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76~80

2020. 2. 22. 14:3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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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76


14-18 그대는 무엇이 부족한가

 

 


山僧은 無一法與人이요 祇是治病解縛이니 儞諸方道流는 試不依物出來하라 我要共儞商量이라 十年五歲토록 並無一人하고 皆是依艸附葉竹木精靈과 野狐精魅니 向一切糞塊上亂咬로다

 
“산승은 남에게 줄 법이 하나도 없다. 다만 병에 따라 치료를 해주고 묶여있는 것을 풀어줄 뿐이다. 그대들 제방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시험 삼아 사물에 전혀 의존하지 말고 나와 보아라. 나는 그대들과 법에 대해서 문답을 하고 싶구나. 15년이 지나도록 누구 한 사람 없었다. 모두가 풀이나 나무 잎사귀나 대나무나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들이다. 또 여우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다. 모두 똥 덩어리에 달라붙어 어지럽게 씹어 먹는 것들이다.”

강의 ; 이 법은 본래로 남에게 줄 수 있는 법이 아니다. 만약 줄 수 있는 법이라면 세존은 벌써 라후라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야수다라에게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라후라에게나 야수다라에게 법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왜냐? 줄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대도 법을 전해 준다느니, 법을 전해 받았다느니 하는 말은 단순한 인정에 불과하다. 그가 깨달은 것이 확실한가를 알아보고 확실하면 인정을 해 주는 일이다. 그와 같은 인정하는 일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까지 그 관례를 그대로 쓴다.


불교는 병에 따라 약을 쓰고 속박된 것을 풀어 주는 일이다. 8만 4천 법문이란 중생들의 8만 4천 가지의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한 것에 불과하다. 또 병이란 다른 말로 하면 속박이요, 구속이다. 있음과 없음에 구속되고, 생과 사에 구속되고, 성인과 범부에 구속되고, 중생과 부처에 구속되고, 선과 악에 구속되고, 일체 차별과 편견과 양변과 변견과 비교하는데 구속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들로부터의 해탈을 희망한다.


간혹 선문답을 하는데서 들을 수 있는 말로서 ‘부처님의 말씀이나 조사들의 말씀을 떠나서 한 마디 일러보라.’ 또는 ‘말과 행동을 쓰지 않고 한 마디 일러보라.’ 라고 주문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모두가 무엇엔가 의지해서 법을 말한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모두가 불조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표현한다. 과거의 선배들이 남겨둔 것을 대단한 보물로 생각하여 모든 삶을 거기에 걸고 있다. 그 기준과 그 사례에 어긋나면 크게 잘 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점에 대해서 임제스님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치 혹독하고 심한 표현을 쓴다. “제발 누구 하나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독창적인 법을 들고 나와서 같이 말 좀 해보자. 15년 동안 한 사람도 경계나 언구나 지금까지 표현한 것이 아닌 것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제 갈 길을 못가고 구천을 떠돌다가 풀섶이나 나무나 바위 등에 붙어있는 귀신 도깨비 같은 존재들이다. 모두가 남들이 싸 논 똥 덩어리를 씹어 먹고 있는 꼴이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전무후무한 극언이다. 누가 감히 그 흉내를 내겠는가. 그 용맹은 천 명의 조자룡이요 만 명의 관운장이다. 누구의 표현처럼 임제는 활화산이고, 천기누설이고, 지뢰밭이고, 산사태고, 태풍이고, 해일이고, 홍수고, 날벼락이고, 대지진이고, 전쟁이고, 폭발이고, 분출하는 용암이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일이다.

 
똥 덩어리란 산처럼 쌓여있는 교학들이 그것이다. 온갖 망상으로 펼쳐 둔 주의 주장들과 사상들이 그것이다. 닦아야 되느니 증득해야 되느니 3아승지겁 동안 6바라밀, 10바라밀을 실천해야만 된다고 하는 등등의 가르침들을 지적해서 하는 말이다. 천하의 선지식이라는 이들이 모두 거기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임제스님이 보기에는 갑갑하고 안타깝고 숨 막히고 몸살이 나서 죽을 맛이다. 활화산과 천기누설과 지뢰밭과 산사태와 태풍과 해일과 홍수와 날벼락과 대지진과 전쟁과 폭발과 분출하는 용암을 한꺼번에 쏟아 부어 다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임제의 적손(嫡孫) 조계종도들이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임제의 적손 조계종도들이여, 세계불교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책임지고 있는 임제의 적손 조계종도들이여. 이 힘과 이 용기와 이 기백과 이 용맹으로 명실상부한 선의 종주국의 깃발을 온 세계에 힘차게 드날리자.

瞎漢이여 枉消他十方信施하고 道我是出家兒라하야 作如是見解로다 向儞道하노니 無佛無法하며 無修無證하나니 祇與麽傍家에 擬求什麽物고 瞎漢아 頭上安頭라 是儞欠少什麽오


“야 이 눈 먼 놈들아, 저 시방의 신도들이 신심으로 시주한 물건을 마구 쓰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짓고 있구나.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들 옆집으로만 다니면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들아!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는구나. 너희들에게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강의 ; 출가입산(出家入山)하여 수행 정진한다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온갖 호설난도(胡說亂道)로 펼쳐놓은 주의주장들을 의지해서 그것이 불교인양 하고 사는 사람들의 견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닌데 헛되이 신도들의 시주 밥만 축내고 출가인 이라고 하다니. 불교를 사뭇 틀리게 말하는 사람, 그것마저 하지 않는 사람들은 차한에 부재다. 논할 대상이 아니다.


이미 우리들 자신이 완전무결한데, 그래서 부처도 법도 수행도 깨달음도 없다. 공연히 자기의 집을 버리고 남의 집으로 찾아 헤매고 있다. 자신의 집에 이미 무한한 보물이 있는데 남의 집에 가서 무엇을 구하자는 것인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아 그렇게 해서 찾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머리 위에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격[頭上安頭]이다. 긁어서 부스럼 내는 일이다. 멀쩡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일이다. 머리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어쩌자는 것인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런 짓을 하는가? 지금 이 순간 글을 읽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하지 않는가? 거기서 다시 무엇이 더 필요한가? 진정한 신통묘용이요 무량대복인 것을. 참으로 천고의 명언이다. 촌철살인이다.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최후 최고의 가르침이다. 수미산 꼭대기다.
두상

안두(頭上安頭). 천고의 명언이다. 흠소십마(欠少什麽). 명언중의 명언이다.

임제록 77


14-19 삼계는 삼독심이다

 


道流야 是儞目前用底가 與祖佛不別이어늘 祇麽不信하고 便向外求로다 莫錯하라 向外無法이요 內亦不可得이니라 儞取山僧口裏語는 不如休歇無事去니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놈이 바로 할아버지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왜 믿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착각하지 말라. 밖에도 법이 없으며 안에도 또한 얻을 것이 없다. 그대들은 산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는 모든 생각을 쉬어서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강의 ; 불교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인가? 도를 이룬 부처님이나 조사는 또 무엇인가? 그대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하면서 작용하는 그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 작용하는 그놈이 부처님과 조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단지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그 외의 것들을 찾아 밖으로 법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안에서 얻을 수도 없다. 내가 하는 이 말은 이 지상에서 제일가는 법문이다. 이보다 더 위대한 법문은 없다. 팔만사천법문과 온갖 시시비비를 다 쓸어버리는 어마 어마한 태풍과도 같은 말씀이다. 하지만 산승의 이 말을 듣는 것 보다는 한 생각 쉬는 것이 더 낫다. 한 생각 쉬고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것이 훨씬 훌륭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지만 나는 놈보다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놈이 백배 훌륭하다.

已起者莫續하고 未起者不要放起하라 便勝儞十年行脚이니라 約山僧見處하면 無如許多般이요 祇是平常이니 著衣喫飯하고 無事過時니라


“이미 일어난 것은 계속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라. 이렇게 한다면 10년을 행각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허다한 일[소승, 대승, 출가, 속가, 수행의 단계 등]은 없는 것이니 다만 평소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아무런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뿐이니라.”

강의 ; 스승을 잘못 만나고 한 생각 잘못하여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하려고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일으켰다면 더 이상 지속하지는 말라. 만약 일어나지 않았거든 어떤 좋은 생각도 일으키지 말라. 그렇게만 하면 그대들이 공부를 위해서 10년을 행각한 것 보다 훨씬 낳으리라.

 
산승의 소견으로는 그 허다한 5위 75법이니, 5위 100법이니 하는 것이 없다. 5온 12처 18계니, 4성제 8정도 12인연도 없다. 3승 4과도 없다. 보살의 수행계위인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도 없다. 6바라밀, 10바라밀도 없다. 참선 염불도 없다. 간경 주력 기도도 없다. 다만 평소대로 옷 입고 밥 먹으며 아무런 일없이 인연 따라 세월을 보내는 것뿐이다. 만약 산승의 소견이 틀린다고 생각이 들거든 맞는 길을 찾아서 알아서 살아라. 한국의 모든 선지식들은 이 정신 이 가르침이 좋아서 모두들 임제스님 밑으로 줄을 대고 있다.

儞諸方來者가 皆是有心이라 求佛求法하며 求解脫求出離三界하나니 癡人이여 儞要出三界하야 什麽處去오 佛祖是賞繫底名句니라 儞欲識三界麽아 不離儞今聽法底心地니 儞一念心貪은 是欲界요 儞一念心瞋은 是色界며 儞一念心癡는 是無色界라 是儞屋裏家具子니라 三界不自道我是三界요 還是道流의 目前靈靈地照燭萬般하야 酌度世界底人이 與三界安名하나니라

“제방에서 온 그대들은 모두가 마음이 있다. 부처를 구하려고 하며, 법을 구하려고 하며, 해탈을 구하여 삼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어리석은 이들아! 그대들이 삼계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부처와 조사란 보기 좋은 올가미로 만든 이름과 글귀일 뿐이다.

 
그대들은 삼계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지금 그대들이 법문을 듣고 있는 그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한 생각 탐내는 마음이 욕계(欲界)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색계(色界)며,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無色界)니라. 이 삼계는 바로 그대들의 집속에 있는 살림살이들인 것이다. 삼계가 스스로 ‘내가 바로 이 삼계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아주 분명하게 만물을 비추어 보고 세계를 가늠하는 그 사람이 삼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강의 ; 모든 사람들은 다 마음이란 것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고 해탈을 구하여 삼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다 옳은 일이다. 그런데 삼계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삼계라는 것이 진실로 있기나 한가? 참으로 있어서 벗어나려 하는가? 가나오나 지금 있는 이 자리뿐인 것을. 동쪽 사람들은 염불을 해서 서방으로 간다지만 서방 사람들은 염불을 해서 어디로 가는가? 동쪽으로 오는가?


그대들이 참으로 삼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이 순간 법문을 듣고 있는 그 마음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대들 한 생각 탐욕하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들이 곧 욕계, 색계, 무색계다. 이 삼계란 그대들의 집에서 쓰는 가구들이다. 삼계 25유(有)를 모두 그대들의 목전에서 역역한 그것이 이름 붙인 것이다. 온갖 만물을 살피고 온 세계를 헤아리는 바로 그 사람이 이름을 지어 붙인 것이다.

 
또 그대들이 오매불망 구하려고 하는 부처나 조사라는 것도 모두가 금이나 은 같은 그럴듯한 좋은 올가미를 만들어 사람들을 얽어매는 것에 불과하다. 부처니 조사니 하는 말이 얼마나 근사한가.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가? 사람들을 얽어매기 아주 좋은 금과 은으로 만든 올가미다. 그 올가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매여 속박을 당하는가. 금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도 올가미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올가미일 뿐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대 해탈, 대 자유인이 곧 그대 자신이거늘 왜 올가미에 걸려드는가.

임제록 78


14-20 무명은 없다

 


大德아 四大色身是無常이라 乃至脾胃肝膽과 髮毛爪齒도 唯見諸法空相이니 儞一念心歇得處를 喚作菩提樹요 儞一念心不能歇得處를 喚作無明樹니라 無明無住處요 無明無始終이라 儞若念念心歇不得하면 便上他無明樹하야 便入六道四生하야 披毛戴角이요


“큰스님들이여! 사대로 되어있는 이 몸뚱이는 덧없는 것이다. 비장과 위와 간과 쓸개와 머리카락과 털과 손톱과 이빨마저도 오직 모든 것이 텅 비어있는 모양임을 보여줄 뿐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쉰 곳을 보리수라 하고, 한 생각 마음이 쉬지 못하는 곳을 무명수라 한다. 무명은 머무는 곳이 없으며, 처음과 끝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만약 순간순간의 마음이 쉬지 못한다면 곧 무명수 위에 올라가서 곧바로 사생 육도(四生六道)에 들어가서 털이 나고 뿔이 달리는 짐승이 될 것이다.”

강의 ; ‘나는 없다.’ 이 말은 반야심경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5온이 모두 텅 비어 없다. 안·이·비·설·신·의도 텅 비어 없다. 색·성·향·미·촉·법도 모두 텅 비어 없다. 4성제, 8정도, 12인연도 텅 비어 없다. 일체가 다 텅 비어 없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요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반야심경을 주력삼아 외우다가 깨달은 것이 ‘나는 없다.’이다. 내가 없는데 다시 무엇을 위하여 헐떡거리겠는가. 생로병사와 일체 문제의 해결이다.

 
그대들 한 생각 쉬어버린 곳이 보리수다. 그대들이 한 생각 쉬지 못한 곳이 무명수다. 그런데 무명이란 말 뿐이지 실은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찾으려고 헐떡거리는 마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온갖 4생(生) 6도(途)가 다 벌어진다. 다종다양한 삶이 펼쳐진다. 천태학(天台學)에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말이 있다. 한 순간에 삼천 가지의 삶의 양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살며 느끼고 있는 일체 현실이 모두 한 생각 쉬지 못해서 무명이 있고, 그 무명으로 인하여 환영처럼 펼쳐진 것들이다.

 

儞若歇得하면 便是淸淨身界니라 儞一念不生하면 便是上菩提樹라 三界神通變化하야 意生化身하야 法喜禪悅하며 身光自照니 思衣羅綺千重이요 思食百味具足하야 更無橫病이니라 菩提無住處라 是故無得者니라


“그대들이 만약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곧 청정법신의 세계다. 그대들이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곧 보리수에 올라 삼계에서 신통 변화하여 마음대로 화신의 몸을 나타내리라. 그래서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法喜禪悅]으로 몸의 광명이 저절로 빛날 것이다. 옷을 생각하면 비단 옷이 천 겹으로 걸쳐지고, 밥을 생각하면 백 가지 진수성찬이 그득히 차려지며, 다시는 뜻밖의 병이나 가난으로 오는 병에 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보리는 어떤 주처가 없다. 그러므로 얻을 것도 없느니라.”

강의 ; 한 생각 쉬는 것이 곧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며, 한 생각 일어나지 않은 것이 곧 한 생각 쉰 것이다. 그 경지가 되면 이 현실 그대로가 청정법신의 세계며 곧 보리수에 올라 삼계에서 신통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뜻대로 몸을 나타내며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누리리라. 비단 옷이 넘쳐나고 온갖 진수성찬이 구족하여 병도 없으리라. 한 생각 쉬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에게 모든 것이 구족하여 더 이상 밖을 향해서 찾을 것이 없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설사 부처와 조사라 하더라도 자신 밖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밖을 향해 찾지 않는 것이다. 신통묘용과 복덕 지혜도 그렇다. 그것이 쉬는 것이며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법희선열(法喜禪悅)이란 말은 삶의 극치다. 가만히 읊조리기만 해도 그 희열이 샘솟는다.


임제록 79


14-21 보고 듣는 이가 누구인가

 


道流야 大丈夫漢이 更疑箇什麽며 目前用處가 更是阿誰오 把得便用하야 莫著名字를 號爲玄旨니 與麽見得하면 勿嫌底法이니라 古人云, 心隨萬境轉이나 轉處實能幽라 隨流認得性하면 無喜亦無憂라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가 또 무엇을 의심하는가?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가 다시 또 누구인가? 잡히는 대로 쓰며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심오한 뜻이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없는 도리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그곳이 참으로 그윽하여라. 마음이 흘러가는 그곳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니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라고 하였다.”

강의 ; 사람들의 마음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매우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높이 그 넓이에 미칠 수가 없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작용은 신묘불측(神妙不測)이다. 그래서 언어로써 표현할 길이 없고 생각으로 따를 수 없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보아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들으며 작용하고 있는 그것이다. 그러한 이치를 잘 알아서 추호의 의심도 없고 양변에 떨어지거나 편견이 없으면 대장부다.

 
옛 인도의 23조(祖)인 학륵나 존자가 아직 법을 깨닫기 전에 학의 무리들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래서 22조 마라나 존자를 만나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대가 옛날 제자들을 데리고 용궁에 가서 공양을 받았는데 그 제자들이 박복하여 학의 몸을 받은지 5겁이나 되었다. 바로 그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이 해탈할 수 있는 길을 물으니 위와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유명한 게송이다. ‘마음이 흘러가는 그곳을 따라 성품을 깨닫는다.’는 말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즉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텅 빈 마음자리를 잘 누리어 남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나는 나의 자리를 잃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때렸다. 남이 나를 욕했다. 모함했다. 비방했다. 손해를 입혔다. 망신을 주었다. 내 것을 빼앗아 갔다. 등등에 흔들리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온갖 몹쓸 병들이 나를 괴롭게 한다. 몸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세월이 나를 늙게 한다. 는 등등에도 소요자재(逍遙自在)하고 여여무심(如如無心)하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으리라. 본래로 그런 것이 없는 텅 빈 마음의 세계에서 자유자재하게 노닐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이 금쪽같은 구절은 반드시 외워야 한다.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 잘 이해하면 평생의 좋은 양식이 될 것이다.



임제록 80


14-22 주인과 객이 서로 보다

 

 


道流야 如禪宗見解는 死活循然하니 參學之人이 大須子細어다 如主客相見할새 便有言論往來호대 或應物現形하며 或全體作用하며 或把機權喜怒하며 或現半身하며 或乘獅子하며 或乘象王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선종의 견해로는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것이니,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자세히 살펴야 한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만나면 곧 말들을 주고받는데, 혹은 사람에게 맞추어서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전체작용(全體作用)을 하기도 하며, 혹은 기연과 방편으로 기뻐하거나 성내기도 하며, 혹은 몸을 반쯤 나타내 보이기도 하며, 혹은 사자를 타기도 하고, 혹은 코끼리를 타기도 한다.”

강의 ; 선문답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진검승부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장난삼아, 또는 소영웅심리에서 선문답을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삶과 죽음이란 주객이 서로 만나 법을 거량하는 경우에 이기거나 지는 일을 표현한 것이다. 이기는 것은 살아나는 것을, 지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말로써 주고받는데 이기고 지는 일이 돌고 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여섯 가지의 사례를 들고 있다.


혹 사자를 타기도 한다는 것은 문수보살의 역할을 뜻한다. 언제나 보현보살과 대비가 된다. 집안의 일을 맡은 사람이며 지혜를 상징한다. 코끼리를 타기도 한다는 것은 보현보살의 역할을 뜻한다. 바깥의 일을 맡은 사람이며 실천을 상징한다. 여섯 가지 예들이 모두 그와 같은 입장에 서서 사람을 제접한다는 것을 다 들어 보인 것이다.

如有眞正學人이 便喝하야 先拈出一箇膠盆子하면 善知識이 不辨是境하고 便上他境上하야 作模作樣하면 學人便喝에 前人不肯放하나니 此是膏盲之病이라 不堪醫니 喚作客看主니라

 
“만약 진정한 학인이 있어서 대뜸 “할”을 하여 아교풀을 담은 단지를 하나 내놓으면 선지식은 그것이 경계[미끼]인 줄 모르고 곧 그 경계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지어 낸다. 이것을 본 학인이 다시 “할”을 하여도 앞의 선지식은 이를 놓아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의사도 고칠 수 없는 불치[膏盲]의 병이다. 이런 경우를 ‘객이 주인을 본[看破]다.’라고 한다.”

강의 ; 선문답을 할 경우 주인과 객, 즉 선지식과 학인이 만났을 때 눈이 밝은 학인이 곧 “할”을 하여 마치 아교풀을 담은 단지를 앞에 내어 놓는 것과 같다. 그러면 선지식은 그것이 고기를 낚는 미끼인 줄을 모르고 덥석 물고는 이리 저리 헤아린다. 그 때 학인은 곧 “할”을 하면 선지식은 그 미끼를 놓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예가 있다. 이것은 치료할 수 없는 병이다. 학인이 선지식을 간파하고 선지식은 간파를 당한 것이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나가보자면, 집안이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한 집안이 잘 되려면 어른들이 모법이 되어야한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면 문제가 많다. 나라에도 마찬가지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너무도 평범한 진리다. 나라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매일 매시간 부정과 부패를 소개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부정부패가 왜 그토록 많은가? 윗사람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어느 물줄기도 맑은 곳은 없는가보다. 특히 상부층 지도층에 있는 정치인들, 기업인들, 공직자들, 종교인들, 교육자들이 맑아야 한다.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맑지 않으면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맑을 길이 전혀 없다. 윗물이 흐린데 아랫물이 맑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그런 이치는 없다. 나라가 잘되려면 모든 공장을 멈추더라도 위에서부터 정직하고 검소한 생활을 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다 허사다. 도로 아미타불이다. 위에 있는 정치인들은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인도하고 선지식은 학인을 가르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或是善知識이 不拈出物하고 隨學人問處하야 卽奪이라 學人被奪에 抵死不放하나니 此是主看客이니라


“혹은 또 다른 경우는, 선지식이 아무 것도 내놓지 않고 학인이 물으면 묻는 대로 곧 빼앗아 버린다. 학인이 빼앗기고는 한사코 놓아버리려 하지 않으면 이것을 ‘주인이 객을 간파한다.’라고 한다.”

강의 ; 선문답의 또 한 예로서, 선지식은 찾아 온 학인을 두고 보다가 학인이 무엇을 물으면 선지식은 곧 그 질문을 부정해 버린다. 그 때 학인은 인정을 받기위해서 죽자고 놓치지 않는다. 고인의 말씀을 빌리자면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 어떻습니까?” “놓아버려라.” “한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놓으란 말입니까?” “놓아버리기 싫거든 가져가거라.” 이와 같은 예다. 이런 경우는 선지식이 학인을 간파하고 학인은 간파를 당한 것이다. 이런 예도 크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아름답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미 선문답이 오고가는 사이라면 학인도 한 칼이 있어야 하는데 물고 늘어지기만 한다. 그러나 모든 학인이 다 그러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01.백만송이 장미

02.립스틱 짙게 바르고

03.사랑한 후에

04.제2의 연인

05.이대로 영원히

06.하늘 사랑

07.무지개 타고

08.타인

09.아리수변의 여인

10.별을 쥐고 있는 여자

11.담배 한 개피의 고독

12.사랑할 때와 용서할 때

13.시바의 여왕

14.가버린 사랑

15.슬픈 고백

16.추억열차

17.파리의 여인

18.님이시여 이젠 나의 품안에

19.사랑의 종착역

20.비가 내리면

21.보내는 마음

22.곰례야

23.기별

24.앵무새

25.여보여보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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