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참 부처며, 참 법이며, 참된 도인지 비옵건대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 법이란 마음이 밝은 것이며, 도란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깨끗한 빛이다. 이 셋이 곧 하나이니 모두가 헛이름일 뿐,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도를 지어가는 사람이라면 순간순간 마음에 틈새가 없어야 한다.”
강의 ; 불교는 심외무법(心外無法)이다.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부처도 만들고 조사도 만들고 보살과 아라한도 만든다. 부처니 법이니 도니 하는 여러 가지의 이름을 쓰고 있으나 그 또한 한 마음이다. 한 마음이면서 또한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일체다. 그래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다. 한순간이 한량없는 시간이고, 한량없는 시간이 곧 한순간이다. 먼 과거의 그 많은 오욕과 영광과 숱한 우여곡절들이 모두 지금 이 한순간이다. 끝없는 미래도 역시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한순간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 한순간의 이 마음밖에는 모두가 공이다. 무다. 없다. 마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없다. 모든 것은 없다. 진정으로 도를 지어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도 궁극적 진리의 현현이며 진리의 현현은 곧 없음이다. 그리고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보고 듣는 이 모든 것이 곧 진리의 현현이며 이 진리의 현현은 곧 없음이라는 사실이다.
自達磨大師가 從西土來로 祇是覓箇不受人惑底人이니 後遇二祖하야 一言便了하고 始知從前虛用功夫니라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오신 것은 다만 남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뒤에 2조를 만났는데 2조가 한마디 말에 곧 깨닫고 비로소 종전의 공부가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강의 ;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뜻에 대하여 그 말이 분분하다. 오고 간 행적도 이야기 하려면 장황하다. 어떤 사람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였다. 곧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하였다. 사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라고도 하였다. 임제는 다만 남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달마는 2조 혜가(慧可)대사를 만났다. 혜가는 달마에게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 달라고 하였다. 달마는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오면 편안하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가져가기 위해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찾아진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벌써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라는 말에 곧 바로 깨달았다. 알고 보니 종전의 공부가 헛된 공부였음을 비로소 알았다. 마음, 마음 하지만 마음마저 없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마음도 없는데 불안이 어디에 있겠는가?
“산승의 금일의 견해는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 만약 제 일구에서 깨달으면 조사나 부처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 이구에서 깨달으면 인간과 천상계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 삼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강의 ; 법어나 경문이나 기연(機緣)에 제 일구 제 이구 제 삼구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법어라도 듣는 사람이 받아드리는 데 따라 차별이 나눠진다. 경문이나 기연도 역시 그렇다.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도 역시 그렇다. 육조 혜능스님이 불교를 전혀 모를 때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린 일이 있다. 마치 부드러운 흙 위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보통 불자들은 금강경이 뚫어지도록 읽어도 깜깜 무소식이다. 마치 차돌위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다. 육조스님에게는 금강경이 제 일구가 되었다. 책이 뚫어지도록 읽은 보통 불자들은 금강경이 제 삼구에도 미치지 못했다. 작은 한 소리의 “할”에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스피커를 틀어놓고 고막이 터지도록 “할”을 외쳐대도 깜깜 무소식인 사람이 있다.
삼구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제 일구로 듣는 것은 마치 허공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제 이구로 듣는 것은 마치 물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제 삼구로 듣는 것은 마치 진흙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흔적이 남는 것에 대한 차이를 표현한 말이다. 도는 우주에 꽉 차있고 우리들의 곁을 한 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무슨 흔적이 있겠는가?
“달마대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만약 뜻이 있다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미 뜻이 없었다면 2조께서는 어떻게 법을 얻었습니까?” “얻었다는 것은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만약 얻지 못했다면 어떤 것이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그대들은 모든 곳을 향하여 치달려 구하는 마음을 쉬지 못하므로 달마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애닯다. 장부들아! 머리가 있는데 또 머리를 찾는구나.’ 하신 것이다. 그대들은 말끝에서 곧 스스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돌아보아라. 더 이상 다른데서 찾지 말고 이 몸과 마음이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알아서 당장에 아무 일 없게 되면 바야흐로 법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강의 ; “달마대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근본적으로 틀린 질문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틀린 그 질문에 숱한 답을 하고 있다. 틀린 질문에 답을 한들 맞을 리가 없다. 말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진행하드라도 역시 틀리기는 마찬 가지다. 그러나 임제스님의 대답은 틀려도 매우 절묘한 데가 있다. 눈여겨 볼 일이다. “얻었다는 것은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머리가 있는데 머리를 찾는 일이 옳겠는가? 설사 찾아서 다시 머리위에 올려놓았다고 가정하자. 그 꼴이 무엇인가? 귀신도 그런 모습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얻었다는 것은 곧 얻지 못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철저히 지금 현재의 너 자신에게서 조금도 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본래 성불인데 달리 무엇을 찾고 구한단 말인가? 부처도 조사도 보고 듣고 알고 느끼는 그대 자신이다. 달마도 달마가 오신 뜻도 역시 그대 자신이다.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오늘 부득이해서 쓸데없는 더러운 소리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착각하지 말라. 내가보기에는 실로 이처럼 허다한 도리는 없다. 작용하게 되면 곧 작용하고 작용하지 않으면 곧 쉰다.”
강의 ; 임제스님은 자신이 부득이해서 이런 저런 소리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쓸데없고 더러운 소리들이다. 그 소리들을 주어모아 기록한 이 임제록도 역시 똥을 닦는 휴지에 불과하다. 여타의 무수한 경전 어록들이야 물어 무엇 하랴? 수많은 사람들이 남남거린 말들이야 물어 무엇 하랴? 왜 그런가? 그와 같은 허다한 도리가 실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떠든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그것에 의지하여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간경도하고 주력도하고 기도도하며 살아왔는데. 작용할 일이 있으면 곧 작용하고 작용할 일이 없으면 그대로 쉬면 된다. 볼 일이 있으면 보고, 들을 일이 있으면 들으라.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라. 사람을 만나면 대화를 나누고 혼자 있으면 그대로 있으라. 해는 뜨고 지고 계절은 오고 간다. 바람은 불고 멎고, 꽃은 피고 지고 한다. 지금의 필요한 인연을 따라 물이 흐르듯 살면 된다. 이것이 임제가풍 중의 하나다. 한국불교는 모두가 임제가풍을 표방하고 있다. 또 그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랑으로 여긴다. 한국의 스님들은 목탁을 쳐서 생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그들이 하는 축원을 들어보면 ‘임제스님의 문중에서 영원히 인천의 안목이 되소서[臨濟門中 永作人天之眼目].’라고 한다. 이것은 돌아가신 스님들을 빌 때 가장 요긴하고 핵심이 되는 축원문이다. 그만치 임제스님의 가르침과 그의 사상을 흠모하여 길이 이 세상의 눈이 되어 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모든 스님들은 이 임제록에 있는 일체의 가르침을 최상의 바른 법으로 숭상하여 따르고 실천해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제방에서는 육도만행을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장엄하는 것이고 불사를 짓는 일이지 불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재계를 지키고 계행을 가지며, 기름이 가득찬 그릇을 들고 가도 출렁거리지 않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더라도 도를 보는 안목이 밝지 못하면 모두가 빚을 지지 않을 수 없으니 밥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불도에 들어와서 이치를 통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신도들의 시주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가 81살이 되자 그의 집에 있는 나무에서 비로소 버섯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강의 ;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불교가 권하는 여섯 가지 덕목은 승속을 막론하도 불자들이 실천해야할 생활지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법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장엄일 뿐이다. 불교를 위한 일거리[佛事]일 뿐이다. 재계를 잘 행하고 계율을 철저히 지키더라도, 그리고 부처님 앞에서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이 아무리 빼어나더라도 도안(道眼)이 어두우면 모두가 빚을 짊어진 것이다. 언젠가 밥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약간 옆길로 새는 이야기를 덧붙일까 하는데, 그렇다면 밥값을 따로 갚지 않아도 되는 육도만행과 불교를 위한 일은 무엇일까? 영명연수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진부한 소리 같지만 보시를 하는 마음의 흔적 없이 보시를 하라. 계를 지키더라도 지키는 마음의 흔적 없이 계를 지키라. 등이다. 또 우리들의 몸은 텅 비어 없음을 보면서 몸을 단장하고 위의도 갖추고 화장도 아름답게 하라. 본래로 설할 것이 없는 이치를 깨닫고 설법을 하라. 사찰을 건립하되 마치 물에 비친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고 하라. 등상불(等像佛)에게 꽃과 향과 과일 등 온갖 공양거리를 올리더라도 그것들이 모두 환영이며 헛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올리라. 그림자요 메아리인 여래에게 공양 올리라. 죄란 그 성품이 텅 비어 없음을 알고 참회하라. 등등이다. 육바라밀과 불교의 제반 신행활동들을 중도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연기이며 공인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모든 것은 공이며 연기이며 중도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일체 사물과 일체 사건이 다 그렇다. 그러므로 중도의 원리에 맞게 육바라밀을 닦고 신행활동과 불사를 해야 된다는 뜻이다. 중도의 원리에 맞게 하면 따로 밥값을 갚을 일이 없다.
“불도에 들어와서 이치를 통하지 못하면...” 운운한 것은 제 15조 가나제급존자의 게송이다. 존자는 인도의 비라국을 찾았을 때 79세 된 장자와 그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수행하는 한 비구를 성의를 다해서 공양했다. 그 비구는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뒤에 그 장자의 집에 나무버섯으로 환생하여 그 장자가 81세가 될 때까지 계속 돋아나면서 공양 받은 빚을 갚았다고 한다. 또 그의 부인은 평소에 공양드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므로 버섯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가나제급존자로부터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된 장자의 아들은 뒤에 출가 수행하여 제 16조 라후라다존자가 되었다. 금생에 마음의 도리를 밝히지 못하면 물 한 방울의 빚도 갚기 어렵다는 무서운 말도 있다.
“외로운 산봉우리에 혼자 살며 아침 한 끼만 공양을 하고 눕지도 않고 앉아서 밤낮으로 도를 닦는다 하여도 모두 다 업을 짓는 사람들이다.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를 보시하고, 나라와 성곽과 아내와 자식을 보시하고, 코끼리와 말과 일곱 가지 값진 보물들을 모조리 다 기꺼이 보시하더라도 이와 같은 견해는 모두가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괴로운 과보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이 순일하여 잡스런 것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강의 ; 불교의 고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결코 권장하는 일은 아니지만 위에서 소개한 것들이다. 세존도 성도하시기 전에 숱한 고행을 하였다. 그러나 고행은 고통의 과보를 불러올 뿐이다. 바람직한 수행은 아니다. 그래서 세존도 나중에는 고행을 버렸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첫 마디 말이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 향락의 삶도 고행의 삶도 정상적이거나 바람직한 삶의 길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중도의 법칙에 의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중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 중도의 삶이란 무엇인가? 아무 일 없이 순일하고 잡스런 것이 없는 삶이다. 인연을 따라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적 삶의 길이다. 모든 인생사란 결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십지에 오른 보살조차도 이 도인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신들이 기뻐하고 지신들이 그의 발을 받들어 모시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도인이 작용하는 그 곳에는 아무런 자취가 없기 때문이니라.”
강의 ; 그와 같이 사는 사람의 자취는 아무리 수행이 많이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찾지 못한다. 차별 없는 참사람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차별 없는 참사람은 지금 이 순간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다 차별 없는 참사람이다. 그 사람은 아무리 작용이 활발발 하더라도 아무런 자취가 없기 때문이다. 본래로 사람은 아무런 자취가 없다. 자취 없이 왔다가 자취 없이 가는 것이 인생이다. 먼 하늘가에 자취 없이 사라지는 흰 구름 일뿐이다. ‘태어남이란 어디서 오는가? 죽음이란 어디로 가는가? 태어난다는 것,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뜬 구름 그 자체 본래로 실체가 없듯, 태어나고 죽고 가고 오고하는 것도 본래로 그 실체가 없더라.’ 그러면서도 이렇게 분명히 보고 듣고 울고 웃고 지지고 복고 하는 것, 이 또한 인생의 실상이다. 우리들 인생은 인연과 조건으로 잠간 있다가 인연과 조건이 끝나면 사람진다. 그래서 인생은 공이다. 무다. 있으면서 없는 것, 없으면서 있는 것, 이런 원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도라고 한다. 천지지간 만물지중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그렇거늘 다른 것이야 논해 무엇 하랴?
“대통지승 부처님께서 십 겁 동안 도량에 앉아 계셨지만 불법이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께서 지시하여 주십시오.” “대통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나 만법은 성품과 모양이 없음을 통달하는 것을 대통이라 한다.
지승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나 의혹이 없어서 한 가지 법도 얻을 것이 없음을 지승이라 한다. 불이란 마음의 청정한 광명이 온 법계를 꿰뚫어 비추는 것을 불이라 한다. 십 겁 동안 도량에 앉았다고 하는 것은 십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것은 부처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고 법은 본래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무엇이 다시 나타나겠는가?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부처가 다시 부처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부처님은 항상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강의 ; 법화경의 이야기다. 경전의 이야기지만 선문답(禪問答)이며 화두다. 실은 아무리 고준한 선어(禪語)라도 모두가 경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부처님의 말이나 조사의 말이나 말은 어디까지나 말일뿐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모두가 화두가 된다. 시중잡배들이 떠드는 말도 역시 말이다. 그들의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그러면 화두가 된다. 선문답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들의 말 속에도 의리선(義理禪)도 많지만 격외의 말도 많다. 도리의 진실을 나타내는 말도 많다. 향상일구도 많고 최초일구도 많다.
기도하는 보살님들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외치는 염불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인연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세음만 외우면 이것이 여래선이고 또한 조사선이다. 모르고 들으면 모르는 말이고 알고 들으면 아는 말이다. 선어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오던 법화경의 이야기를 임제스님은 교묘하게 잘 해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