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시장경제, 무너진 자본주의의 신념 _ 대공황

2020. 10. 2. 20:53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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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시장경제, 무너진 자본주의의 신념 _ 대공황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③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10-02 12:33:02

수정 2020-10-02 12: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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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달러는 어떻게 기축통화가 됐나?_ 스미소니언 협정
②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다_토르데시야스 조약
③ 몰락한 시장경제, 무너진 자본주의의 신념 _ 대공황
④ 미국, 핵폭탄이 아니라 환율로 일본을 꿇리다 _ 플라자합의
⑤ 독일을 짓밟은 쾌감도 잠시, 유럽의 자살골 _ 베르사유 조약

 

오렌지 가격이 곤두박질 쳤다. 농장 주인들은 가치가 없어진 오렌지를 땅에 묻어버렸다. 그때 농장 밖에는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이들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농장의 담을 넘어 땅에 묻힌(다 썩어가는!) 오렌지를 훔쳐 먹었다.

하지만 농장 주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자기 땅에 무단으로 침입한 이들을 향해 총을 갈겨대는 건 미국인들의 오래된(고약한) 습관이다. 화가 난 빈민들이 항의 집회를 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들 대부분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아프리카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 일은 1930년대 풍요로운 나라의 상징이었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졌던 사건이다. 미국은 세계 1차 대전을 마치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됐다.

농업과 공업 모든 면에서 미국은 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최강국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랬던 미국이 삽시간에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처럼 돌변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굶어죽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를 ‘대공황’이라고 부른다. 대공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인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당시 미국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굶어죽은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캘리포니아 농장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미국에는 오렌지가 남아돌아 농장 주인들은 이를 땅에 묻어버릴 정도였다. 식량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물건도 마찬가지였다. 상점에는 생필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비누 하나 구하지 못해 쩔쩔 매다 더러운 환경에서 병에 걸려 죽어갔다.

대공황이라는 참사

도대체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 경제학에서는 이 대공황을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못해 벌어진 참사’로 기록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른바 ‘포드 시스템(Ford system)’이라고 불리는 혁신적인 대량생산 시스템이 도입됐다. 공장에 컨베이어 벨트가 들어서면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그런데 인류를 풍요롭게만 만들어 줄 것 같았던 기계화는 정반대의 참사를 불러일으켰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대신 해주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시대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대공황의 출발점이었다.

경제학에서는 공황을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모순이 순간적으로 폭발해 나타나는 경제 불황’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공황은 순수하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에만 해당되는 경제 불황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어죽는 현상은 공황이 아니다. 조선시대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으니까.

공황이 발생하는 형태는 다양하지만 원인은 보통 한 가지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아서다. 특히 공급이 수요에 비해 심각하게 많을 때 공황이 발생한다. 팔려는 물건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데(공급 과잉) 사려는 사람들의 호주머니가 텅 비어있을 때(수요 부족)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1930년 미국이 겪었던 것은 그냥 공황도 아니고 무려 대(大)공황이었다. 얼마나 공황이 심각했으면 이런 이름이 붙었겠나?

대공황 직전까지 미국은 세계경제의 왕좌(王座)에 앉아 있었다.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금만 보더라도 세계에서 유통되는 금의 60%가 미국 금고에 쌓여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돈방석에 올라앉은 것 같아보였던 미국 내부의 모습은 달랐다.

1932년 미국의 실업자는 5,000만 명을 넘어섰다. 노동자의 임금은 3분의 1로 주저앉았다. 공산품 생산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무역 거래량도 3분의 1토막으로 감소했다. 이 정도면 나라가 완전 거덜이 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경제 위기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끔찍한 수치들이다.

대공황 당시 무료 급식소에 줄을 선 미국의 실업자들.ⓒ기타


어긋나버린 수요와 공급의 균형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수요와 공급은 늘 딱딱 맞아 떨어진다는 게 스미스의 주장이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격’이라는 녀석이다.

예를 들어 공장이 물건을 잔뜩 생산해서 상점에 물건이 남아도는 일이 발생했다고 치자. 스미스에 따르면 이때 가격이라는 녀석이 등장한다. 물건이 남아돈다는 것은 수요가 공급보다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물건의 가격이 떨어진다. 가격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그 물건을 더 많이 사려고 한다. 싼 맛에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생길 테니까. 이래서 수요가 다시 들어나게 되고 결국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게 된다.

그런데 대공황 때에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공황 때에도 물건이 넘쳐나는 바람에 가격이 떨어졌다. 물건 가격이 내렸으니 당연히 그 물건을 사려는 사람, 즉 수요가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시 미국 국민들의 호주머니에는 돈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특히 기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실업자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더더욱 국민들이 가난해 진 상황이었다. 그러니 물건 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수요가 늘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들이 가난해지니 물건이 안 팔리고, 물건이 안 팔리니 공장이 망하고, 공장이 망하니 일자리가 줄어 국민들이 더 가난해진다. 이 지겨운 악순환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공황을 맞게 된 것이다.

케인스의 등장과 해법

영웅은 난세에 등장한다고 했던가? 미국이 대공황으로 시름할 때, 새로운 천재 경제학자가 해결사로 등장한다.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그 주인공이다.

케인스는 특히 대공황 시절처럼 국민들의 소득이 압도적으로 낮을 때에는 가격이 결코 수요와 공급을 조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먼저 국민들의 소득을 먼저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월급을 주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뭔가를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줘야 문제가 풀린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무슨 수로 국민들에게 일자리도 주고 월급도 준단 말인가? 안 그래도 망하는 공장들이 널려있는데! 바로 여기서 케인스는 스미스를 뛰어넘는 놀라운 발상을 꺼내든다. 이 일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케인스의 생각을 잘 나타내주는 유명한 그의 글 한 대목을 읽어보자.

“정부가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냥 빈 병에다 돈을 잔뜩 넣어서 그걸 탄광에 묻어버리세요. 그리고 그 위에 쓰레기를 쌓아두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르세요. 저 안에 돈이 묻혀 있으니 파서 쓰라고 말이죠.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땅을 파는 일을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빈 병에 들어있는 돈을 갖게 되겠죠. 사람들에게 소득이 생길 겁니다. 돈이 생긴 사람들은 물건을 살 것이고, 그러면 공장도 제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정부가 진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면 그냥 이런 짓이라도 하세요. 그게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짓보다는 정부가 도로나 주택을 짓는 게 더 좋긴 하겠죠.”

물론 빈 병에 돈을 채워서 묻는 일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짓이다. 하지만 케인스는 단언한다. 그 한심한 짓이라도 정부가 해야 하며, 그것이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부가 TV나 자동차 같이 일반 기업들이 만드는 것을 생산하기는 쉽지 않다. 이렇게 하면 정부는 기업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당연히 기업들이 반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인스는 정부에게 ‘일반 기업들이 하지 않는 독특한 일’을 하라고 요구했다.

예를 들어 도로를 짓거나 댐을 만들거나 철도를 놓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정부가 그 일을 벌이면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월급도 주면 국민들의 소득이 늘어 안 팔리던 물건이 팔리게 된다. 대공황의 원인이었던 수요와 공급이 마침내 일치하게 되는 셈이다.

뉴딜정책, 대번영의 초석을 마련하다

케인스가 대공황을 끝낼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이론은 현실에 적용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때마침 케인스의 말에 귀를 기울인 미국의 지도자가 등장했다.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가 1933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루스벨트는 케인스의 말대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무엇이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그 유명한 ‘뉴딜 정책’을 실시한다. 우선 그는 테네시 강에 다목적댐 건설을 시작했다. 댐을 만들어 강도 개발하고, 수력발전을 통해 전기도 생산하자는 목적이었다.

국민들이 굶어 죽는데 왜 한가한 댐 공사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발상이야말로 케인스의 아이디어를 십분 활용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생각은 댐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부가 뭔가 일을 시작해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루스벨트는 각종 정책을 통해 시장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최저임금제도의 도입이다. 루스벨트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자본가가 노동자를 얼마를 주고 부려먹건, 정부는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뉴딜 정책의 시행으로 미국의 노동자들은 최소한 먹고 살 돈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돕자’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 최소한의 수요가 존재해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케인스의 지적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마찬가지 차원에서 루스벨트는 미국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복지 정책이라는 것을 펼치기 시작했다. 실업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고 일할 능력이 없는 노인과 극빈자, 장애자를 돕는 제도를 마련했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덕에 미국은 길고 길었던 대공황에서 마침내 벗어났다. 그리고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이른바 대번영 시기의 초석을 놓는다. 그런 루스벨트는 역사의 진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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