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록 96~100

2020. 3. 21. 14: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임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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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96


14-38 마음 따라 모든 법이 생기고 소멸한다

 

 


道流야 儞欲得作佛인댄 莫隨萬物하라 心生種種法生하고 心滅種種法滅이라 一心不生하면 萬法無咎니라 世與出世에 無佛無法하야 亦不現前하며 亦不曾失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아라. 마음이 생겨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 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이건 출세간이건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 나타난 적도 없고 일찍이 잃어버린 일도 없다.”

강의 ;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지키라. 어떤 상황에서도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이 되라. 주인 노릇만 제대로 하면 그것이 곧 부처다. 상황에 끄달리지 말고 당당하게 나 자신으로 있으라.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나다. 나 외에 또 다른 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내 마음 하나에 온갖 세상이 다 살아나고 내 마음 하나에 온갖 세상이 다 없어진다. 세상을 내 마음대로 만들고 부순다. 이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있겠는가? 울고 웃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다. 누가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이끌려 다니는가? 수처작주(隨處作主)하라. 나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

設有者라도 皆是名言章句라 接引小兒하는 施設藥病이요 表顯名句니 且名句不自名句라 還是儞目前昭昭靈靈하야 鑑覺聞知照燭底가 安一切名句니라


“설혹 부처와 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명칭과 말과 문장일 뿐이다. 어린아이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병에 따라 쓰이는 약이다. 표현하는 이름과 문구일 뿐이다. 그런대 이름과 문구도 스스로 이름과 문구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 눈앞에서 아주 밝고 분명하게 느끼고 듣고 알며 비춰보는 그 사람이 모든 이름과 문구를 만들어 두었다.”

강의 ; 경전어구란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편이다. 어린아이가 울 때 어머니는 밖에 호랑이가 왔다고 거짓말을 하여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다. 경전상에 나타난 무수한 부처님과 보살들 역시 울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달래는 방편의 말이다. 병에 따라 약을 베푸는 일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설혹 부처와 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명칭과 말과 문장일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과 보살들을 표현하는 명구는 다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지금 목전에서 소소영영하게 지각하고 듣고 알고하는 그 사람이 일체 명구들을 만들었다.

임제록 97


14-39 오무간업

 

大德아 造五無間業하야사 方得解脫이니라 問, 如何是五無間業고 師云, 殺父害母하며 出佛身血하며 破和合僧하며 焚燒經像等이 此是五無間業이니라 云, 如何是父오 師云, 無明是父니 儞一念心이 求起滅處不得하야 如響應空하야 隨處無事를 名爲殺父니라 云, 如何是母오 師云, 貪愛爲母니 儞一念心이 入欲界中하야 求其貪愛하나 唯見諸法空相하야 處處無著을 名爲害母니라 云, 如何是出佛身血고 師云, 儞向淸淨法界中하야 無一念心生解하고 便處處黑暗이 是出佛身血이니라 云, 如何是破和合僧고 師云, 儞一念心이 正達煩惱結使하야 如空無所依가 是破和合僧이니라 云, 如何是焚燒經像고 師云, 見因緣空心空法空하야 一念決定斷하야 逈然無事가 便是焚燒經像이니라


“큰스님들이여!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업을 지어야 바야흐로 해탈하게 되느니라.”
“무엇이 오무간업입니까?”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어머니를 해치는 것과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과 화합 승단을 깨뜨리는 것과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고 깨트리는 것이 오무간업이다.”
“무엇이 아버지입니까?”
“무명이 아버지다.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곳을 찾을 수 없어 마치 허공에 메아리가 울리는 것 같고 어디를 가나 일이 없는 것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니라.”
“무엇이 어머니입니까?”
“탐내고 애착하는 것이 어머니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욕계에 들어가 그 탐내고 애착하는 것을 찾아보아도 오직 모든 법은 공한 모양임을 볼 뿐이고 어디에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어머니를 해친 것이니라.”
“무엇이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입니까?”
“그대들이 청정한 법계에서 한 생각 마음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고 어디에서는 캄캄한 것[절대평등]이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니라.”
“무엇이 화합승단을 깨뜨리는 것입니까?”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번뇌의 속박을 바르게 통달하여 마치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 같은 것이 화합승단을 깨뜨린 것이니라.”
“무엇이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입니까?”
“인연이 비고 마음이 비고 법이 비었음을 보아서 한 생각에 결정코 끊어서 초연히 일이 없는 것이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이니라.”


강의 ; 다섯 가지 무간지옥에 들어갈 죄업을 매우 독특한 견해로 풀이하였다. 불교도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것이 아버지, 어머니, 부처님, 승단, 경전과 불상들이다. 이것들을 헤치는 것을 일반 불교에서는 큰 죄악으로 생각해서 무간지옥에 들어갈 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임제스님은 헤친다는 것을 특별한 뜻으로 해석하여 이 다섯 가지 업을 지어야 비로소 해탈한다고 하였다. 선문에서 가끔 보이는 좀 장난기 있는 엉뚱한 해석이다. 어떤 조항이든 일관성 있게 말씀하신 것은 텅 비어 없음이다. 인연이 비고 마음이 비고 법이 비고, 번뇌의 속박이 없고 알음아리가 없고, 탐욕과 애착이 공하고 무명으로 생멸하는 것은 허공의 메아리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텅 비어 없어야 한다. 세상사는 좋은 것이 있으면 당연히 나쁜 것도 있기 마련이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듯이. 흥망성쇠는 세상의 순리다. 춘하추동 사계절은 쉬지 않고 순환한다. 생자필멸 회자정리의 법칙 그대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불어난다고 기뻐할 것도 아니고 줄어든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다. 만났다고 기뻐할 것도 헤어진다고 슬퍼할 것도 아니다. 결국 모두가 텅 비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텅 비어 없는 줄 알아야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이다.

임제록 98


14-40 산승의 말도 취하지 말라

 

 


大德아 若如是達得하면 免被他凡聖名礙니라 儞一念心이 祇向空拳指上生實解하며 根境法中虛捏怪하야 自輕而退屈言하되 我是凡夫요 他是聖人이라하니 禿屢生이여 有甚死急하야 披他師子皮하야 却作野干鳴고
“큰스님들이여! 만약 이와 같이 통달한다면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이름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빈주먹 속에서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을 낸다. 또 육근과 육진의 법에서 공연히 없는 것을 만들어 내어 괴이한 짓을 하여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고 뒷걸음질 치면서 ‘나는 범부고 저분은 성인이시다.’라고 한다. 이 머리 깍은 바보들아! 무엇이 그리 다급하여 사자의 가죽을 쓰고 여우의 울음소리를 내는가?”

강의 ; 모든 존재는 공이다. 삼라만상과 천지만물도 모두가 공이다. 남녀노소 성인 범부 부처 조사 보살 나한 모두가 공이다. 무엇이든 모두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왜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연기(緣起)로 인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있으면서 공인가?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지 하나에서부터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연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세균이나 미물곤충이나 사람에 이르기까지 역시 연기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알면 성인이다 범부다 하는 이름에 하등 구애될 것이 없다. 칭찬과 비난에도 하등 구애될 것이 없다. 모함하고 음해하는 것에도 하등 마음 흔들릴 것이 없다. 영광도 오욕도 하등 마음 쓸 일이 아니다. 태평무사다. 배울 것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한가한 도인은 거짓도 진실도 선도 악도 찾지 않는다.

大丈夫漢이 不作丈夫氣息하야 自家屋裏物을 不肯信하고 祇麽向外覓하야 上他古人閒名句하야 倚陰博陽하야 不能特達이라 逢境便緣하며 逢塵便執하야 觸處惑起하야 自無准定이로다 道流야 莫取山僧說處하라 何故오 說無憑據하야 一期間圖畫虛空이요 如彩畫像等喩니라
“대장부 사나이가 장부의 기개를 펴지 못하고 자기 집안의 보물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단지 바깥으로만 찾아다닌다. 옛사람들이 만든 부질없는 명칭과 문구에만 사로잡혀 이리저리 이 말에 의지하고 저 말에 의지하여 분명하게 통달하지 못한다. 경계를 만나면 곧 거기에 반연한다. 육진을 만나면 곧 또 집착한다. 닿는 곳마다 미혹을 일으켜서 스스로 정해진 기준이 없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이 말하는 것도 취하지 말라. 왜냐? 내말에도 아무런 근거와 의지할 데가 없다. 잠깐 허공에 대고 그림을 그린 것이다. 또 남이 그린 그림이나 형상에 채색을 입히는 것과 같다.”

강의 ; 천번 만번 부르짖는 말이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행복도 평화도 물론 자기 자신에게 있다. 우리들 자신은 무한한 능력과 영원한 생명 그 자체다. 어떤 부귀와 영화와 명예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이와 같은 보물 창고를 버리고 어디를 헤매는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찾아 헤맨들 무엇을 얻겠는가? 부질없는 문자상에서 이리 저리 헤아려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설사 어록 중에서 왕이라고 일컫는 임제스님의 말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경전과 어록을 똥 닦는 휴지로 취급하는 더없이 높고 높은 소리를 토해 놓은 것이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임제스님의 말씀도 취하지 말라.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역시 똥 닦는 휴지에 불과하다.
또 한 가지 육진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 설사 불보살이 와서 방광을 하고 자신을 업어주고 예배하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육진경계에 불과하다. 사람들을 더욱 미혹하게 할 뿐이다. 자신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위진인이 있다.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드나든다. 부디 수처작주하라. 어떤 상황이 앞에 나타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자신을 지키라. 이것이 진짜 불교다. 죽은 뒤에도 잊어서는 안 될 임제문중의 인천안목이다.

임제록 99


14-41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잃을 것이다

 

 


道流야 莫將佛爲究竟하라 我見猶如厠孔이요 菩薩羅漢은 盡是枷鎖며 縛人底物이니 所以로 文殊仗劍하야 殺於瞿曇하며 鴦掘持刀하야 害於釋氏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부처를 최고의 경지라고 여기지 말라.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화장실의 변기와 같은 것이다. 보살과 나한은 모두 다 목에다 씌우는 칼과 발을 묶는 족쇄와 같이 사람을 결박하는 물건들이다. 그러므로 문수는 긴 칼을 비껴들고 부처님을 죽이려 했고, 앙굴리마라는 단도를 가지고 석가모니를 해치려 한 것이다.”

강의 ; 강강(剛强)한 말세의 사람들에게는 역시 강강한 처방이 필요하다. 제발 부처니 보살이니 조사니 하는 성스러운 모습과 그 명칭에서 벗어나라. 부처란 무엇인가? 마치 화장실의 변기와 같은 것이다. 보살과 아라한은 또 무엇인가? 모두 죄인의 목에다 씌우는 칼과 발을 묶는 족쇄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부처가 있는 곳에는 머물지 말고 부처가 없는 곳에는 급히 지나가라. 별로 좋은 물건이 아니다. 문수보살과 앙굴리마라가 할 일이 없어서 그와 같은 짓을 했겠는가? 모두가 경계에 집착하여 자신의 보물 창고를 잊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기 위하여 노파심절로 한 일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일체 허상이 다 사라지기를 바라고 한 일이다. 이렇게 강강한 처방으로도 듣지 않는 병이라면 임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道流야 無佛可得이니 乃至三乘五性과 圓頓敎迹은 皆是一期藥病相治요 並無實法이니라 設有라도 皆是相似表顯路布며 文字差排하야 且如是說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부처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삼승과 오성과 원돈교의 자취마저도 모두다 그때그때의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지 고정된 실다운 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로 표현하는 길거리의 광고 게시판이다. 문자를 알맞게 배열해 놓은 것이다. 임시로 이와 같이 이야기 해 본 것일 뿐이다.”

강의 ; 불교에는 입만 열면 부처님, 보살님, 성문, 연각, 아라한, 도인, 선지식, 큰스님,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등등 별의별 명칭을 다 말한다. 그리고 경전만 펼치면 그러한 명칭들이 있다. 그러나 부처니 보살이니 하는 말도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다. 병에 따라 시설하는 약방문일 뿐이다. 혹은 길거리에 내걸린 광고문에 불과하다. 만일 실재로 있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 하나를 두고 별의별 이름을 다 붙인 것이다. 진정 부처를 좋아하는가? 부처란 다만 부처를 좋아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없다. 그 사람도 실은 부득이 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게 알아야 한다. 그와 같은 명칭을 일컫는 그 사람마저 부득이해서 말 할 뿐인데 여타의 것이야 말해 무엇 하랴.

 

그래서 필자는 불교에서 굳이 사상을 말하라면 인불사상(人佛思想)이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에게 하듯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다. 평화도 행복도 거기에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 현재 이대로 부처가 아니라고 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보통 삶은 부처로써의 효용이 없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보통 사람 그대로가 완전무결한 부처인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라. 사람이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부처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아프면 아파하고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한다. 순간순간이 부처의 삶이다. 참으로 신묘하다. 불가사의하다. 매일 매일 천금을 드려서 잔치를 해야 할 일이다. 매일 매일 최고의 파티를 열어야 한다. 사람이 산다는 일이 이렇게 감동적일수가 없다.


道流야 有一般禿子하야 便向裏許著功하야 擬求出世之法하니 錯了也라 若人求佛하면 是人失佛이요 若人求道하면 是人失道요 若人求祖하면 是人失祖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어떤 머리 깍은 사람들이 있어서 곧 그러한 것에 공을 드려서 출세간법을 구하려고 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를 잃을 것이고, 만약 도를 구한다면 도를 잃을 것이며, 만약 조사를 구하다면 조사를 잃을 것이다.”

강의 ; 자신이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부처를 잃게 된다. 자신이 그대로 도인데 다시 도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도를 잃게 된다. 자신이 조사인데 다시 조사를 구한다면 이미 있는 조사를 잃게 된다. 물로써 물을 씻으려는 것이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쓰려는 일이다. 오히려 멀어질 뿐이다. 공연히 쓸데없는 문자에 이끌려 긁어 부스럼을 내고 있다.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려놓는 일이다.

임제록 100


14-42 주리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잔다

 

 


大德아 莫錯하라 我且不取儞解經論하며 我亦不取儞國王大臣하며 我亦不取儞辯似懸河하며 我亦不取儞聰明智慧하고 唯要儞眞正見解니라

 
“큰스님들이여! 착각하지 말라. 나는 그대들이 경과 논을 잘 알고 있는 것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국왕이나 대신이라 하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폭포수처럼 유창한 말솜씨를 가졌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총명하고 지혜롭다 하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오직 그대들이 진정한 안목을 가지기를 바랄 뿐이다.”

강의 ; 살림에는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무엇보다 안목이 제일이다. 진정견해(眞正見解)야 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제일 우선하는 일이다. ‘그대의 행동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견해를 나는 소중하게 생각할 뿐이다.’라는 옛 선지식의 말씀이 있다. 올바른 안목이 없으면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하더라도 아무런 쓸데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동서고금의 모든 학설을 다 꿰뚫고 있다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설법을 아무리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총명 영리하여 하루에 백 권의 책을 외운다 하더라도 참되고 바른 안목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평생을 일종식하고 장좌불와로 살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25시간을 좌선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종정을 열 번 백번 지내고 대통령을 또 그렇게 지냈다 하더라도 인생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그 인생 헛산 것이다. 본산 주지를 백 번 했다 하더라도 인생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헛산 것이다. 오직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은 진정견해다. 바른 안목이다.

道流야 設解得百本經論하여도 不如一箇無事底阿師니 儞解得하면 卽輕懱他人하야 勝負修羅와 人我無明이 長地獄業이니라 如善星比丘가 解十二分敎호되 生身陷地獄하야 大地不容하니 不如無事休歇去니라 飢來喫飯이요 睡來合眼이라 愚人笑我나 智乃知焉이로다 道流야 莫向文字中求니 心動疲勞하고 吸冷氣無益하니 不如一念緣起無生하야 超出三乘權學菩薩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설사 백 권의 경과 논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일개 일 없는 스님만 같지 못하다. 그대들이 그런 것들을 안다하더라도 곧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여 승부를 다투는 아수라가 될 뿐이고 나와 남을 분별하는 무명 번뇌로 지옥의 업을 기를 뿐이다. 예컨대 선성비구가 십이분교를 잘 알면서도 산 채로 지옥에 떨어져서 대지도 용납하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일없이 쉬고 쉬느니만 같지 못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눈을 감으면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보고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문자 속에서 찾지 말라. 마음이 움직이면 피곤하고 찬 기운을 마시면 좋을 것이 없다. 차라리 한 생각 인연으로 일어난 법이 본래 생멸이 없음을 깨달아 삼승의 방편 학설을 공부하는 보살들을 뛰어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강의 ; 대개의 사람들은 많이 알면 교만하기 마련이다. 지위가 높아도 그렇고 재산이 많아도 그렇다. 나이가 많아도 그렇다. 아는 것이 많고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아도 마음을 비우고 아무 것도 없는 양 소박하고 순수하면 한없이 아름다우련만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불교공부란 다른 말로하면 마음 비우는 일이다. 한없이 겸손하고 하심하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다. 나주 다보사의 우화(雨華)스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는 분이었다. 해인사에서 온 객승이라고 여쭈니 당신이 해인사에 가거든 방부를 꼭 받아달라고 진심으로 간청을 하셨다. 그것도 4, 50년 어린 사람에게.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를 한없이 존경하였다.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도를 문자 속에서 찾지 말라. 문자와 도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글이란 이름자만 쓸 줄 알면 넉넉하다. 더 배워야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말이나 글로 공연히 머리만 썩일 뿐이다.’ 하물며 정치에 야욕을 품은 유비도 이런 말을 했다. 스승 조식이 써준 추천서를 찢어 버리고 더 이상 학문을 하지 않았다.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도를 이루려는 출세 대장부야 말해 무엇 하랴.

A01.사슴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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