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은 감각도 생각도 아니다

2007. 6. 9. 12: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대승기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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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란 현상 그대로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일심은 진여다. 대승기신론은 몸에 대한 얘기는 안한다. 오로지 마음에 관한 얘기다. 진여는 허무가 아니다. 인아집이란 내 자신 안에 나를 주재하는 영혼이 있다고 보는 고집이다. 생멸이 고통이다. 법의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공양 보다 내적 성찰이 훨씬 더 큰 일이다.

 

삼대<체 상 용> 체란 공으로 불변을 말한다. 상은 모양이다. 용은 쓰임새로 작용을 말한다.   

예를 들면 금 자체의 성품은 불변이지만 인연따라 얼마든지 다른 상<모양>을 가지고 가락지 목걸이 등을 만든다. 마음 근본은 원래 공이지만 인연 대상에 따라 변한다. 변하고 불변하고는 하나에서 시작된다. 자성청정은 아뢰야식 속에 있다.

 

대승은 크다 그러나 먼지에도 들어간다. 모든 존재의 본질은 대승이다. 마음을 움직이면 한 생각에 천당 가고 지옥 간다. 그러나 그 바탕은 원래 평등하다. 중생과 부처는 평등하다. 왜냐하면 바탕이 공하기 때문이다. 소승은 자리 대승은 자리이타<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다>이다. 소승은 관찰대상이 몸이다. 몸을 통해 마음을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몸이 없다. 왜냐하면 몸은 아는 성질이 없다. 몸은 생멸해도 마음과 달리 아는 성질이 없다. 

 

대승은 일심이다. 일심은 불변의 마음인 진여문과 변하는 생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승과 소승의 차이는 대비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있다. 잠재의식은 몸만 관찰해선 알 수 없다. 따라서 대승과 소승의 수행법이 다르다. 모든 존재는 분리돼 있지 않다. 하지만 왜 분리되어 있는 것 처럼 보이나?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대상에 따라가기 때문이다. 체상용을 믿었을 때 깨달음이 온다. 자아 영혼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다. 원래 씨앗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세간이란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말과 생각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이 생긴다. 사과라는 생각 자체가 공간을 만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이 출세간이다. 세간과 출세간은 같다. 하지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 같이 한 마음이다.

 

인과 연이 만나야 결과를 가져오고 그 결과의 모습은 모두 법이다. 불평등이 생길 때 갈등과 고통이 인다. 중생은 평등한 성품을 모른다. 평등한 입장엔 상이 생기지 않는다. 진여가 만든 오염된 모습이 상이다.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통틀어서 법계라 한다.

 

생각엔 반드시 내가 들어간다. 너와 내가 생기면 질곡이 일고 다툼이 인다. 알아차리는 정념은 감각도 생각도 아니다. 사과를 직접 보면 보고 알아차리기 때문에 나라는 개념이 작용하지 않는다. 정념은 보는 성질이 있고 알아차리는 성질이 있다. 공은 아는 성질이 없지만 마음은 아는 성질이 있다. 눈으로 보지 말고 전자현미경으로 보라. 현상계를 알고 보면 공하다. 상을 나타나게 하는 마음을 닦으면 몸을 부술 이유가 없다. 관찰하는 방법을 사용하라.

 

책상이 딱딱하다고 느끼는 감각도 마음이다. 책상 자체는 딱딱하다 안하다가 아니다. 인과 연이 만나 모든 현상계를 만든다. 마음이 고통을 일으키는 주범이지만 그 고통을 치료하는 것도 마음이다. 알아차림은 감각도 생각도 아니다. 생각엔 자아관념 과거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감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류다. 하지만 알아차림은 다르다. 생각도 감각도 아니다.

색을 소멸시켜 공을 얻는 게 아니다. 색 자체가 공이다. 허공과 공은 다르다. 공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우리는 두루 헤아려 분별하고 집착하는 성질<분별성>이 있다. 분별이 착각을 만든다. 우리 마음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 속에<의타성> 존재한다. 꼬잡으면 아프다고 알아차린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난다는 걸 알아차린다. 변화를 계속 알아차린다. 하지만 변화를 주재하는 실체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다. 우리가 변화를 못 느끼는 건 망념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상 대승기신론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