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8. 11:3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임제록 66
14-8 그 마음 그대로 살아있는 할아버지다
大德아 覓什麽物고 現今目前聽法無依道人이 歷歷地分明하야 未曾欠少하니 儞若欲得與祖佛不別인댄 但如是見이요 不用疑誤니라 儞心心不異를 名之活祖니 心若有異하면 則性相別이요 心不異故로 卽性與相不別이니라
“대덕아! 무엇을 찾느냐?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그 사람,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무의도인(無依道人)은 너무도 분명하고 결코 부족한 것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할아버지 부처님[祖佛]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다만 이와 같이 보면 된다. 의심하여 그릇치지 말라. 그대들의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이름하여 살아있는 할아버지[活祖]라 한다. 마음이 만약 다르면 성품과 형상이 다르게 되지만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성품과 형상이 다르지 않다”
강의 ; 완벽한 자신을 두고 더 이상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지금 눈앞에서 법문하는 것을 듣는, 아무 것에도 의지함이 없는 그 사람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렇게 말을 하고 글을 쓴다. 참으로 명명백백하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없다. 조금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 여러분들이 만약 부처나 조사가 되고 싶다면 이 사람을 부처나 조사로 알아라. 언제나 한결 같은 그 마음이 곧 살아있는 할아버지, 즉 조사다.
달라지지 아니하고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이란 마음의 공적한 자리다. 하루 종일 써도 쓴 흔적이 없는 그 자리다. 화도 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고,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지만, 그 나온 자리는 언제나 텅 비어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두 그 자리다. 성공도 실패도, 영광도 오욕도 모두 그 자리다. 마치 물이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얼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고 맑기도 하지만, 젖는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것과 같다. 알고 보면 본래 다르지 않다.
신심명(信心銘)에도 “마음이 만약 달라지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다.”고 하였지만 알고 보면 본래로 다르지 않다. 성품과 형상을 달리보지만 실은 같은 것이다. 체가 곧 용이고 용이 곧 체다. 몸이 몸짓을 하기 때문에 몸과 몸짓은 둘이 아니다. 몸은 체고 몸짓은 작용이다. 편의상 몸과 몸짓을 나누어 말하고, 물과 물결을 나누어 말하고, 체와 용을 나누어 말하고, 성과 상을 나누어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공부는 심심불이 명지활조(心心不異 名之活祖)다.
임제록 67
14-9 구하는 것이 있으면 괴롭다
問, 如何是心心不異處오 師云, 儞擬問早異了也니 性相各分이로다 道流야 莫錯하라 世出世諸法이 皆無自性하며 亦無生性하고 但有空名하야 名字亦空이어늘 儞祇麽認他閑名爲實하니 大錯了也로다 設有皆是依變之境이라 有箇菩提依와 涅槃依와 解脫依와 三身依와 境智依와 菩薩依와 佛依니라
“무엇이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는 경계입니까?”
“그대들이 물으려 하는 순간 벌써 달라져 버린 것이니 성품과 형상이 각각으로 나누어졌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아라.
세간이나 출세간의 모든 법은 다 자성이 없으며, 또한 생멸의 성품도 없다. 그저 허망한 이름뿐이며 그 이름을 쓴 글자도 또한 텅 빈 것이다. 그대들은 이처럼 그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매우 잘못 된 것이다.
설사 그러한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의지해서 변화한 경계들이다. 이른바 보리의 의지와 열반의 의지와 해탈의 의지와 세 가지 불신의 의지와 경계와 지혜의 의지와 보살의 의지와 부처의 의지 등이다.”
강의 ; 앞의 단락에서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한 것을 살아있는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은 것인가? 이렇게 묻고자 할 때 이미 달라져 버렸다. 성품과 형상도 이미 나누어 졌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소식이다. 한 생각 일어나면 벌써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고 삼라만상이 벌어진 것이다. 잘 살펴야 한다. 착각하기 쉬운 대목이다.
세간이나 출세간의 법이 다 허망하다. 실로 제행이 무상하다. 모든 것이 생기고는 없어지고 없어지고는 다시 생기는 인연에 의한 연기의 작용이다. 연기는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또한 연기한다. 모든 존재는 이 원리대로 존재한다. 우주만유가 이 원칙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헛된 이름뿐이다. 이름이라는 글자조차 텅 비어 없다.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아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부처나 중생이나, 성인이나 범부나, 생로병사나 상락아정(常樂我淨)이나,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모두 공이요 연기다. 독립된 자성으로서의 실체가 없다. 그래서 이 존재의 원리인 “오온이 모두 공한 줄 알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이다.” 라고 밤낮 외우고 있다. 고통으로 인하여 숨이 끊어지고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지고, 이어졌다가는 다시 끊어지고 하는 이와 같은 아픔도 모두가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설사 경전에서 말한 이런 저런 것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들은 다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변화된 가상의 경계들이다. 보리니 열반이니 해탈이니, 법신 보신 화신이니, 경계니 지혜니, 보살이니 부처니 하는 이름들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답고 성스럽고 위대한가. 그 훌륭하고 성스럽고 위대한 이름들은 모두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변화한 헛된 가상의 경계요 이름뿐이다.
보리·열반·해탈·법신·보신·화신·경계·지혜·보살·부처 등등의 주옥같은 이름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이름들, 이런 것들을 가상이요, 허상이요, 이름뿐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중하다. 그동안 믿고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실은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다. 믿고 싶지가 않다. 그동안 공을 드린 것이 너무도 아깝다[前功可惜]. 그렇다고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릴 수[擔麻棄金]도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 가르침이 진짜 불교며 우리 한국불교의 전통인 것을. 이 가르침이 정통 불교인 것을. 역대 조사들이 이런 가르침에 매혹되어 임제스님을 꿈에도 못 잊는다. 모두가 임제스님의 법을 계승했노라고 자랑들이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나라의 큰스님들은 임제스님의 흉내를 내느라고 남의 상가 집에 가서도 “할”을 하지 않는가. 죽어서도 다시 임제스님의 문중에서 그 가풍을 따르리라고 축원하지 않는가.
儞向依變國土中하야 覓什麽物고 乃至三乘十二分敎는 皆是拭不淨故紙며 佛是幻化身이요 祖是老比丘니 儞還是娘生已否아 儞若求佛하면 卽被佛魔攝이요 儞若求祖하면 卽被祖魔縛이니 儞若有求皆苦라 不如無事로다
“그대들은 의지하여 변한 국토에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 삼승 십이분교마저도 모두가 똥을 닦아낸 휴지다. 부처란 허깨비로 나타난 몸이며, 조사란 늙은 비구인데 그대들은 어머니가 낳아 주신 진짜의 몸이 있지 않는가.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하면 부처라는 마군(魔群)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군에게 묶이게 된다. 그대들은 만약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 아무런 일 없느니만 못하니라.”
강의 ; 임제스님의 말씀은 점입가경을 넘어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곳까지 왔다. 막보자는 막말이다. 정말 마지막 말이다. 어찌 이렇게 까지 표현 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진짜가 아닌 가짜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무엇을 찾으려는가. 보리·열반·해탈·법신·보신·화신·경계·지혜·보살·부처 등등은 말할 것도 없고 부처님의 살림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생의 가르침인 삼승 십이분교는 모두 똥을 닦는 휴지다. 임제록도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은 허깨비고 조사란 늙은 비구다. 그런데 그대들에게는 어머니가 낳아준 진짜가 있지 않은가. 그것을 두고 다시 무엇을 찾는가. 여기서 할 말은 다 했다. 이 몸 당체가 곧 살아있는 부처요 조사다. 아무리 찾아봐야 그 이상은 없다. 여러분들이 허망하다고 말하는 이 육신, 즉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여래법신이다. 만약 그대들이 그것을 두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라는 마군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군에게 묶이게 된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다 괴롭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유구개고 불여무사(有求皆苦 不如無事)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근기 소인들은 임제록에서 이 한 마디만 건져도 훌륭하다. 평생의 양식은 된다. 공연히 창업한다고 퇴직금 날리고 전세금까지 날리지 말라. 집에서 청소하면서 마음 청소도 하고 빨래하면서 마음 빨래만 해도 크게 버는 일이다. 즐거움이란 구하지 않는 즐거움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본래 더 구할 것이 없다 다 갖추어져 있다. 억만 장자다. 세세생생 써도 다 못쓴다. 더 이상 무엇을 구하는가.
임제록 68
14-10 형상 없는 것이 참 형상이다
有一般禿比丘하야 向學人道호대 佛是究竟이니 於三大阿僧祇劫에 修行果滿하야 方始成道라하니 道流야 儞若道佛是究竟인댄 緣什麽하야 八十年後에 向拘尸羅城雙林樹間하야 側臥而死去며 佛今何在오 明知 與我生死不別이니라 儞言, 三十二相八十種好是佛이라하니 轉輪聖王도 應是如來라 明知是幻化로다
“어떤 머리 깎은 비구가 있어서 학인들을 향해 말하기를, ‘부처님은 최고 궁극적인 경지이니 삼대 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그 결과가 다 채워져서 비로소 도를 이룬 것이다.’라고 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최고 궁극적인 경지라 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80년 후에 쿠시나가라 성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옆으로 누워 돌아가셨는가? 그리고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들의 생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라. 그대들은 32상과 80종호가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류성왕도 마땅히 여래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환영이고 허깨비임을 분명히 알리라.”
강의 ; 머리 깍은 중들만 부처님을 최고 궁극의 경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자들은 다 그렇게 생각한다. 스스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수행을 한 뒤 불과(佛果)가 원만하고 나서 비로소 성도(成道)를 하였다고 여긴다. 이야기가 더해지고 또 더해지고 해서 별의별 방편의 말이 다 생겨낫다.
실제로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 사람이 있을 뿐이다. 참으로 혼자만 최고 궁극의 경지에 있다면 왜 우리들과 같이 80세에 돌아가셨는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가 뿔뿔이 다 흩어지지 않았는가. 평소에 잘 생긴 모습을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그런 모습은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잘 생긴 모습을 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이치는 이미 금강경에서 부처님 스스로도 밝힌바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여러 분들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그 부처님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 그냥 사람일뿐이다. 보고 듣고 하는 사람일뿐이다. 이 세상에 최고고 제일이고 가장 위대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일뿐이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어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 사람이 최고 궁극의 경지에 있다. 그래서 필자는 평생 인불사상(人佛思想)을 펼치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겨야 한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면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며 사는 길 외엔 다른 길은 없다.
古人云, 如來擧身相은 爲順世間情이라 恐人生斷見하야 權且立虛名이로다 假言三十二하고 八十也空聲이니 有身非覺體요 無相乃眞形이로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여래가 갖추신 몸의 모습은 세상의 인정을 따른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다는 단견을 갖게 될까봐 염려하시어 방편으로 세운 헛된 이름이다. 32상은 거짓 이름이고 80종호도 헛소리다. 몸이란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며, 형상 없음이 진실한 형상이다’라 하였다.”
강의 ; 임제스님은 앞에서는 금강경을 인용하였고, 여기서는 다시 고인(古人)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의 주장을 보완하고 있다. 부대사(傅大士)가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여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뜻을 따른 것이다. 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잠간 있으면 영원히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없으면 영원히 없는 것으로 착각한다. 있고 없는 양변에 잘 떨어지고 잘 집착하는 것이 중생들의 속성이다. 여래가 있고 없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선과 악에도 잘 집착한다. 자신만의 기준과 틀을 만들어 놓고 일체를 그 기준에 맞춰본다. 그런 편견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기고 순종하는 것을 살핀다. 자신도 어기거나 순종한다. 그래서 평생을 미워하고 애착하여 취하고 버리는 일로 인생을 삼는다. 병이다. 모두가 환자다. 중환자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부처님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몸은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다. 형상이 없는 것이 진실한 형상이다. 모든 형상에서 형상이 없음을 보아야 여래를 본다. 엑스레이 적 안목을 가져라. 세상만사 보기를 마치 홀로그램 보듯이 하라. 홀로그램에 나타난 영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 들고 있는 유리잔이 이미 깨어진 것이라고 보며 사용하라.
임제록 69
14-11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
儞道호대 佛有六通하야 是不可思議라하니 一切諸天과 神仙阿修羅와 大力鬼도 亦有神通하니 應是佛否아 道流莫錯하라 祇如阿修羅가 與天帝釋戰戰敗에 領八萬四千眷屬하고 入藕絲孔中藏하니 莫是聖否아 如山僧所擧는 皆是業通依通이니라
“그대들이 ‘부처님께서는 여섯 가지 신통이 있으시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하는데, 여러 천신들과 신선과 아수라와 힘센 귀신들도 역시 신통이 있다. 이들도 마땅히 부처님이겠구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아라. 아수라들이 제석천신들과 싸우다 지게 되면 팔만 사천의 권속들을 거느리고 연근 뿌리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하니, 이들도 성인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예를 든 것은 모두가 업의 신통이거나 의지한 신통들이다.”
강의 ; 불교에는 신통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부처님의 위대함도 이 신통이 있다는 조건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통이란 요즘말로하면 초능력 같은 경우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魔法)과 같은 것을 뜻한다. 아수라와 제석천신들이 싸우는 이야기는 해리퍼터의 마법 그대로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목련존자가 신통제일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런대 부처님은 어느 날 목련존자에게 신통은 정도(正道)가 아니니 쓰지 말라고 당부한 적이 있다. 그래서 목련존자는 신통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도(外道)들로부터 구타를 당해서 열반하였다고 한다. 임제록에서 보인바와 같이 설사 그와 같은 능력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런 일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장려할 바가 아니다. 그런 능력으로서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외도의 소견이다.
방거사(龐居士)의 말씀에 “신통과 묘용이란 물을 길어 오고 땔나무를 해오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참 신통이다.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고 날이 개이면 화창한 날씨를 감상하는 일, 즐거운 일이 있으면 즐거워하고 몸이 아프면 ‘아야! 아야!’하고 앓을 줄 아는 그것이 참다운 신통이다. 지금 이 순간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이 사실이 신통묘용이고 무량대복이며, 대 자유(大自由) 대 해탈(大解脫)이다.
夫如佛六通者는 不然하야 入色界不被色惑하며 入聲界不被聲惑하며 入香界不被香惑하며 入味界不被味惑하며 入觸界不被觸惑하며 入法界不被法惑하니라 所以로 達六種色聲香味觸法이 皆是空相이라 不能繫縛此無依道人하야 雖是五蘊漏質이나 便是地行神通이니라
“대저 부처님의 육신통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물질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물질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소리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소리의 미혹함을 받지 않으며, 냄새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냄새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맛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맛의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감촉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감촉에 미혹함을 받지 않고, 법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법의 경계의 미혹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색·성·향·미·촉·법 이 여섯 가지가 모두 텅 비었음을 통달하고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무의도인을 속박할 수 없다. 비록 오온의 번뇌로 이루어진 몸이지만 바로 이것이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地行神通]이니라.”
강의 ; 부처님의 진정한 육신통이란 육진(六塵)경계를 만나 그 육진경계들을 일일이 느끼고 감상하고 수용하면서 그 경계에 빠지지 않고 더렵혀지지 않고 속지 않는 것이다. 그 육진경계를 능동적으로 사용하는 그 사람의 작용이다. 경계는 경계일 뿐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본래인(本來人)과는 상관없다. 본래인을 속박할 수는 없다. 본래인이 오온으로 된 이 육신을 떠나서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육신이 본래인이다. 결론은 부처님의 신통도 이 육신이 땅으로 걸어 다닐 줄 아는 그 사실이다. 그래서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이라 한다.
지행신통(地行神通). 아주 재미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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