨 - 박재홍
8.비나리는 호남선 -백설희,이미자
9.내사랑 니나 -현인
10.울어라 열풍아 -이미자

11.바보처럼 울었다 - 진송남
12.아네모네 탄식 - 송민도
13.아들의 심판 - 최무룡
14.눈물의 압록강 - 최숙자
15.내몸에 손대지 마라 - 배호

16.황포돛대 - 이미자
17.죄많은 인생 - 고태원
18.여인 애가 - 장세정, 백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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