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속살] 한국 진보의 거목, 노회찬의 삶 & 노회찬 의원이 재벌(?)같다며 욕보인 조선일보 칼럼•2018. 7. 25

2020. 4. 15. 17:42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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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속살] 한국 진보의 거목, 노회찬의 삶 & 노회찬 의원이 재벌(?)같다며 욕보인 조선일보 칼럼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비보를 접하며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 진보정치의 거목

마음속의 단 한명의 국회의원이셨던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운동가 노회찬, 정치인 노회찬을 존경했던 후배로서

그분을 그리는 마음으로 여러 기록들과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1995년 제가 학생단체에서 일을 할때

제가 속했던 학생단체가 동대문 운동장 앞에 있었는데

아주 허름한 건물 2층이었는데

같은 층 옆 건물에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줄여서 당시 진정추)사무실이 있었어

진정추 대표가 노회찬 의원이셔

거의 얼굴 뵈었어

저는 맨날 구석에 삐리리였던 사람이라

노대표와 말씀을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노대표는 종종 저희 사무실에 들르셔서

뭐하고 있어요 빨리빨리 졸업하셔서

진정추에 들어와서 진보정당운동 같이 합시다

웃으시면서 이야기 하셨던 기억이 선해요

노회찬의원의 삶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이번에 벌어진 사건을 저는 잘 몰라요

이번 사건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게 아니고

7.2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노동자 대변한다면서 아내의 운전기사는 웬일인가요?

이혜훈기자라는 자가 쓴 기사인데

기사에 보면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드루킹 김동언씨의 측근 도모 변호사에게

5000만원을 받은 혐의가 보도되자

지지자들이 배신감에 휩싸였다

돈을 받았다는 사실만큼 돈을 받은 경우만으로도 화제된 것

특검팀에 따르면 도변호사가 어저구 저쩌구

나머지 3000만원을 도변호사가

노원내대표 아내의 운전기사를 통해 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기사 따옴표를 치고 집안에 아내전용 운전기사가 있을 정도면

재벌아닌가

이런 사람들이 노동자를 대변한다

이렇게 떠옴표로 기사를 시작해

노회찬 원내대표의 비서실장인 김종철 실장의 페이스북을 보면

이런 반론이 적혀있어

21일 토요일에 올라온 반론인데

'해당기자와 통화를 했다.

노의원 부인은 전용운전기사가 없고

2016년 선거기간에 후보 부인 수행을 위해

자원 봉사로 운전을 한 사람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랬더니 10일이든 20일이든

그 기사는 어쨋든 전용기사 아니냐고 한다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기사에 쓴 전용기사가 그런 의미냐고 따지고

게다가 돈을 주지도 않고 자원본사로 운전을 한 사람이라고

했더니

돈을 안준게 더 문제 아니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면서

돈을 주었든 안주었든

전용기사라고 우긴다

자원봉사자에게 돈을 주면

선거법 위반이라는 것을 알기나 하는 건지

세상에 전용기사 개념이 새로 생긴 거 같다

선거 때 후보 배우자 수행을 위해

선거운동원이든 자원봉사자이든

그런 경우가 많다고 했더니

자기가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했는데

그런 경우 별로 없다고 한다

이 근자감은 뭔가

게다가 이건 칼럼이라 자기생각을 쓰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한다

허허허

조용히 문제제기하고 해당만 수정하려고 했으나

언론중재위든 뭐든 조치를 취해봐야겠다

생각나는대로 막 쓰는게 기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여야겠다'이렇게 써

그러니가 조선일보 이혜훈기자는

선거기간동안 자원봉사 운전기사를

전용기사라고 쓰고

평생을 노동자를 위해 일했다는 정치인이

부인의 전용기사를 두는 건 뭐냐

이런 식으로 기사를 풀어나간겁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습니까

참 이 공방을 보다가

노회찬의원의 부고 소식을 듣고

정말로 참답합니다

이렇게가지 잔인한 짓은 서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진영이 달라도...

진보정당 후보의 가족은 그 바쁜 선거기간을 맞아서

이동을 할때 누군가가 차를 태워주면

그 차를 타면 안되느냐구요

그게 조선일보 눈에는 전용운전기사를 둔거고

그래서 그걸 재벌이랑 다를 게 없다

이렇게까지 표현을 해야겠습니까.

이 악랄한 보도가

재벌에 비유했던 그 보도가

평생을 재벌과 싸우셨던

고인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을지

생각을 하면

뭐라고 표현이 안되는 거죠

이렇게까지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부터는 노회찬의원의 삶에 대해서 여러 기록들을 종합을 해서

제가 아는 이야기들을 드릴 텐데요

국회의원이 되신 이후의 삶은많이 보도가 되었으니

진보정당운동을 하실 때 노동운동을 하실 때

이런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노회찬 의원은 부산 출신입니다

조금 잘 안와 닿죠

대부분 경상도 출신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경상도 억양을 잘 버리기가 어렵잖아요

노회찬의원은 부산 억양을 잘 안쓰는 편이시죠

아버님게서 북한 출신이라고 합니다

비료공장 노동자이셨는데

징병으로 끌려가서 고생을 하셨고

한국전쟁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초량동의 산동네 판자촌에 정착을 하셨다고 해

그래서 노의원의 억양이 완전히 부산말투가 아니라고 합니다

북한말투를 쓰셨던 아버님의 말투와

지역의 말투가 중화가 되어버린 거죠

초량동 산동네 판자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누님 한분과 남동생 한분이 있어요

판자촌에서도 방 한칸에 세를 들어서

사셨다고 해요

부산중학교를 졸업했는데

부산고등학교 그 당시 시험을 칠때였으니까요

여기 떨어지십니다

그래서 재수를 하셔서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을 해요

중학교때까지만 부산 생활을 하시고

그러면서 더더욱 부산억양이 지금은 많이 안 드러나는

이유인거 같습니다

노회찬 의원이 살아생전에 인터뷰를 하는 걸 보면

어버님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아버님게서 문화 예술쪽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해요

방이 한칸에서 두칸으로 늘어났을 때

아버님께서 제일 먼저 하셨던 일이

암실을 만드셨다고 해요. 사진을 많이 찍으신 겁니다

직접 암실에서 인화를 하시고

노의원께서는 아버님께서 정말로

예술적으로 멋진 분이셨다

그 분덕에 삶은 가난했지만 전신적으로 풍요로왔다

그렇게 회고를 합니다

그리고 노의원이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갔을때

아버님게서 밥 먹기 전에 너도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니

이런 걸 들어야된다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주시는

그런 멋진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뜻밖일 수도 있는데

노의원이 첼로를 어렸을때 부터 배웠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자라나는 아이가 악기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굉장히 현실적인 생각을 가지셨던 거죠

첼로를 배울때는거의 무료로 배웠다고 하시는데

웬지 이야기를 자주 하시지는 않아

왜냐면 첼로가 좀 노동운동가 이미지가 잘 안어울리죠

아까 조선일보가 퍼뜨린 마타도어처럼

노동운동하고 진보운동하는 사람은

첼로를 하면 부르주이처럼 보이고

이런 오해가 있는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자주 안하셨다고 해요

실제로는 첼로 연주를 꽤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수를 해서 서울경기고등학교 진학을 했구요

부산 생활을 완전히 마쳤는데

고등학교 때에는 웃으면서 인터뷰한 대목이

이화여고 축제에 초대를 받아서

첼로 연주를 하고

3000원인가 출연료를 받았다는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신 적도 있습니다

노회찬 의원이 72년에 재수끝에 경기고 입학을 하는데

이해 10월에 유신개헌이 이루어지죠

이종걸 의원이 노회찬의원의 경기고 동창이라고 합니다

노의원이 이종걸 의원과 함께 유신반대투쟁에 앞장섭니다

고등학교때 그런 투쟁을 마치고

서울대 철학과에 지원을 했다가 떨어지고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바로 징집영장이 나와

이른바 방위 판정을 받아요

노의원이 56년생인데 이때 정말 인구가 많았던

베이비붐세대여서 이 연베되신분들은 건강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다 보충역 판정을 받을 때였어요

그래서 노의원은 시력때문에 보충역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78년에 제대를 했는데

다시 대학 입시를 봐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합격을 합니다

그러니가 동갑내기들은 75학번인데

노의원은 고등학교 재수한번 대학교 재수한번 군복무까지 마치면서

동년배들보다 4년 늦게 79학번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하죠

노의원 인터뷰를 보면

이분이 대학을 간 이유가 아주 특이하고 명백합니다

내가 대학에 간 이유는 딱 하나 오로지

데모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분의 고등학교 때 꿈이 혁명이었다겁니다

경기고때 유신반대를 주도했던 경력도 있고

동기보다 4살이 많은 나이에 대학을 입학했으니까

입학을 하자마자

언더서클 바로 가입을 해서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 언더서클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 말씀을 드리겠지만

들으시면 많은 분들이 거부감을 가지실 수있는데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이대는

언더서클이라는거는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겁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뭔가 운동을 할 수있는 현실이 아니었어

언더서클을 하지 않는게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언더서클이 노의원 뿐만 아니고

전체 진보진영에서도 이슈가 된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말씀을 드리게씁니다만

언더서클이라는 건 그 시대의 시대상황이었다는 걸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노의원은 대학 다닐 때에도 평생 운동가로 살겠다는

것에 대해서 한번도 의심한적이 없었다고 해요

대학 입학 자체가 데모를 위해서 였으니가요

신념이 한번도 안꺾였던거죠

나중에 언더서클과 함께 이념이야기도 드릴 텐데

이념과 사람의 관계가 묘합니다

이념이 종교가 되어버리구요

이걸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는 절대선 같은게 되면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결합을 잘못하면

아주 이상한 결과물이 나올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운동의 동력이 이념, 종교화된 이념이 아니고

현실 혹은 민중 이렇게 시작을 하면

그리고 그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념을 차용하고 공부를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

이런 사람들은 변정하지 않아요

노의원은 이념이 교조가 아니었던 거죠

종교가 아니었던겁니다

노의원에게 이념은 현실과 민중을 변혁하기 위한 수단이었었던겁니다.

그래서 운동가의 삶을 버리지 않았던 거죠

평생 운동가로 살기로 결심했던 노의원이

82년에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따요

그래서 실제로 노동자의 삶을 시작합니다

위장취업이라고 하죠

그리고 학출이라고도 불렀는데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가

되는겁니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현대정공 하청공장에 취업을 하는데

이때 3년동안 노동자로 일하면서 받았던 월급이

국회의원이 되기전까지 노의원이 받았던

인생에서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았던 때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시기가 80년대 초반이 학생운동 출신이

대거 노동현장에 뛰어든 시기였어요

이때 농담이 학출 출신 노동운동가가 만명은 되었을거란 이야기있어

노의원은 경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그 조직에서 중책을 맡았구요. 당연히 3년이라는 노동자 생활이

빨리 끝나죠. 수배생활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7년동안 수배를 받고 도망을 다니게 됩니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하나만 더 추가를 하자면

인민노련이라는 조직이 있어

조직에 이름이 인민이 들어가야 되냐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이름이 무시무시한데...

인민노련의 인민은 그 인민이 아니고

인천지역 민주 노동자연맹의 약자죠

정확하게 말하면 인천지역의 학출 학생운동가 출신의

노동운동가들의 조직이었어요

그러면 인민노련에서의 인민이 북한에서 쓰는 그 인민이 아니고

인천민주의 약자라 해서

이 조직이 사회주의와 무관한 조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인민노련이 물론 당시의 정파적 구도로 보면

상당히 실사구시적인 조직이기는 했어

그래서 정통 사회주의를 주장했던 조직들로부터

개량주의자들아 이런 욕도 많이 먹었는데

그렇다고 인민노련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조직이 아니었느냐

그건 아니었어

인민노련은 지하조직이었구요

조직원 숫자만 600명이 넘는다는 전국 최대단위의

언더서클 조직이었어

단적으로 이 인민노련이 발행했던 기관지가

굉장히 영향력이 컸는데

기관지 이름이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노회찬 의원은 인민놀녀에서 조직국장을 맡았고

그와 겸해서 사회주의자라는 기관지의 편집위원이기도 해

실제로 인민노련 조직이 완전히 적발되고 난 다음에

지루한 법정공방을 벌였는데 굉장히 유명한 일화가 있어

그 당시 언더서클들이 조직사건으로 검찰에 구속이 되고 하면

법정 진술을 할때 우리가 하고 있는게 왜 사회주의;가 아니냐

우리는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다 이걸 설명하는데

많은 법정 공방을 벌여

인민노련은 법정공방을 벌이면서 최후진술에서

조직원중의 한 명이 당당하게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에요. 이렇게 답한 것로 유명합니다

'그렇소 우린 사회주의자요' 책으로도 지금 나와 있습니다

인민노련은 우리가 사회주의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던

숨기지 않았어요

지금 들으시는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 역시 얘들이 빨갱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실 텐데

이것도 시대상황을 보고 이해를 해주셔야합니다

제가 1980년대 선배들을 보면서 느끼는 짐작이지만

그 시절에는 사회주의자가 되지않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박정희, 전두환 이 두 악마가 다스렸던

자본주의였어

그런데 그 악마가 다스렸던 자본주의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는데

그 체제를 미국이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악마의 세상을 뒤엎을 대안을

고민을 할 때 이 악마진영의 반대 진영에서 대안을 찾을 밖에 없었던

거에요. 통제된 정보속에서...

그래서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뛰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시절 군사독재 시절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군부 독재 시스템을 허무는 중요한 대안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인민노련이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건

분명했는데

1990년대 동구 사회주의가 몰락을 하면서

그 이후에 내가 젊었을 때 사회주의 이념을

교조적으로 종교적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랬던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습을 봐야됩니다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로 돌아갔을때

교조적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멘탈이 박살이 나버립니다

왜냐하면 내 종교가 깨진 거에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될 지 갈피를 못잡다가

결국은 황급히 반대쪽으로 투항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과거 운동권들은 진짜 사회주의자들이었어

빨갱이들이었어

이렇게 손가락질하게 되죠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운동의 기반이 사회주의라는 교과서 교조 종교 이런 이념이 아니구요

민중과 현실에 박혀있던 사람들은 사회주의 몰락 하면 아 그래

그러면 우리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되겠다

우리 민중들과 다시 평등하게 살아나갈 우리의 시스템을 찾는 운동을 시작하자

이런 관점을 갖게됩니다.

노회찬의원이 그런 사람이었던 거죠

그래서 노의원이 2008년 시사인과 가진 인터뷰를 보면

자본주의는 태양처럼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게 있어요

노회찬 의원은 

인민노련 시절 이후 1990년 그리고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면서

이후의 삶을 보면 그때 얘기했던 정통적 사회주의 이념과는

완벽하게 결별을 합니다

그러면 이 노회찬 의원이 자본주의 포함해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살고 있던 자본주의라는 세상이 민중들과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억압적인 세상이라는 걸 절감하고 있는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가고 있는 중이었던 거죠

그러니가 자본주의는 태양처럼 영원하지 않다라는 말을 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서 끊임없이 온동을 하는 겁니다

이게 진짜 운동가의 모습인거죠

노회찬 의원은 인민노련 사건으로 끝내 구속이 됩니다

그리고 1992년 석방이 된 거에요 상상해보십시요

내가 감옥가기전에 내가 속했던 단체는 거대한 사회주의 이념조직이었는데

감옥에 갇혀있다 나와보니 이 조직이 박살이 난거에요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동구 사회주의는 몰락을 해버리고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하지만 이때도 민중과 현실속에서 

정신을 콱 박아놓고 있는 사람은 운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때 노회찬의원이 새로 선택한 길이 뭐냐면

아까 말씀드렸던 진정추

진보정당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이야

이 시절의 진정추는 뭐라 그럴까요

진짜 오만욕을 다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언더서클 조직들이 강한 힘을 갖고 있었기때문에

진보정당운동을 하면

저 자식들은 혁명을 포기한 애들이다

이념을 포기한 애들이다

이런식으로 별의별 욕을 다 먹었던

시절이었어요

실제로 비판의 뉴앙스랑 상관없이 내용은

맞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진정추는 사회주의혁명과 결별을 했구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봐야할 거에요

자본주의라는 현실 안에서 더 나은 시스템을 고민하는

방법으로 언더서클이 아니라

공개된 합법정당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선거였으니까요.

이데 지금은 간단히 들려도

당시에는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수십년동인 유지되어왔던 언더서클 지하조직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공개된 세상으로 조직을 다 공개하고

이제는 정말로 대중들 앞에서 

우리의 생각을 완벽하게 까발리고

심판받는 그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이야기거든요

이 말은 뭔가 언더서클들이 대중을 지도하고

이런 개념들을 포기하는

대중들을 지도하는게 아니라

대중들속에서 심판받고

그 속에서 운동을 하겠다는 코페루니쿠스 전환같은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그런 변화를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 변화를 노회찬의원이 받아들이죠

제 생각에는 그때부터 노회찬의원은 정통사회주의하고는

완벽하게 결별을 한게 아닌가 이렇게 짐작을 합니다

이후부터 노회찬의원의 활동을 보면

진보정당에 뼈를 묻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꿈이 진짜로 대단했어요

그 국회에 노동자를 대표하는 단 한명의 국회의원을 만들겠다

농민을 대표하는 단 한명의 국회의원이라도

이 열망이 정말 노의원이 보여준 열망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1992년 출소를 한 다음에 처음에 

백기완후보와 함께

대통령 선거운동을 했는데

1%밖에 지지를 얻지 못했거든요

이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운동을 포기를 해요

그런데 노회찬 의원은 자리를 지킵니다

그리고 5년 뒤 국민승리 21을 결성해서

권영길 후보와 다시 대선에 나서지만

이때도 참패를 하죠

보통 이 정도 되면

진보정당은 내 생애에서는 틀렸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런데 노회찬의원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000년 1월에 민주노동당 결성의 주역이 되죠

이분의 삶의 2막은 진보정치 의회진출을 위한

헌신의 역사 같은 거였습니다

지금은 노의원이 3선이니까 

왠지 사람들 인상이 국회의원 오래 하셨고

본인도 국회의원 배지다는 거 욕심 되게 있어서

뭐 이렇게 3선이나 했구나 하지만

첫번째 배지를 단게 2008년이었구요

이 총선때는 비례대표 순번이 8번이었습니다

욕심부리는 사람이 들어갈 수있는 번호가 아니었어요

대한민국 진보정당이 역사상 한 석도 못 얻었을때였는데

비례대표 8번이라는 건 절대로 국회의원이 되는 자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자리를 맡고 발군의 토론 실력을 보이면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혁혁한 공헌을 하죠

아슬아슬하게 8번까지 극적으로 당선이 됩니다

그래서 노회찬 의원이 국회위원이 돼

지금의 진보정당이 갖고 있는 여러 뭐 질곡의 역사도 있고

자산들도 있지만

그 여러 정치적 기반들은 굉장히 많은 면에서

노회찬이라는 한 진보정당의 꿈을 갖었던

헌신적인 활동가가 남긴 그늘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빚을 노회찬의원께 지고 있는 거죠

왜 평생 진보운동을 했느냐

살아생전의 노회찬 의원의 답은

한 사람이 평생에 한 가지 일만 추구해도 이루기 힘든데

어떻게 여러가지 일을 하겠습니까

학창 시절에 결심한대로 이 사회의 약자와 빈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뿐입니다.

평등하고 알므다운 세상 평생을 함께 투쟁해왔던 노동자들과

민중들이 차별받지 않고 형제자매처럼 지낸는 그런 

세상에 도착하셨기를 소망합니다.

그곳에서 편안하게 쉬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우리는 진보정당의 가장 든든했던 버팀목으로

기억할거고

제일 강건했던 동지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