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21. 14:50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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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97
14-39 오무간업
大德아 造五無間業하야사 方得解脫이니라 問, 如何是五無間業고 師云, 殺父害母하며 出佛身血하며 破和合僧하며 焚燒經像等이 此是五無間業이니라 云, 如何是父오 師云, 無明是父니 儞一念心이 求起滅處不得하야 如響應空하야 隨處無事를 名爲殺父니라 云, 如何是母오 師云, 貪愛爲母니 儞一念心이 入欲界中하야 求其貪愛하나 唯見諸法空相하야 處處無著을 名爲害母니라 云, 如何是出佛身血고 師云, 儞向淸淨法界中하야 無一念心生解하고 便處處黑暗이 是出佛身血이니라 云, 如何是破和合僧고 師云, 儞一念心이 正達煩惱結使하야 如空無所依가 是破和合僧이니라 云, 如何是焚燒經像고 師云, 見因緣空心空法空하야 一念決定斷하야 逈然無事가 便是焚燒經像이니라
“큰스님들이여!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업을 지어야 바야흐로 해탈하게 되느니라.”
“무엇이 오무간업입니까?”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어머니를 해치는 것과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과 화합 승단을 깨뜨리는 것과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고 깨트리는 것이 오무간업이다.”
“무엇이 아버지입니까?”
“무명이 아버지다.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곳을 찾을 수 없어 마치 허공에 메아리가 울리는 것 같고 어디를 가나 일이 없는 것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니라.”
“무엇이 어머니입니까?”
“탐내고 애착하는 것이 어머니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욕계에 들어가 그 탐내고 애착하는 것을 찾아보아도 오직 모든 법은 공한 모양임을 볼 뿐이고 어디에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어머니를 해친 것이니라.”
“무엇이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입니까?”
“그대들이 청정한 법계에서 한 생각 마음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고 어디에서는 캄캄한 것[절대평등]이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니라.”
“무엇이 화합승단을 깨뜨리는 것입니까?”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번뇌의 속박을 바르게 통달하여 마치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 같은 것이 화합승단을 깨뜨린 것이니라.”
“무엇이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입니까?”
“인연이 비고 마음이 비고 법이 비었음을 보아서 한 생각에 결정코 끊어서 초연히 일이 없는 것이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이니라.”
강의 ; 다섯 가지 무간지옥에 들어갈 죄업을 매우 독특한 견해로 풀이하였다. 불교도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것이 아버지, 어머니, 부처님, 승단, 경전과 불상들이다. 이것들을 헤치는 것을 일반 불교에서는 큰 죄악으로 생각해서 무간지옥에 들어갈 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헤친다는 것을 특별한 뜻으로 해석하여 이 다섯 가지 업을 지어야 비로소 해탈한다고 하였다. 선문에서 가끔 보이는 좀 장난기 있는 엉뚱한 해석이다. 어떤 조항이든 일관성 있게 말씀하신 것은 텅 비어 없음이다. 인연이 비고 마음이 비고 법이 비고, 번뇌의 속박이 없고 알음아리가 없고, 탐욕과 애착이 공하고 무명으로 생멸하는 것은 허공의 메아리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텅 비어 없어야 한다. 세상사는 좋은 것이 있으면 당연히 나쁜 것도 있기 마련이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듯이. 흥망성쇠는 세상의 순리다. 춘하추동 사계절은 쉬지 않고 순환한다. 생자필멸 회자정리의 법칙 그대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불어난다고 기뻐할 것도 아니고 줄어든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다. 만났다고 기뻐할 것도 헤어진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다. 결국 모두가 텅 비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텅 비어 없는 줄 알아야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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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99
14-41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잃을 것이다
道流야 莫將佛爲究竟하라 我見猶如厠孔이요 菩薩羅漢은 盡是枷鎖며 縛人底物이니 所以로 文殊仗劍하야 殺於瞿曇하며 鴦掘持刀하야 害於釋氏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부처를 최고의 경지라고 여기지 말라.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화장실의 변기와 같은 것이다. 보살과 나한은 모두 다 목에다 씌우는 칼과 발을 묶는 족쇄와 같이 사람을 결박하는 물건들이다. 그러므로 문수는 긴 칼을 비껴들고 부처님을 죽이려 했고, 앙굴리마라는 단도를 가지고 석가모니를 해치려 한 것이다.”
강의 ; 강강(剛强)한 말세의 사람들에게는 역시 강강한 처방이 필요하다. 제발 부처니 보살이니 조사니 하는 성스러운 모습과 그 명칭에서 벗어나라. 부처란 무엇인가? 마치 화장실의 변기와 같은 것이다. 보살과 아라한은 또 무엇인가? 모두 죄인의 목에다 씌우는 칼과 발을 묶는 족쇄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부처가 있는 곳에는 머물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에는 급히 지나가라. 별로 좋은 물건이 아니다. 문수보살과 앙굴리마라가 할 일이 없어서 그와 같은 짓을 했겠는가? 모두가 경계에 집착하여 자신의 보물 창고를 잊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기 위하여 노파심절로 한 일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일체 허상이 다 사라지기를 바라고 한 일이다. 이렇게 강강한 처방으로도 듣지 않는 병이라면 임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道流야 無佛可得이니 乃至三乘五性과 圓頓敎迹은 皆是一期藥病相治요 並無實法이니라 設有라도 皆是相似表顯路布며 文字差排하야 且如是說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부처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삼승과 오성과 원돈교의 자취마저도 모두다 그때그때의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지 고정된 실다운 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로 표현하는 길거리의 광고 게시판이다. 문자를 알맞게 배열해 놓은 것이다. 임시로 이와 같이 이야기 해 본 것일 뿐이다.”
강의 ; 불교에는 입만 열면 부처님, 보살님, 성문, 연각, 아라한, 도인, 선지식, 큰스님,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등등 별의별 명칭을 다 말한다. 그리고 경전만 펼치면 그러한 명칭들이 있다. 그러나 부처니 보살이니 하는 말도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다. 병에 따라 시설하는 약방문일 뿐이다. 혹은 길거리에 내걸린 광고문에 불과하다. 만일 실재로 있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 하나를 두고 별의별 이름을 다 붙인 것이다. 진정 부처를 좋아하는가? 부처란 다만 부처를 좋아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다. 그 사람도 실은 부득이 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게 알아야 한다. 그와 같은 명칭을 일컫는 그 사람마저 부득이해서 말 할 뿐인데 여타의 것이야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 필자는 불교에서 굳이 사상을 말하라면 인불사상(人佛思想)이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에게 하듯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다. 평화도 행복도 거기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 현재 이대로 부처가 아니라고 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보통 삶은 부처로써의 효용이 없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보통 사람 그대로가 완전무결한 부처인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라. 사람이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부처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아프면 아파하고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한다. 순간순간이 부처의 삶이다. 참으로 신묘하다. 불가사의하다. 매일 매일 천금을 드려서 잔치를 해야 할 일이다. 매일 매일 최고의 파티를 열어야 한다. 사람이 산다는 일이 이렇게 감동적일수가 없다.
道流야 有一般禿子하야 便向裏許著功하야 擬求出世之法하니 錯了也라 若人求佛하면 是人失佛이요 若人求道하면 是人失道요 若人求祖하면 是人失祖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어떤 머리 깍은 사람들이 있어서 곧 그러한 것에 공을 드려서 출세간법을 구하려고 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를 잃을 것이고, 만약 도를 구한다면 도를 잃을 것이며, 만약 조사를 구하다면 조사를 잃을 것이다.”
강의 ; 자신이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부처를 잃게 된다. 자신이 그대로 도인데 다시 도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도를 잃게 된다. 자신이 조사인데 다시 조사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조사를 잃게 된다. 물로써 물을 씻으려는 것이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쓰려는 일이다. 오히려 멀어질 뿐이다. 공연히 쓸데없는 문자에 이끌려 긁어 부스럼을 내고 있다.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일이다.
임제록 100
14-42 주리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
大德아 莫錯하라 我且不取儞解經論하며 我亦不取儞國王大臣하며 我亦不取儞辯似懸河하며 我亦不取儞聰明智慧하고 唯要儞眞正見解니라
“큰스님들이여! 착각하지 말라. 나는 그대들이 경과 논을 잘 알고 있는 것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국왕이나 대신이라 하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폭포수처럼 유창한 말솜씨를 가졌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총명하고 지혜롭다 하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오직 그대들이 진정한 안목을 가지기를 바랄 뿐이다.”
강의 ;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무엇보다 안목이 제일이다. 진정견해(眞正見解)야 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제일 우선하는 일이다. ‘그대의 행동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견해를 나는 소중하게 생각할 뿐이다.’라는 옛 선지식의 말씀이 있다. 올바른 안목이 없으면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하더라도 아무런 쓸데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동서고금의 모든 학설을 다 꿰뚫고 있다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설법을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총명 영리하여 하루에 백 권의 책을 외운다 하더라도 참되고 바른 안목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평생을 일종식하고 장좌불와로 살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25시간을 좌선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종정을 열 번 백번 지내고 대통령을 또 그렇게 지냈다 하더라도 인생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그 인생 헛산 것이다. 본산 주지를 백 번 했다 하더라도 인생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헛산 것이다. 오직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은 진정견해다. 바른 안목이다.
道流야 設解得百本經論하여도 不如一箇無事底阿師니 儞解得하면 卽輕懱他人하야 勝負修羅와 人我無明이 長地獄業이니라 如善星比丘가 解十二分敎호되 生身陷地獄하야 大地不容하니 不如無事休歇去니라 飢來喫飯이요 睡來合眼이라 愚人笑我나 智乃知焉이로다 道流야 莫向文字中求니 心動疲勞하고 吸冷氣無益하니 不如一念緣起無生하야 超出三乘權學菩薩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설사 백 권의 경과 논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일개 일 없는 스님만 같지 못하다. 그대들이 그런 것들을 안다하더라도 곧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여 승부를 다투는 아수라가 될 뿐이고 나와 남을 분별하는 무명 번뇌로 지옥의 업을 기를 뿐이다. 예컨대 선성비구가 십이분교를 잘 알면서도 산 채로 지옥에 떨어져서 대지도 용납하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일없이 쉬고 쉬느니만 같지 못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눈을 감으면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보고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문자 속에서 찾지 말라. 마음이 움직이면 피곤하고 찬 기운을 마시면 좋을 것이 없다. 차라리 한 생각 인연으로 일어난 법이 본래 생멸이 없음을 깨달아 삼승의 방편 학설을 공부하는 보살들을 뛰어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강의 ; 대개의 사람들은 많이 알면 교만하기 마련이다. 지위가 높아도 그렇고 재산이 많아도 그렇다. 나이가 많아도 그렇다. 아는 것이 많고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아도 마음을 비우고 아무 것도 없는 양 소박하고 순수하면 한없이 아름다우련만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불교공부란 다른 말로하면 마음 비우는 일이다. 한없이 겸손하고 하심하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다. 나주 다보사의 우화(雨華)스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분이었다. 해인사에서 온 객승이라고 여쭈니 당신이 해인사에 가거든 방부를 꼭 받아달라고 진심으로 간청을 하셨다. 그것도 4, 50년 어린 사람에게.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를 한없이 존경하였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도를 문자 속에서 찾지 말라. 문자와 도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글이란 이름자만 쓸 줄 알면 넉넉하다. 더 배워야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말이나 글로 공연히 머리만 썩일 뿐이다.’ 하물며 정치에 야욕을 품은 유비도 이런 말을 했다. 스승 조식이 써준 추천서를 찢어 버리고 더 이상 학문을 하지 않았다.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도를 이루려는 출세 대장부야 말해 무엇 하랴.
A01.사슴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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