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71~75

2020. 2. 15. 12: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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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71


14-13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唯有道流의 目前現今聽法底人하야 入火不燒하며 入水不溺하며 入三塗地獄호대 如遊園觀하며 入餓鬼畜生而不受報하나니 緣何如此오 無嫌底法일새니라 儞若愛聖憎凡하면 生死海裏沈浮하리니 煩惱由心故有라 無心煩惱何拘리오 不勞分別取相하면 自然得道須臾니라 儞擬傍家波波地學得하면 於三祇劫中에 終歸生死하리니 不如無事하야 向叢林中하야 牀角頭交脚坐니라


“오직 도를 배우는 벗들의 눈앞에 법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삼악도의 지옥에 들어가도 마치 정원을 구경하며 노는 듯하고, 아귀 축생에 들어가도 그 업보를 받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하면 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은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번뇌는 마음을 말미암아서 생겨나는 것이니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찌 사람을 구속하겠는가?

분별하여 모양을 취하느라 헛수고하지 않으면 저절로 잠깐 사이에 도를 얻을 것이다. 그대들이 분주하게 옆 사람에게 배워서 얻으려 한다면 삼 아승지겁 동안 애를 써도 결국은 생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아무런 일 없이 총림의 선상 구석에서 두 다리를 틀고 않아 있느니만 못하리라.”

강의 ; 모든 사물은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없다. 물에 빠지지 않는 것이 없다. 하지만 말을 하고 말을 듣는 이 사람은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빠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정원을 거니며 구경하는 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다. 축생이나 아귀에 들어가도 그 축생이나 아귀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도는 꺼려할 것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無嫌底法]. 물론 좋아할 것도 없는 법이다. 보고 듣는 이 자리에 무슨 차별이 있는가. 좋아하고 싫어할게 어디 있는가. 그래서 혜능조사는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취사선택하지 말고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훤하게 밝다.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다. 성불이고 견성이고 열반이고 깨달음이고 조사고 부처님이다. 말을 듣고 있는 이 사람이다. 너고 나다. 삼라만상이고 우주만유다.


선이라고 좋아하고 악이라고 싫어한다면 좋고 싫고 취하고 버리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성인이다 법부다 하는 분별이 있게 되어 사랑과 미움이 있게 된다. 편견과 치우침이 있게 되어 양변에 떨어진다. 편견과 치우침으로 양변에 떨어지면 그것이 곧 삼악도다. 지옥이다. 윤회다. 불에 타고 물에 빠지는 일이다.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고 탐욕의 물결에 떠내려간다. 물과 불에 반복하여 윤회하게 되며, 아귀와 축생에 끌려 다니며 윤회하게 된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주체가 되지 못하고 종이 되어 끌려 다닌다. 타인이 손해를 입히고 비방을 하고 욕을 하고 때리고 모함하는 일에 휘말린다. 그런 일에 따라다니며 윤회하게 된다. 하루 종일 시시비비에 떠다닌다. 그래서 나는 없다. 온통 남이다. 경계뿐이다.


 
산은 산, 물은 물대로 그대로 두고 보라. 장미는 장미 목련은 목련 그대로 두고 보라. 밤나무는 밤나무 감나무는 감나무 그대로 두고 보라. 눈앞에 버러진 온갖 현상들에 쫒아 다니지 말고 주인이 되라. 그러면 어디서나 행복하리라. 이것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상대적 편견에 떨어진 온갖 이론들을 애써 배우느라고 삼 아승지겁 동안 돌아다니느니 보다는 차라리 아무런 일 없이 총림의 선상 구석에서 두 다리를 틀고 않아 있느니만 못하리라.

임제록 72


14-14 주객이 서로 만나다

 


道流야 如諸方有學人來하야 主客相見了하고 便有一句子語하야 辨前頭善知識이라 被學人拈出箇機權語路하야 向善知識口角頭攛過하야 看儞識不識이어든 儞若識得是境이면 把得하야 便抛向坑子裏하나니라 學人이 便卽尋常然後에 便索善知識語하나니 依前奪之하면 學人云, 上智哉라 是大善知識이여하리니 卽云, 儞大不識好惡로다하고 如善知識이 把出箇境塊子하야 向學人面前弄하면 前人辨得하야 下下作主하야 不受境惑이라 善知識이 便卽現半身에 學人便喝한대 善知識이 又入一切差別語路中擺撲하면 學人云, 不識好惡로다 老禿奴여하야 善知識이 歎曰, 眞正道流로다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컨대 여러 곳에서 학인이 찾아왔을 때 주인과 객이 인사를 나눈 뒤 학인이 대뜸 한마디를 던져 앞에 있는 선지식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학인으로부터 한 가지[箇] 시험하는 말[機權語路]을 끄집어내어 선지식을 향해서 입씨름하는 말[口角頭]을 던져서, ‘보십시오! 스님께서는 이걸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당하게 된다. 그 때 선지식이 만약 시험하는 말이라는 것[是境]을 알면 그 말을 잡아서 곧바로 학인을 궁지로 몰아넣는다[구덩이에 던져버린다]. 그 때 학인은 곧 태도를 고치고 평상의 자세로 돌아간 뒤 곧 선지식의 말[가르침]을 찾는다. 그러면 선지식은 여전히 그를 부정해버린다. 학인이 말하기를 ‘참으로 지혜로우십니다. 큰 선지식이십니다.’라고 한다. 그 선지식은 곧 ‘이 녀석은 도대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라고 한다.

 
또 선지식이 하나의 시험하는 말[境塊子]을 학인 앞에 내놓고 희롱하면 그 학인이 알아차리고 하나하나 주제를 지어서 경계에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다시 선지식이 곧 진심을 조금[半身] 드러내 보이면 학인은 곧바로 “할!”하고 고함을 친다.

 
선지식이 다시 여러 가지 차별된 말로 시험해 보는데, 학인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 이 늙고 머리 깍은 종아.’ 하면 선지식은 찬탄하기를,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벗이로다.’라고 한다.”

강의 ; 이 단락은 선지식과 학인이 만나서 오고가는 대화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법을 거량하는 일은 늘 있어 왔다. 제대로 깨달은 사람들의 거량은 더 이상 논할 것이 없고 위와 같은 엉터리 가짜들의 거량은 문제가 많다. 필자도 선원에서 직접 많이 보아온 경험이 있다. 모두가 대개 일방적이다. 선지식도 학인이 법을 거량하거나 법을 거량하기 위해서 앞에 나와 절을 하면 다짜고짜 깔아뭉개는 식이다. 학인도 자신이 할 소리만 내뱉고 휙 일어서 버린다. ‘백골(白骨)이 만산(滿山)이다.’라고 하거나 또는 “할”을 하거나 주장자로 치거나 방바닥을 치거나 하고는 일어나 버린다. 단 두합을 가지 않는다. 서로 모르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옛 검객들은 오십 합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옛 선지식들도 진지하게 학인을 위해서 몇 합을 주고받다가 성의 있게 일러준다. 학인도 성의를 다하여 지시를 따른다.



요즘도 선원에서 오고가는 질문이 있기는 하다. 어떤 곳에서는 불교에 대한 상식이 자기 수준과 엇비슷하면 인가해준다. 공부에 관심만 좀 있어도 인가해준다. 인가를 받은 사람이 어느 날 ‘인가는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 것도 아니고,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하는 사람도 있다. 공부에 관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으로서는 좋게 생각해 줘야 할런지 잘 모르겠다. 불법에 관심을 유도하는 뜻에서 좌우간 좋은 현상이다.

임제록 73


14-15 귀신과 도깨비들

 

如諸方善知識은 不辨邪正하야 學人이 來問菩提涅槃三身境智하면 瞎老師가 便與他解說타가 被他學人罵著하고 便把棒打他言無禮度하나니 自是儞善知識無眼이라 不得瞋他로다


“제방의 여러 선지식들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학인이 찾아와서 보리와 열반과 삼신(三身)과 경계와 지혜 등을 묻는다. 눈이 먼 노사는 그에게 해설을 해 주다가 학인으로부터 꾸짖고 힐난함을 받게 되면 곧바로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이 예의와 법도도 모르는 놈아!’라고 한다. 그것은 스스로 그대들 선지식들이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학인에게 화를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의 ; 세상의 선지식들이 어찌 임제스님과 같겠는가. 거개가 눈 먼 이들이다.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학인의 지적을 받으면 그만 화부터 낸다. 아만은 있어서 채면이 깎이는 것은 못 참는다. 실은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자신이 안목이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라. 자신이 안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시인 할 줄 알면 그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존경을 받을 분이다. 자신을 비우고 꼬리를 내릴 줄 안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안목이 제일이다. 불법을 공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 “그대의 행동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안목은 반드시 점검하겠다.”라는 고인의 말이 있다. 안목은 참으로 중요하다.

有一般不識好惡禿奴하야 卽指東劃西하며 好晴好雨하며 好燈籠露柱하나니 儞看하라 眉毛有幾莖고 這箇具機緣에 學人不會하고 便卽心狂이라 如是之流는 總是野狐精魅魍魎이니 被他好學人의 嗌嗌微笑하야 言瞎老禿奴여 惑亂他天下人이로다


“좋고 나쁜 것을 모르는 머리 깍은 종들이 있어서 동쪽을 가리키다 서쪽을 가리키고, 맑은 날을 좋아하다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며, 등롱(燈籠,등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는 기구)과 노주(露柱,법당의 드러난 둥근 기둥)를 좋아한다. 그대들은 잘 보아라! 눈썹에 털이 몇 개가 남아 있는가? 이 일에는 기연(機緣)이 갖추어져 있는데 학인들은 알지 못하고 곧 미쳐버리는 것이다. 이런 무리들은 모조리 여우나 귀신 도깨비들이다. 그 좋은 학인들에게 ‘이 눈멀고 머리 깍은 늙은이가 온 천하 사람들을 미혹하고 어지럽게 만드는 구나’라는 비웃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강의 ; 온전하지 못한 선지식들은 학인이 무엇을 물으면 그 말을 따라 별의별 이야기를 어수선하게 다 늘어놓는다. 이야기가 갈팡질팡한다. 보리니 열반이니 삼신이니 관찰할 대상인 경계니 관찰하는 지혜니 하는 등등에 대하여 펼치는 이야기가 장관이다. 팔만장경을 다 동원한다. 모두가 삿된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삿된 말만 어지럽게 늘어놓다가 눈썹이 남아나겠는가? 삿된 말을 좋아하면 눈썹이 빠진다. 동·서·남·북이니 맑고 흐림이니 등롱이니 노주니 구모(龜毛)니 토각(兎角)이니 석녀(石女)니 하는 말로 모두 선문답으로 여긴다. 선리(禪理)를 알지 못하고 허황된 망언만 늘어놓는다. 악지식들에게 보통 있는 관례다. 모두가 눈앞에 보이는 온갖 것들을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어지럽게 늘어놓는다.



이 도리에는 반드시 기연(機緣)과 까닭이 있다. 함부로 늘어놓는다고 맞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을 여우나 도깨비나 귀신들의 장난이라고 한다.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되어서야 옳겠는가. 선지식 그 자신이 잘못되는 것은 그렇지만 학인을 미치게 만들면 그 업을 어찌하겠는가. 천하의 스승 된 모든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임제록 74


 

14-16 계율도 익히고 경론도 배웠다

 

道流야 出家兒는 且要學道니라 祇如山僧은 往日에 曾向毘尼中留心하고 亦曾於經論尋討라가 後方知是濟世藥이며 表顯之說이라 遂乃一時抛却하고 卽訪道參禪하니라 後遇大善知識하야 方乃道眼分明하야 始識得天下老和尙하야 知其邪正하니 不是娘生下便會요 還是體究練磨하야 一朝自省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무엇보다 도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난날 계율에 마음을 두기도 하였고, 경론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나중에서야 그것들이 세간을 구제하는 약이며 겉으로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인 줄을 알았다. 드디어 몽땅 다 버려 버리고 도에 대해서 묻고 선을 참구하였다. 그런 뒤에 큰 선지식을 만나 뵙고 나서야 마침내 도안(道眼)이 분명해져서, 비로소 천하의 노화상들이 삿된지 바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안 것이 아니다. 깊이 연구하고 갈고 닦아서 어느 날 아침에 스스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의 ; 짧은 글이지만 임제스님께서 수도의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엿볼 수 있다. 도에 이르는 길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라는 오랜 전통과 체계 속에서 그 길을 모색해 온 사람들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순서와 길은 있다. 그 길을 스님은 그대로 밟아온 것이다. 옛날대로 라면 승려가 되어서 5, 6년은 계율(戒律)울 공부하여 수행자로서 삼천 가지 위의(威儀)와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을 익힌다. 그 다음에는 경전과 논을 10여년 깊이 연찬하여 깊고 오묘한 불교교리들을 낱낱이 깨닫는다.

 
그리고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하여 그동안 배우고 익힌 교학을 모두 버리고 참선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생을 통해서 바람직한 수행자가 되는 대는 이와 같은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임제스님은 그 코스를 하나도 빠짐없이 밟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황벽이라는 큰 선지식을 만나서 도안(道眼)을 분명하게 뜨게 되었다. 눈을 뜬 뒤에는 천하의 노화상들이 삿된지 바른지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마치 밝은 거울이 붉은 것은 붉은 대로 비치고 푸른 것은 푸른 대로 비치는 것과 같다. 이 깨달음의 눈은 어머니가 낳아준 그대로 다 알아보는 그 눈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길을 모든 수행자가 다 같이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육조 혜능 같은 이들은 나무를 팔려갔다가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바로 깨닫기도 했다. 열반회상에 광액(廣額)이라는 소를 잡는 백정은 어느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고는 ‘나도 천 부처님 중에 하나다.’라고 큰 소리를 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례들은 특수한 경우다. 임제스님이 걸으신 길을 눈여겨 볼 일이다.

임제록 75


14-17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道流야 儞欲得如法見解댄 但莫受人惑하고 向裏向外하야 逢著便殺하라 逢佛殺佛하며 逢祖殺祖하며 逢羅漢殺羅漢하며 逢父母殺父母하며 逢親眷殺親眷하야사 始得解脫하야 不與物拘하고 透脫自在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미혹[속임]을 당하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 자재하게 된다.”

강의 ; 여법한 견해나 진정견해나 모두가 같은 것이다. 수처작주도 같다. 모두가 다른 사람에게나,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온갖 경계가 앞에 오거든 무조건 다 부정하고 끌려가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나를 욕하고 나를 때리고 모함하고 손해를 입히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유혹하는 순조로운 경계도 같은 것이다. 부처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부모나 처자권속이나 모두가 다 나 아닌 경계고 내가 미혹을 당할 상대들이다. 다시 말해서 역경계나 순경계나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것이다. 거기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해탈이다. 어떤 사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다. 툭 터져서 자유자재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깡그리 부정해 버리고 끌려가지 말라는 뜻에서 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불조에 대한 모든 잘못된 관념들을 때려 부셔라는 뜻이다. 이렇게 파격적이고 강도 높은 언어를 써도 강강(强剛)한, 억세고 미련한 중생들은 아무런 감동이 없다. 깊은 사유가 없어서이다.


경계는 경계의 일이고 나는 나의 일이다.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 나는 내 할 일 하면 된다. 내 자신을 굳게 지키고 타인의 잘잘못을 보지 말라. 흔들리고 따라가면 그 순간 내 생명은 벌써 상처를 입는다. 그가 부처든 조사든 부모든 칭찬이든 욕이든 마찬가지다. 자신을 자각하는 일은 그처럼 중요하다.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라. 참으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하고 입처개진(立處皆眞)라하. 불여물구(不與物拘)하고 투탈자재(透脫自在)하라. 제대로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이 말대로 하라.

如諸方學道流는 未有不依物出來底라 山僧向此間은 從頭打하야 手上出來手上打하고 口裏出來口裏打하고 眼裏出來眼裏打하나니 未有一箇獨脫出來底요 皆是上他古人閑機境이니라

 
“제방에서 도를 배우는 벗들은 말이나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앞에 나온 자는 하나도 없었다. 산승은 여기에서 처음부터 그들을 쳐버린다. 손에서 나오면 손으로 치고, 입에서 나오면 입으로 치며, 눈에서 나오면 눈으로 쳐버린다. 다만 홀로 벗어나서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옛날 사람들의 부질없는 지식이나 언어나 행위들[閑機境]을 숭상하고 받드는 것이었다.”

강의 ; 임제스님이 법을 쓰는 것은 매우 독특하다. 그 표현이 독창적이다. 파격적이고 상상을 초월한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하고 기상천외하다. 밝은 대낮에 청천벽력이다. 구름 한 점 없는데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진다. 그 밝기로는 일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서 수수만년을 비추고 있다. 어디에도 의지하거나 근거를 대어 나타내는 경우가 없다.

 
그런대 다른 모든 이들은 그동안 불교역사에서 축적되어진 표현들을 그대로 빌려오거나 변형을 시킨 것들이다. 원래로 법이 그렇지가 않은데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모두 쳐 없앤다. 어떤 입장에서 나오든지 모두 쓸어버린다.



옛 사람들의 부질없는 말이나 행위들을 흉내 내어 봐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할”을 하고 방을 써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느 큰 참선 법회에 가서 보고 온 사람이 왈, ‘외계인들이 와서 놀다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는 말을 했다. 매우 적절한 평이었다. 이제는 되지 않은 옛 스님들의 격외 법문을 문자로 적어서 그것을 다시 번역하고 떠듬떠듬 읽어서 법문이랍시고 토해내는 그런 것은 그만 하는 것이 좋다. 차라리 자신이 알고 있고 확신이 가는 것만 이야기 하자. 전설 따라 삼천리도 좋고 소를 팔러 다니던 이야기도 괜찮다. 진실하게 소신이 있는 말이면 되지 않는가. 공연히 옛 사람들의 흉내를 낸다고 자신이 옛 사람처럼 존귀하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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