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6. 9. 12:4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유식사상
34.원성실성 – 의타기자성 분별연 소생 원성실어피 상원이전성
의타기성은 인연을 분별하여 생긴 것이다.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위면 원성실성이 된다. 의타기성은 오관이 한다. 6식은 분별하고 7식은 집착한다. 아뢰야식은 같이 움직이지만 자기 할 일이 없다. 아뢰야식은 성품이 무부무기라 7식이 온갖 것을 집착하거나 말거나 관여하지 않는다. 눈을 떠나 보는 방법은 없다. 마음을 갖고 보면 7식으로 보는 것이 된다. 온 종일 꽃 피는 걸 관찰하듯 간절하게 보면 안 잊어버린다.
35.원성실성의 근본 – 고차여의타 비이비불이 여무상등성 비불견차 피
원성실성은 의타기와 더불어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다. 비이비불이 - 만법이 원성실성을 떠나면 의타기성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낱낱이 의타기법은 모두 원성실성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비이라 하고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이 아니며 의타기 또한 원성실성이 아니므로 비불이라 하였다.
사법인의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을 아는 자리가 원성실성에서 나온다. 변계소집으로 무상을 보면 착각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체개고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세상이 얼마나 즐거운가 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경사가 겹쳐도 결국은 생로병사 고통의 씨가 그 안에 숨어있다. 아무리 즐거워도 생노병사를 이길 수 있나? 이 것이 없는 데 근본이 괴롭지 않다고?
노자도 도덕경에서 무아의 개념을 방<그릇>이 비워져야 방 노릇한다고 했다. 몸에서 눈이 눈노릇 귀가 귀노릇 한다고 덤비면 깨진다. 눈은 눈 노릇만 할 뿐 아가 없다.
제법이 무아인 것은 원성실성에서 깨닫는다. 원성실성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변계소집 때문에 안나온다. 권력의 최후가 얼마나 허망한지 알면서 갈 때 가더라도 또 탐한다. 얼마나 벼슬에 대한 폐해가 많았으면 족보에 명시한 집안이 다 있을까? 일체가 허망한지 알고 탐하지 않으면 원성실성이다.
36.원성실성의 근본 2 – 고차여의타 비이비이불
왜 성품을 3으로 구분했을까? 예를 들면 새끼줄을 새끼줄로 보면 의타기성이다.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면 변계소집이 되고 새끼줄을 분명히 보고 삼으로 만들었다는 걸 알면 원성실성<진여>이 된다.
무상한 것을 보지 않고 깨달을 수 없다. 이 세상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된 나도 공기 물을 빼고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 나오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러니 고통이다. 무상 무아 고 공을 그대로 인식하면 정견이다. 우리는 내일 죽으면서도 백년 살 것처럼 즐기고 계획하는 전도견 속에 살고 있다. 의타기성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원성실성이고 분별을 일으키면 변계소집이 된다. 변계소집 말고 사물을 보고 바로 원성실성을 보라.
변계소집을 여윈 원성실성은 피에서 온다. 의타기에 의해서 무상을 보고 무상을 통해서 원성실성을 깨닫는다. 만약 보고 듣는 걸 차단하면 무인도에 사는 사람처럼 무기에 빠진다. 수박이란 밖을 접하면서 지킨다는 뜻이다. 확실하게 보고 깨달았을 때 끊어진다.
이상 혜거스님 유식삼십송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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