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전교 1등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대단한 착각에 관하여

2020. 9. 14. 21:44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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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전교 1등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대단한 착각에 관하여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09-13 09:55:31

수정 2020-09-13 09:5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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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정책에 대한 의료계의 반발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문제에 관해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딱히 할 말이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의료계 반발 과정에서 불거진 ‘전교 1등 논란’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달 초 대한의사협회가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한다며 SNS에 올린 ‘전교 1등’ 홍보물에 대한 이야기다.

문제 풀이 형식으로 제작된 의협의 게시물에는 “매년 전교 1등을 하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와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추천제를 통해 공공의대에 입학한 의사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실렸다.

아, 이 저렴한 선민의식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어떤 의사를 고르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1>치료를 잘 하는 의사 <2>환자의 고충을 이해하는 의사, 뭐 이런 종류의 답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매년 전교 1등을 하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는 도대체 왜 들어가는지 나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이들과 다른 종류의 초중고를 나온 게 아니라면, 내 기억에 초중고 시절 나는 단 한 번도 의료 기술에 관한 공부를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초중고 시절 공부를 잘 한 것은 뛰어난 의료인이 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에 대한 지독히 단순한 평가

 

지금 한국은 초중고 시절 국영수 중심의 성적으로 인간의 총체성을 평가하고 그것을 진리처럼 여긴다. 그래서 갓 스무 살이 된 청년들의 총체적 능력을 국영수 성적에 따라 한우 등급 매기듯이 매겨버린다. 너는 전교 1등을 위해 매진했으니 1등급, 너는 대학을 못 갔으니 저기 밑에 10등급, 뭐 이런 식이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보자. 전교 1등을 위해 매진했다는 의사 선생님들, 혹시 코시-슈바르츠의 부등식이 뭔지 아시나? 대부분 모르시지? 아마 그러실 거다. 이거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적인 절대부등식 공식이다.

내가 이 질문을 수백 번 해봤는데 수학을 전공하지 않은 30세 이상 중 코시-슈바르츠 부등식을 아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의사협회 전교1등 홍보물ⓒ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그래서 묻는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사용할 일이 없고, 지금도 인구의 99% 이상이 모르는 이 코시-슈바르츠의 부등식이 왜 뛰어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구분하는 잣대가 돼야 하나? 그리고 이 잣대가 왜 평생을 따라다니며 인간을 함부로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구분하느냔 말이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내가 방송에서 이 이야기를 한 번 했더니 수학 전공자들이 “수학을 무시하냐?”며 대거 항의 메일을 보낸 일이 있었다. 내 말은 수학이 안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수학에서 코시-슈바르츠 부등식은 당연히 중요하겠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수학에서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게 왜 인간의 총체적 능력을 규정하며 등급을 나누는 기준이 돼야 하냐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교 시절 수학 성적은 신분을 가르는 준거가 된 지 오래다. 그러니 의사들이 전교 1등(을 한 것도 아니고 ‘전교 1등을 위해 매진했다는 것’으로 폼 잡는 것도 웃기다)으로 저런 선민의식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정말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와 관련한 경제학 실험을 하나 살펴보자. 최후통첩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생면부지의 A와 B 두 사람 중 A에게 1만 원을 공짜로 지급한 뒤 “당신의 파트너인 B에게 얼마를 나눠주시겠어요?”라고 묻는 게임이다.

A에게 ‘돈을 분배할 권리’가 있다면 B는 ‘A의 제안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B는 A의 제안액을 보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단, B가 A의 제안을 거부하면 두 사람 모두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이 게임을 해보면 A는 평균 약 4,500원의 돈을 B에게 나눠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인간은 이 정도로 나눔과 연대를 베푼다. 이게 최후통첩 게임의 첫 번째 핵심이다. 인간은 경제학이 규정하는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또 한 가지, B는 A의 제안 금액이 2,000원 이하일 때 과감히 그 제안을 거부한다. 이러면 자기도 한 푼도 못 받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2,000원을 포기하면서까지 A의 불공정한 분배를 응징하는 것이다. 이게 최후통첩 게임의 두 번째 핵심이다. 인간은 자기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불공정에 저항한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호프먼(Elizabeth Hoffmann)이라는 학자가 이 게임을 조금 비틀었다. 최후통첩 게임을 똑같이 하는데, 게임 직전에 두 사람에게 아주 간단한 퀴즈를 풀게 한 것이다.

퀴즈는 “2+3=5” 류의 아주 쉬운 것들이었다. 거의 순발력 테스트에 가까운 퀴즈인데, 이 퀴즈를 푼 사람이 승자가 된다. 그리고 승자는 최후통첩 게임에서 돈을 나눠주는 A의 역할을 맡는다. 패자는 나머지 B의 역할을 맡는다. 최후통첩 게임에서는 돈을 나누는 A가 B에 비해 훨씬 유리하므로 승자에게 A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아까 최후통첩 게임에서 A는 평균 4,500원 정도를 나눠준다고 했다. 그런데 호프먼의 게임에서 A는 그보다 훨씬 낮은 금액, 즉 평균 2,000원 정도를 나눠주고 8,000원을 자기가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A가 훨씬 탐욕적으로 변한 것이다.

B의 태도 변화도 놀랍다. 아까는 2,000원 이하를 제안 받았을 때 B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호프먼의 게임에서 B는 A가 2,000원 이하를 주겠다는 굴욕적인 제안을 해도 대부분 받아들였다.

이 불평등의 원인이 고작 고교 성적이라니!

이유가 뭘까? 간단한 퀴즈를 통해 신분이 나뉘었기 때문이다. 퀴즈의 승자인 A는 ‘나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 A의 자리를 차지했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당당하게 챙기려 한다. 퀴즈의 패자인 B 또한 ‘내가 퀴즈를 못 푼 탓이니 불평등을 받아들여야 해’라고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퀴즈의 승자인 A에게 정말 이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나? 그가 한 것이라고는 그냥 “2+3=5”를 더 빨리 푼 것뿐이다. 이게 이런 엄청난 불평등의 원인이 될 수 있나?

하지만 게임에서 증명됐듯이 아무 것도 아닌 퀴즈를 푼 것만으로도 승자인 A는 오만해지고 패자인 B는 열등감에 빠진다. 이게 우리가 이 사회의 불평등을 대하는 방식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고교 수학이 쓸 모 없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게 뛰어난 의료인과 뭔 상관이 있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 했다는 것은 적어도 인내심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한 것 아니냐?”라는 반론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인내심 테스트를 왜 수학으로 하는 건데? 차라리 ‘찜질방에서 누가 오래 견디나’로 하면 훨씬 간편하지 않겠나? 게다가 꿈을 활짝 꽃피워야 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왜 인내를 그토록 강조하는 건데? 바야흐로 활짝 열린 창의성의 시대에 ‘하기 싫은 것 꾹 참고 오래 하는 능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난리인가?

의협이 스스로 인정했듯이 그들이 지금 누리는 기득권의 본질은 ‘전교 1등을 위해 매진했던’ 그 잘난 고교 성적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 의사들도 지금 코시-슈바르츠 부등식이 뭔지 모르지 않나? 그건 인간의 총체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고, 뛰어난 의료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더더욱 되지 않는다.

존경받는 의사가 될 능력이 없으니 고작 내세우는 게 전교 1등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냥 고등학교 인내심 테스트에서 조금 더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라고 착각하니 지독한 선민의식에 불타 현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대국민 홍보에 사용하는 대목에서 당신들이 얼마나 멍청한지가 입증된다. 이 멍청한 자들에게 내 건강과 생명을 맡겨야 하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이재용 구속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인가?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09-06 14:50:42

수정 2020-09-06 14: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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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경제역사학 교수인 애브너 오퍼(Avner Offer)는 “노벨경제학상이 노벨물리학상에 가까울까? 노벨문학상에 가까울까?”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질문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노벨문학상에 가깝다”고 단언했다. 이 말의 의미는 경제학이 답이 정해진 과학이 아니라 마음대로 창작할 수 있는 문학에 가깝다는 뜻이다.

오퍼 교수의 이런 주장은 현대 경제학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경제학이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을 과학이나 수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수많은 그래프와 표들은 마친 경제학을 ‘정답이 있는 학문’으로 착각하게끔 만든다.

그런데 그럴 리가 있나?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학문이라면 인류는 어떤 경제 시스템을 만들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고, 수많은 실패를 반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 간단하고 명백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경제학 그 자체에 있었다. 학문이 인기를 끌면서 경제학은 오만해졌다. 마치 자신들의 계산이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거들먹거린 것이다.

“경제적 효과는 OOO”원이라는 허세

서론이 좀 길어졌는데,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덧붙인다. 이런 이유로 나는 경제연구소 등에서 종종 발표하는 “XXX의 경제적 효과는 OOO”이라는 발표를 거의 믿지 않는다. 그 숫자가 도출된 과정을 꼼꼼히 살펴보면 현실세계와 너무 동떨어진 공식을 사용하는 경우기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정답을 찾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현실은 수만 가지가 넘는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수만 가지의 변수를 대부분 생략하고 3, 4개의 변수만으로 답을 뚝딱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치 그걸 정답처럼 발표한다. 웃기는 짓들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세테리스 패러버스(ceteris paribus)라는 어려운 말로 포장한다. 세테리스 패러버스란 “변수가 너무 많으면 계산이 불가능하므로 다른 변수는 없다고 가정하고 계산한다”는 뜻이다.

만약 사람들이 “왜 이 변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계산하셨어요?”라고 물으면 경제학자들은 “세테리스 패러버스에 의한 계산이에요”라고 답을 한다. 이러면 대부분 민중들은 ‘세테리스 패러버스가 뭔지 몰라도, 경제학자가 저렇게 어려운 말로 설명하는 걸 보니 뭐가 있긴 있구나’라고 겁을 먹고 질문을 멈춘다.

하지만 뭐가 있기는 개뿔이 있겠나? 그 말은 그냥 “우리는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을 제대로 계산할 길이 없어서 대충 마음대로 계산했어요”라는 뜻에 불과하다.

이런 종류의 기억 중 제일 황당했던 일은 2015년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가 8월 14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대체공휴일의 효과를 1일 당 금액으로 따지면 1조 3,000억 원 정도, 고용유발은 4만 6,000명 정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고 밝힌 것이었다.

노동자의 휴식권 보장을 적극 지지하는 나로서는 임시 공휴일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만, 일국의 경제 부총리가 “하루 더 쉬면 1조 3,000억 원의 경제적 효과가 있다”며 생색을 내는 장면에서는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진짜면 맨날 쉬면 되겠네?

이재용 구속의 경제적 효과를 계산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경제적 효과’ 운운하는 계산 대부분이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신뢰할 만하지 않은 계산의 영역으로 나도 발을 내디뎌 보겠다.

검찰이 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기소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추진 과정에서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지른 혐의다. 벌써부터(아니, 오래 전부터) 보수 언론은 “이재용이 구속되면 나라 경제가 휘청거린다”며 엄살이다.

과연 그럴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오히려 이재용이 구속되면 나라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폭증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민중의소리


수치로 입증(응?)할 수도 있다. 물론 나도 이 수치를 도출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세테리스 패러버스를 왕창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 이야기도 신뢰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당연히 그렇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오는 숫자에는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우선 첫째, 이재용의 구속은 최소 2조 원에서 최대 4조 원 이상의 국고를 늘리는 효과를 유발할 예정이다. 왜냐하면 국내 2위의 재벌 현대차그룹이 벌써부터 “우리는 앞으로 세금을 잘 내겠어요”라며 쫄았기 때문이다.

현대차 그룹의 승계자 정의선은 이재용 따라쟁이로 유명했다. 이재용이 편법으로 재산을 불리면, 정의선은 그 방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런 방식으로 정의선은 3조 원대 거부에 올랐다.

그런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문제가 되면서 이재용이 약 1년 동안 구속되자 정의선이 정신을 차렸다. ‘이번만큼은 재용이 형 따라했다가 엿되겠구나’라는 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지금 현대차 그룹은 “앞으로 세금 잘 내고 3세 승계하겠다”라고 밝힌 상태다.

정 씨 일가가 착해서 이런 결심을 한 게 아니다. 걔네들? 지금까지 해온 짓들로 판단하건데 정 씨 일가는 삼성 이 씨 일가에 버금가면 버금갔지 결코 개과천선 따위를 할 자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자들이 앞으로는 세금을 잘 내겠다고 한다. 이재용 구속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내세운 기업 지배구조 개편안을 보면 일단 정 씨 일가는 세금을 2조 원 정도 더 낼 생각이다. 여기에 개편 이후 정몽구-정의선 부자가 제대로 상속증여세를 내면 추가로 최소 2조 원의 세금이 더 걷힌다. 평소 같으면 이 4조 원, 절대 낼 생각이 없었던 정 씨 일가가 이 돈을 내겠단다. 벌써 국고가 무려 4조 원이나 증가할 예정이다.

둘째, 이재용에 대한 단죄는 한국 재벌들의 상속증여세 징수에 새로운 장을 열 것이다. 20대 재벌이 보유한 주식 총액은 대략 60조 원 남짓이다. 이들은 앞으로도 3세, 4세 승계를 계속할 것이다. 이재용 구속에 겁을 먹은 이들이 앞으로 상속증여세를 제대로 낸다고 가정하면 최소 30조 원 이상의 국고가 충당된다. 엄청난 돈이다.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

셋째, 조세 저항을 줄일 수 있다. 뇌물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정부의 신뢰도가 폭락해 조세저항이 거세진다. 부패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는 것만으로도 정부 세수가 GDP의 0.8%나 늘어난다는 통계도 있다.

이재용이 박근혜에게 90억 원대의 뇌물을 갖다 바친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이를 응징하면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져 조세 저항을 줄일 수 있다. 한국 정부의 1년 세수가 400조 원 정도니 세수가 0.8% 늘어나면 3조 2,000억 원이나 된다. 그것도 그냥 3조 2,000억 원이 아니라 매년 이 정도가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10년이면 32조 원이라는 거금이 복지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

국민소득 증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13년 세계은행(World Bank)은 뇌물과 부정부패가 유발하는 경제적인 손실을 GDP의 3% 정도로 추산했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은 이 수치를 GDP의 5% 수준으로 더 높게 잡았다.

한국의 1년 GDP는 약 1,800조 원 정도다. 이재용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단죄한다면 우리는 매년 58조 원(GDP 3%)에서 90조 원(GDP 5%)의 국민소득을 늘릴 수 있다. 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일인가?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한 거 아니에요?”라는 반론은 매우 옳다. 내가 계산했지만, 세테리스 패러버스를 왕창 사용한 이런 계산은 당최 믿을 게 못된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수치를 믿어달라는 게 아니다. 이재용 구속은 나라 경제 측면에서 매우 큰 이익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이재용이 뭐라고 이 범죄자 하나를 잡아가두는 일이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구속은커녕 기소를 하는 일조차 해야 되네 말아야 되네 이러고 있는 게 정상이냐는 이야기다. 우리 제발 좀 정상적으로 살자. 수치야 그냥 해본 이야기지만, 확실한 것은 ‘정상적으로 사는 것’을 회복하는 일이 국고도 늘리고 경제 발전도 돕는다는 사실이다.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머리를 맞댈 용기, 연대를 복원하는 지혜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08-30 11:05:08

수정 2020-08-30 11: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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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당적이 없지만 나는 과거 한 진보정당의 당원이었던 적이 있었다. 당비만 내는 불량 당원이긴 했어도 아주 가끔 지역 당원 모임에 얼굴을 비추긴 했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나는 그 모임에서 희망보다 절망을 느낀 적이 훨씬 많았다.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합이 잘 안 됐기 때문이었다.

당원 모임은 늘 격렬했다. 내가 보기에 대충 합의하고 넘어가도 될 문제였는데도 한 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당원들은 서로를 “존경하는 아무개 동지!”라고 불렀는데, 정작 토론 때에는 피차를 전혀 존경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속으로 ‘그럴 거면 차라리 <안 존경하는 아무개 동지>라거나 <미워하는 아무개 동지>라고 솔직하게 부르지’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당명을 바꿀 때 논쟁은 극에 달했다. 물론 나도 선호하는 당명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당명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주요 후보로 오른 당명은 몇 글자 다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몇 글자를 가지고 여러 정파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게 이렇게 싸울 일인가?

보다 못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당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당명을 기사식당이나 숭구리당당으로 하시고, 제발 좀 그만 싸웁시다”라고 말이다.

내 감정이나 기억이 과장됐을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해보자. 이른바 ‘정파’라고 불리는 파벌의 문제가 범 진보진영 내에서 하루라도 안 심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 정파의 갈등이 과연 오로지 역사의 진보를 위한 것이었을까? 내가 무식해서 그런지 모르겠어도, 나는 지금까지도 그 갈등이 역사의 진보를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머리를 맞댈 용기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시비하자는 게 아니다. 진보는 다양성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과 같은 것이다. 다양한 의견은 진보의 숙명이자 자랑이기도 하다. 문제는 다른 의견을 해소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납작하게 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관행이 우리에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힌트를 하나 소개해보려 한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자연주의 의사결정론의 창시자로 불리는 심리학자 게리 클라인(Gary Klein)이 두 주인공이다. 카너먼과 클라인은 인간이 어떤 경로로 의사결정을 내리는지를 연구한 의사결정이론 분야의 양대 산맥이다.

이 두 거장은 전문가의 의사결정에 대해 매우 상반된 시각을 가졌다. 카너먼은 “전문가라도 많은 편향 탓에 형편없는 결정을 자주 내린다”고 주장한다. 반면 클라인은 “전문가의 직관은 이성을 뛰어넘는 매우 훌륭한 것이다”라고 반론한다.

“그게 뭐 중요한 주제라고 지면에 소개를 하느냐?”라고 반론하지 않아주셨으면 한다. 경제학과 심리학에서 다루는 의사결정이론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그러니 카너먼이나 클라인 같은 거장들이 의견을 다투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완전히 상반된 주장의 이 두 거장이 언젠가 치열한 논쟁을 벌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한판 대결을 은근히 기대하기까지 했다. 사람들 심리가 그렇지 않은가? 원래 싸움 구경이 재미진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두 학자는 한판 대결이 아니라 공동연구라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카너먼이 클라인에게 공동연구를 제안했고 클라인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진심으로 거장들의 품격을 느꼈다. 공동연구를 벌여 한 가지 결론에 이르면 그 뒷감당은 어찌 할 것인가? 애초 정 반대의 의견을 지닌 둘 중 한 명은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둘 다 의사결정이론 분야에서 맨 꼭대기까지 오른 인물들인데? 하지만 두 사람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흔쾌히 공동연구에 동참했다. ‘거장이 괜히 거장이 아니구나’라는 감탄을 금치 못한 대목이었다.

험난했던 공동연구와 위대한 합의

두 거장은 이후 꽤 오랜 기간 연구를 진행했는데, 예상대로 좀처럼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의견이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정반대였던 데다가, 양쪽 다 30, 40년의 오랜 연구 결과를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카너먼의 회고다.

“클라인은 직관을 주장하는 전문가를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내게 말한 대로 진정한 전문가는 자기 지식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반면 나는 전문가 중에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자기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짜 전문가도 많다고, 그리고 주관적 확신은 너무 확고하고 무익한 때가 많아서 보편적 제안이나 진술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연대를 상징하는 아이콘ⓒMichele Pinna

그런데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이 마침내 합의에 이를 중요한 힌트를 하나 찾아냈다. 그 힌트란 두 사람이 말하는 ‘전문가’가 각각 서로 다른 전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클라인이 말하는 전문가는 소방지휘관이나 임상 간호사 같이 정말 오랫동안 현장에서 경험을 누적한 진짜 전문가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직관이 뛰어난 이유는 이들 스스로가 ‘내 지식이 사람을 살리는 일에 충분하지 않다’는 한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카너먼이 연구한 전문가들은 속된 말로 야부리만 터는 전문가, 즉 정치평론가나 주식 감별사, 50년 뒤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 등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대상을 연구하고 있었떤 것이다.

이 힌트를 기반으로 두 사람은 마침내 한 가지 합의에 도달한다. 전문가의 직관이 뛰어날 수도 있고(클라인의 견해), 엉망진창일 수도 있는데(카너먼의 견해),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잘난 척 하는 전문가들은 대부분 틀렸다는 사실이다. 이 역사적(!) 합의에 대한 카너먼의 회고는 이렇다.

“클라인과 나는 마침내 중요한 원칙에 동의했다. 사람들이 자기 직관을 확신한다고 해서 그 직관이 타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내 판단을 이 정도는 믿어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일지라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내가 전문가니 내 말을 믿어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카너먼에 따르면 이 사람은 자신감 착각에 빠져 오류를 저지르는 중이다. 그리고 클라인에 따르면 이 사람은 ‘진정한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의 능력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클라인조차도 “진정한 전문가는 자기 지식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너먼은 이렇게 덧붙인다.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예측이 부족하다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 전문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의 직관이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좋게 말해 자기기만이다.”

어떤 주장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주장이란 언제든지 틀릴 수 있기에, 틀렸다고 누군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이 세상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거장에 따르면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나는 안 틀려. 내가 항상 옳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은 매우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카너먼에 따르면 대중을 속이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일이다.

다시 연대를 복원하자

이 두 거장의 공동연구는 나에게 참 많은 교훈을 선물해줬다. 이들은 ‘내가 틀렸을 수 있다’는 전제로 정반대의 사람과도 함께 진실을 찾아 떠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전문가는 이런 겸손한 전문가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더 빨리, 더 가까이 진실에 다가간다.

진정한 연대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다툼이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이 합의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데, 그 과정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니 너는 짜져 있어라’는 태도의 충돌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카너먼과 클라인에 따르면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이들은 전문가도, 개뿔도 아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나는 다른 사람보다 절대로 뛰어나지 않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한 가지 나은 점이 있다면, 나는 적어도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세상에나, 실로 부끄럽다. 한줌도 안 되는 지식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우리 같은 소인들 앞에서 소크라테스 선생님 같은 분이 “나는 다른 사람보다 절대로 뛰어나지 않다”고 말하면 우리는 뭐가 되나?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이가 자신을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실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연대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전직 3선 의원 김문수 씨, 경제학은 당신을 한량이라 부릅니다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08-23 08:54:24

수정 2020-08-23 08: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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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3선 의원 김문수 씨가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줬다. 광복절 집회에 참석했던 김 씨가 코로나 검진을 요청한 경찰관들에게 “사람을 뭘로 보고 어디라고 와서 나한테 가자고 하느냐?”며 호통을 쳤다는 거다.

그가 경찰관에게 “신분증을 내봐라. 나는 김문수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피식 웃었고, “내가 국회의원을 3번 했다”라고 핏대를 올린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빵 터졌다. 어이쿠 김문수 씨, 못 알아봐서 열라 죄송합니다?

권위에 찌든 이 꼰대를 도대체 어디다 써먹어야 하나? 내가 무식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꼰대를 써먹을 대목이 없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이 있다. “사람을 뭘로 보고”나 “내가 누군지 알아?” 따위의 과시욕이 김문수에게 도대체 왜 생겼느냐는 것이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경찰관과 실랑이 하는 장면ⓒ사진 = 김문수 페이스북 동영상 갈무리

물론 권위주의와 꼰대의식이 그 근간이겠으나, 경제학은 김문수 씨의 심리상태를 추측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한다. ‘베블런 효과’라는 경제학 용어를 만들어낸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이 그 주인공이다.

과시욕과 베블런 효과

영화 [신세계]에서 조폭 정청(황정민 역)은 이자성(이정재 역)에게 새로 산 명품 선글라스(나중에 짝퉁으로 밝혀지지만)를 자랑한다. 그러면서 그는 “브랜드가 브랜드라 그런지 겁나 비싸요. 아이 좋아. 역시 명품이 좋긴 좋아. 시커먼 게 조낸 안 보여”라고 투덜댄다.

상식적으로 ‘조낸 안 보이는’ 선글라스가 좋을 리가 없다. 선글라스는 햇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지, 앞이 조낸 안 보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다. 시커매서 앞이 안 보이면 그게 왜 선글라스인가? 그냥 ‘안대’지!

그런데도 왜 정청은 기능이 떨어지는 명품을 좋아할까? 이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다. 베블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먹는 계급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베블런은 이런 자들을 유한계급(有閑階級)이라고 부른다. 유한계급이란 ‘한계가 있는 계급’이란 뜻이 아니고, 매우 ‘한가(閑暇)’한 계급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레저계급(leisure class)이라고 부르는데, 한 마디로 매일 놀고먹는 불한당이나 한량 정도 되는 자들이다.

문제는 대운(大運)을 등에 업고 놀고먹으면서도 호의호식하는 이 한량들이 열심히 일을 해야 먹고사는 노동자 계급과 뭔가 달라 보이고 싶어 안달을 한다는 점이다. 만약 한량들이 노동자들과 똑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면 티가 안 날 것 아닌가?

그래서 한량들은 ‘과시욕’이라는 상품을 마음껏 소비한다. 시커매서 앞이 조낸 안 보이는 선글라스를 명품이라는 이유로 쓰고 다니는 이유가 바로 이 과시욕 탓이다.

한량들의 과시욕은 남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는 유한계급의 본능 같은 것이다. 그래서 베블런은 자신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상류층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치를 일삼는다”고 꼬집었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베블런 효과는 주류경제학이 자랑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거스르는 현상이기도 하다. 경제학에 따르면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과시욕에 찌든 한량들은 비싼 제품에 더 열광한다. 명품 숍들이 가방 하나에 수백 만 원씩 받는 사기(?)를 저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놀고먹는 자들의 특징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베블런 효과는 단지 부자들의 아둔한 소비를 꼬집는 말이 아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유한계급, 즉 사회에 아무 기여 없이 놀고먹는 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꼭 존재한다는 데 있다. 과시욕은 이 한량들의 전유물이다.

김문수 씨와 딱 어울리는 이야기 아닌가? 이 분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경력을 팔아 보수 정당에서 도지사도 하고 3선 국회의원까지 한 인물이다.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할 때에는 직업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직업도 없다. 고작 한다는 일이 가스통들 쫓아다니며 헛소리나 하는 게 전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정치 한량이다.

그리고 이런 한량들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죽는다.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를 할 때에는 사람들이 “우리 의원님”, “우리 도지사님”하고 떠받드니 과시욕이 자연스레 충족된다. 하지만 한량이 된 지금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못 알아볼까봐 전전긍긍이다.

그러니 경찰관들이 김문수 씨 건강 걱정해서 공손하게 동행을 요청해도 “나 김문수야. 나 3선 국회의원 출신이라고. 나를 뭘로 보고!”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 거다. 김문수 씨, 누가 당신이 김문수 아니랬냐? 국가라고 당신이 좋아서 당신 건강 걱정 해주고 있겠냐고? 당신이 병에 걸리면 여기저기 옮기고 다닐 게 뻔하니까 돌봐주려는 거다.

김문수 같은 사람이 3선 국회의원씩이나 했다는 사실이 비극이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지하기에 그런 사람이 선출됐다는 사실을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을 국회의원으로 뽑았던 이유가, 한량이 됐을 때 과시용으로 쓰라고 국민들이 표를 준 건 절대 아닐 것이다.

전직 3선 국회의원 김문수 씨. 혹시 요즘 들어 자꾸 사람들 앞에서 폼 잡고 싶고 그런 증상이 더 심해지시나? 그러면 신성한 노동을 하라. 한량으로 사는 거, 그거 생각보다 정신건강에 매우 해로워서 하는 이야기다.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전광훈과 그 일당을 사회에서 격리시켜라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08-16 09:13:55

수정 2020-08-16 1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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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하면 종교인들에게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뚜껑이 열려서 참을 수 없다. 전광훈 목사와 그 일당들, 우리는 진지하게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광복절이었던 15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 회장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에서 115명의 확진자가 무더기로 쏟아지면서 누적 확진자가 134명으로 급증했단다. 이것도 분통 터지는 일인데 전 목사는 이를 두고 “외부로부터 바이러스 테러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육성으로 쌍욕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광훈 씨(이제부터 당신을 목사라고 칭하지 않겠다), 잘 들어라. 외부세력이 머리에 총 맞았냐? 당신이 뭐 중요한 인물이라고 당신 교회에 바이러스 테러를 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사람들, 즉 당신이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뭐라 이야기를 하면 ‘지나가던 멍멍님이 짖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당신이 뭔가 이야기를 하면 폐지된 개그콘서트 다시 보는 셈 치고 즐겁게 웃었다. 당신을 향한 바이러스 테러? 과대망상도 적당히 해라!

그런데 이번 일만큼은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다. 대한민국은 헛소리의 자유가 있는 나라여서 당신이 헛소리를 하는 건 얼마든지 괜찮다. 그런데 당신 교회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당신의 헛소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지만 당신 교회의 확진자는 반년 넘게 바이러스 확신을 막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국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교회 집회에서 확진자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면 문제의 원인을 찾고 재발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고작 하는 말이 외부세력의 테러라고? 그 말은 앞으로도 교회의 감염병 관리를 지금처럼 개판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렷다! 도대체 네가 뭔데 이 나라 국민들에게 이런 고통을 준단 말인가?

나는 이번에 확신했다. 당신은 대한민국 공동체를 대놓고 망치고 있다. 그리고 경제학은 당신 같은 파괴자를 즉각 사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공공재 게임과 무임승차자

공공재 게임(public goods game)이라는 것이 있다. 생면부지의 참가자 다섯 명을 모은 뒤 1만 원씩 나눠주고 이들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게임이다. 이들이 낸 기부금은 공공금고에 쌓이는데 그냥 쌓이는 게 아니라 세 배로 불어서 쌓인다.

모금이 끝나면 공공금고에 쌓인 돈을 정확히 5분의 1로 나눠 다시 각자에게 나눠준다. 누가 얼마를 냈건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똑같이 나눈다. 심지어 누가 얼마를 기부했는지 알 방법조차 없다. 이 게임은 경제학에서 가장 싫어하는 무임승차자, 혹은 프리라이더(free-rider)가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상식적으로 이 게임에서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다섯 명 전부 1만 원을 몽땅 기부하는 것이다. 이러면 ‘5만 원 X 3 = 15만 원’이 기부되고 이 돈을 다섯이 똑같이 나눠가지면 1인당 3만 원씩 받을 수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서울시가 보수단체에게 집회금지 명령을 내린 가운데 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그런데 이 게임을 실제로 해보면 무임승차자가 꼭 등장한다. 이 무임승차자는 한 푼도 내지 않고 버틴다. 이때 나머지 네 명이 1만 원을 몽땅 기부하면(총 4만 원), 그 돈은 세 배로 불어서 12만 원이 공공금고에 적립된다. 이 12만 원은 다시 다섯 명에게 분배되므로 각자 2만 4,000원씩 얻는다. 무임승차자는 애초에 1만 원을 챙긴데다가 공공금고로부터 2만 4,000원을 추가로 획득해 총 3만 4,000원을 얻는다.

이 게임의 1차적인 교훈은 이타적인 사람들과 이기적인 무임승차자가 섞여있으면 무임승차자가 무조건 유리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현실 사회에서 이런 게임은 절대로 단판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우리는 이런 게임을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

첫 판을 마치고 두 번째 판이 시작된다고 생각해보자. 1만 원을 온전히 기부한 사람들은 당연히 열이 받는다. 나는 선의를 바탕으로 1만 원을 몽땅 기부했는데, 돌아온 돈은 3만 원이 아니라 2만 4,000원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섯 명 중 누군가가 돈을 안내고 버텼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기부 안 하고 자기 몫을 더 챙겼어?”라고 길길이 뛰어도 소용이 없다. 무임승차자가 자백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다섯 명은 범인을 잡지 못하고 다음 판에 돌입한다. 이때부터 사람들 생각이 복잡해진다.

‘왜 나만 손해를 봐야 해? 나도 기부 안 하고 버티는 게 더 유리하지’라는 유혹이 들불처럼 번진다. 그도 그럴 것이 첫 판에서 무임승차자는 무려 3만 4,000원이나 벌어갔기 때문이다. 이 생각이 확산되면 두 번째 판에서 기부금은 더 줄어든다.

두 번째 판이 끝나면 이번에는 분배되는 몫이 더 줄어든다. 또 다시 사람들이 길길이 뛰겠지만 역시 범인을 잡을 길은 없다. 이런 식으로 판이 거듭되면 다섯 명 다 한 푼도 기부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

다섯 명이 서로를 믿고 1만 원씩 기부하면 3만 원을 챙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무임승차자 한 명이 판을 흐려놓는 바람에 이기심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결국 몇 판이 지나면 다섯 명 모두 애초 받은 1만 원 외에 한 푼도 더 챙기지 못한다.

이 게임의 진짜 교훈은 이것이다. 이기심은 전염병과도 같다. 한 명의 무임승차자를 방치하면 공동체는 파괴되고 모두가 손해를 입는다. 이것이 바로 무임승차자를 발견했을 때 즉각 제거하거나 격리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협동은 용서와 같은 말이 아니다

내가 협동의 사회를 강조하고 다니다보니 받는 오해가 하나 있다. 협동이 좋은 말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나에게 “협동경제학은 용서와 관용을 기반으로 하는 거지요?”라고 묻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협동은 용서나 관용과 같은 말이 결코 아니다.

협동의 공동체는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과도 같다. 이 그릇을 깨지 않기 위해서는 매우 섬세한 조치들이 필요하다. 특히 무임승차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용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 한 명의 무임승차자를 방치하면 판이 거듭될수록 공동체가 깨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기심은 전염된다.

온 국민이 감염병 사태를 이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와중에 전광훈 류의 인간들은 집회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통령 욕이나 하며 낄낄거린다.

그건 그들에게 쾌감을 안겨줄뿐더러 헌금도 걷는 1석2조(응?)의 얍실한 행위다. 이 자들은 지금 공동체야 파괴되건 말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대놓고 무임승차자 짓을 하고 있다.

이 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즉시 공동체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 공공재 게임에서는 누가 무임승차를 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하지만 무임승차자가 누구인지 밝혀낼 수만 있다면 최선의 방법은 그 자를 두 번째 판부터 배제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나머지 네 명이 서로를 믿고 1만 원씩 기부해 3만 원을 얻을 수 있다.

전광훈과 그 일당들을 방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스크 벗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전광훈도 저러고 다니는데 왜 나만 비난하느냐?”라고 화를 낼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통제가 안 된다. 반년 넘게 우리가 지키려 했던 공공의 안전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이다.

전광훈이 “외부로부터 바이러스 테러를 당했다”는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이 자는 다음 판에도, 그 다음 판에도 계속 이런 무임승차를 할 태세다. 경제학은 이런 자가 설치고 다녀서는 절대 안 된다고 경고한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전광훈과 이 일당들을 어떻게든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혼자보다 함께 있을 때 더 멀리, 더 오래 전진한다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08-09 13:35:14

수정 2020-08-09 13: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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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전문가들의 논쟁은 최악의 상황을 불러온다. 나는 이런 의견 교환이 낭비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특히 첫 비판의 논조가 날카로우면 답변과 재답변은 비꼬기의 경연장이 되기 일쑤다.

답변은 신랄한 비판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처음에 비판했던 사람은 그 비판에 실수나 잘못이 있었다고 시인하는 법이 없다. 나도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한 비판에 몇 번 대답한 적이 있다. 대답하지 않으면 오류를 시인하는 꼴이 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악의적인 의견 교환이 유익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 남긴 말이다. 나 역시 카너먼의 이런 혜안에 깊이 동의한다.

나는 악의적인 의견 교환이나 비꼬기의 향연이 진보진영의 발전에 1도 도움이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기술은 상대와 싸울 때 쓰는 것이지, 우리끼리 서로를 베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아군과 대화를 할 때에는 ‘말의 예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20대 때에는 같은 진보진영 내에서라도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이 보이면 독설을 퍼붓는 것이 옳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면 그 독설들이 단 한 번도 피차에게 유익한 전진을 만든 적이 없었다. 전진은커녕, 한번 상한 감정은 우리를 동지라고 부르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곤 했다. 그게 역사의 진보에 도움이 될 리가 없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슈날의 경사도 실험

2008년 『사회심리학 저널(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에 실린 케임브리지 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 사이먼 슈날(Simone Schnall)의 경사도 실험을 살펴보자. 슈날 교수는 논문 서두에서 “사회적 지원과 협동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국민들의 삶이 나아진다”는 기존의 여러 연구를 언급한다.

슈날에 따르면 협동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심장병과 암 발생률이 낮아진다. 정신적 스트레스도 훨씬 덜하다. 심지어 이런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은 감기에도 덜 걸린다.

그렇다면 사회적 협동이, 더 구체적으로 말해 마음에 맞는 벗과 동지의 존재가 우리 시각(視覺)에도 영향을 미칠까? 슈날 교수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버지니아 대학교 34명의 학생들을 모아 실험에 나섰다.

슈날 교수는 학생들을 언덕 앞에 서게 한 뒤 체중에 따라서 각기 다른, 꽤 무거운 배낭을 메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들이 배낭을 메고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라고 알려줬다. 맨 몸으로 올라가도 힘들 판에 배낭을 메고 언덕을 올라가라니!

이후 슈날 교수는 학생들에게 “당신 앞에 놓인 언덕의 경사도를 어림짐작해보세요”라고 요구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짐작한 경사도를 말로, 혹은 각도기를 벌려서, 혹은 그림으로 각도를 표현하는 과제를 받았다.

실험 결과 참가자의 성별과 건강상태는 그들의 어림짐작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건강하다고 경사를 만만하게 보거나, 특정성별이라고 경사를 특별히 가파르게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 결정적 요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옆에 친한 벗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차이였다. 동료와 함께 어림짐작에 나선 이들은 혼자서 각도를 짐작한 이들보다 평균 10∼15% 언덕의 경사를 낮게 평가했다.

게다가 옆에 있는 벗과 더 친할수록, 그 관계가 오래되고 더 따뜻한 사이일수록 두 사람은 언덕의 경사도를 더 완만하게 추정했다. 이는 자신의 짐작을 말로 표현하건, 그림으로 표현하건, 각도기로 표현하건, 모든 측정 방식에서 똑같이 나타난 일관된 현상이었다.

사진저자 Rennett Stoweⓒ기타

또 한 가지, 혼자 측정을 하더라도 머릿속에서 벗이나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거나 혹은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린 경우보다 언덕의 경사도를 20%나 완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곁에 동지들이 있을 때 앞에 닥친 난관을 훨씬 쉽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차피 저 가파른 언덕을 배낭 메고 올라가야 한다. 그때 나의 옆에 믿음직한 동지가 있으면 그 언덕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반면 홀로 있으면 그 언덕은 실재보다 훨씬 가팔라 보인다.

그래서 슈날 교수는 “동료가 있고 사회적 지원이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도전에 훨씬 부담을 덜 가지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그러한 지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언덕이 더 가파르고, 거리가 더 멀고, 더 깊고, 다른 종류의 물리적 도전들이 더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서로를 벗이라고 생각하는 신뢰

나는 진보가 거대한 이념에 따라 좌우되는 낭만적인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는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말과 행동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는 진보진영에서 의견 충돌을 거치면서 동지들에 대한 심각한 배신감을 느낀 사람들을 여럿 만난 경험이 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사람들은 상대를 끔찍이 미워하게 된다. 심지어 “박근혜보다도 저 자식들이 더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봤다. 내 경험상 의견 충돌이 치열할수록 이런 증오는 더 심해진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진실이 아니다. 아무리 의견이 갈렸더라도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연대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박근혜보다도 밉다고? 절대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다. 그리고 그 길은 절대 혼자서 갈 수 없다.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 한다. 너무 어려운 길이기에 때로는 중도에 포기하는 동료들도 나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벗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혼자 쳐다보면 그 언덕은 절벽과도 같지만, 벗이 옆에 있으면 그 언덕은 아주 완만해 보인다.

우리 모두 다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마음이 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분노는 아주 잠깐으로 충분하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의 저자 찰스 아이젠스타인(Charles Eisenstein)은 “‘나는 네가 필요치 않다’는 느낌은 환상에서 비롯된 착각이며, 사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역설했다.

당장은 ‘저런 XX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을 모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사실 모두를 진정으로 필요로 한다.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승자라고 거들먹거리지 말고, 누군가를 패배자라고 부르지도 말자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08-02 15:39:24

수정 2020-08-02 15: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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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 대학교 경제학과 석좌교수인 로버트 프랭크(Robert Harris Frank)는 ‘능력주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인물이다. “실력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지금의 불평등은 실력의 결과이므로 인정해야 한다”라는 보수적 사고로 이어진다.

하지만 프랭크 교수는 본인이 코넬 대학교에서 종신 교수직을 따낸 일조차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각종 행운이 겹쳐져서 벌어진 일”이라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승리와 패배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결코 실력이 아니다.

그런 그가 2009년 『뉴욕타임스』에 ‘축배를 들기 전에 당신의 행운에 먼저 감사하라(Before Tea, Thank Your Lucky Stars)’라는 칼럼을 실었다.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경제학자의 소신이었을 뿐인데 이 칼럼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스스로를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나쁜 쪽으로) 폭발적이었다.

“내 성공이 행운 덕분이었다고? 웃기는 소리 작작 해. 그건 내 재능과 노력의 산물이야!”

논란의 중심이 된 프랭크 교수는 쇼 진행자 스튜어트 바니(Stuart Varney)의 초청을 받아 『폭스 비즈니스 뉴스쇼』에 출연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폭스그룹은 미국 방송사 중 가장 보수적인 곳이다. 우리로 치면 『TV조선』쯤 되는 스탠스인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애지중지하는 방송으로 유명하다. 진행자인 바니도 미국을 대표하는 보수 논객이었다.

방송에서 진행자 바니가 게거품을 물었다. 바니는 “내가 당신 칼럼을 읽고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는지 아느냐? 35년 전 빈손으로 미국에 이민 온 나는 오로지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 영국 악센트를 쓰면서 미국 방송사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이 알아? 당신이 뭔데 내 성공을 행운 덕이라고 폄하하냐고!”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얼핏 들으면 바니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무일푼 이민자로서 바니가 미국에서 거둔 성공을 “오로지 행운 덕분”이라고 말하면 바니가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하나 있다. 바니는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 영국의 명문 런던정경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런던정경대학은 세계적인 명문 대학이다. 즉 그는 빈손으로 미국에 이민 오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먹어주는’ 학벌을 손에 쥐고 미국에 온 것이다.

그는 “영국 악센트를 쓰면서 미국 방송사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프랭크 교수는 자신의 책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영국식 억양이 핸디캡이라고?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시길! 미국인은 영국식 악센트를 동경한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요인

무엇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을 꼽는다. 그런데 이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운’이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나는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 외에도 매우 중요한(어쩌면 훨씬 더 중요한) 요소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과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 교수는 8학년(우리로 치면 중2) 학생들의 수학 성적과 대학 졸업장 획득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집 아이들은 8학년 때 수학 성적이 상위 25%에 들어도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쥘 확률이 29%에 불과했다.

반면 수학 성적이 하위 25%에 머물렀던 부유층 집안 자제들이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쥘 확률은 30%였다. 어렸을 때 공부 열심히 해서 수학 성적을 잘 받아도 대학 졸업장을 거머쥘 확률은 공부 더럽게 안 한 부잣집 아이들보다 낮다는 이야기다.

대학 졸업 이후 삶은 더 크게 벌어진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청춘을 바친다. 반면 부잣집 아이들은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 저축도 하고 집도 산다.

이들 중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할까? 물어보나 마나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결과를 두고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이 성패를 가르는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나? 수학 성적이 하위 25%여도 부모를 잘 만난 운을 타고 나면 성공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법이다.

우리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자꾸 성공한 사람들을 모은 뒤 “저 사람들이 왜 성공했느냐?”를 너무 열심히 분석하고 있다. 이러면 당연히 그들 중 누구는 뛰어난 재능을 과시하고, 누구는 성실한 노력을 포장한다. ‘노력과 재능’은 성공의 만능키가 된다.

그런데 그 뛰어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을 다 가진 사람 중 실패한 사람들이 없을 것 같은가? 당연히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고 무지하게 많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같은 노력과 재능으로 성공하지 못했는지를 분석하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닌가?

프랭크 교수가 10만 명을 대상으로 모의실험을 벌인 결과 비슷한 재능과 비슷한 노력을 퍼부은 사람들 중 승자는 단연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 운 좋은 사람이 정상에 올라서서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외면을 당한 수많은 ‘또 다른 우리들’의 불운에 대해 더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패배자라고 부르지 말라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도 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작용했다. 내 경력 중 ‘메이저 언론 출신’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나는 ‘메이저 언론 출신’임을 전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메이저 언론사의 이념의 후져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그 메이저 언론에 합격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기 때문이다.

겸손해 보이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메이저 언론사에 합격하기 전에 이미 세 곳의 마이너 언론사 입사 시험을 쳤다. 붙으면 무조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 떨어졌다. 나는 마이너 언론 시험에서 줄줄이 낙방하는 행운에다가, 메이저 언론사의 논술주제가 하필 내가 바로 전날 준비한 주제였다는 놀라운 행운이 겹쳐 그곳에 입사했다.

그래서 승자들은 겸손해야 한다. 제발 당신의 승리가 오로지 당신 덕이라고 말하지 말라. 부동산 과세에 대해 “집 가진 게 죄냐?”고 외치지도 말라. 집 가진 건 당연히 죄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쩌다보니 그 집을 가졌고, 그 집값이 수억 원이 올랐다. 그건 결코 당신의 노력과 재능 덕이 아니다. 그 운에 감사하며 그 성공의 과실을 이웃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희들은 몰라!”라고 말하지도 말라. 똑같은 노력을 하고도 정규직이 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은 게 아니다. 그냥 조금 불운했을 뿐이다. 심지어 똑같은 노력을 할 상황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수두룩하다.

마트 노동자들의 투쟁기를 그린 만화 『송곳』에서 “노동운동을 통해 비정규직의 삶을 개선하자”고 주장하는 노동운동가에게 한 노동자가 “경쟁에서 져서 그런 걸 어쩌라고요. 본인이 책임져야죠!”라며 비웃듯 말한다. 이때 노동운동가 구고신은 이렇게 답을 한다.

“패배는 죄가 아니오. 게다가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 평범한 거요. 우리의 국가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오. 우리는 벌 받기 위해 사는 게 아니란 말이오!”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의 한 장면ⓒ기타

그렇다.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패배자라 불릴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조금 평범했을 뿐이고, 조금 불운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승자와 패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승자라고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 제발 이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단언하는데, 평범함과 불운함이 죽을죄가 아니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