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2007. 6. 9. 12:5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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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부처님은 스리랑카를 3차례 방문하신 것으로 능가경에 기록되어 있다. 3세기 아쇼카 대왕 통치 당시 이스라엘까지 승려를 파견했고 스리랑카엔 아들 마힌다를 보냈다. 당시 가져온 보리수 나무가 지금도 실존해 있다. 또한 캔디엔 부처님 이빨이 불치사에 모셔져 있다. <필자는 몇 년전 사리를 친견하고 바보처럼 울었다>. 왈라감바우 왕 시절엔 야자나무 잎에 역사상 최초로 불경이 쓰여졌다.

 

16세기 초엽 불교 힌두고 폴투갈인들이 데려온 무슬림 기독교인들이 스리랑카에 공존해 있었다. 많은 신도들이 물었다. 도대체 무얼 믿어야 하나요? 이에 대해 부처님은 Kalama sutra에 선택의 자유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그저 뜬 소문에 귀 기울이지 말라. 단지 자신과 생각이 같다고 따를만 하다고 존경하는 스승이 있다고 관습이 비슷하다고 논리적이라고 혹은 추정으로 외관으로 자신이 믿는 경전과 비슷하다고 따르지 말라. 만약 어떤 것이 건전하지 않고 그릇되고 나쁘다고 스스로 안다면 그 것은 버려라. 하지만 어떤 것이 건전하고 유익한지 스스로 안다면 그 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라.

어떤 종교지도자가 이렇게 말하던가? 이런 자유는 불교에만 존재한다. 부처님은 사람을 개종시키려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당시 최하층 계급인 청소부를 데려다 계를 주고 승려로 만들면서 말씀하셨다. 그 누구도 위대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아무도 귀족으로 천민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따라 귀족도 되고 천민도 된다. 

사성제 고집멸도의 고<Dukkha>는 인생의 고통만 의미하는 염세적인 말이 아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염세적이거나 낙천적으로 되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고를 열병 혹은 불만족으로 번역하는 학자들이 있다.

 

조사에 의하면 현재 프랑스인 중 500만 정도가 스스로 불자로 생각한다고 한다. 2000년 동안 기독교를 믿는 국가에서 아무런 강요도 없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 침략 당시 피르한이라는 철학자들을 인도에 동행했다. 그리스 철학 스토이즘<금욕>과 에피큐리언이즘<쾌락>에서 사용하는 Apatheia<일종의 멈춤 위안의 방법> Equanimity<평정>같은 말은 팔리어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리스 왕 마난다와 불교승려 나가세나는 밀린다왕문경<Milinda panha>에서 그리스 철학과 불교가 만난다. 사람이 죽고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데 그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요 다른 사람인가요? 같은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진이 그인가요? 그는 사진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스님 또한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신부들이 윤회와 업을 믿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5세기 2차 카톨릭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윤회와 업을 믿는 신부들을 추방하거나 파문시켰다. 이 신부들이 죽거나 인도 혹은 중국으로 피신하여 메시아 예수경<Sutra>을 썼고 후에 중국학자들이 번역했다.              

 

17-18세기 유럽 특히 독일에서 불교가 광범위하게 논의됐다. 바그너는 승리자라는 오페라를 썼고 이 제목의 주인공이 부처님이다. Nirvana라는 교향시를 쓴 시인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레오 톨스토이는 1910년 사망하기 1년전 부처님과 업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두 편 쓰고 구도행을 했다. 이태리 작가 Albert Moravia는 불교도가 되었다. 프랑스의 한 실존주의 철학자는 인간이란 자신의 행동의 총합<업>이라는 책을 썼다. 자기가 행한 모든 행동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의 종교가 될 거다. 그 것은 인간적인 하나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선 것이다. 물질적인 자연세계와 정신세계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미있는 단일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불교가 이런 요구에 대해 만족시키는 답이다. 물질적 종교적인 감응과 이런 세계를 포괄하는 현대과학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 것은 불교다.          

 

법구경에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했다. 현대과학은 미립자를 관찰할 때 처음의 입자 상태가 두 번째 관찰에선 파동으로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새로 파동자<wavicle>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마음은 강력한 힘이 있다. 관찰하는 과학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대상이 변한다. 사실 우리는 관찰자가 아니고 참여자다. 부처님께서는 사티파타나 경에서 몸 안의 몸을 명상하라고 하셨다. 수행자 따로 대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심장 전문의들이 모여 심장의 암호<Heart’s code>란 책을 썼다. 10대 소녀가 칼에 찔려 살해 당했다. 이 소녀의 심장이 다른 소녀의 심장에 이식되자 이식받은 소녀가 살인범을 기억했다. 사실 우리는 신체 모든 부분에 기억 코드가 심어져 있다. 심장은 단순한 혈액순환 펌프가 아니다. 명상은 불교의 핵심이다. 숲 속의 좌선만 상상하지 말라. 명상은 일상생활 속에서 야채를 다듬거나 쓸 때 그런 행위 속에 존재한다. 우리는 걸으면서 차 마시며 다른 생각 때문에 불필요한 피로가 쌓인다. 항상 깨어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아채라!               

 

이상 반야완사 스님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