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81 ~85

2020. 2. 29. 15: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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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81


14-23 삿되고 바른 것을 알라

 

 


或有學人이 應一箇淸淨境하야 出善知識前이어든 善知識이 辨得是境하고 把得抛向坑裏하면 學人言, 大好善知識이로다 卽云, 咄哉라 不識好惡로다 學人便禮拜하나니 此喚作主看主니라


“혹 어떤 학인이 일개 청정한 경계를 선지식 앞에 내놓으면 선지식이 그것이 경계인 줄을 알아차리고 집어다가 구덩이 속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학인이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십니다’라고 하면 선지식은 곧 ‘쯧쯧,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라고 한다. 그러면 학인이 절을 하는데 이것을 ‘주인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강의 ; 이것은 선지식과 학인 모두 눈이 밝아서 함께 간파하고 문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예다. 마치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드니 가섭존자가 미소를 보내고, 다시 ‘세존은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그대에게 부촉하노라.’ 하면 가섭은 그 말을 기꺼이 받아드리는 광경이라고나 할까? 법을 인가하는 일과 함께 서로 주인이 되어 동시에 간파한 것이다. 임제록에서 공부를 점검하는 감변장(勘辨章)에 많이 있는 예다. 매우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선문답이다.

或有學人이 披枷帶鎖하야 出善知識前하면 善知識이 更與安一重枷鎖라 學人歡喜하야 彼此不辨하나니 呼爲客看客이니라 大德아 山僧如是所擧는 皆是辨魔揀異하야 知其邪正이니라


“혹 또 어떤 학인이 목에 칼을 쓰고 발에 족쇄를 찬 채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이 그 위에다 다시 칼과 족쇄를 한 겹 더 씌워버리는데도 학인이 기뻐하여 피차가 서로 분간하지 못하면, 이것을 ‘객이 객을 간파한다.’고 한다.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이와 같이 예를 든 것은 모두가 마군과 이단을 가려내서 삿된 것과 바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강의 ; 이 단락에서 간파한다는 것은 위의 사례와 비교해 볼 때 말이 좀 일정하지 않다. 객이라는 말이 학인이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서는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도 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로가 눈이 어두운 처지이기 때문에 이리 저리 뒤엉킨 것이다. 학인이 기뻐함도 진정한 기쁨이 아니다. 동반의식에서 온 기쁨이다.

 
근래의 선문답을 보면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대개 자신을 높이고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눈을 뜬 사람이라면 어찌 자랑을 하겠는가? 자랑을 하거나 아상을 내세운다면 어찌 눈을 뜬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됨을 알만하다. 어릴 때 치기나 객기로 선배스님들과 일방적인 말 한마디 주고받은 것을 가지고 평생 떠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니까 그 선지식이 대답을 못하더라.’는 등. ‘옛 공안을 못 이르더라.’는 등. 입만 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시장 아낙네들에게 그런 자랑을 늘어놓는다. 임제록을 강설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필자도 실은 한없이 부끄럽다. 혹 학인과 문답을 한다 하더라도 서로 모르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노릇이다. 흉내만 내는 것이다. 그런 것도 기록해 두었다가 책이 되어 돌아다닌다. 지금도 또 어디선가 자랑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참으로 아득하다.


이 법에 눈을 제대로 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알아내는 기준이 있다. 여덟 가지 바람[八風]이다. 이익·손해·훼방·추켜세움·칭찬·놀림·고통·즐거움이다. 이 여덟 가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그 위인이 어지간하다고 할 수 있다. 안팎으로 모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밖으로는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 같으나 속마음이 흔들리면 그는 아니다. 지사나 의인이나 호걸도 이익이나 손해, 명예나 칭찬, 비방 등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물며 마음공부에 달통한 도인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임제스님은 마와 이단을 잘 가리고 사와 정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임제록 82


14-24 신 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道流야 寔情大難이요 佛法幽玄이나 解得可可地니라 山僧竟日에 與他說破나 學者總不在意하고 千徧萬徧을 脚底踏過하야 黑沒焌地로다 無一箇形段하야 歷歷孤明이언만 學人信不及하고 便向名句上生解하야 年登半百토록 祇管傍家負死屍行하며 擔却擔子天下走하나니 索草鞋錢有日在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진실한 마음을 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고 불법은 심오하지만 알고 보면 별것이 아닌 당연한 일[可可]이다. 산승은 온종일 그들로 더불어 설파해주지만 공부하는 이들은 도대체 마음을 쓰지 않는다. 천 번 만 번 밟고 다니면서도 도무지 깜깜하다. 아무런 형체도 없으면서 밝고 뚜렷한 이것을 학인들은 믿지 못하고 명자와 글귀위에서 이해하려 한다. 나이가 오십이 넘도록 단지 송장을 짊어지고 밖으로만 다니는구나. 이렇게 짐을 지고 천하를 돌아다녔으니 짚신 값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강의 ; 이 지구상에서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 진실로 발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진실한 발심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생 최고의 가치인 도를 깨닫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소인들은 도에 대해서 설명을 들면 비웃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가 저런가 망설인다. 하지만 대인은 흔쾌히 받아드린다. 소인들이 비웃지 않으면 족히 도가 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더구나 대부분 소인의 성향을 가진 말세의 인간들이 도에 대해서 진정으로 마음을 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오욕락과 세상사 인간사에 홀딱 반하고 깊이 빠져서 벗어나올 길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무슨 도에 관심이 있겠는가? 무슨 진정한 불교에 뜻이 있겠는가? 불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삶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진실한 마음을 내기가, 진정으로 발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는 깊고 오묘하다. 설사 깊고 오묘하더라도 알고 보면 별 것이 아니다. 작은 일이다. 쉽고 간단한 일이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임제스님은 처음 대우스님에게 가서 불법을 깨닫고 나서 ‘황벽의 불법이 간단하구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옷 입고 밥 먹고 보고 듣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인들은 그 쉬운 것을 믿지 않는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은 그 자리, 곧 자기 자신이지만 문자나 이론을 따라가며 사량 분별을 하고 머리를 굴린다. 옆길로 옆길로 생명 없는 송장을 매고 천하를 돌아다닌다. 짚신은 얼마나 달았을까? 짚신 값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임제록 83


14-25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쓴다

 

 


大德아 山僧이 說向外無法하면 學人不會하고 便卽向裏作解하야 便卽倚壁坐하며 舌拄上齶하고 湛然不動하야 取此爲是祖門佛法也하나니 大錯이로다 是儞若取不動淸淨境하야 爲是면 儞卽認他無明爲郞主라 古人云, 湛湛黑暗深坑이 實可怖畏라하니 此之是也니라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밖에는 법이 없다고 말하면 공부하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곧 안으로 알음알이를 지어서 벽을 보고 앉아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는 이것을 조사문중[祖門]의 불법이라 여기는데 크게 잘못 아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경계를 옳다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無明)을 주인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깊고 깊어 캄캄한 구덩이는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강의 ; 이 단락은 참선공부의 일종인 묵조사선(黙照邪禪)을 비판하는 이야기다. 그 때는 화두의 성격을 띤 법어는 많이 있었으나 특별히 그 법어를 오늘날 화두처럼 참구하기를 지도하는 일은 없었다. 선문답을 알아듣지 못하면 스스로 참구하고 사유할 뿐이었다. 또 묵조사선이라고 지칭하는 말도 없었다. 뒷날 그런 폐단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말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뜨는 공부에 있어서 묵묵히 앉아 안으로 관하면서 생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조사문중(祖師門中)의 불법이라고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캄캄한 무명의 상태를 대기대용(大機大用), 전체작용(全體作用)의 주인공, 무위진인으로 오인한 것이다.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큰 생명이 목석처럼 멍청한 상태가 되어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임제스님이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를 통하여 깨달은 경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불법의 대의를 알고자하다가 생각이 이러한 무기공의 상태로 기우려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병을 없애기 위해 뒷날 대혜(大慧)스님은 선문답의 언어인 화두를 들고 참구할 것을 권하게 되었고, 화두를 참구하는 공부가 불교를 깨닫는 최 첩경의 방편이라 생각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儞若認他動者是면 一切艸木이 皆解動하니 應可是道也니라 所以動者是風大요 不動者是地大니 動與不動이 俱無自性이니라 儞若向動處捉他하면 他向不動處立하고 儞若向不動處捉他하면 他向動處立하나니 譬如潛泉魚가 鼓波而自躍이니라 大德아 動與不動은 是二種境이니 還是無依道人은 用動用不動하나니라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것을 오인해서 옳다고 한다면 온갖 초목들도 다 움직일 줄 아니 그것도 응당 도이리라.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질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의 성질이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모두 다 고정된 자성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또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곳에 서 있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결을 치면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큰스님들이여,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두 가지 경계이다. 의지함이 없는 도인[無依道人]이라야 움직임도 쓰고 움직이지 않음도 쓰느니라.”

강의 ; 우리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옳으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다.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중도(中道)다.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선과 악의 상대적 견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쪽으로든 치우쳐 있으면 그것은 편견이고 변견(邊見)이다. 잘못된 견해다. 그래서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위진인은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쓰고 다 수용한다. 양변을 멀리 벗어나서 치우치지 않는다. 차(遮)와 조(照)의 동시적 삶을 산다. 그것이 불교적 삶이다.

 
왜냐하면 선과 악과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과 있음과 없음과 사랑하고 미워함과 주관과 객관과 번뇌무명과 보리열반과 부처와 중생과 성인과 범부 등 이 모든 것이 본래로 공인데 다만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에 의해서 존재하므로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이런 이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도라고 한다. 존재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런 이치를 알아서 거기에 맞게 살면 그것이 중도적 삶이다. 중도적 삶을 사는 사람을 무의도인, 무위진인이라고 한다. 부처요 조사라고 한다.

 
그들은 혹은 동을 쓰고 혹은 부동을 쓴다. 영가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행할 때도 선이고 앉을 때도 선이다. 어·묵·동·정에 그 마음 편안하다.”라 하였다.



임제록 84


14-26 삼종근기로 판단한다

 

 


如諸方學人來하면 山僧此間은 作三種根器斷이라 如中下根器來하면 我便奪其境而不除其法하고 或中上根器來하면 我便境法을 俱奪하고 如上上根器來하면 我便境法人을 俱不奪하고 如有出格見解人來하면 山僧此間은 便全體作用하야 不歷根器니라


“제방의 학인들이 찾아오면 산승은 여기서 세 가지의 근기로 그들을 판단한다. 중하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만 빼앗고 그 법을 없애지 않는다. 혹 중상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을 함께 빼앗는다. 만약 상상의 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과 사람을 다 빼앗지 않는다. 만약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나는 여기서 곧 전체작용을 나타내어 근기를 따지지 않는다.”

강의 ; 사람들의 근기란 다양하다. 하필 세 가지 근기이겠는가. 부처님은 다양한 근기를 모두 헤아려서 알맞게 대처한다. 그러나 조사들은 법을 씀에 있어서 간단명료하다. 첫째 사람이 의지할만한 것이 될 경계는 부정해버리고 그 이치[법]는 그대로 두고 상대한다. 둘째 경계와 법을 모두 다 부정하고 상대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어디에 몸 둘 바를 모른다. 셋째 경계와 법과 사람을 그대로 두고 상대한다. 이것은 좀 더 높은 차원이다. 그러나 모두 상식 안에서 법을 쓴다. 그러나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근기를 헤아리지 않고 전체를 작용한다. 이런 사람은 근기에 해당시키지 않는다. 전체작용이란 임제스님이 처음 황벽스님에게 불법의 대의를 물었을 때 황벽스님이 방을 써서 보여준 경우다

 

[黃蘗山頭 曾遭痛棒].
전체작용(全體作用) 불역근기(不歷根器). 좋은 말이다. 임제스님의 대기대용이 엿보인다.

大德아 到這裏하야 學人著力處니라 不通風하며 石火電光도 卽過了也니라 學人이 若眼定動하면 卽沒交涉이니 擬心卽差요 動念卽乖라 有人解者하면 不離目前이니라

 
“큰스님들이여, 여기에 이르게 되면 공부하는 이가 힘을 한껏 써야 한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전광석화까지도 곧 지나가 버린다. 학인이 만약 눈만 깜박여도 곧 교섭이 없어진다.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면 곧 틀리며 생각을 움직였다하면 바로 어긋나 버린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눈앞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강의 ; 불교의 대의를 물었는데 사정없이 방을 후려 친 그 전체작용에 대해서 무어라고 입을 땔 것인가? 있는 힘을 다 해야 하리라. 바람도 통하지 않는 자리다. 전광석화보다도 빠르다. 날아오는 총알을 세 번 네 번 쪼개는 칼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학인이 눈도 깜박이지 못하는 자리다. 1초는 12찰나고, 1찰나에 9백번 생멸한다는 그 마음작용으로 무어라 일러도 이미 틀려버리고 어긋나 버린다. 너무 느려서 벌써 십만 팔 천리로 어긋나 버린 것이다. 사유심(思惟心)으로 전체작용의 경계를 헤아려서야 되겠는가. 이미 멀리 달아나서 그 낙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지금 이 순간 목전에서 떠나있지 않다는 것을.

大德아 儞擔鉢囊屎擔子하고 傍家走하야 求佛求法하니 卽今與麽馳求底를 儞還識渠麽아 活鱍鱍地하야 祇是勿根株라 擁不聚하며 撥不散하야 求著卽轉遠이니 不求면 還在目前하야 靈音屬耳어니 若人不信하면 徒勞百年이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랑에 똥짐을 짊어지고 옆으로 내달리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데, 지금 그렇게 구하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대들은 아는가? 활발발하게 작용하지만 그 뿌리가 없으니 움켜잡아도 모이지 않고 펼쳐도 흩어지지가 않는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하지 않으면 도리어 눈앞에 있다. 신령스런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데 만약 이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백년 세월을 헛수고만 할 뿐이다.”

강의 ; “똥자루를 짊어지고 옆으로만 내달린다.” 옆이란 무엇인가? 치우친 소견이다. 유무, 선악, 동정, 고락, 증애, 역순, 시비 등등의 양변에 떨어진 견해다. 육조스님도 도명을 만나 첫 법문에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악 시비의 옆길을 헤매지 말라는 뜻이다. 세존이 처음 성도하시고 다섯 비구들을 찾아간 것도 고행의 삶과 쾌락의 삶,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말고 중도적 삶을 살기를 권하기 위해서다.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라는 <중도 대 선언(中道大宣言)>이 불타의 첫 일성이었다.
본래로 시비, 선악, 고락, 유무를 벗어난 지금 구하고 있는 그 사람을 아는 것이 문제의 열쇄다. 인간은 본래 그와 같은 치우친 견해가 아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 본래 사람을 알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온 우주적 작용을 하지만 무슨 뿌리나 줄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움켜잡을 수도 없다. 흩어도 흩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구하거나 찾으면 찾아질 것 같으나 찾을수록 멀어지는 것이 또한 이 사람이다. 차라리 찾지 않으면 눈앞에 있다. 저 바람소리가 그 사람의 소리인가? 그 사람이 저 바람 소리인가? 지금 이 사람은 비시, 선악, 고락, 유무인가?

임제록 85


14-27 모두다 놓아버리라

 

 


道流야 一刹那間에 便入華藏世界하며 入毘盧遮那國土하며 入解脫國土하며 入神通國土하며 入淸淨國土하며 入法界하며 入穢入淨하며 入凡入聖하며 入餓鬼畜生이나 處處討覓尋하야도 皆不見有生有死하고 唯有空名이로다 幻化空花를 不勞把捉이니 得失是非를 一時放却하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한 찰나 사이에 연화장 세계에 들어가고 비로자나불의 국토에도 들어간다. 해탈국토에도 들어가고 신통국토에 들어가고 청정국토에도 들어간다. 법계에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 들어간다. 범부의 세계에 들어가고 성인의 세계에 들어가며, 아귀·축생의 세계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곳곳마다 찾고 또 찾아보아도 아무 곳에도 생사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허망한 이름만 있을 뿐이다. 환영이며 허깨비며 헛꽃인 것을 애써서 붙잡으려 하지 말고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모두다 놓아버려라.”

강의 ; 사람의 마음은 미묘 불가사의하다. 사람이 보고 듣고 감지하고 창조해내는 그 능력도 역시 무궁무진하다. 촌보도 움직이지 않고 일체 세계를 다 돌아다닌다. 한 순간에 삼천 가지의 삶을 산다[一念三千]. 지옥, 아귀, 축생, 성인, 범부 등 없는 것이 없다. 작은 먼지 속에 앉아서 무한한 세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이 분명하지만 그 종적을 찾아보면 어디에도 태어나고 죽고 가고 오고하는 일이 없다. 허망한 이름뿐이다. 극락세계도 화장세계도 지옥세계도, 해탈도 신통도 청정하고 더러운 곳도, 범부도 성인도 아귀도 축생도 모두가 헛된 이름뿐 실체는 없다.

 
그 인생이 어디쯤 왔던지 뒤돌아보면 영광도 오욕도 기쁨도 슬픔도 성공도 실패도 승리도 패배도 텅 비어 없다. 누구나 똑 같다. 부귀빈천 남녀노소 그 누구에게도 한결같다. 한바탕 꿈이고 스쳐가는 환영이다. 인생사 일체가 환영이며 허깨비며 헛꽃인 것을 애써서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말라.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모두다 놓아버려라. 깃털처럼 가볍게 살라. 물처럼 흘러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살라.
이런 노래가 있다. 굽이쳐 넘실대며 흘러가는 길고 긴 강물, 그 물결에 휩쓸리듯 옛 사람들 모두 다 사라졌네. 옳고 그르고 이기고 지는 일 모두가 허망하여라. 청산은 예와 다름없건만 서산의 붉은 해는 몇 번이나 넘어 갔던가. 고금의 많고 많은 일들 한바탕 웃음에 붙여 보낸다.


신심명의 글이다. 다시 한번 음미해야 한다.

환화공화(幻化空花) 불노파착(不勞把捉). 득실시비(得失是非) 일시방각(一時放却).

인생은 결국 이것이다.





 ♬ 윤시내 노래모음  

     

    01. 그대에게서 벗어나고파

    02. 목마른 계절
    03. 공부합시다
    04. D.J에게
    05. 여자의 마음
    06. 흔들리는 마음
    07. 몬테카를로의 추억
    08. 열애
    09. 천년
    10. 고목
    11. 여심
    12. 연민 (with 전영록)
    13. 그대 떠나버리면 (with 나미)
    14. 공연히
    15. 난 모르겠네


     

    - 바람나무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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