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심

2007. 6. 9. 13: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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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생각을 끊고 마음과 자신이 텅 빈 실재로 공을 체험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차 살 때 친구와 의논하고 잡지보고 가격이나 품질을 분석하듯이 차 연구를 하고 구매할 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듯이 티벳불교 전통인 분석적 명상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곳 논리적 생각의 흐름을 따라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대승이란 자신을 위해 고통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 불교수행 속으로 몰입하는 사람이다. 자비심은 대승의 핵심이다. 중생이란 의식과 자신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는 생명체다. 모기 역시 중생이다. 모기가 덤비면 죽인다. 자비심이 아니고 이기심이다. 막 먹으려는 고기 한 점을 보고도 맛 있겠다 하지 말고 연민을 가지고 영양을 제공하고자 죽어간 가엾은 동물에 대하여 생각하고 먹으라.

 

보리심<Bodhichitta>은 깨달음의 마음이다. 이라크 전쟁을 보라! 진정한 자비심을 갖추려면 가까운 사람들만이 아닌 적으로 보이는 사람 모두에게 동등한 연민을 보여야 한다. 누가 죽으면 안됐군 하지 말고 적즉적으로 고통을 덜어주려는 노력을 하라. 고통엔 여러 형태가 있다. 그 중 변화에 따른 고통이 있다. 즐거움 속에 내재된 고통의 씨앗 무상을 보라. 화려한 생활을 부러워하지만 그 내면엔 고통이 있다.

 

갖고 싶은 카메라를 사는 순간 만족은 사라진다. 2대의 카메라를 가지면 2배의 고통이 3대의 카메라를 가지면 3배의 고통이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즐거움 속에는 고통의 씨앗이 있다. 덥다고 선풍기를 틀다 치우는 순간 고통을 경험한다. 즐거움이란 하찮은 것이다. 선풍기가 주는 즐거움엔 한계가 있다. 종국엔 발아하게되는 고통의 씨앗이 숨어 있다.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 보면 결국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에 겪는 것이다. 그래서 생의 무상이라는 경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어느 순간이든 죽음의 왕이 내리칠 수 있다. 이 순간에도 생은 조금씩 사라져 간다. 죽음의 순간은 분명치 않다. 우리는 자신이 어느 정도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은 자신의 과업을 완수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동차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도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다. 생존이란 단순히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이다. 죽음을 대비하라. 당신을 에워싸고 울어줄 가족이나 친구를 갖는 것이 아니다. 친구도 가족도 느닷없이 닥치는 죽음의 순간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자비심 사랑이라는 덕망있는 생각이다.

 

우리 삶은 업의 법칙이다. 이 강론을 듣는 것도 과거 선업의 결과다. 신은 특별히 비이기적 이거나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신은 단순히 수행의 결과로 은총을 누리는 존재다. 자비란 자신의 고통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인 무명을 제거하는 것이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발원을 하라. 부처님은 환자에게 고품질 특효약을 주신다. 그 것이 부처님의 존재 이유다.

 

집착 오만 분노에서 모든 불행이 온다. 자비심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개발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사실 모기도 전생에 여러 차례 나의 어머니였을지 모른다. 아이가 아플 때 모든 어머니들은 대신 아프고 싶어 한다. 그 순간 보살이 된다. 이를 남과 나를 바꾸기라 한다.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모기도 그런 의미에서 나와 다르지 않다. 화낼 수 없다. 어떤 무지한 방식으로 당신에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모기의 본성이다.

 

모든 나의 이기적인 행동은 고통을 가져오며 비이기적인 행동은 행복을 가져 온다. 일체 중생을 도우려면 불성을 가져야 한다. 그 것이 깨달음의 핵심이다.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낫다. 소유해서 행복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상 니콜라스 스님 자비심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