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 소리 기자 "파농의 폭력론"2017. 5. 1

2020. 10. 4. 12:26일반/금융·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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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알제리 민중들끼리 치고 받고 하는게 너무 많아

옆집 천막에서 애가 운다고 옆집 뛰어 들어가서 애를 찔러 죽이고

상점 주인이 외상 안준다는 이유로 상점 주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살인 강간 이런 범죄가 너무 많아 프랑스가 당시 알제리를 점령한 상태에서

'알제리 민중들은 선천적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며, 이유없이 살인하고

범죄성향이 강하다'고 선전해

 알제리를 점령하고 있는 자신들을 대단히 그들을 교화시키고 있는 것같은 똥폼을 

다 잡고 있었던 겁니다.

파농이 정신과 의사이니

본인 1952년에서 1959년까지 6년동안 치료한 기억과 데이타 베이스를

가지고 연구를 한 결과 프랑스쪽에 반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파농은 어떻게 이야기를 하느냐면

알제리 민중들이 폭력적인 건 맞다.

그런데 폭력적인 건 저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프랑스놈들 니놈들이 수직폭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격을 시작합니다.

파농은 폭력을 수평폭력과 수직폭력으로 구분을 하는데요.

결국은 민중들이라는게 그렇잖습니까!

알제리 민중들은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받는 수직폭력때문에

너무나 삶이 곤궁해지는거죠.

파농의 표현으로는 '곤궁한 외상' 외부로부터 받는 상처

공궁한 외상이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거에요.

사람이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대면 자연히 폭력적이게 되는데

그 폭력을 어디에다 쓰느냐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한테 쓴다는거죠.

그래서 옆집의 애를 죽이고 상점주인을 죽이고...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걸 수평폭력이라고 해요.

파농의 분석본질은 이겁니다.

수평폭력은 원래 그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폭력적이기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란느거에요.

결국은 프랑스인들의 수직폭력이 수평폭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그걸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굶주림, 집값을 못내 집 주인에게 내 쫓김,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 해골이 앙상한 아이들, 폐쇄된 작업장, 시장 곁을 까마귀 떼처럼 따라다니는 실업자들, 이 속에서 원주민은 매일 살인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몇 파운드의 밀가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이렇게 적습니다.

가난했기때문에 폭력적이라는 겁니다.

수직폭력때문에 수평폭력이 생긴다는 거에요.

그래서 알제리 사람들은 구제불능이야 이야기했던 유럽사람들 프랑스사람들과 백인들한테

'웃기지만! 니네만 물러나면 다 해결 돼. '

그리고 알제리 사람들 위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이니요.

이성을 가진 신체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며,

더 큰 폭력앞에서만 항복할 것이다.'

그러면서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자.

수직폭력을 가하는 제국주의자들에게 폭력저항을 시작하자

이렇게 주장합니다.

식민주의라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고,

더 큰 폭력외에는 무릎을 꿇지 않기때문에

더욱 더 강력하게 폭력적으로 싸워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파농은 굉장히 열성적으로 알제리 독립운동에 참여를 합니다.

안타깝게도 파농이 백혈병으로 1961년에 죽습니다. 나이도 되게 젊었어요.

36세였거든요.너무 아깝죠 천재가요.

그런데 62년에 알제리가 독립이 됩니다.

그러니까 파농이 그렇게 꿈꾸었던 알제리의 독립을 딱 1년 앞두고 세상을 따난거죠.

파농이 61년에 남긴 책이름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유명한 책인데요.

이게 안타깝게도 유작이 되고 만겁니다.

특이한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책도 유명한데

이 책 서문이 정말 유명합니다.

서문을 누가 썼냐하면 파농이 정말로 존경했던

동지라고 생각을 했고, 스승이라고 생각했던 프랑스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장폴 샤르트르가 이책 서문을 씁니다.서문치고는 정말로 긴 문장인데 

정말로 명문장입니다.

사르트르가 파농의 책 서문에 파농의 사상을 이렇게 요약을 해요.

“원주민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매질을 당하고, 영양 부족과 질병,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은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늘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된다. 즉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도둑질을 하는가 하면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알제리 사람들이 흑인이라서 폭력이 만연했던게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사람이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대접을 받게되면

매질 당하고 영양이 부족하고, 질병공포에 시달리면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모든 인간은 같은 속성을 같게 된다는 거에요.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폭력을 행사하게되고...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명문장으로 평가받는 새르트르의 서문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 그 중 5억 명은 인간이고, 15억 명은 원주민이다.”

당시의 제국주의자들은 5억명에 이르는 자신들을 인간이라 분류하고

나머지 15억명은 원주민으로 분류를 한거죠.

그리고 15억명의 원주민들이 수평폭력을 서로 가하고 서로 죽이고

이러는 걸 유럽 백인들은 즐기면서 낄낄대면서 조롱을 하는 겁니다.

자기들은 뭔가 대단하고 우월한 인종인척 하는거죠.

이걸 한국 현실에 대보면 와닿는 것들이 있습니다.

민중들을 끊임없는 빈곤으로 내몬 다음에 지배자들이 위에서 보면서 낄낄대지 않습니까.

' 야! 이 미개한 것들아! 천성이 게으른 놈들아.' 이렇게 조롱을 하죠.

그리고 심지어  지배자들은 수평폭력을 조장합니다.

트럼프가 대표적인 인물이죠. '내가 못 사는 건 멕시코 사람들 때문이다'

'멕시코 사람들을 두들겨 패.' 하고 민중들에게 수평폭력을 가할 것을

선동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수평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지배자들의 수직폭력이라는 것을 감춥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 귀족 노조때문이야, 누구때문이야' 이렇게 서로를 분열하게 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위에서 낄낄대는 겁니다.

' 이 미개한 것들아. 니네들 그러니까 개돼지들이지.' 이러고 웃고 있는거죠.

샤르트릐 서문에 무시무시한 대목이 있는데 사르트르가 이렇게 외칩니다.

"유럽이 우리 대륙에 손을 댔으니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아주 좋은 때다. 비제르타(현재 튀니지의 반자르트), 엘리자베스빌(콩고의 루붐바시), 알제리 벽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 마비 상태를 이용하자.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보편성 속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투쟁을 시작하자. 마땅한 무기가 없다면 식칼이라도 충분하다.

저는 한국사회에서 폭력투쟁을 근본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기때문에

한국에 만연한 빈곤과 고단함을 극복하기위해서 샤르트르처럼 식칼을 들자 이렇게 까지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샤르트르의 말처럼 

지배계급이 우리의 삶에 손을 댔다면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투쟁을 시작하자라는 샤르트르의 외침에 동의를 합니다.

샤르트르의 서문 하나만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원주민은 무력으로 이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식민지 노이로제를 치료한다. 분노가 들끓을 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고 경찰은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하러 일요일 날

뻔뻔스럽게도 서울대병원에 왔죠.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수백만의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그러면 샤르트르의 말대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순수함을 되찾는 것은

우리의 노이로제를 치료하는 방법은 뭐냐면

샤르트르의 표현대로라면 분노가 들끊을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자신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분노하라는 거에요.

그리고 지배계급에게  손을 떼라고 후려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이 다시 돌아옵니다.

분노하고 싸우면서 자기자신으로 되돌아와야지

자신의 자아를 민중들은 스스로 창조한다는 거죠.

사실은 일요일 날 그 장면을보고 화가 많이,났어요.

그 장면을 보고 누가 화가 안났겠어요.

뻔뻔스럽게 서울대병원으로 밀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

그럴수록 분노하고 싸우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어

우리가 접한 수많은 문제의 본질은

수평폭력에 있는게 아니고 수직폭력에 있는거고요.

비록 우리가 식칼을 들자고 말을 하지는 않더라도

주먹은 불끈 쥐고 악랄한 지배계급이 몇년동안

우리에게 가한 폭력들을 더 행사하지 못하도록 싸워야지 우리 스스로

자아를 되찾는 겁니다.

오패산 터널 총기 살해사건을 보면서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까를

한참 고민해보다가

위대한 사상가 프란츠 파농의 폭력론이 한국사회에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소개해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 1961년 판 서문 (장 폴 사르트르) 

얼마 전에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 그 중 5억 명은 인간이고, 15억 명은 원주민이다. 전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졌으며, 후자는 그것을 가져다 썼다. 양자 사이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왕, 영주, 부르주아지, 온갖 야바위꾼, 거간꾼들이 설치고 다녔다. 식민지에서는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모국의 국민들은 진실이 은폐되기를 바랐다. 
유럽의 지배층은 원주민 지배층을 마음대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망한 젊은이들을 발탁하여 붉게 달궈진 낙철로 그들의 이마에 서구 문화의 낙인을 찍고, 그들의 입에는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미사여구를 가득 채워 재갈을 물렸다. 
그들은 모국에 잠시 체제하는 동안 하얗게 표백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이 살아있는 거짓들은 자신들의 동포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하고 다만 남의 말을 되풀이할 따름이었다. 
파리에서, 런던에서, 암스테르담에서 우리는 "파르테논! 형제애!"라고 외쳤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도 입만 열면 "..테논!"..애!"를 외쳤다. 가히 황금기였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입들이 스스로 열렸다. 노랗고 검은 목소리들은 여전히 우리의 인간주의를 말했으나 그것은 우리의 비인간성을 책망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 정중한 분노의 주장을 들으면서 불쾌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처음에는 뿌듯함과 놀라움을 느꼈다. 뭐라고? 그들이 스스로 말할 줄 안다고? 드디어 우리의 작업이 성과를 거두었도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이념을 받아들이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그 이념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아시아를 그리스 문명권으로 만들고, 그리스 - 라틴 흑인이라는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세계인의 자격으로 우리들끼리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이 마음껏 소리치게 놔둬라, 그러면 그들의 마음이 풀릴 것이다, 짓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서 사태를 변화시켰다. 새 세대의 작가와 시인들은 놀라운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가치관과 그들이 살아가는 참된 현실이 서로 들어맞지 않으며, 그들로서는 그 가치관을 완전히 외면할 수도, 그렇다고 그것에 동화될 수도 없다는 점은 우리에게 설명하려 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이렇다. '당신들은 우리를 괴물로 만들고 있다. 당신들의 인간주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주장하지만 당신들의 인종주의적 조치들은 우리를 차별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하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식민지 관리들은 헤겔을 읽고 봉급을 받는 게 아니므로 헤겔을 거의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양심을 불편하게 하고 모순에 빠지도록 만드는 철학자 따위가 아쉬울 리 없다. 양심의 불편은 어쩔 수 없으니 그대로 놔두자 아무리 말해도 입만 아플 따름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탄식 속에서도 요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차별의 폐지다. 물론 차별을 폐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알다시피 과도한 착취에 의존하는 체제는 결국 파멸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코 앞에 당근만 매달아줘도 죽어라고 달릴 것이다. 그러니 반란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제 정신을 가진 원주민들 중에 고작해야 유럽인들처럼 되기 위해 유럽의 잘난 아들들을 학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컨대 우리는 그 우울한 사람들의 의욕을 고취하기 위하여 한 번쯤 공쿠르 상(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1939년까지는 그랬다. 

그럼 1961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쓸모없는 탄원과 역겨운 흉내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이 유럽을 떠나라. 인간에 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거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보이는 대로 인간을 살육하는 이 유럽을 버려라. 수백 년 동안 유럽은 이른바 정신적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성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이 말은 새롭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하는가? 
그는 아프리카인, 제3세계인, '원주민' 출신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유럽은 지금 무모한 광기에 휩싸여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럽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 
쉽게 말해서 유럽은 글렀다는 이야기다, 
입으로 말하기에는 썩 유쾌하지 않겠지만 우리 유럽인들 모두가 굳게 확신하고 있는 진실이 아닐까? 
그러나 한 가지 유보할 게 있다. 예컨대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이 나라는 글렀어"라고 말한다면 - 내 기억으로 1930년 이후에는 거의 매일 그런 말을 들은 듯하다 - 그것은 감정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즉 그들은 애증이 뒤섞인 격한 감정으로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래서 그 말 다음에는 흔히 "이러저러하게 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 의도는 명백하다. 더 이상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주장하는 방침이 철두철미하게 시행되지 않을 경우에만, 예컨대 그 위협의 뒤에는 조언이 따르며, 애국적 상호주관성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그 말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반대로, 파농이 말하는 유럽의 현재 위기는 단순한 경고나 진단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이 의사는 유럽이라는 환자가 기적을 바랄 만큼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고 애써 주장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치료약을 주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이 관찰할 수 있는 징후를 통해 유럽이 죽어가고 있다는 외적 증거를 밝힐 따름이다. 사실 치료제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다. 그는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유럽이 죽느냐 사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책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다소 낭패한 기색으로,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말하는군!"이라고 중얼거린다면, 여러분은 그 논란의 참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파농은 어느 누구도 대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그의 책에 대해 여러분은 싸늘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는 여러분에 관해서 말할 뿐 여러분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흑인종도 공쿠르 상을 받았고 황인종도 노벨상을 받았다. 
프랑스어를 배운 원주민 출신의 청년은 바로 그 프랑스어로 자신의 동포를 향해 "모든 저개발국의 원주민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있다. 얼마나 황당한가! 과거에는 우리만 말할 줄 알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를 제대로 된 중재자로조차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낱 대상에 불과하다. 파농은 세티프(알제리 해방운동의 한 거점이었던 도시), 하노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우리가 저지른 범죄들을 언급하지만, 비난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식민주의의 전술, 식민주의자들과 모국 민중을 단결시키거나 분열시키는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동포를 위해서다. 즉 그의 의도는 동포들을 가르쳐 우리가 만든 게임판에서 우리를 이기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제 제3세계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다. 물론 제3세계라고 해서 동질적인 집단은 아니다. 제3세계에는 여전히 예속된 민족들이 많고, 허울뿐인 독립을 얻은 민족이 있는가 하면, 주권을 쟁취하기 위해 지금도 싸우는 민족,  완전한 자율를 얻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민족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식민지의 역사, 다시 말해 억압에서 비롯된다. 모국은 봉건적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충분한 대가를 얻어내는 한편, 분할 통치를 통해 원주민 부르조아지, 즉 머리에서 발끝까지 위선적인 자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모국은 식민지에 이주민(colcn)들을 보내면서 동시에 식민지를 착취하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유럽은 분파와 반대파를 양산했고, 여러 계층과 때로는 인종적 편견까지도 만들어냈으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식민지 사회의 계층 분화를 심화시켰다. 
 파농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 예전의 식민지였던 곳은 우리와 싸우기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어쩌면 그 두 가지 투쟁은 사실상 같다고 볼 수도 있다. 투쟁의 열기 속에서 내부의 모든 장벽들은 무너진다. 기업가와 상인으로 구성된 괴뢰 부르조아지, 늘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도시 프롤레타리아, 소도시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민족 혁명군의 든든한 예비대인 농민 대중과 행동을 함쎄 하게 된다. 식민주의로 인해 발전이 가로막힌 나라에서는 농민층이 들고 일어나면 순식간에 혁명적 계급으로 부상할 수 있다. 농민층은 노골적인 억압을 겪고,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리며, 굶주림으로 죽지 않기 위해 기존 체제를 전면적으로 타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민족 혁명이 승리하려면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 
그 과정이 생략되어 토착 부르조아지가 권력을 장악하면, 신생국은 명목상으로는 주권을 얻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제국주의자들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카탕가(콩고 독립 후 내분을 겪었던 콩고 남서부 샤바 지역)의 사례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제3세계의 단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결을 이루려면 먼저 각 나라가 독립을 얻은 뒤에도 예전처럼 농민층의 지도 아래 식민지 민중 전체가 단결해야 한다. 
이것이 파농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형제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모든 지역에서 한꺼번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쟁취하지 못하고 한 나라씩 혁명을 전개한다면 예전의 식민지 주인들에게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약점과 불화도 솔직히 드러내며, 신비화하지도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운동의 출발부터 나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초기에 성공을 거둔 뒤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운동이 교착 상태에 빠진 곳에서 다시 추진력을 얻으려면 농민들이 자국의 부르조아지를 타도해야 한다. 이때 경계해야 할 매우 위험한 도깨비불이 있다. 지도자나 인물, 서구 문화에 대한 숭배다. 또한 사라져가는 과거(아프리카)문화로 퇴행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유일하게 참된 문화는 혁명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성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파농은 큰 소리로 외친다. 유럽인들은 분명하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식민지 강국이 그의 순수한 마음을 악용할 것을 걱정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대에 뒤떨어진 우리의 방법으로는 해방을 늦출수는 있어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식민주의라는 모국의 나태한 꿈은 다분히 허풍이다.우리는 '제3세력'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존재한다 해도 싸구려 부르조아지에 불과할 뿐이고 식민주의는 이미 제 자리를 잡았다고 믿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키아밸리즘은 우리의 허구성을 낱낱이 밝혀내는 깨어난 세계에 대해서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식민지 이주민은 오직 한 가지, 야만적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원주민은 예속과 주권 중에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파농에게 유럽인들이 그의 책을 읽느냐 안 읽느냐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는 자신의 동포들에게 낡은 술수를 고발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더 이상의 방책이 없다고 확신한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이 우리 대륙에 손을 댔으니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아주 좋은 때다. 비제르타(현재 튀니지의 반자르트), 엘리자베스빌(콩고의 루붐바시), 알제리 벽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 마비 상태를 이용하자.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보편성 속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투쟁을 시작하자. 마땅한 무기가 없다면 식칼이라도 충분하다.

유럽인들이여, 당신들은 이 책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둠 속으로 몇 발자국 나아가면 불 가에 모여 앉은 이방인들이 보일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을 들어라. 그들은 당신들의 무역 중심지와 그곳을 방비하기 위해 고용된 군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 그들은 당신을 보겠지만 무시해버리고, 목소리마저 낮추지 않고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들의 무관심이 폐부를 찌른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어두운 생명들이며, 당신의 피조물인 그들은 죽은 영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불을 준 것은 분명히 당신이지만, 당신은 그 유령들을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아들들이 당신을 무시한다. 불은 그들을 따뜻하게 하고 주변을 밝혀주고 있다. 그것은 당신이 밝힌 그 불이 아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니, 은밀한 야행성을 가진 데다 추위에 떠는 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씩 차례로, 그 그림자에서 동이 튼다. 유령은 바로 당신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던져버리자고 말할 것이다.우리를 위해 쓴 책도 아닌데 굳이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파농은 자기 형제들에게 우리를 설명해주고, 우리가 자신에게서 소외된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런 관점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실 속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에게 희생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처와 사슬을 통해 우리를 안다. 그들의 증거를 논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알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렇다. 유럽은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모국에 살고 있으며, 모국의 폭력을 비난하는 입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이주민이 아니니까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도 나을 게 없다. 이주민들은 바로 당신의 동포다. 당신이 그들을 해외로 보냈고, 그들 덕분에 부자가 된 사람도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이주민들에게 그들이 너무 많은 피를 흘려도 그들을 책임지지 않겠노라고 경고했다. 그토록 자유롭고 인간적인 당신, 문화에 대해 허위에 가까울 만큼 과장된 존경심을 보이는 당신은 정작 자신이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당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학살된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파농은 동지들 - 특히 과도하게 서구화된 사람들 - 에게 모국의 민중과 식민지 대표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용기를 내서 이 책을 읽어라. 그러면 우선 당신은 수치를 느낄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수치는 혁명적 정서다. 
당신도, 그리고 나도 자신의 주관적 환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도 역시 당신에게 말한다. 지금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으리라고. 
유럽인으로서 나는 적의 책을 훔치고, 거기서 유럽의 치유책을 얻는다. 이 책을 최대한 활용하라. 

둘째, 소렐(19세기 프랑스 역사가)의 파시즘적 주장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파농이 엥겔스 이래 처음으로 역사의 과정을 오늘의 밝은 빛 아래 조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또한 파농이 성미 급한 사람이거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폭력에 관해 흔치 않은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그는 다만 상황을 해석해줄 뿐이다. 그러나 그 해석만으로도 그는 자유주의적 위선이 은폐하고 있는 변증법, 그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변증법을 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다. 
지난 세기에 부르조아지는 노동자들을 탐욕스러운 존재로 보고 그 탐욕을 어쩌지 못해 불법을 저지른다고 여겼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그 짐승 같은 노동자들을 우리 인류 속에 포함시켜주었으며, 적어도 그들을 자유인이라고 간주했다. 다시 말해 노동자도 자신의 노동을 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인간주의는 보편성을 내세웠다. 
강제노동의 경우 사정은 정반대가 된다. 여기에는 계약이 없다. 게다가 위협과 억압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해외에 나간 우리 병사들은 모국의 보편주의를 거부하고 인류에게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범주 제한)를 적용한다. 
즉 누구도 자기 동료를 노예로 삼고, 강탈하고, 죽이는 죄를 지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병사들은 원주민이 자기 동료가 아니라는 원칙을 정한디. 또한 합병된 나라의 주민들을 우수한 원숭이 수준으로 격하시켜 이주민들이 그들을 짐승처럼 대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식민지에서의 폭력은 노예화된 사람들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비인간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원주민의 전통을 말살하고, 그들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대체하고,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주지 않으면서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온갖 조처가 행해졌다. 신체적인 노역만으로도 그들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하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에게 영혼이 남아 있다면, 공포로 일을 마무리한다. 군인들은 농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민간인들은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에게 매질을 가해 땅을 경작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물론 농민이 싸울 태세를 보이면 군인은 즉각 그를 쏘아 죽인다. 농민이 항복하면 그들 스스로 영락하여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수치와 공포는 그의 성격을 분열시키고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자아를 파괴한다. 
이 작업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에는 '심리학적 처우'가 없었고 세뇌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기울였어도 그들의 목적은 어디에서도 달성되지 않았다. 콩고에서는 흑인들의 손을 잘랐고, 앙골라에서는 아주 최근까지도 불만분자의 입술에 구멍을 뚫어 자물쇠를 채우는 짓이 자행되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나는 인간을 짐승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그렇게까지 하려면 인간을 상당히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말할 따름이다. 매질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아 상태를 더 밀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노예제에 문제를 빚게 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길들일 경우에는 산출량이 줄어들게 된다. 일꾼에게 아무리 조금만 준다고 해고 그는 결국 자신이 산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잡아먹게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이주민들은 길들이기를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원주민이다. 매질을 당하고, 영양 부족과 질병, 공포에 시달리는 - 물론 어느 정도까지만 - 인간은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늘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된다. 즉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도둑질을 하는가 하면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딱한  이주민.  
여기에 그의 적나라한 모순이 있다. 그는 자신이 약탈하는 사람들에게서 '악령'이라는 욕까지 먹어가며 그들을 죽여야 한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그들을 착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그는 살육을 대량학살로, 노예를 짐승 같은 처지로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통제력을 상실한다. 기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가차 없는 논리에 이끌려 탈식민화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즉각 일어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유럽인의 지배가 지속된다. 
사실 그는 이미 전투에서 졌으나 그 점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아직까지 원주민들이 절반만 원주민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원주민들에게 뿌리깊이 박힌 악을 파괴하거나 억누르기 위해 그들을 심하게 다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3세대쯤 지나면 그들의 해악적인 본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가 말하는 본능이란 뭘까? 노예들을 부추켜 주인을 살해하는 본능일까?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잔인함이 결국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걸까? 농민을 억압하는 노예제에서는 농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신의 만행에 아무런 치유책도 없음을 모르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절대권력에 사로잡혀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그 절박한 존재는 한때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채찍이나 총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열등한 종족'을 길들이는 일이 조건반사적으로 진행된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그 인간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을  근본적으로 완강하게 거부함으로써 현재의 우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3세대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두 번째 세대는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들이 매 맞는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그들은 평생토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에게 복종심을 안겨주기는커녕 끊임없이 공격성을 강화시켜 견딜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만든다. 유럽인들은 조만간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뒤 그들이 자라나서 수치와 굶주림과 고통이 뭔지 알게 되면, 그들은 활화산처럼 분노를 터뜨리게 된다. 그 분노의 크기는 그들을 억압하는 힘과 맞먹는 크기다. 그들은 폭력 밖에 모른다고 했던가? 당연하다. 처음에는 이주민만이 폭력을 행사하지만 곧 그들도 폭력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거울에 다가가면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반사되는 것처럼 우리가 행사한 폭력이 반사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 광기의 분노, 그 쓰라린 원한, 우리를 죽이고자 하는 욕망,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된 그 근육으로 인해 그들은 인간이 된다. 자신들을 짐승처럼 부리려 하는 이주민 때문에 그들은 이주민에 대항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증오, 아직은 추상적이고 맹목적인 증오는 그들의 유일한 자산이다. '주인'은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빚지만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그 과정을 도중에 중단하지도 못한다. 이리하여 '절반의 원주민'은 억압자의 힘과 약점을 통해 짐승과 같은 상태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인간으로 변화한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안다. 그들은 게으르지만 그것은 바로 태업의 한 형태다. 그들은 교활하고 도둑질을 한다. 상상해보라! 그들의 좀도둑질은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저항의 단초를 나타낸다.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 중에는 총포 앞에 맨손으로 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유럽인들은 살해하고 총살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이 되는 사람도 있다. 도적이든 순교자이든 그들의 고뇌는 겁에 질린 대중을 일깨운다. 
그렇다. 겁에 질린 대중, 이 초기 단계에서 식민주의의 공세는 원주민들에게 공포를 심어 준다. 그 공포는 그들이 우리의 무한한 억압 수단을 마주할 때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겨눈 우리의 총과 그 끔찍한 강제 사이에 갇힌 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그러나 항상 의식하는 것은 아닌 살인의 욕망을 느낀다. 처음에는 그들의 폭력이 아니라 우리의 폭력이 그들을 파괴한다. 이에 대한 피억압자들의 첫 행동은 분노를 깊이 파묻는 것이다. 이 감춰진 분노는 그들로 우리의 도덕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지만 실은 인간성의 마지막 도피처다. 파농을 읽어라. 궁지에 몰린 그들에게 광적인 살인의 충동이 왜 집단무의식의 표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억압된 분노가 배출구를 찾지 못하면 그것은 진공 속으로 밀려 들어가 피억압자 자신들을 유린한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심지어 서로를 학살하기도 한다. 부족들끼리 싸우는 이유는 그들이 진정한 적을 대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식민 정책을 잘 이용하면 그들이 계속 다투도록 할 수 있다. 자기 형제에게 칼을 들이대는 사람은 그 행위로써 자신들이 공동으로 타락한다는 혐오스러운 생각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속죄의 희생양으로써 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일을 대신 해줌으로써 그들이 기관총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막아줄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하는 비인간화를 자발적으로 촉진한다. 이 광경을 즐겁게 바라보는 이주민들 앞에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경계하고, 초자연적인 장벽을 세우고, 때로는 터무니없게 낡은 신화까지 되살리고, 세심한 의식을 치러서 부족마다 결속을 다진다.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깊은 욕구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특정한 계율에 자신을 묶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춤을 춘다. 춤은 그들을 바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수축된 근육을 풀어준다. 그리고 그 춤은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거부, 감히 저지르지 못하는 살인을 몸짓으로 표현하게 된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 영혼의 홀림을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예전에 그것은 신앙심을 신성한 사물과 결부시키는 정도의 매우 단순한 종교적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굴욕과 좌절에 맞서서 싸우는 무기다. 멈보점보(서아프리카의 토속 수호신)와 부족의 모든 우상들이 그들에게로 내려와 그들의 폭력성을 다스리고 무아지경 속에서 완전히 소진하도록 한다. 그와 동시에 이 지체 높은 인물들은 그들을 보호한다. 
바꿔 말하면식민화된 사람들은 종교적 소외를 진척시킴으로써 식민주의적 소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결과 두 가지 소외가 결합되어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어떤 정신병 환자는 환각에 사로잡혀 늘 자신의 악마에게 지겨우리만큼 모욕을 당하다가 어느 맑은 날에 자신을 칭찬하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조종이 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야유와 찬사가 교대로 들리게 된다. 이것은 나름대로 방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자아는 분열하고 광기에 빠진다. 다른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앞서 이미 말했던 또 다른 주술, 즉 서구 문화를 덧붙이기로 하자.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약 내가 그들이라면, 나는 이들의 아크로폴리스보다 내 멈보점보를 좋아할 것이라고. 아주 좋다. 당신을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당신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들이 선택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즉 그들은 둘 다 가져야 하는 것이다. 
 두 세계, 그것은 두 가지 주술을 만들어낸다. 그들은밤새 춤추다가 새벽이 되면 교회로 몰려가 미사에 참석한다. 갈수록 그 틈은 넓어진다. 우리의 적은 자기 형제들을 배반하고 우리와 결탁한다.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원주민'이라는 지위는 이주민이 식민화된 사람들의 동의 하에 도입하고 유지하는 불안정한 조건이다.   
  
인간의 조건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부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이 모순은 상당히 폭발적이다. 
결국 폭발하고 말리라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현재는 도화선에 성냥을 갖다대는 시기다. 출산율 상승이 더 큰 기근을 유발할 때, 새로 온 사람들이 죽음보다 삶을 걱정할 때가 되면 폭력의 급류는 모든 장벽을 휩쓸어버릴 것이다. 알제리와 앙골라에서 유럽인들은 눈에 띄기만 하면 살해된다. 지금은 부메랑의 시기, 즉 폭력의 3단계다. 폭력은 되돌아와서 우리를 공격하는 데, 우리는 과거에 폭력을 시작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는 망연자실해진다.  
그들은 우리가 원주민들을 잘 대우하지 않았다면서 늦기 전에 어느 정도의 권리를 그들에게 부여하는 게 현명하고 공정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대단히 배타적인 무리인 우리를 후원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야만적이고 광기에 찬 폭발을 그들에게나 나쁜 이주민들에게나 용서가 없다. 
본국의 좌익은 당황한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무자비한 억압에 시달리도 있아는 진정한 상황을 안다. 그들은 원주민들의 반란을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도발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 역시 일방적이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게릴라들은 자신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이다. 자신들도 인간임을 보여주는 최선의 방법이 거기에 있다. 때로 좌익은 그들을 꾸짖는다. "너무 지나쳤어. 그러면 우리도 너희를 지지하지 않겠어." 하지만 원주민들은 그들의 지지에 개의치 않는다. 실은 지지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뒤를 봐주는 게 고작이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이 엄정한 진실을 깨달았다. 우리 모두가 각자 몫을 차지하고 그들에게서 뭔가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증명을 요청할 필요가 없기에, 누구에게도 우호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무이자 목적이 있다. 즉 온갖 수단을 다해서 식민주의를 몰아내는 것이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결국 그 의무를 목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련에서,인간 이하의 사람들의 인간주의 헌장의 특권을 얻어내기 위해 구사하는 안전히 비인간적인 수단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그 특권을 그들에게 즉각 내준 다음, 그에 걸맞은 평화로운 노력을 그들에게 요구하라. 우리둘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도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파농을 읽는 게 좋다. 파농은 그렇게 분출되는 폭력을 분노의 표출로 보지도 않고, 야만적인 본능의 부활로도 보지도 않으며, 심지어 원한의 결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나는 우리가 이 진실을 즉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잊었다.부드러움으로 폭력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오직 폭력 자체만이 폭력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원주민은 무력으로 이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식민지 노이로제를 치료한다. 분노가 들끓을 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그의 전쟁과는 별도로 우리는 그것을 야만의 승리라고 간주한다.그러나 그것은 자체의 의지로 느리지만 확실히 반역의 해방을 실현하며, 그의 내부와 주변에 드리워진 식민지적 암영을 조금씩 걷어낸다. 이것은 일단 시작되면 무자비한 전쟁이다.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거나 남에게 두려움을 주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위선적 존재가 해체되거나, 아니면 통합의 생득권을 쟁취하는 것이다. 

농민이 총을 손에 쥐면 낡은 신화는 희미해지고 금제는 하나씩 잊혀진다. 반역의 무기는 그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거다. 반란의 초기에 그는 남을 죽여야 한다. 유럽인을 쏘아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의 행위다. 억압자를 없애는 동시에 피억압자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죽은 자와 해방된 자가 남게 된다. 생존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 아래 조국(nation)의 흙을 느낀다.이 순간부터 조국은 그에게서 멀어지지 않는다. 그가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조국은 그와 함께 존재한다. 조국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그의 자유와 한몸이 된다. 그러나 그 최초의 놀라움이 물러간 뒤에는 식민지 군대가 들이 닥친다. 모두들 단결하지 않으면 학살될 판이다. 부족들 간의 불화는 약해지고 점차 없어진다. 우선 불화로 인해 혁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 불화가 폭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는 점에 있다. 콩고에서처럼 부족들 간의 불화가 남아 있는 경우는 식민주의의 하수인들이 불화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조국은 전진한다. 조국의 자식들이 싸우는 현장 어디에나 조국이 함께 한다. 그들이 서로 간에 느끼는 감정은 그들이 당신에게 느끼는 증오의 정반대다. 그들은 지금까지 적을 죽였고 앞으로도 언제든 다시 적을 죽여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형제다. 파농은 독자들에게 '자발성'의 한계, '조직화'의 필요성과 위험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매번 고비마다 아무리 중대한 과제가 생겨난다 해도 혁명적 의식은 심화된다. 마지막 콤플렉스는 사라져버린다. 이제는 아무도 우리에게 ALN(알제리 민족해방군) 병사들의 '종속적' 콤플렉스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눈가리개가 사라지자 농민은 자신의 빈곤에 대해 의식한다. 전에는 그것 때문에 죽을 생각도 했었지만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자 했다. 이제 그는 그것을 무한한 필요로 파악한다. 민중에게서 샘솟는 폭력, 그들을 5년 동안 - 알제리인들의 경우에는 8년 동안-이나 버틸 수 있게 해준 이 폭력에는 군대, 정치, 사회의 요구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단지 지휘권과 책임의 문제를 정하는 것만으로도 장차 최초의 평화 기구가 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낸다. 바로 거기에 새로운 전통 속에 자리잡은 인간, 비참한 현재의 후손이 있다.  
그는 장차 생겨날, 혹은 현재 포화 속에서 매일 생겨나는 법에 의해 정당성을 얻는다. 이주민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돌려보내거나, 동화시키고 나면 소수 종족은 사라지고 사회주의로 대체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반역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가 옛 모국의 예전 주민들과 같은 수준에 머물기 위해 목숨을 내걸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끈질긴지 보라! 아마 그는 또 다른 디엔비엔푸(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이 참패를 당한 곳--옮긴이)를 꿈꾸겠지만, 정말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튼튼하게 무장한 부자들에 맞서 싸우는 빈곤 속의 거지 천사다. 결정적인 승리를 기다릴 때도, 혹은 그런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도, 그는 적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만든다.  
 패배의 두려움이 없지는 않다. 식민지 군대는 사나워지고, 전국이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소탕작전이 전개되며, 인구가 이동하고, 보복 전쟁이 벌어져 여자와 아이들이 살육된다. 그도 그것을 안다. 이 새로운 인간은 그것이 끝나면서부터 인간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송장이나 다름없다고 여긴다. 그는 살해될 것이다. 그는 이런 위험을 감수할 뿐 아니라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확신한다. 이 산 송장은 아내와 자식들을 잃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봐서 생존보다는 승리를 원하자. 승리의 결실을 거두는 것은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는 너무도 힘들다 . 그러나 이 거친 가슴은 믿을 수 없는 용기를 키워내는 뿌리다. 우리가 인간성이 죽음과 절망 가까이에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그것이 고통과 죽음 너머에 있다고 여긴다.우리가 바람을 퍼뜨린다면 그는 소용돌이를 퍼뜨린다. 폭력의 아이, 그는 매 순간 자신의 인간성에서 폭력을 끌어낸다. 우리는 그를 희생시켜 인간이 되었고, 그는 우리를 보고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 그는 더 고결한 다른 인간이다. 

여기서 파농은 멈춘다. 그는 앞길을 보여주었다. 그는 싸우는 사람들의 대변인으로서 단결을 외친다. 아프리카 대륙이 일체의 알력과 지역주의 버리고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만약 그가 탈식민지화하는 역사적 현상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싶었다면 우리에게 말했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지은이와 상관없이 우리끼리의 논쟁은 계속된다. 우리 모두 반란을 일으키는 민족들의 힘을 감지하며, 무력으로 응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폭력의 생생한 순간이 다가오는데, 여기에는 우리 자신도 관련된다. 이 폭력은 그 본성상 '절반의 원주민'이 변화되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도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늘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유럽인들은 프랑스, 벨기에, 영국이 받은 타격으로 인해 깜짝 놀라면서도 조금이라도 딴 데로 주의를 돌리면 마치 식민주의의 범죄에 공범자가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진다. 
이 책에 서문 같은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가 서문을 쓴 이유는 논증의 결론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우리유럽인들 역시 탈식민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 내재해 있는 이주민은 현재 난폭하게 뿌리를 뽑히고 있다. 우리가 변하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볼 자신이 있다면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우선 우리는 우리의 인간주의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폭로되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누구나 알듯이 그 적나라한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다. 그것은 위선의 이데올로기일 뿐이고 약탈에 대한 완벽한 정당화다. 그 미사여구, 그 허구적 감수성은 우리의 침략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당신이 비폭력을 옹호하며 나는 처형자도 희생자도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아주 좋다. 당신이 희생만 아니라면, 당신이 투표한 정부, 자신의 형제들이 망설임이나 뉘우침도 없이 다른 민족을 살해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당신은 전혀 처형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만약 당신이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면, 하루 이틀쯤 감옥에 갇힐 위험이 있다면 , 당신은 즉각 손을 빼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최후까지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 적어도 이 점을 이해하려 해보라. 만약 오늘 저녁에 폭력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착취와 억압이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면, 비폭력의 구호는 분쟁을 멈추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비폭력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해도 체제 전체가 천 년 동안이나 억압을 당해왔다면, 당신의 수동성은 당신을 억압자의 편에 서도록 할 뿐이다 

당신은 우리가 착취자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가 '신대륙'의 귀금속과 자원, 그리고 석유에 먼저 손을 댔다는 것, 우리가 그들을 과거로 돌려보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훌륭한 성과도 없지는 않다. 우리의 궁전, 우리의 성당, 우리의 대산업도시가 그 성과다. 게다가 식민지 시장은 경기 침체의 위협을 완화시켜주거나 그 타격의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부자들이 우글거리는 유럽은 국민들에게 정당한 인간적 지위를 부여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곧 식민주의의 공범자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예외없이 식민지적 착취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름지고 창백한 대륙은 파농이 올바르게 표현하듯이 자기도취에 빠져버린다. 콕도(Cocteau)는 파리에 싫증을 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도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유럽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게다가 유럽을 능가하는 괴물, 북아메리키는 또 어떤가? 자유, 평등, 박애, 사랑, 명예, 애국심 등등 마음대로 외쳐라. 아무리 외쳐본들 더러운 흑인과 유대인 과 아랍인이라는 인종주의적 주장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고결한 사람들, 자유주의적이 성향을 가진 사람들, 혹은 그저 마음만 착한 사람들은 그런 부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항의하지만, 그들은 착각을 하고 있거나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 노예와 괴물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딘가에 원주민들은 존재했으나 지금까지 그런 사기극은 폭로되지 않았다.인류라는 개념에서 우리는 보편성이라는 추상적 전제를 얻어내는데, 이것은 대단히 현실적이 실천을 은폐하는데 기여한다. 대양의 건너편에는 인간 이하의 인종이 살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받아도 앞으로 1천 년이 지나서야 우리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오늘날 그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며, 동시에 우리의 배타적인 '무리'는 그 약점을 드러낸다. 우리의 무리는 소수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실은 그보다 더 나쁘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대항하는 의미에서 인간이 되고 있지만 우리는 인류의 적인 셈이니까. 엘리트는 본연의 색깔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기껏해야 패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귀중한 가치관이 변하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면 피가 묻지 않은 게 하나도 없음을 알 것이다. 
 사례를 알고 싶다면 이 말을 기억하라."프랑스는 얼마나 너그러운가!" 우리가 너그럽다고? 그렇다면 세티프는 뭐하고 해야 할까? 알제리인 100여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 격렬했던 8년간의 전쟁, 그 지독했던 고문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러나 아무도 우리가 이러이러한 임무에 불성실했다고 책망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임무도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너그러움 그 자체다. 이 듣기 좋은 말은 법제화된 헌장을 부여했다는 의미밖에 없다. 우리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 새로운 인간, 해방된 인간은 누구에게 무엇을 부여하고 말고 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각자 나름의 권리,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인류가 완전히 성숙하면, 그 권리는 단순히 전세계 인구의 총계가 아니라 상호적 필요성의 무한한 통일로서 규정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멈춘다. 당신은 굳이 그 일을 마칠 필요가 없다. 단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귀족적 덕목을 직시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덕목이 지금 부서지고 있다. 그것을 존재하게 한 귀족정치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그 덕목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 몇 년 전에 어떤 부르주아 식민주의 학자는 오로지 서구를 변호하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다. 하지안 우리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가책을 느낀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가! 예전에 우리 대륙을 지탱한 것은 파르테논 신전, 사르트르대성당, 인권선언, 철십자 등 다른 수단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안다. 우리가 난파선에서 구조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바로 그리스도교적 죄의식이다. 당신은 그것이 종말임을 알 수 있다. 유럽은 곳곳에서 누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간단하다. 과거에 우리는 역사를 만들었으나 이제는 역사가 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탈식민화가 시작되었고, 우리의 용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과정을 늦추는 것뿐이다. 

예전의 '모국'은 지금도 그대로다. 이들은 여전히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전투에 전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 모험의 끝에서 우리는 식민지의 야만 행위가 뷔고(프랑스 육군 원수.1840년 알제리 총독)의 수상쩍은 영광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하지만 아무리 수십 배나 확대되어도 충분하지 않다. 군대가 알제리로 파견되었지만 7년 동안이나 아무런 성과도 없다. 오히려 폭력의 방향이 바뀌었다. 승리할 때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면서 폭력이 우리를 변화시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폭력은 그들을 쓰러뜨렸으나 우리의 인간주의는 무사했다. 이익으로 일치단결한 모국인들은 자신들의 범죄 연방에 세례를 주고, 그것을 박애와 사랑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폭력이 곳곳에서 차단되어 우리 병사들을 통새 우리에게로 되돌아와서는 우리에게 내면화되고 우리를 사로잡는다. 혼란이 시작된다. 원주민은 자신을 재창조하는 데 반해 우리 이주민과 유럽인, 극단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지리멸렬하다. 분노와 공포는 이미 노골적이 되었다. 알제에서의 흑인 사냥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제는 어느 편을 야만이라 해야 할까? 어디가 미개할까? 사라진 것은 없다. 북소리도 살아 있다. 자동차의 경적이 '프랑스의 알제리'보다 크게 울리는 가운데 유럽인들은 무슬림들을 산 채로 불태운다. 
 파농은 얼마 전에 열린 정신과 의사들의 대화에서 원주민의 범죄적 성향이 심각하게 다뤄졌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죽입니다.정상이 아니에요. 알제리 사람의 대뇌 피질은 덜 발달해 있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중앙 아프리카를 모델로 삼아 "아프리카인은 전두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학자들은 현재 유럽에서 연구를 계속하면서 특히 프랑스인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도 역시 '전두엽 미사용'의 제물이었던 셈이다. 우리의 애국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다수 암살했고, 외국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집을 무수히 파괴했기 때믄이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내전은 가을에도 벌어질 테고, 이듬해 봄까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두엽은 완벽한 상태인 듯 보인다. 우리는 원주민들을 완전히 짓밟을 수 없다. 그러므로 폭력은 본 궤도로 돌아와서 우리의 본성에 깊이 쌓이다가 배출구를 찾지 않을까? 알제리 민족의 단결은 프랑스 민족의 분열을 빚는다. 예전의 모국이 지배했던 영토 전역에서 부족들은 그들의 전쟁 춤을 추고 있다. 그 공포는 아프리카를 떠나 이곳에 정착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도 죄를 범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지만(비제르타 이후, 9월의 린치 사건이 벌어진 이후 그들 중 누가 거리에 나와서 "우리는 이제 질렸다"고 외쳤던가?),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이거나 유연한 좌익의 불한당들이기에 보기에는 더 좋지 않다. 그들 또한 점점 흥분이 고조되며 분노도 상승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바람을 탔다! 그들은 신화와 복잡한 의식으로 분노를 숨긴다. 그렇게 해서 심판의 날을 모면하고, 우리의 문제를 대마법사 -그의 주요 임무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어둠 속에 있게 하는 것이다 - 에게 맡기는 결정을 유보하려는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 어떤 이는 인정하고 이떤 이는 부정하고 폭력은 진공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날 폭력은 메스 또는 보르도 근방에서 터져나온다. 여기, 저기, 어디서나 사냥에 쫓기는 짐승처럼 요리조리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 길을 한 걸음씩 걸어서 원주민의 수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자 완전한 원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땅이 예전의 식민지화된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어야 하며, 우리 역시 굶주림에 시달려야 한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를 사로잡은 식민주의는 불신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늙고 오만한 주인이 우리의 몸 위에 걸터앉아 있다. 여기 우리의 멈보점보가 온다. 

파농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이주민이 되기보다는 비참한 상태에 빠진 원주민이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확신이 들 것이다. 경관에게 하루에 열 시간 동안이나 고문을 가하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하다가는 그의 신경이 터져버릴 것이다. 고문 경관을 과도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국가와 군대의 도덕이 엄정한 법에 의해 보호되는 게 바람직스럽다면, 국가가 체계적으로 군대를 타락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공화정의 전통을 가진 나라가 수천 수만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반역 장교들을 다루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동포들이여, 우리의 이름으로 온갖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에 관해 한마디도 다른 사람에게 내뱉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 법정에 서게 되는 게 두렵다면 자신의 영혼에게라도 말해야 한다. 처음에 당신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나중에야 당신은 그런 일이 사실인지 의심했으며, 지금을 분명히 알고 말할 수 있다. 8년 간의 침묵이라니,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당신의 침묵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현재 고통의 눈먼 태양은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그 빛은 온 나라를 내리쬔다. 그 무자비하게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 모든 웃음은 가식일 뿐이고, 모든 얼굴은 공포와 분노를 숨기고 있으며, 모든 행동을 우리의 혐오와 공포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오늘도 프랑스인 들이 만나면 그들 사이에는 반드시 시체 한 구가 생겨난다. 내가 '시체 한 구'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 일찍이 프랑스는 나라의 이름이었다, 주의하자! 
1961년엔 프랑스가 신경질환의 이름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 폭력은 아킬레우스의 창처럼 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손발이 묶이고 모욕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지만 더 아래로 떨어질 수는 없다. 다행히도 아직 식민주의적 귀족정까지 이를 정도는 아니다. 알제리에서 그것이 완전히 지연되려면 먼저 프랑스가 식민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전선에서 퇴각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회피하지는 않는다. 살인자들은 전쟁이 필요하다, 그들은 우리를 데려가서 마구 두드려 팰 것이다. 

 이리하여 마법사의 물신들의 시대는 끝날 것이다. 당신은 싸우지 않으면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이것이 변증법의 끝이다. 당신은 이 전쟁을 비난하지만 감히 스스로 알제리 전사들의 편이라고 선언하지는 않는다.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은 이주민과 용병들에게 의지할 수 있다. 그들은 당신에게 모험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아마 당신이 벽에 등을 기대면, 당신 안에서는 자주 반복된 해묵은 범죄들로 인해 새로운  폭력이 솟아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듯이 그건 또 다른 이야기, 즉 인류의 역사다. 나는 우리가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할 시간이 가까워졌다고 확신한다.

 

놀라울 만큼의 폭력…우리는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나?

이완배 기자 peopleseye@naver.com

발행 2016-10-23 19:38:45

수정 2016-10-23 19: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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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패산 터널 총격 사건은 2016년 대한민국의 또 다른 단면이다. 범인이 9000원 밖에 남지 않은 통장을 공개하며 “경찰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는 게 내 목적이다”라는 적었다는 대목에서, 이 놀라운 폭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이른다. 그는 스스로 실업자에 가난뱅이, 국민 왕따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조했다.

당연히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휘두르는 이 비정상적 폭력에 대해 한국 사회가 아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할 수는 없다. ‘묻지 마 범죄’는 정말 그 범죄의 원인을 ‘묻지 않아야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더 처절하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느냐고 말이다.

오패산 터널 총격사건의 용의자가 지난 11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민중의소리

백성들이 서로에게 휘두르는 비정상적 폭력에 대해 20세기 이후 가장 설득력 있는 해답을 내놓은 이는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이다. 파농은 민중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평폭력의 원인은 바로 그들을 위에서 짓누르는 수직폭력에 있다고 설파했다. 파농에게 수평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당연히 그 수직폭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알제리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파농

파농이 알제리 독립 운동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아프리카 출신으로 오해를 한다. 하지만 파농이 태어난 곳은 카리브 해안에 있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였다.

프랑스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알제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정착한 파농은 그 누구보다도 알제리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파농의 사상 중 가장 도드라진 부분은 ‘폭력론’이다. 당시 알제리에서는 크고 작은 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민중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천막에 돌아온 알제리 민중은, 옆 천막에서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아기를 찔러 죽였다. 더 이상 외상 주기를 거부하는 상점 주인을 야밤에 찾아가 찔러 죽인 사건도 있었다.

프랑스는 당시 알제리의 이런 폭력성을 몹시 증오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알제리 민중들을 “선천적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며, 이유 없이 살인하고 범죄 성향이 강하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인 파농은 이에 대해 신랄한 반격을 가했다. 1954~1959년 자신이 직접 치료한 환자들의 치료기록을 바탕으로 파농은 “알제리 민중들의 폭력성의 원인은 바로 프랑스인들이 가하는 수직폭력 탓”이라고 반격했다.

파농은 폭력을 수평폭력과 수직폭력으로 구분했다. 민중들은 결국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받는 수직폭력으로 곤궁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곤궁한 외상(外傷)이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민중들은 수평폭력에 유혹을 받는다. 자기보다 못 하거나 약한 사람을 죽이고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받은 수직폭력의 한과 고통을 푸는 것이다. 이 폭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알제리 민중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유 없이 살인하는 유전자를 타고 나지 않았다. 잠시 파농의 말을 따라가 보자.

“굶주림, 집값을 못내 집 주인에게 내 쫓김,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 해골이 앙상한 아이들, 폐쇄된 작업장, 심장 곁을 까마귀 떼처럼 따라다니는 실업자들, 이 속에서 원주민은 매일 살인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몇 파운드의 밀가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파농의 유작이 된 책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은 파농이 그토록 존경했던 프랑스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가 썼다. 사르트르 또한 서문에서 이렇게 적는다.

“원주민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매질을 당하고, 영양 부족과 질병, 공포에 시달리는 인간은 흑인종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늘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된다. 즉 교활해지고, 게을러지고, 도둑질을 하는가 하면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폭력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나?

그들은 결국 가난했기에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파농은 “알제리 사람들은 구제불능이야”라고 선동했던 유럽의 백인들을 향해 ‘폭력 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요, 이성을 갖춘 신체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며, 더 큰 폭력 앞에서만 항복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수평폭력이라는 현상이 아니라 수직폭력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제거하자는 뜻이었다.

안타깝게도 파농은 1961년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알제리의 독립을 불과 1년 앞두고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동지였던 사르트르는 파농의 유작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 장문의 서문을 남겼다. 그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구의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 그 중 5억 명은 인간이고, 15억 명은 원주민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제국주의자들은 5억 명에 이르는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불렀고, 나머지 15억 명을 ‘원주민’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은 그 15억 명의 수평폭력을 낄낄대고 조롱했다. 자신들은 뭔가 더 대단하고 우월한 인종인 척했다.

한국 현실과 많이 다른가? 민중들을 빈곤과 죽음으로 내 몬 뒤 지배자들은 위에서 내려 보면서 낄낄대고 조롱한다. 국민 정서가 미개하다고, 역시 개돼지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심지어 지배계급은 민중들의 편을 갈라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도록 조장한다. 트럼프가 “국민들이 못 사는 건 멕시코 사람들 때문이야!”를 외치며 멕시코 국경에 성벽을 쌓겠다는 계획을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것도, 그가 민중들의 수평폭력 성향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이라고 다른가? “너희들이 못 사는 건 외국인 노동자 때문이야” “남자들이 직장을 못 얻는 건 군대도 안 간 여자들이 설치기 때문이야” 이런 의식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넘쳐나나?

서울 강북경찰서에서 경찰이 피의자로부터 압수한 사제 총기를 공개하고 있다.ⓒ뉴시스

하지만 민중들이 못 사는 건 외국인 노동자 탓이 아니고, 남성들이 직장을 못 구하는 것은 여성들이 과거보다 조금 더 사회에 진출한 탓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계급이, 재벌들이, 소수 기득권층이 부와 권력을 몰아넣고 백성들에게 돌아올 몫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이 수직폭력의 구조를 먼저 해체하는 일이다. 사르트르는 파농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유럽이 우리 대륙에 손을 댔으니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아주 좋은 때다. 비제르타, 엘리자베스빌, 알제리 벽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 마비 상태를 이용하자.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보편성 속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다. 투쟁을 시작하자! 마땅한 무기가 없다면 식칼이라도 충분하다!”

폭력투쟁을 지지하지 않기에 사르트르처럼 “식칼을 들자!”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배계급이 백성들의 삶에 손을 댔으니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에 동의한다. “투쟁을 시작하자!”라는 그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바로 백성들을 죽음과 빈곤으로 내모는 수직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