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반공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비효율성을 강조하며 들었던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대목은 “그들은 생필품을 배급받기 위해 매일 줄을 늘어선다”는 것이었다. ‘배급제와 길게 늘어선 줄’은 시장의 효율성을 무시한 사회주의를 조롱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은 5부제 날짜를 기다리며 1주일에 두 장의 마스크를 얻기 위해 아무 불평 없이 줄을 선다. 돈을 더 준다고 더 많은 마스크를 살 수도 없다. 시장의 효율성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고, 마스크 앞에서 온 국민은 평등해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선호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미래통합당 일부 의원들이 “이게 빨갱이 나라의 배급제와 뭐가 다르냐?”는 멍멍이 소리로 관심을 끌려 하는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불쌍할 정도다. ‘배급제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멍청한 짓’이라는 수십 년 된 옛 관념이 설 자리는 한 뼘도 없다.
세계적 저술가이자 진보적 사상가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재난이나 전쟁 같은 엄청난 쇼크는 사회의 모든 것을 백지 상태로 리셋(reset)시킨다”고 주장한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뇌는 오랫동안 믿었던 과거의 질서와 고정관념을 단번에 잊어버린다. 백지 상태의 뇌는 새로운 사상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재난은 낡은 세상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도약의 방아쇠가 된다.
그 도약의 방향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클라인에 따르면 비열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재난으로 백지화된 민중들의 뇌에 “신자유주의만이 세상을 극복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클라인은 1998년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겪었던 외환위기도 월가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확신하는 인물이다. 국가 부도라는 강한 외부 충격으로 국민들의 생각이 백지가 되면, 신자유주의자들은 “외국자본과 시장주의로 극복해야 한다”라며 새로운 사상을 주입한다. 그게 우리가 겪었던 국가부도 사태의 본질이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백지 위에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복지강국이라는 멋진 미래를 그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인류 진보의 놀라운 계기가 된다. 클라인에 따르면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 1929년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대공황이 그것이다.
미국의 진보, 다수파가 되다
현재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적당히 번갈아 집권하는 나라다. 1970년 이후 대선에서 3연승을 거둔 경우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아버지 부시(George H. W. Bush)’를 앞세워 1980, 1984, 1988년 연거푸 승리를 거머쥔 공화당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어떤 당도 대선에서 3연승을 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 압도적 승리가 예견됐던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마저 뜻밖의 패배를 당하면서 민주당이 노렸던 ‘3연승의 꿈’을 날렸다.
그런데 미국 정치 구도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양당제가 얼추 정립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압도적인 공화당의 세상이었다. 1896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공화당은 1908년 선거까지 내리 4연승을 거뒀다.
1912년부터 8년 동안 민주당에 정권을 내줬지만 공화당은 1920년, 1924년, 1928년 선거에서 다시 3연승으로 기세를 올렸다. 특히 이 3연승 기간 동안 표 차이는 거의 더블스코어로 벌어졌을 정도였다. 9번 대선에서 공화당이 7승 2패를 차지한 것이다.
그런데 1929년 대공황 이후 전세가 역전됐다. 이때부터 30년은 미국 진보의 전성기였다. 1932년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던 아웃사이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공화당의 4연승을 저지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1936년, 1940년 1944년 선거를 석권했다. 루스벨트 혼자서만 4연승을 거둔 셈인데, 민주당은 루스벨트 사망 이후 첫 대선(1948년)조차 승리하며 전대미문의 5연승을 달성했다.
1952년과 1956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를 앞세워 2연승으로 반격했지만 1960년과 1964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또다시 연승으로 이를 되갚았다. 대공황 이전 민주당은 9번 선거에서 2승 7패로 참패했는데, 대공황 이후 9번 선거에서는 7승 2패로 세상을 장악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크리스티 앤더슨(Kristi Andersen)은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재난이 깨질 것 같지 않았던 옛 질서를 허물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었다”고 분석한다. 이 새로운 세상을 연 주인공은 무당층, 즉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먹고 살기 바빠서 투표를 해 본 적이 없던 사람들(앤더슨은 이들을 ‘비면역 유권자’라고 부른다)에게 대공황은 ‘정치가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구나’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실직을 당하고 죽음의 위기에 내몰려보니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 백지 위에 기존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그려 나갔다. 한 때 진리로 여겨졌던 고전학파의 논리(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미국은 이후 30년 동안 각종 복지제도를 도입하며 역사상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 즉 ‘대번영의 시대’를 열었다.
신자유주의는 진짜로 망했다
2016년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를 선택하고 미국 국민들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를 지도자로 선출했을 때, 자유무역을 앞세웠던 신자유주의는 망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시장주의자들은 여전히 시장만능론의 끈을 놓지 않았다. 본질적으로는 망했는데, 현실에서는 시장만능론이 악다구니를 쓰는 기묘한 동거가 4년 가까이 이어진 셈이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치면서 신자유주의는 진짜로 망했다. 이 전대미문의 재난은 공고해 보였던 자본주의의 옛 질서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신속하게, 그리고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는지를 잘 보여줬다.
이탈리아 정부가 16일 국적 항공사인 알리탈리아를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알리탈리아는 원래 국영회사였는데 2008년에 이탈리아 정부가 10억 유로를 받고 민영화한 기업이다. 그 회사가 12년 만에 다시 국유화의 길을 걷는다. 항공업이 시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반산업이라는 사실을 이탈리아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페인 정부는 16일 개인병원을 비롯해 모든 영리·비영리 민간병원을 일시적으로 국유화하는 충격적 조치를 취했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개인병원 의사를 포함해 제약회사와 의료기기 제조회사 모두 정부 통제를 받아야 한다. 1년 전이라면 “스페인이 빨갱이 나라냐?”라는 십자포화를 맞았을 정책인데, 재난을 맞은 지금 이 정책을 그렇게 비판하는 이는 극소수다.
빌 더 블라지오(Bill de Blasio) 미국 뉴욕시장은 15일 「MSNBC」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검사키트, 산소호흡기가 너무 부족하다. 의료용품을 생산할 수 있는 중요한 공장이나 산업을 국유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뉴욕은 월가의 상징이다. 신자유주의의 심장부에서 뉴욕시장이 의료용품 국유화를 주장한다.
프랑스 재정경제부장관은 17일 “금융시장 위기에 흔들리는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을 재자본화, 혹은 지분매입이라고 불러도 좋고, 필요하다면 국유화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로 치면 정부가 “삼성전자나 현대차를 국유화 하겠다”는 말이다.
이 모든 일들은 ‘옛 질서’라는 사고의 틀에서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옛 질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우개로 박박 지워지는 중이다.
당분간 그 어떤 나라에서도 코로나 검사 한 번 받는데 수백 만 원이 들고, 구급 헬기 한 대 부르면 3,000만 원을 내야하며, 오바마 케어를 실시했는데도 여전히 2,750만 명의 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미국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는 전 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해있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도 한 푼도 내지 않고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민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가 인류에게 거대한 불행이라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재난이 발생하면 옛 질서는 삽시간에 무너진다. 그리고 백지의 세상이 열린다. 그 백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인류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1929년 대공황이라는 비극을 딛고 미국이 30년 동안 복지의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지금이야말로 시장만능론을 머리에서 깨끗이 지울 기회다. 강력한 정부의 든든한 공공정책을 기반으로 국민의 건강, 안전, 생명, 인권, 복지가 최우선 가치로 인정받는 새로운 세상을 그려야 한다. 부디 우리가 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그 백지 위에 멋지고 안전한 복지국가를 그려나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