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를 만든다

2007. 6. 9. 12: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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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에 집착 마라. 불교의 가르침은 공이다. 신성한 것은 없다. 온 우주가 다 공하다.

우리 각자의 본성도 이와 같이 공하다. 달마에게 물었다. 당신 도대체 누구요? 몰라. 아무 것도 몰라. 황제의 마음을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일체 법이 무아 다. 모든 보살은 공덕에 연연하지 않는다. 선행을 하면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대가를 바란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란 힘들다. 사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행한다. 금강경은 복을 바라는 마음을 완전히 버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선행도 사실 공하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다. 바라지 마라. 어떤 대가나

보상에 집착하면 고통이 생긴다. 순간순간 어느 것도 잡을 수 있는 게 없다. 모든 건 실체가 없다. 따라서 그 어떤 보시에 대한 공덕도 사실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건적인 보시를

하지 마라. 모든 현상 물체의 공함을 깨닫는 것이 대자유 다. 그래야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도울 수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도울 수 있다.

 

우리는 성인의 어떤 특정한 모습을 기대한다. 여래가 혹 오고 가며 앉고 눕는 것처럼 보인다면 뜻을 이해 못한 것이다. 여래는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고 어디로부터 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 한다.

 

농부가 여래께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아니면 반신반인 인가? 법사인가? 그럼 남자인가?

여자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그러자 여래가 말씀하셨다. 나는 깨어있음 이라고. 여래는 일반 사람처럼 움직인다는 사실로 척도를 삼지 않고 깨어있음으로 척도를 삼는다. 깨어있는 마음은 책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타타가아타 – 이와 같이 오고 이와 같이 간다. 진정한 뜻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마음<여래>은 여기도 저기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들을 쫓는다.

어제 생각. 내일 생각. 학교 생각. 집 생각. 하지만 이런 모든 생각들은 실체가 없다. 깨어난 상태가 부처다. 깨어있는 마음은 부처와 나 두개의 서로 다른 마음이 아니다.

 

완벽한 고요. 더 이상 진정시킬 필요가 없이 그대로 완전하다. 진짜 신은 시공을 초월해

순간에 있다. 탕! 이 경험 안에 다 들어 있다. 삼천대천세계를 잘게 부수어 티끌로 만든다면 티끌이 많겠느냐? 많겠지요. 하지만 티끌은 티끌이 아니다. 그 이름이 티끌이며 세계도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정말 세계가 있다면 일합상 인데 이는 다만 범부들이 일합상이라는 이름과 형상에 탐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어떤 존재도 관계를 전제로 한다. 저쪽에 목탁 소리가 있다 생각하지만 귀를 막으면 더 이상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도 상호 관계성에서만 존재한다. 죽은 이에게

목탁 소리가 들리겠는가? 우리는 모든 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성공도 있고 야망도 있고

후회도 있고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온 우주를 가루로 내면 많겠느냐? 하지만 사실 티끌 그 것도 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탁자를 탁자라 부르고 탁자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탁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탁자를 태우면 재로 돌아간다. 현대 물리학에서 원자는 양자와

전자로 더 세분하면 쿼크로 이뤄진다는 데 쿼크는 입자가 아닌 일종의 띠의 형태를 한 파장이라 한다. 그 옛날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이 미세한 입자를 다시 보면 아무 자성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말했다. 이 소리는 생각이 나를 만든다는 소리다. 우리는 책상을 책상이라 말하고 이름 붙이고 있지만 책상 스스로는 아무 대답이 없다. 모두 오직 개념일 뿐이다. 스스로 아무 자성이 없는 존재다. 

 

이상 현각의 금강경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