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노동자는 늘어지게 쉴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다

2020. 10. 2. 20:56일반/금융·경제·사회

728x90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나, 노동자는 늘어지게 쉴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다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20-09-27 09:31:04

수정 2020-09-27 09:31:04

이 기사는 709번 공유됐습니다

 

공업도시 울산 시내 한 복판에 ‘공업탑’이라고 불리는 명소가 있다. 정식 명칭은 ‘울산 공업센터 건립 기념탑’인데 사람들은 다들 그냥 공업탑이라고 부른다. 박정희가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한 뒤 이를 기념한다며 만든 탑이다. 탑 주변에는 박정희가 직접 남긴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치사문이 남아있다. 일부 내용이 이렇다.

“사천 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어쩌고저쩌고)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을 재현하려는 이 민족적 욕구를 (어쩌고저쩌고) 이것은 민족 재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고,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는 것이며,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읽으면 정말 빵 터지는데, 당시 박정희는 진짜로 이렇게 비장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세상과,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는’ 세상을 꿈꾼다.

여보세요. 검은 연기가 그렇게 대기 속에 뿜뿜 뻗어나가니 1980년대 울산 온산공단에서 온산병이라는 공해병이 발생한 겁니다. 아프기는 노동자가 아프고 멋있는 척은 너 혼자 다 하면 그게 공정한 세상이어요? 그리고 우렁찬 건설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할 정도로 크게 나면 그건 소음공해지!

왜 노동자만 전사인가?

 

아무튼 이 치사문은 비장하기 짝이 없다. 치사문 뒤쪽을 읽어보면 민족적 번영과 숭고한 사명 나오고, 궐기 나오고, 각성과 분발 나오고, 세기적 과업 나오고, 분기 노력 나오고, 정말 장난 아니다. 공업단지 치사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으면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는 줄 알겠다.

전쟁 이야기는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다. 국가 경영을 전투 하듯 지휘했던 박정희는 정말로 노동자들을 군인처럼 취급했다. 박정희가 “나가서 죽어라”고 명령하면 그냥 나가 죽어야 하는 대상이 노동자였다.

그래서 그 시절 흥한 단어가 산업전사(産業戰士)다. 이 단어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강제징용할 때 사용했던 것인데, 누가 친일파 아니랄까봐 박정희는 이 단어를 국가 경영의 철학으로 삼았다.

탄광에서 노동자들이 사고로 몰살을 당하면 산업전사 위령탑을 세우는 것도 그런 것이다. “너희는 국가가 치르는 전쟁에서 명예롭게 죽은 전사이니 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겨라” 뭐 이런 취지인 것 같은데, 웃기지 마라! 죽는 게 노동자가 아니라 박정희 너라면 너는 산업전사 운운하며 기꺼이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바칠래?

나는 산업전사라는 말만 들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왜 노동자들만 전사여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예인전사, 예술전사, 체육전사, 의료전사라는 말은 없지 않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노동자만 지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노동자에게 전사라는 칭호를 붙이는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그들을 마음껏 착취하고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야 자본가들이 배를 불리기 때문이다.

케인스가 꿈꾼 2030년의 모습

르네상스 시절의 위대한 정치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토마스 모어(Thomas More)는 1516년 발간한 명저 《유토피아》에서 하루에 6시간만 일을 하는 세상을 꿈꿨다. 그가 그린 유토피아에서 시민들은 하루 6시간만 일하고도 매우 풍요롭게 산다. 아니, 그들은 풍요로운 걸 넘어서서 다른 나라에 원조 물품까지 보낸다.

놀고먹는 귀족이나 성직자들을 모두 노동현장에 내보내고, 누구나 공정하게 노동을 하며, 누구도 사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하루 6시간 노동으로도 그 공동체의 풍요는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는 게 모어의 생각이었다.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하니까 그걸 유토피아(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가 강함)라고 부르는 거 아닌가요?”라는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다. 그러면 인문학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경제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번에는 현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이야기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23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정부와 택배사의 분류작업 인력 투입 중간실태를 발표하는 모습. 위원회는 "업계가 서브터미널 분류작업 인력을 하루 평균 2,000명 충원하기로 했으나 노조 조사결과 200명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김철수 기자

케인스는 1930년 출간한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라는 에세이에서 장대한 낙관론을 펼친다. 그는 “기술이 진보하면 시간당 생산량이 증가하므로 생계를 위한 필요 노동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 테고, 마침내 거의 일할 필요가 없어지는 단계(하루 3시간 노동)에 이르게 된다”고 예측했다.

오타가 아니다. 케인스는 분명히 ‘하루 3시간 노동’으로도 충분하다고 장담했다. 토마스 모어의 하루 6시간 노동이 위대한 경제학자 케인스에 이르러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케인스는 이런 유토피아(!)가 먼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가 예상한 하루 3시간 노동의 시대는 고작 100년 뒤의 일이었다. 1930년의 100년 뒤는 2030년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우리는 하루 3시간만 일하는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울산 한복판에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을 꿈꿨던 박정희의 염원이 남아있고, 주 52시간 노동에 게거품을 무는 자본가들의 위세가 여전한 걸 보라. 나는 케인스의 꿈이 10년 뒤 한국에서 실현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안타깝지만 케인스는 틀렸다.

노동자들에게는 늘어지게 쉴 권리가 있다

하지만 케인스가 틀린 것과 별개로 왜 그가 100년 전 저런 상상을 했는지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케인스는 기술의 진보가 인류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고 보았다.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면 인간은 특별히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그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예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처럼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케인스는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었다. 기술은 발전했는데, 노동자들을 종처럼 부려야 직성이 풀리는 자본의 속성이 변하지 않은 것뿐이다. 영국의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은 1935년 발간한 평론집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 도시 노동자들이 막 투표권을 따낸 직후였는데 몇몇 공휴일이 법으로 정해지자 상류층에서 대단히 분개했다. 나는 한 늙은 공작부인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가난뱅이들이 휴일에 뭘 한다는 거지? 그 사람들은 일을 해야 한다고!’”

이처럼 부자들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근면’과 ‘근로’를 노동자에게 부추긴다. 지들은 펑펑 놀고 처먹으면서! 하지만 이런 세상이 지속되면 맞이하는 것은 결국 지옥이다.

기계화로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하루 열 몇 시간 씩 노동하는 것이 전사의 임무”라고 부추기면 어쩌란 말인가? 자본가들이 당장 돈 벌기는 좋겠지. 하지만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수입이 없어서 죽고, 일자리가 있는 사람은 과로로 죽는다. 유일한 해법은 노동자들을 종처럼 부리지 않고 노동시간을 줄여 일을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러셀의 진심어린 충언,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데 있다”는 말을 굳게 믿는다. 나는 산업전사도 아니고, 민족 부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현장에서 죽어도 되는 소모품도 아니란 말이다.

“우리 명절 때라도 늘어지게 쉬어봅시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이 눈에 밟힌다. 택배 노동자는 그날도 배송을 할 것이고, 마트 노동자들은 그날도 계산대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어지게 쉬어야 한다. 최소한 명절 때만이라도. 최소한 일주일에 이틀 있는 주말만이라도, 최소한 8시간의 격무를 마친 뒤 찾아온 해질녘의 휴식시간만이라도 온전히 우리 노동자들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노동자들은 이번 명절 때 모두 늘어지게 쉴 것을 비장하게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산업전사 이야기로 박정희도 저렇게 비장한데, 노동자의 휴식권을 위해 우리가 비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웹툰을 보며 낄낄대도 괜찮다. 그건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다. 노동자에게 충분한 휴식을! 그것이 이번 명절을 맞는 노동자의 선언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