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61~65

2020. 2. 1. 17: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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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61


14-3 대장부라야 된다

 


道流야 儞若欲得如法하면 直須是大丈夫兒라사 始得다 若萎萎隨隨地하면 則不得也니라 夫如시[斯瓦]嗄之器는 不堪貯醍醐니 如大器者는 直要不受人惑이라 隨處作主하야 立處皆眞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여법(如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장부라야 비로소 할 수 있다. 만약 시들시들하고 나약하게 흐느적거려서는 안 된다. 깨어진 그릇에는 제호(醍醐)같은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그릇이라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고 어딜 가나 주인이 되어 그가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다운 삶이 된다.”



강의 ; 이 단락을 부연하면 이렇다.
불교의 문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진정한 불교인은 드물다. 불교공부를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아무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여법한 불교인이 되려면 먼저 세속적 명리(名利)를 초개같이 보아야 한다. 세상사 인생사가 모두 무상한 줄 알고 허망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아가서 있다 없다, 선이다 악이다. 라고 하는 편견에 떨어져서도 안된다. 그것은 모두 세속적 안목이다. 세속적 가치관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불교인이 아니다. 또 하나 결단력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나약하거나 비실비실해서는 불교를 제대로 체득할 수 없다. 조사스님들은 무쇠로 지어 만든 사람, 또는 쇠말뚝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런 저런 주장에 미혹되어서도 안된다. 명예와 이익과 칭찬에 좌우되어서도 안된다. 정직해야 한다. 의롭고 떳떳하게 행동해야 한다. 어디를 가나 당당한 주인이 되어 그가 선 자리가 그대로 참되고 진실한 삶이어야 한다. 더럽고 깨어진 그릇에는 좋은 음식을 담을 수가 없다. 빼어난 훌륭한 그릇이어야 한다. 그를 대장부라 한다. 불교의 문에 드나들면서 입으로 불교를 운위한다고 불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머리를 깎고 중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불교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세상에서 칭송받는 의인(義人)이나 영웅호걸보다도 더욱 빼어난 사람이 불교인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해야 할 공부는, 남에게 속지 말라. 불수인혹(不受人惑). 그리고 어디서든지 주인으로 살라. 수처작주(隨處作主). 그리하면 그대 선 곳이 모두가 참된 삶이리라.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但有來者어든 皆不得受니 儞一念疑하면 卽魔入心이라 如菩薩疑時에 生死魔得便이니라 但能息念이요 更莫外求하고 物來卽照하라


“다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모두 받아들이지 말라.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면 곧 마(魔)가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만약 보살이라도 의심을 내면 생사의 마군이가 그 틈을 얻게 된다. 다만 생각을 쉬기만 하면 된다. 다시 바깥으로 구하지 말라. 사람이 다가오면 오는 대로 곧 비춰보라.”

강의 ; 날아오는 공을 다 받을 필요는 없다. 걸려오는 전화를 다 받을 필요는 없다. 부탁하는 일이라고 다 할 것은 없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받아드릴 일은 아니다. 수많은 번뇌 중에서 의심하는 번뇌도 큰 번뇌에 속한다. 만약 그대들이 한 생각 의혹이 생기면 그 순간 마군이가 마음속에 자리하게 된다. 경전에도 보살이 의혹이 생기면 본래 생사가 없는 데서 곧 생사의 마군이가 그 틈을 엿보아 침입하게 된다고 했다. 자주 말씀하시는 불수인혹(不受人惑)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혹[속임]을 받아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한 생각 쉬어버려라. 한 생각 쉬어버리고 다시는 밖을 향해서 찾지 말라. 사람이 오거나, 사물을 대하거나, 일이 벌어지거나, 그냥 가만히 비취보라는 것이다.

儞但信現今用底하면 一箇事也無니라 儞一念心生三界하야 隨緣被境하야 分爲六塵하니 儞如今應用處가 欠少什麽오 一刹那間에 便入淨入穢하며 入彌勒樓閣하며 入三眼國土하야 處處游履하나 唯見空名이니라


“그대들이 지금 바로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런 일이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삼계를 만들어내고 인연을 따라 경계에 끄달려서 육진경계로 나누어진다. 그대들이 지금 응하여 쓰는 그곳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겠는가?
한 찰나 사이에 깨끗한 국토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국토에도 들어가며,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고 삼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가서 곳곳을 다니지만 오직 텅 빈 이름뿐이다.”


강의 ; 아마도 임제스님이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것이라 여겨진다. 지금 곧 사용하고 있는 것,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을 믿고 알면 아무런 일이 없다. 일생의 일을 끝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모든 것의 근본이며 모든 것이 그 사람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믿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공연히 그대들 한 생각이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는 그들의 경계에 이끌리면서 또다시 여섯 가지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그대들이 지금 모든 상황에 맞추어 활용하고 있는 그 사실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비가 오면 비가 오는 줄을 알고, 날씨가 개이면 개인 줄을 알고, 추우면 추운 줄을 알고, 더우면 더운 줄을 알고, 피곤하면 쉴 줄을 알고, 배고프면 밥을 찾아 먹을 줄을 알지 않는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팔만사천 신통묘용이며 무량대복이 아닌가?

 
이 사람은 한 찰나사이에 청정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고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미륵누각에도 들어가고 삼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간다. 이렇게 곳곳을 흘러 다니지만 그것들은 헛된 이름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 한 사람, 지금 목전에서 활발발하게 작용하는 그 한사람뿐이다. 다시 복습할 말이 있다. 이여금응용처 흠소십마(儞如今應用處 欠少什麽)


임제록 62


14-4 마음 밖에 법이 없다

 

問, 如何是三眼國土오 師云, 我共儞入淨妙國土中하야 著淸淨衣하고 說法身佛하며 又入無差別國土中하야 著無差別衣하고 說報身佛하며 又入解脫國土中하야 著光明衣하고 說化身佛하나니 此三眼國土는 皆是依變이니라 約經論家하면 取法身爲根本하고 報化二身爲用하나 山僧見處는 法身卽不解說法이라 所以로 古人云, 身依義立이요 土據體論이라하니 法性身法性土는 明知是建立之法이요 依通國土니 空拳黃葉으로 用誑小兒니라 蒺藜菱刺와 枯骨上에 覓什麽汁고 心外無法이요 內亦不可得이니 求什麽物고


“무엇이 삼안국토입니까?”
“나는 그대들과 함께 청정하고 미묘한 국토에 들어가 청정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설한다. 또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설한다. 또 해탈국토에 들어가 광명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설한다. 이 삼안국토란 모두가 무엇에 의지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교학자(敎學者)들은 법신을 근본으로 하고 보신과 화신을 그 작용이라 하지만 산승이 보기에는 법신도 설법을 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몸이란 의미에 입각하여 말하고 국토란 본체에 근거해서 논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법성신과 법성토는 건립되어진 법이고 무엇에 의지해야만 통하는 국토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빈주먹과 누런 잎사귀로 어린아이들을 속이는 것이다. 찔레가시와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을 찾겠는가?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마음 안에서도 얻을 바가 없는데 무엇을 찾겠는가?”


강의 ; 삼안국토를 임제스님은 법·보·화 삼신으로 해석하였다. 그 삼신은 모두 무엇에 의지하여 변화한 것이다. 그 삼신을 설명할 때는 삼신이 갖는 의미에 알맞은 모습을 나타내서 설한다고 하였다. 교리에서는 법신을 근본으로 보지만 임제스님은 법신마저 지엽으로 본다. 근본은 지금 이 순간 법을 듣는 그 사람이다. 그 사람 그 마음에 의지해서 나타난 것들이다. 그래서 법신도 보신도 화신도 모두 법문을 들을 줄을 모른다고 했다.

 
몸을 이야기 하면 그 몸이 의지하는 국토가 따라서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몸이니 국토니 하는 것은 모두가 조작으로 건립되어진 것이고 무엇엔가 의지해야만 성립되는 존재들이다. 다 가짜다.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빈주먹을 보이고 주먹 안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속인다. 또 단풍이 든 나뭇잎으로 돈이라고 속인다. 그것들이 무슨 진실이 있겠는가. 교학에서 아무리 높고 높은 경지를 말한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다 도무지 실다운 것이 없는 가짜들이다. 죽은 말들이다. 전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바짝 마른 찔레가시와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이 나오겠는가.” 라는 상당히 혹독한 표현을 하여 우리들을 경각시킨다. 대단히 강한 처방으로 병을 다스린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말이다. 여기서 눈을 뜨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 가서 눈을 뜨랴.

 
마음밖에 법이 없다. 마음 안에도 얻을 것이 없다. 어디서 무엇을 찾겠는가. 마음은 공적(空寂)한 것으로 그 체를 삼는다. 어찌 보면 허허롭지만 한편 너무도 시원하다.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틀린다.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또한 틀린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면서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있고 없음의 양변(兩邊, 偏見)을 초월해야 조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대 무슨 법신이니 보신이니 화신이니 하는가? 모두가 일심에서 버러진 것이다. 심외무법 내역불가득(心外無法 內亦不可得)이다.

임제록 63


14-5 수행이란 업을 짓는 일이다

 


儞諸方言道호대 有修有證이라하니 莫錯하라 設有修得者라도 皆是生死業이며 儞言六度萬行齊修라하나 我見皆是造業이니라 求佛求法은 卽是造地獄業이라 求菩薩亦是造業이요 看經看敎도 亦是造業이니 佛與祖師는 是無事人이라 所以有漏有爲와 無漏無爲가 爲淸淨業이니라

 
“그대들이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말하는데 착각하지 말아라. 설령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보기에는 모두 업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거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일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조사에게는 억지가 있고 조작이 있는 유루유위(有漏有爲)와 조작 없이 저절로 그러한 무루무위(無漏無爲)가 다 청정한 업이 된다.”

강의 ; 불교역사에서 임제스님 등 몇몇만 빼고는 모두 수행을 강조한다. 열심히 닦아야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별의 별 수행을 다 권한다. 참선, 염불, 간경, 주문, 육바라밀, 몸을 불사르고 절을 하는 등등이다. 그러나 임제스님은 위와 같이 수행해서 깨닫는 다는 것은 잘못알고 있다고 한다. 수행이 전혀 필요 없는 일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설사 수행을 해서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 될 뿐이다. 생사해탈을 위한 수행이 도리어 생사 속으로 빠져드는 길이란다.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 일도 다 업을 짓은 일이다.

 
불교는 성불이 목적이라고 하는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일이 모두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라고 한다. 구하는 그 사람이 곧 부처인데 그 사람을 버리고 따로 구하니 지옥 업이 될 수밖에 없다. 보살이 되기 위한 일도 경을 보거나 법문을 듣는 일도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란다. 영가스님도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덕을 베푸는 것은 부처될 기약이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본래로 닦아 깨닫는 부처란 없다[無修證佛]. 닦아서 점차적으로 되는 부처도 없다[無漸次佛]. 사다리 타듯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서 히말라야산에라도 올라가자는 것인가.


위와 같은 가르침과 주장이 불교의 수많은 다른 가르침이나 주장보다 우선하기에 우리나라의 유수한 큰 스님들이 모두 임제스님의 법을 이었노라고 자랑한다. 위와 같은 임제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지 않으면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사상이 불교의 바른 사상이다. 진짜 불교다.
그렇다면 부처란 무엇인가? 일없는 사람이다. 일없는 사람이 부처인데 무슨 업을 그리 많이 짓는가. 일이 없는 사람인 줄 알고 나면 그때에 가서는 조작이 있는 짓이나 조작이 없는 짓이나 모두가 업이라 할 것도 없는 청정한 업이 된다. 텅 빈[청정한] 업이 된다. 양변을 떠나 있으니 유나 무나, 선이나 악이나, 생이나 멸이나 어디에 있어도 그는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다. 변견에 있어도 변견이 아니고, 편견에 있어도 편견이 아니다. 양변을 떠났으되 양변에 다 조화를 이루며 산다. 그래서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일뿐이다.
구불구법 즉시조지옥업(求佛求法 卽是造地獄業). 촌철살인의 말씀이다. 깊이깊이 사유하라.

有一般瞎禿子하야 飽喫飯了하고 便坐禪觀行호대 把捉念漏하야 不令放起하며 厭喧求靜하나니 是外道法이니라 祖師云, 儞若住心看靜하며 擧心外照하고 攝心內澄하며 凝心入定하면 如是之流는 皆是造作이라하니라


“어떤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 밥을 배불리 먹고 나서 곧 좌선하거나 관법을 하되 생각이 새어나가는 것을 꽉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 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찾는데 이것은 다 외도의 법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조작이다.’라고 하셨다.”

강의 ; 좌선을 하고 관법을 수행하는 스님들을 비하해서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꾸준히 새어나가는 것을 붙잡아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또는 시끄러운 것을 매우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편견에 떨어져 있다. 그래서 좌선하는 사람들은 선방 부근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거나 일을 하는 소리가 들리면 기겁을 한다.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낸다. 또한 생각을 가라앉히거나 한 곳에 집중하거나 숨을 쉬는 것에 예의주시하거나 자신의 하나하나의 행위를 관찰하고 주시하는 따위의 수행을 하는 자도 있다. 이런 것은 불교가 아닌 외도(外道)의 법이라고 매도한다. 불교에서 가장 심한 욕이 불자를 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제스님은 그와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조사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그따위 공부는 모두 조작이며 가짜라고 한다.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히 하는 것이 공부라면 일상생활에서 피치 못할 일, 즉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보고 하는 일을 할 때는 공부가 아니지 않은가. 또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춰보거나,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는 것이 공부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또 무엇이라고 하는가. 또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선정에 드는 것이 공부라면 선정에 들지 않고 옷을 입거나 목욕을 하거나 할 때는 역시 공부가 아닌 것이다. 공부가 그렇게 간단이 있고 틈이 있으면 그것을 어찌 출세간의 공부라 할 것인가. 도가(道家)에서도 “도란 한 순간도 떠나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한 순간이라도 떠나 있으면 도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도교의 도도 이렇거늘 하물며 불교의 법이겠는가.


공부의 바른 길을 이렇게 확실하고도 명확하게 밝혔다. 최상의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길을 잘 못 든 사람이 비일비재하다. 천 원짜리 물건을 하나 사면서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살피면서 인생을 걸고 도를 닦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살피고 또 살피며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할 일이다.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가짜인지를 잘 가려야 한다. 그래서 정법(正法)을 찾아야 한다. 여시지류 개시조작(如是之流 皆是造作). 조작이 아닌 것이 불교다.

是儞如今與麽聽法底人을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리오 渠且不是修底物이며 不是莊嚴得底物이니라 若敎他莊嚴하면 一切物을 卽莊嚴得이니 儞且莫錯하라


“그대들은 지금 이렇게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어떻게 그를 닦고, 어떻게 그를 증득하며, 어떻게 그를 장엄하려 하는가? 그것은 닦을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만약 그것을 장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못 알지 말아라.”

강의 ; 이 사람은 본래로 완전무결하여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이라 달리 어디서 가져올 일이 아니다. 너무나 잘 생겨서 더 이상 장엄하거나 꾸밀 것이 아니다. 꾸미거나 화장을 하면 오히려 더 추하게 만든다. 닦거나 꾸미거나 장엄을 하면 마치 머리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아서 멀쩡한 사람을 요귀를 만드는 격이 된다. 그 사람은 닦고 꾸미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일이 붙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보고 듣고 하는 일이란 그저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은 도리이다.


만약 그 사람을 장엄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장엄할 수 있으리라. “꽃은 화사하게 피어 있고 새는 아름답게 지저귄다.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각각 완연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사람사람이 본래로 구족하였고 개개가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데 달리 무슨 장엄이 필요하겠는가. 또 저 산하대지를 어떻게 장엄하려고 하는가. 제발 그르치지 말라.

임제록 64


14-6 사자후 일성에 뇌가 찢어진다

 


道流야 儞取這一般老師口裏語하야 爲是眞道하야 是善知識은 不思議요 我是凡夫心이니 不敢測度他老宿이라하나니 瞎屢生이여 儞一生을 祇作這箇見解하야 辜負這一雙眼하니 冷噤噤地가 如凍凌上驢駒相似로다 我不敢毁善知識이라 怕生口業이라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노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것이 참된 도라고 여긴다. 이러한 선지식은 불가사의하다고 하면서 ‘나는 범부의 마음이니 감히 그 노스님의 뜻을 헤아려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사람아! 그대들의 일생을 이러한 견해에 사로잡혀 멀쩡한 두 눈을 막아버리고 산다. 추워서 벌벌 떠는 모습이 마치 빙판 위를 걸어가는 당나귀의 새끼 같구나.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감히 선지식을 비방하지 못한다. 입으로 짓는 업이 두렵다.’고하니라.”

강의 ; 일반 불자들은 스님의 모습을 하고 있기만 하면 젊든 늙든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물며 주지스님, 노스님, 큰스님이라고 하면 거의 맹목적으로 그들의 말을 믿는다. 좀 알려진 큰스님이라면 그를 믿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다. 특별한 차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맹신한다. 그래서 그의 말은 어떤 말이든지 다 옳다고 생각하고 전전긍긍하면서 감히 비판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치 한 사람의 맹인이 많은 맹인들을 이끌고 위험한 길을 가는 격이다. ‘악지식(惡知識)을 비판하고 꾸짖을 수 있어야 비로소 불조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확실한 소신을 가진 이라면 정법을 위해서 큰스님도 비판하고 도인도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위하는 길이다.

道流야 夫大善知識이 始敢毁佛毁祖하며 是非天下하며 排斥三藏敎하며 罵辱諸小兒하야 向逆順中覓人하나니 所以我於十二年中은 求一箇業性을 如芥子許도 不可得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를 비방할 수 있고 천하의 선지식들을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율·논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어린애 같은 모든 무리들을 꾸짖을 수 있다. 거슬리고 순종하는 경계 속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12년 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는데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강의 ; 진짜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님을 훼방하고 조사님을 훼방할 수 있다. 천하 선지식들의 법을 시비할 수 있다. 또 부처님이 설한 경과 율과 논을 그르다고 배척하고 비판할 수 있다. 역행(逆行)이나 순행(順行)을 자유롭게 저지르면서 그 가운데서 좀 사람다운 사람을 찾는다. 따뜻한 자비의 손길로 어루만지기도 하고 매섭게 꾸짖기도 하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모두가 학인들의 눈을 열어주기 위함이다. 솟을 아홉 번이나 걸게 했다는 구정(九鼎)조사도 있었다.

 
부처와 조사를 훼방하고 삼장을 배척하면 일반적으로는 큰 죄업을 짓는다고 한다. 당연하다. 어찌 함부로 부처님을 훼방하랴. 큰 죄업을 짓는 일이다. 하지만 임제스님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오랜 세월동안[12년] 업의 성품을 아무리 찾아야 찾을 길 없었다.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마음이 텅 빈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천수경에도 “죄업이란 자성이 없다. 다만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마음을 비우면 조업도 없다.”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늘 그와 같은 경지에 있기 때문에 죄업이란 있을 수 없다. 일체 업성(業性)이 공(空)인 자리에서 생활한다. 한없이 당당하다. 하늘을 찌를 기상과 자존심이 있다. 수천만 불조(佛祖)가 한꺼번에 와서 질문을 하고 법을 거량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비바시불(毗婆尸佛)의 게송이 좋아서 소개한다.
“몸이란 형상이 없는 곳으로부터 태어났다.
마치 요술쟁이가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든 것과 같다.
요술쟁이가 만든 사람은 본래 마음이 없으며
죄도 복도 모두 공하여 머무는 곳이 없다.”
[身從無相中受生 猶如幻出諸形象 幻人心識本來無 罪福皆空無所住]


若似新婦子禪師하면 便卽怕趁出院하야 不與飯喫하야 不安不樂이어니와 自古先輩가 到處人不信하고 被趁出하야 始知是貴하나니 若到處人盡肯하면 堪作什麽오 所以師子一吼에 野干腦裂이니라


“만약 새색시 같은 선사라면 절에서 쫓겨나서 밥을 얻어먹지 못할까 두렵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뛰어난 선배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아 쫓겨났다. 그리고 나중에야 비로소 귀한 사람인줄 알았다.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면, 이런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 번의 사자후에 여우의 머리통이 찢어지는 것이다.”

강의 ; 새색시 같이 이제 막 조실이 된 선사가 있다. 새색시는 남편의 눈치도 시어머니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시어머니 같은 대중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혹시라도 말을 잘못했다가는 선원에서 축출당한다. 밥을 굶을지 몰라 불안하기 이를데 없다. 그렇게 되면 개망신이다. 그래서 새색시 같은 선사라 한다. 대개가 그와 같은 선지식들이다. 소신도 없지만 그나마 대중들에게 아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옛 선배들 중에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고 선원에서 축출을 당한 예가 있다. 대중들도 축출한 뒤에 그가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달마대사가 그 좋은 예다. 그가 만약 양나라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그의 성가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만약 훌륭한 선지식을 가는 곳마다 알아준다면 그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사한 예로 오늘날의 불교도 정법(正法)을 거론 하는 데는 파리를 날린다. 하지만 삿된 가르침이나 불교가 아닌 행사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진정으로 정법에 소신을 가지고 법을 펴는 사람들은 매우 외롭다. 하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섭섭해 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의인군자가 아닌가.


임제스님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할 말은 당당하게 한다. 그래서 임제가풍을 청천벽력이라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기상천외의 사자후 일성에 자질구레한 불교 상식으로 재산을 삼고 있는 사람들은 뇌가 찢어지거나 기절하고 만다. 지금까지의 법문이 기존의 불교 상식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말씀들이 많았다. 아마도 뇌가 찢어지거나 기절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혀를 내 둘렀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책을 던져버렸을 것이다.

 
최상의 근기는 최상승법을 들으면 기쁜 마음으로 곧바로 받아드린다. 중간 근기는 과연 그러한가 아닌가 하고 망설인다. 그러나 소인배 하근기는 비웃어 버린다. 소인배 하근기가 비웃지 않으면 족히 최상의 도가 되지 못한다. 사자일후 야간뇌열(師子一吼 野干腦裂). 사유해 볼만한 구절이다.


임제록 65


14-7 평상심이 도다

 


道流야 諸方說有道可修하며 有法可證하나니 儞說證何法修何道오 儞今用處欠少什麽物이며 修補何處오 後生小阿師不會하야 便卽信這般野狐精魅하야 許他說事하야 繫縛他人言道호대 理行相應하고 護惜三業하야사 始得成佛이라하니 如此說者는 如春細雨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제방의 선지식들이 말하기를 도를 닦을 것이 있고 법을 깨칠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치며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으며, 어떤 점을 닦고 보완한다는 것인가? 못난 후학들이 잘 모르고 이들 여우와 도깨비들을 믿어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어 말하기를 ‘이치와 행이 서로 부합하고 삼업(三業)을 잘 보호하고 지켜야만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강의 ; 천번만번 말하지만 제방의 선지식들은 모두들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 한다. 요즘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이 이처럼 발달하고 불교도 이제 알 수 있을 만치 알건만 그래도 한결 같이 닦을 것이 있고 증득할 것이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곳곳에서 닦는 다고들 야단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닦아서 얻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본래로 완전한 것을 다시 닦은들 무엇이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부처가 무슨 조각 작품도 아니고 한 점 한 점 그려가는 그림도 아니다. 과거의 수많은 부처님과 조사들을 살펴보라 무엇이 달라진 것이 있는가. 본래 그 사람이다.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존재다. 그것은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갖춘 것이고 개개인이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잘 보고 잘 듣고 잘 느끼고 잘 아는 이것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통묘용이고 무량대복인 것을. 방거사도 말하지 않았던가. 신통묘용이 물을 길어오고 땔 나무를 해오는 일이라고. 이치와 행이 잘 부합하고 삼업을 잘 보호하여야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이치와 행이 잘 부합하고 삼업을 잘 보호하여 불에 타지 않던가. 물에 빠지지 않던가. 그것을 부처라고 하는가. 천번만번 외쳐도 더 외쳐야할 말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이금용처 흠소십마(儞今用處 欠少什麽). 너무 좋은 말이다. 길어서 어려우면 ‘흠소십마’만 외우라.

古人云, 路逢達道人이어든 第一莫向道하라하니라 所以言, 若人修道道不行이니 萬般邪境競頭生이라 智劍出來無一物하야 明頭未顯暗頭明이로다 所以로 古人云, 平常心是道라하니라


“옛 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를 아는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도에 대해서 말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누구라도 도를 닦으면 도는 행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수만 가지의 삿된 경계들이 다투어 생겨난다. 지혜의 칼을 뽑아들면 아무 것도 없다. 밝은 것이 나타나기 전에 어두운 것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다’라고 한 것이다.”

강의 ; 이 단락에는 아주 중요한 옛 사람의 말을 셋을 인용하고 있다.
먼저 도를 아는 사란을 만나거든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도란 본래 언급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제스님은 상당 첫 법문에서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 바로 입을 열수가 없다. 또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라고 하였다. 입을 열기 전에 이미 틀려버린다. 그러니 부디 세상이 돌아가는 얘기나 할지언정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또 이런 말도 인용하였다. 도를 닦는다면 도는 행해지지 않고 온갖 삿된 경계가 다투어 일어난다. 천 번 만 번 강조 하지만 도는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로 비춰보면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고 중생도 범부도 아무 것도 없다. 번뇌무명이 곧 불성이고 허망한 이 육신이 곧 여래 법신이기 때문이다. 달리 어두운 것을 보내고 나서 밝은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둘이 아니다. 하나다. 한번 시험해보라. 어두운 방에 문을 꼭꼭 닫고 전기 스위치를 올려서 불을 밝혀보라. 어두운 것이 그대로 밝은 것이다. 어두운 것이 어디로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나갈 틈도 시간도 없다. 그런데 곧 바로 밝아진다. 전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어두운 그대로가 밝은 것이다.

 
그래서 또 인용하시기를 굳이 도를 말한다면,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다. 천고의 명언이다. 달리 무엇을 논할 것인가. 무엇을 닦고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여기에서 치구심(馳求心)을 쉬어야 한다. 부처는 불상을 조각하듯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평상의 그 마음 그대로 도다. 즉심시불(卽心是佛). 현재 이 마음 이대로 부처다. 불교는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고 쉽다.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만고의 명언이다. 이 한마디만 알면 불교공부 끝이다. 서툰 글씨라도 하나 써서 걸어두자.


      * 캬바레뽕짝18곡* 01. 청춘을 돌려다오 02. 애정이 꽃피던시절 03. 추억의용두산 04. 내영혼의 히로 05. 방랑시인김삿갓 06. 내인생의마지막여인 07. 앉으나서나당신생각 08. 이대로돌이되어 09. 비내리는강변도로 10. 흰구름가는길 11. 남자인데 12. 추억의 소야곡 13. 월악산 14. 철수야 잘있거라 15. 못잊을건정 16. 돌지않는풍차 17. 추억의테헤란로 18. 사랑은장난이아니랍니다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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