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86~90

2020. 3. 7. 15: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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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86


14-28 전통과 계보가 있어야 한다

 


道流야 山僧佛法은 的的相承하야 從麻谷和尙과 丹霞和尙과 道一和尙과 廬山與石鞏和尙하야 一路行徧天下하나 無人信得하고 盡皆起謗이로다 如道一和尙用處는 純一無雜이라 學人三百五百이 盡皆不見他意요 如廬山和尙은 自在眞正하니 順逆用處를 學人不測涯際하고 悉皆忙然이요 如丹霞和尙은 翫珠隱顯하야 學人來者가 皆悉被罵요 如麻谷用處는 苦如黃檗하야 皆近不得이요 如石鞏用處는 向箭頭上覓人하니 來者皆懼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불법은 확실하고 분명한 선문의 정통을 계승한 것이다. 위로부터 내려온 마곡화상과 단하화상(738-823)과 도일화상(709-788)과 여산화상과 석공화상은 한길로 조사선의 가풍을 천하에 두루 폈는데 아무도 믿지 않고 모두들 비방만 하고 있다.


예컨대 도일화상이 법을 쓴 것은 매우 순수하여 잡티가 없었다. 그 분으로부터 도를 배우던 3백에서 5백이나 되는 학인들은 모두 다 화상의 뜻을 보지 못하였다. 여산화상은 자재하시고 참되고 바른 분이었다. 순으로 혹은 역으로 법을 쓰는 것을 학인들이 그 경계를 측량하지 못하고 모두 다 갈팡질팡 하였다. 단하화상은 구슬을 굴리는 솜씨가 자유자재하여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찾아오는 학인들마다 모두 꾸지람을 들었다. 마곡화상이 법을 쓰는 것은 그 쓰기가 소태나무와 같아서 모두들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또 석공화상이 법을 쓰는 것은 화살 끝에서 사람을 찾는 것이어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강의 ; 세존이 자신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은 다시 아난에게 전하고, 아난은 다시 상나화수에게 전하고, 상나화수는 다시 우바국다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28대에는 보리달마에게 전해졌다. 보리달마는 동토(東土)에 와서 초조(初祖)가 되고 그 후에는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전해졌다. 다시 남악에서 마조로, 마조에서 백장으로, 백장에서 황벽으로, 황벽에서 임제로 전해졌다.


본문에서 소개된 조사들은 모두 그 전통이 뚜렷하며 법을 활용하는 가풍이 독특하고 파격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조사들의 가풍이 재각각인 것을 생각해보면 깨달음의 경지는 같다고 하드라도 그 활용에 있어서는 다 타고난 성격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한 사람도 같은 이가 없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삶이란 결국 지금 사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단지 존재 일체를 보는 시각이 좀 달라졌을 뿐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달라질 필요도 없다. 각양각색의 다른 삶의 모습 그대로 깨달은 삶의 모습이다. 복숭아꽃은 붉고 배꽃은 희다. 황새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밤나무에는 밤이 열린다. 산은 산, 물은 물 그대로다.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차별한 것은 여전히 차별하고 평등한 것은 여전히 평등한 그대로다.

임제록 87


14-29 옷 입은 것에 속지 말라 1

 


如山僧今日用處는 眞正成壞하며 翫弄神變하야 入一切境호대 隨處無事하야 境不能換이니라 但有來求者하면 我卽便出看渠하나 渠不識我새 我便著數般衣하면 學人生解하야 一向入我言句하나니 苦哉라


“산승이 오늘날 법을 쓰는 것은 진정으로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며 가지고 놀기도 하고 신통변화를 부리기도 한다. 일체 경계에 들어가지만 가는 곳마다 아무 일이 없어서 경계가 나를 빼앗지 못한다. 누가 찾아와서 구하는 이가 있으면 나는 곧 바로 그를 알아보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곧 몇 가지 옷을 입어 보이면 학인들은 알음알이를 내어 한결같이 나의 말 속으로 끌려 들어오고 마니 슬픈 일이다.”

강의 ; 앞에서 다섯 분 선지식의 가풍을 간략히 소개하고 여기서는 임제스님 자신이 법 쓰는 가풍의 일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진정으로 만들고 부순다. 마술하는 사람이 구슬을 가지고 희롱하듯 보였다가 감췄다가 한다. 또는 하나를 보이다가 여러 개를 보이기도 한다. 그 신묘한 변화는 현란하다.

 
그리고 모든 경계에 자유자재로 드나든다. 청정한 경계나 더러운 경계나 성인의 경계나 범부의 경계나 부처의 경계나 중생의 경계에 다 드나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경계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 그래서 경계가 나를 빼앗거나 바꾸어 놓지 못한다. 수처작주(隨處作主)다. 어떤 상황이든 나는 그 상황에 따라가지 않고 나는 나로서 당당하게 주인으로 산다. 명예와 이익이 나를 유혹하더라도, 칭찬과 비방이 나를 흔들더라도 나는 여여히 동요하지 않는다. 가난과 고통이, 병고와 몰락이, 패배와 오욕이 나를 나락으로 빠뜨리더라도 나는 당당하고 유유자적하다. 내가 하는 일에 시기와 질투로써 헐뜯고 모함하고 욕하고 방해하더라도 나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을 가엽고 불쌍하게 생각한다. 가르치고 제도해야할 사람들로 생각한다. 함께 덩달아 열을 올리거나 시비를 삼지 않는다. 수처작주, 수처작주한다.


법을 씀에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오면 나는 그들을 곧 알아차린다. 여러 가지 옷을 바꿔 입어가며 변신을 해 보이듯이 작용에 변화를 보이면 학인들은 그 뜻을 모른 체 말에만 끌려 다닌다. 마치 흙덩이를 쫓아가는 삽살개 같다. 흙덩이를 던지는 그 사람을 물 줄 모른다. 슬프고 안된 일이다.

瞎禿子無眼人이 把我著底衣하야 認靑黃赤白이로다 我脫却하고 入淸淨境中하면 學人一見하고 便生忻欲타가 我又脫却하면 學人失心하야 忙然狂走하야 言我無衣로다 我卽向渠道호되 儞識我著衣底人否아하면 忽儞回頭하야 認我了也로다


“눈멀고 머리 깎은 중이나 안목 없는 사람들이 내가 입은 옷을 가지고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흰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내가 옷을 벗어버리고 텅 빈 경계에 들어가면 학인은 한번 보고 기꺼운 생각을 낸다. 또 내가 다시 벗어버리면 마음 둘 바를 몰라 바쁘게 달아나면서 나에게 옷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그대는 내가 옷을 입는 그 사람을 아는가?’ 라고 물으면, 홀연히 머리를 돌려버리고 나를 잘못 알고 만다.”

강의 ; 보통의 사람들도 몇 가지의 옷을 입고 변화를 부린다. 중국영화에 변검(變臉)이라는 것이 있다. 장예모가 감독한 세계영화제 최다수상작이다. 소매를 휘저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가면이 바뀌는 신기한 중국 전통의 가면술을 영화화 한 것이다. 인간의 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선지식이 사람을 교화하는 방편으로써는 근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갖가지 옷을 바꿔 입는 것은 당연하다. 혹은 옷을 다 벗어버리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옷이 아니라 옷을 입는 그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다. 차별 없는 참사람, 곧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무위진인을 어떻게 아는가? 지금 무엇이 무위진인인가? 하는 그 사람이다. 그것도 아니면 바람소리를 듣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이다. 불법을 물으러 갔다가 죽도록 얻어맞은 그 사람이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할”이다.

임제록 88


14-30 옷 입은 것에 속지 말라 2

 

 


大德아 儞莫認衣하라 衣不能動이요 人能著衣하나니 有箇淸淨衣하며 有箇無生衣와 菩提衣와 涅槃衣하며 有祖衣有佛衣니라 大德아 但有聲名文句하야 皆悉是衣變이라 從臍輪氣海中鼓激하야 牙齒敲磕하야 成其句義니 明知是幻化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옷을 잘못 알지 말라. 옷은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사람이 능히 옷을 입을 수 있다. 청정한 옷이 있고, 생사가 없는 옷이 있으며 보리의 옷과 열반의 옷이 있으며, 조사의 옷과 부처의 옷도 있느니라. 큰스님들이여! 다만 소리와 명칭과 문구 따위로만 있을 뿐 모든 것은 옷에 따라 변화하는 것들이다. 배꼽 아래 단전으로부터 울려 나와서 이빨이 딱딱 부딪쳐 그 글귀와 의미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환화임을 알아야 한다.”

강의 ;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옷을 입는 것에 따라 달리 보인다. 도둑놈 사기꾼도 승복만 입고 있으면 수행하는 스님으로 알고 있다. 옷으로써 의식의 변화와 법을 쓰는 작용을 상징하여 말씀하신 것은 매우 뛰어난 발상이다. 선지식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법어가 아니다. 옷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불교의 여러 가지 고급스런 옷들을 걸어놓고 전을 편다. 가끔씩 입어보이기도 한다. 그런대 옷만 입고 있어도 실제로 그와 같은 존재가 있는 것으로 속는다. 눈이 없는 사람들은 곧 바로 사기를 당한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그 사람은 옷에 관계없이 늘 그 사람이며 차별 없는 참사람이다.

 
청정이니, 생사가 없느니, 보리니, 열반이니, 조사니, 부처니 하는 명칭을 일컫는 소리는 모두 옷에 불과하다. 그 소리들은 사람이 소리를 질러서 나오는 음성이다. 먼 하늘가에 메아리 되어 흩어지고 만다. 불을 아무리 말해도 입은 타지 않는다. 아무리 조사와 부처를 말하더라도 말을 하는 즉시 흩어지고 만다. 그보다 천만 배 수승한 말을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허망 그 자체다. 환영이다. 실체가 없는 환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있는 것은 있는가? 무위진인을 말하고 있으나 그 역시 옷이다. 본체는 공적한 것이다. 먼 하늘 가로 흩어지고 마는 메아리 일뿐이다.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잠간 존재할 뿐이다. 그 역시 환영이요, 환상일 뿐이다. 공이다. 원인과 조건이 효과가 있는 동안만 잠간 있는 듯 하다가 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본래 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위진인도 연기며 공이다. 공이며 연기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법칙인 중도의 원리다.

大德아 外發聲語業하며 內表心所法하고 以思有念은 皆悉是衣니 儞祇麽認他著底衣爲實解하면 縱經塵劫하야도 祇是衣通이라 三界循環하야 輪廻生死하나니 不如無事니라 相逢不相識하고 共語不知名이로다


“큰스님들이여!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고 안으로 마음먹은 것을 표현하며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은 모두가 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이 그렇게 걸치고 있는 옷을 오인하여 실다운 견해라고 여긴다면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더라도 다만 옷에 대해서만 통달할 뿐이다. 삼계에 돌고 돌며 생사에 윤회하게 되니 차라리 아무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서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해도 상대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격이다.”

강의 ; 생각하고 말하는 것 모두가 옷이다. 주의 주장과 사상과 개념이 모두 옷이다. 의식 사량 계교 분별이 모두 옷이다. 사람들의 의식의 세계에서 펼치는 모든 것이 옷이다. 옷을 오인하여 실다운 견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헛일이다. 다만 옷에 대해서만 도통을 했을 뿐이다. 사량 분별과 세지변총(世智辯聰)만 발달해봐야 삼계를 돌고 돌며 생사에 윤회할 뿐이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서로 만나도 알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상대의 이름을 모른다.’라는 말은 매우 적절한 인용이다. 우리가 사람을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과연 알기나 하는 것인가? 평생을 함께 살아도 실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불교를 알고 이치를 알고 진리를 알고 부처를 알고 조사를 알고 보살을 알고 나한을 안다는 것이 역시 그렇다. 다만 그와 같은 말과 외형을 따라 끝없이 윤회할 뿐이다.


임제록 89


14-31 명자를 잘못 알고 있다

 

 


今時學人不得은 蓋爲認名字爲解니라 大策子上에 抄死老漢語하야 三重五重으로 複子裏하야 不敎人見하고 道是玄旨라하야 以爲保重하나니 大錯이로다 瞎屢生이여 儞向枯骨上하야 覓什麽汁고


“오늘날 학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대개가 이름과 문자를 잘못 알아서 알음아리를 내기 때문이다. 큰 노트에다가 죽은 노인들의 말씀을 베껴 가지고 세 겹 다섯 겹 보자기에 싸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오묘한 이치라 하며, 애지중지 하는데 아주 잘못된 일이다. 눈멀고 어리석은 바보들아! 그대들은 말라빠진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을 찾고 있는가?”

강의 ;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지만 불교를 알지 못하는 것은 불교를 설명한 책이나 경전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트에다 돌아가신 노인들의 말씀을 기록하여 세 겹 네 겹 싸서 애지중지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노인들이란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체 경전과 어록들을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을 꾸짖는 말이다. 경전의 문지란 단지 말에 불과하다. 말을 기록한 먹과 종이에 불과하다. 사과를 설명한 책을 아무리 들려다 봐야 사과는 아니다. 불 이야기를 아무리 해 봐야 말이 입을 태우지는 않는다. 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불이 나오겠는가? 사과 이야기를 아무리 해 봐야 사과가 나오겠는가? 눈멀고 어리석은 이들이여, 마른 뼈다귀에서 국물을 기대하지 말라.

有一般不識好惡하야 向敎中하야 取意度商量하야 成於句義하나니 如把屎塊子하야 向口裏含了라가 吐過與別人하며 猶如俗人이 打傳口令相似하야 一生虛過로다 也道我出家라하나 被他問著佛法하면 便卽杜口無詞하야 眼似漆突하며 口如楄擔하니라 如此之類는 逢彌勒出世호대 移置他方世界하야 寄地獄受苦니라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어떤 무리들이 있어서 경전을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따져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마치 똥 덩어리를 입 속에 넣었다가 다시 뱉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주는 것과도 같다. 또 속인들이 비밀한 말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것과 같으니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 라고 떠벌리지만 불법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못한다. 멍하니 처다 보는 눈은 새까만 굴뚝같고 입은 서까래를 건 것 같구나. 이와 같은 무리들은 미륵 부처님이 나오시더라도 다른 세계로 옮겨가서 지옥에 살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강의 ; 불교를 강의하고 경전을 설하는 사람들이 꼭 들어 두어야할 말씀이다. 똥 덩어리를 입 속에 넣었다가 다시 뱉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주는 일이란 것을 알고 하자. 꼭 꼭 씹고 잘게 씹어서 세상을 향하여 냄새를 더욱 독하게 풍기면서 말이다. 불교를 강의하고 경전을 설하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가 똥을 씹는 업이다. 온 세상에 악취를 풍기는 일이다.

 
이것은 좀 다른 뜻이지만 실은 불교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아야 한다. 온 세상을 똥 세상으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을 악취에 질식하도록 해야 한다.
불교의 진실은 어디가고 터무니없이 와전된 것을 꾸짖는 말씀이다. 말을 소리 내지 않고 입이 움직이는 모양만 보고 짐작하여 그 짐작한 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입 모양만 보여주고 한다. 이렇게 전하고 또 전하여 많은 사람에게 전했을 때 그 본의가 얼마나 와전되었을까? 얼마나 헛된 일일까? 그러면서도 입만 벌리면 ‘나는 출가하여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다.’라고 떠든다. 하지만 진정한 불교를 물으면 눈은 멍하니 초점을 잃어서 혼이 나간 사람 같다. 입은 꼭 다문 것이 한일자[一] 입을 하고 있다. 미륵불이 출세하더라도 불교를 깨칠 날이 없을 것이다.

임제록 90


14-32 참 부처는 형상이 없다

 


大德아 儞波波地往諸方하야 覓什麽物하야 踏儞脚板闊고 無佛可求며 無道可成이며 無法可得이니라 外求有相佛하면 與汝不相似니 欲識汝本心인댄 非合亦非離로다 道流야 眞佛無形이요 眞道無體요 眞法無相이라 三法混融하야 和合一處니 旣辨不得을 喚作忙忙業識衆生이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쁘게 제방을 쏘다니며 무엇을 구하는가? 그대들의 발바닥이 넓적하도록 걸어 다녔는가? 부처는 구할 수 없고, 도는 이룰 수 없으며, 법은 얻을 것이 없느니라. 밖으로 형상이 있는 부처를 구한다면 그대들과는 닮지 않은 것이다. 그대들의 본래 마음을 알고자 하는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된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도는 실체가 없으며,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이 세 가지 법이 섞이고 융통하여 한 곳에 화합한 것이니,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망망한 업식중생이라고 한다.”

강의 ; 불교를 알기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는가? 불법을 깨닫기 위해서 천하의 선지식을 찾아 얼마나 많이 헤매었던가? 읽어보고 찾아본 성인들의 말씀과 경전 어록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다 포기한 체 잠을 쫒아가며 먹을 것을 참아가며 살아 온 날들이 그 얼마던가? 인간으로서의 모든 미련들을 끊기 위하여 ‘한 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는 세상에 돌아오지 않으리라[一入靑山更不還].’는 구절을 염불을 외듯 외우며 보낸 세월이 또 얼마던가? ‘부처는 구할 수 없고, 도는 이룰 수 없으며, 법은 얻을 것이 없는데.’ 참으로 아득하고 망망한 업식중생(業識衆生) 그대로였다.


참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도는 실체가 없으며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모양 없는 모양도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도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모양도 없다. 모양이 없다고 하는 그 모양도 없다. 그래서 ‘만약 물질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결코 부처를 볼 수 없으리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형상에서 형상이 없음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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