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과 스페인,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다 _ 토르데시야스 조약

2020. 10. 2. 20:54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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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다 _ 토르데시야스 조약

[연재] 추석 연휴에 만나는 재미있는 경제역사②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10-01 10:20:53

수정 2020-10-01 10: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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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달러는 어떻게 기축통화가 됐나?_ 스미소니언 협정
②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다_토르데시야스 조약
③ 몰락한 시장경제, 무너진 자본주의의 신념 _ 대공황
④ 미국, 핵폭탄이 아니라 환율로 일본을 꿇리다 _ 플라자합의
⑤ 독일을 짓밟은 쾌감도 잠시, 유럽의 자살골 _ 베르사유 조약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보면서 “가난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며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의 사람들이 게을러서, 혹은 거짓말을 잘 해서, 혹은 미개해서, 혹은 날씨가 따뜻하다보니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서 등 별의별 이유로 가난한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퍼붓는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는 대부분 원인과 결과를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다. 그들이 직면한 대부분의 문제는 가난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가난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가난의 원인은 대부분 서구 사회의 착취로부터 시작됐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대한민국 어선 삼호주얼리 호가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억류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21세기에 해적이 살아?”라며 놀라워했다. 그 놀라움의 뒤편에는 ‘오죽 할 짓이 없으면 해적질이나 하느냐?’는 조롱도 숨어 있었다.

그렇다. 실제 소말리아 해변에는 해적이 산다. 그런데 그들이 해적질에 나선 이유를 알아야 이 사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는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불리는 뾰족하게 튀어나온 지역이 있다. 소말리아는 이 지역에 ㄱ자 모양으로 형성된 매우 긴 해안을 갖고 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소말리아 국민들은 해산물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잡히는 해산물은 대부분 유럽으로 수출된다. 소말리아 국민들에게 해산물은 곧 식량과 생필품을 구입할 소중한 천연자원이다.

 

또 소말리아는 수에즈 운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수에즈 운하는 한 해 평균 3만 척 이상의 배가 다니는 교통의 요지다.

유럽의 횡포

소말리아 국민들을 해적질로 내몬 자들은 비열한 유럽인들이었다. 유럽인들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소말리아의 치안이 엉망이라는 점을 노렸다. 해상 치안 자체가 없다시피 한 가난한 나라 소말리아 앞바다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잡혀갈 우려가 없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불법 조업을 시작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배들은 자국에서 발생한 산업 폐기물을 소말리아 앞바다에 쏟아 부었다. 바다가 오염됐고 해산물의 씨가 말라갔다. 해산물을 잡아야 생계를 유지하는 소말리아 국민들에게 이는 곧 죽음으로 내몰리는 위험을 뜻했다.

소말리아 해적ⓒ기타

견디다 못한 소말리아 어부들이 직접 해상 치안에 나섰다. 이들은 단체를 조직하고 군벌들에게 무기를 빌렸다. 불법조업과 폐기물 투기를 일삼는 유럽의 배들을 직접 단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침내 그들은 깨달았다. 유럽 배들을 단속하는 것보다, 그들의 배에 실려 있던 재산을 빼앗거나 인질을 잡아 되파는 것이 더 큰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소말리아 해적은 이렇게 탄생했다. 해적질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군벌들도 적극적으로 ‘해적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2009년 이후 전 세계 해적 사건의 절반이 소말리아 인근에서 벌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적질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소말리아 해적의 원인은 그들의 마지막 생계수단마저 오염시켰던 유럽인들의 탐욕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향신료의 왕, 후추

유럽인들의 탐욕은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비극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의 세계침략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놀랍게도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향신료 후추의 존재였다.

후추는 원래 인도 남부에서 자라던 농작물이었다. 기후를 많이 타고 키우기가 까다로워 인도 외의 지역에서는 후추를 재배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제는 후추가 유럽인들의 입맛에 너무 잘 맞았다는 데 있다. 육식을 즐기던 유럽인들에게 후추는 고기 맛을 돋우는 그야말로 신의 향신료였다. 당시 유럽인들은 후추를 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문제는 유럽인들이 인도로부터 후추를 수입할 방법이 만만찮다는 데 있었다. 유럽과 인도 사이에는 아라비아의 드넓은 사막이 가로막고 있었다. 15세기 중반 유럽인들에게 인도의 후추를 소개한 이들도 아라비아의 상인들이었다.

유럽인들이 후추에 열광하자 인도로부터 후추를 받아 이를 유럽에 수출하던 아랍인들은 후추에 엄청난 가격을 매겼다. 이 탓에 유럽에서 후추 가격이 몇 배로 뛰었다. 유럽인들은 아라비아 상인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후추를 싼 값에 들여오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은 이미 몇 차례의 십자군 전쟁을 통해 막강한 아라비아 군대의 위력에 기가 질려 있었다.

싸워서 이길 수 없고, 그렇다고 후추를 포기할 수도 없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내린 새로운 결론이 “아라비아를 거치지 않고 인도에 도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인도를 찾아 나선 제국주의자들

가장 먼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유럽인들이 ‘항해왕’이라고 칭송하는 엔히크(Henrique O Navegador·1394~1460) 왕자가 남쪽 아프리카를 향하기 시작했다. 멀기는 했지만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돌면 그래도 인도로 향할 수는 있다는 게 엔히크의 계획이었다.

문제는 엔히크가 아프리카 대륙을 끼고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닥치는 대로 아프리카를 자신의 식민지로 삼았다는 데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엔히크는 선교를 명목으로 아프리카를 자기의 땅으로 만들었고, 그곳에서 황금과 자원을 쉴 새 없이 약탈했다.

엔히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들의 후예인 포르투갈인들은 계속해서 아프리카를 향해 남진(南進)을 거듭했다. 1488년 1월, 포르투갈 함대는 마침내 아프리카 최남단을 통과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남쪽을 향하지 않아도 됐다. 끝없이 아프리카 대륙 서부 해안을 달렸던 이들은 이제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끼고 북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인도를 향한 항로를 찾은 것이다.

감격에 겨운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최남단을 ‘희망봉’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들이 희망봉을 찾기까지 걸린 수 십 년 동 안 아프리카 대륙은 포르투갈의 침략에 시퍼렇게 멍들어갔다.

포르투갈에 선수를 빼앗긴 스페인은 인도를 향한 또 다른 항로 개척에 나섰다. 포르투갈이 남쪽을 선택했다면 스페인이 선택한 길은 서쪽이었다. 지구는 둥그니까! 서쪽을 향해 자꾸자꾸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는…… 게 아니고, 결국 언젠가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획을 세운 이가 있었다.

그 인물이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1~1506)였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획을 스페인 통치자였던 이사벨 1세(Isabel I, 1451~1504)에게 설명했고,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인도를 발견했다. 아니, 발견했다고 착각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인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아메리카 대륙이었지만 콜럼버스는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인디언(Indian)’, 즉 ‘인도사람’이라는 황당한 이름이 붙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후 유럽인들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는 실로 황당한 어법이다. 이전까지 아메리카가 바다 속에 숨겨져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메리카는 수백 만 년 동안 그곳에 있었고 원주민들도 버젓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아메리카는 결코 새로 등장한 신대륙도 아니고, ‘발견’된 것도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유럽 사회에 알려진 아메리카는 이후 철저히 유럽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착취를 당했다. 포르투갈이 후추를 찾아 남쪽으로 향하면서 아프리카를 초토화한 것처럼, 스페인도 후추를 찾아 서쪽으로 향하면서 아메리카를 짓밟은 것이다.

조선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고?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자신감을 회복한 스페인은 당시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포르투갈의 해상 장악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두 나라가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를 두고 전쟁을 시작하자 보다 못한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PP VI, 1431~1503)가 중재에 나섰다.

그는 두 나라 대표를 부른 뒤 지도를 펼치고 아프리카 대륙 가장 서쪽에 있는 카보 베르데(Cabo Verde)라는 섬으로부터 서쪽으로 480㎞ 떨어진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교황은 “앞으로 두 나라는 싸우지 말고 이 지점을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각각 차지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실로 황당하지 않은가? 지도에 선 하나 그어놓고 세상을 절반으로 나눈 뒤 자기들끼리 “왼쪽은 스페인 땅, 오른 쪽은 포르투갈 땅”이라고 선언을 한다. 이 희대의 기하학적인 영토 조약 이후 유럽 백인들은 지구의 절반을 스페인 땅, 절반을 포르투갈 땅이라고 믿었다.

세계를 절반으로 나눈 엽기적인 영토 조약. 왼쪽 짙은 보라색 선이 토르데사야스 조약의 기준선이다.ⓒⓒLencer

이들의 역사에 따르면 조선과 일본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실제 16세기 중반 일본인들에게 조총을 전해준 이들이 포르투갈 상인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일본을 언제든지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왜냐고? 교황님이 그렇게 허락하셨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신의 명령(!)조차 무시하는 모양이다. 사실 교황의 명령은 매우 단순했다. 직선을 기준으로 오른쪽 즉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직선의 왼쪽 즉 아메리카는 스페인이 차지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면적의 두 배나 되는 아메리카를 모두 스페인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포르투갈이 교황에게 강력하게 항의했고, 이 항의가 받아들여져 1494년 두 나라는 새로운 기하학적인 영토 조약을 맺는다.

그것이 바로 기존의 기준선을 서쪽으로 1,000㎞ 더 이동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as)이다. 기준선이 서쪽으로 더 이동하는 바람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동쪽으로 튀어나온 브라질이 기준선 동쪽, 즉 포르투갈 땅으로 편입됐다.

대부분 남미 지역 국가들이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 지금도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아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추로 시작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전쟁은 전 세계 사람들의 자주적 의사와 아무 상관없이 세계를 두 개로 쪼개는 황당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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