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품

2007. 6. 9. 13: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열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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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리 짧은 이(i) 긴 이(i) 짧은 우(u) 긴 우(u) 열(e) 야(ai) 오(o) 포(au) 암(a) 아(a) 가(ka) 가(kha)

(ga) 무거운 음 가(gha) 아(a) 차(ca) 차(ch) 자(ja) 무거운 음 자(jha) 약(a) 타(a) 타(ha) 다(a)
무거운 음 다(ha) 나(a) 타(ta) 타(tha) 다(da) 무거운 음 다(dha) 나(na) 파(pa) 파(pha) 바(ba) 무거운 음 바(bha) 마(ma) 야(ya) 라(ra) 가벼운 음 라(la) 화(va) 사(a) 사(sa) 사(a) 하(ha) 라(la)

<문자품 생략>

성인은 집착이 없으니 욕심이 없고 만족을 알므로 청정이라 한다. 3유에서 흐르는 생사고해에서 중생들을 제도하므로 성인이라 한다. 또 계행을 지키고 위의를 잘 차린다. 또 성인을 의지함이라 위의와 거동을 배우고 삼보를 공양 공경 예배하며 효도하고 대승을 배우는 것이다. 계율을 지키는 이와 보살마하살을 성인이라 한다.

 

로류로루 4가지 뜻이 있으니 이른바 불법승이다. 대법이라 함은 제바달이 일부러 승단을 파괴하며 가지가지 형상을 변화시킴 같은 것이니 계율을 제정하기 위한 것이므로 지혜있는 이는 그렇게 알고 두려운 생각을 말며 세상을 따르는 행이니 그러므로 로류로루라 한다.


숨 들이키는 소리는 혀가 코를 따르는 소리다. 길고 짧고 뛰어난 소리 따위로 음에 따라 뜻을 해석함이 모두 혀와 이로 인해 차별이 있으니 이런 글자들이 중생의 구업을 깨끗히 한다. 하지만 중생의 불성은 문자를 빌린 뒤에야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 성품이 깨끗해서 비록 5음6입18계에 있더라도 5음6입18계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모두 귀의해야 하며 보살들도 중생들을 평등하게 차별하지 않으니 반쪽 글자가 모든 경서 기론 문장의 근본이 된다.

 

또 반쪽 글자의 뜻은 번뇌를 말하는 근본이며 완전한 글자는 선법을 말하는 근본이니 마치 세상에 악인을 반인이라 하고 선인을 완인이라 하는 것 같다. 이 같이 모든 경서 기론은 다 반자로 근본을 삼거니 만일 여래와 해탈도 반자에 들어간다면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문자를 여윈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온갖 법에 거리끼지도 집착하지도 않아 참으로 해탈을 얻었다. 어떤 것을 가리켜 글자의 뜻을 안다 하는가? 만일 여래가 세상에 나서 반자를 없앨 줄 안다면 이는 글자의 뜻을 안다 할 것이요 만일 반자만 따르는 이는 여래의 성품을 모르는 것이다.

 

어떤 것을 글자가 없는 뜻이라 하는가? 선하지 못한 법을 닦는 이는 글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며 또 글자가 없는 것은 비록 선법을 닦으면서도 여래의 상 무상과 늘 있고 늘 있지 않음과 법보 승보와 계율 잘못된 계율과 경전 잘못된 경전과 마군의 말 부처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렇게 분별할 줄 모르는 이는 글자가 없는 뜻을 따른다 한다. 내가 지금 글자가 없는 뜻을 따르는 것을 말했으니 선남자야 그대들은 지금 반쪽 글자를 여의고 완전한 글자를 잘 알아야 한다.

 

없다고 가르친 것이 반쪽 이다. 4-2=2지만 6-4=2다. 2를 만드는 데 한 가지만 알려준 것이 반쪽이다. 앞서 가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 모른다. 영어도 상대보다 잘 하면 상대가 주눅 든다. 하지만 내가 상대보다 못하면 잘 챙겨준다. 그래서 더 잘 통하는 것이다. 네팔어도 모어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다. 아이우에오가 2600년전 경전에 나온다. 옴은 세상의 첫 소리다. 우리 본성 자리는 착한 자리도 악한 자리도 아니다. 올바른 자리다. 부처님 경전도 반쪽이다. 수행이나 진리는 문자를 여윈 것이다.  


<조유품> 새는 2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가린제요 다른 하나는 원앙이다. 함께 다니며 서로 떠나지 않으니 괴롭고 무상하고 내가 없는 법도 그와 같아 서로 여의지 못한다. 왜 무아법이 저 원앙과 가린제 같은가요? 다른 법이 고요 락이요 항상함이요 무상이요 나요 무아니 마치 벼가 삼이나 보리와 다르고 삼과 보리는 또 콩 조 감자와 다른 것 같다. 이런 여러 가지가 움트고 싹 나고 꽃과 잎이 모두 무상하거니와 열매 익어 사람이 사용할 적에는 항상하다 하니 성품이 진실한 까닭이다.


이런 것들이 만일 항상하다면 여래와 같나요? 그런 말 말라. 왜냐하면 만일 여래가 수미산 같다 해도 겁이 무너질 때 수미산은 무너지지만 여래가 어찌 무너지겠는가? 그대는 이런 생각 말라. 모든 법이 열반을 제외하고 하나도 항상한 것이 없으니 세간법으로 말해 열매가 항상하다는 것이다.

 

비록 모든 경전의 선정을 닦더라도 열반경을 듣지 못하면 무상하다 말할 것이며 이 경을 듣기만 하면 비록 번뇌가 있어도 없는 것 같아 모든 인간 천상사람을 이익케 한다. 왜냐 하면 자기 몸에 불성이 있는 줄 분명히 알아 항상하다 하기 때문이다. 마치 암마라 나무가 꽃이 처음 필적에는 무상하지만 열매 익거나 또 금광석이 녹을 적엔 무상하지만 녹아서 순금이 되거나 또 참깨가 기름 짜기 전에는 무상하다 하지만 짜서 기름이 되면 이익함이 많아 항상하다 함과 같다.


무상천은 생각이 없다 하지만 만일 생각이 없다면 수명이 없을 것이요 수명이 없으면 어째서 5음6입18계가 있겠는가? 이런 이치로 무상천의 수명이 머무는 데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목신이 나무를 의지해 있거니 결정코 가지 마디 줄기 잎에 의지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비록 일정한 곳이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무상천의 수명도 그와 같다.

 

허공에는 집이나 티끌이 머물러 있을 수 없지만 만일 집이 허공으로 인해 머물지 않는다면 옳지 않다. 이런 이치로 집이 허공에 머물렀다 머물지 않았다 할 수 없으니 범부들은 집이 허공에 머물렀다지만 허공은 실로 머물 데가 없다. 왜냐하면 성품이 머물 수 없는 연고다. 마음도 그처럼 5음6입18계에 머물렀다 머물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 무상천의 수명도 여래의 근심 슬픔도 그러하니 근심 슬픔이 없다면 어떻게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를 라후라 같이 한다 말하며 만일 근심 슬픔이 있다면 어떻게 성품이 허공 같다 말하겠는가?

 

마치 환술쟁이가 가지각색 궁전을 변화시켜 만들고 죽이고 기르고 얽매고 놓아주며 또 금은 보물 숲과 나무들을 만들어도 모두 참된 성품이 없으니 여래도 그와 같아 세상 따라 근심 슬픔 나타내지만 진실하지 않다. 여래는 이미 대반열반에 들었거늘 어찌하여 근심 슬픔 괴로움 시끄러움이 있겠는가?

만일 여래가 열반에 들었으니 무상하다면 이 사람은 근심 슬픔이 있는 것이요 만일 여래가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근심 슬픔이 없는 줄을 알겠거니 여래가 근심이 있고 없는 것은 알 사람이 없다.


마치 하품 사람은 하품 법만 중품 사람은 중품 법만 알지만 상품 사람은 상품도 알고 중품 하품도 아는 것같이 성문 연각도 그처럼 자기 처지만 안다. 하지만 여래는 자기와 다른 이의 처지까지 알아 걸림없는 지혜라 하며 환술같은 변화를 나타내 세상을 따르는 것을 범부의 육안으로는 진실하다 하지만 여래의 걸림없고 위없는 지혜를 알고자 함은 옳지 않으며 근심이 있고 없는 것은 부처님만 아는 것이니 이런 인연으로 다른 법은 내가 있고 다른 법은 무아를 아시니 이 것을 원앙과 가린제의 성품이라 한다.

 

불법은 마치 원앙이 함께 행하는 것 같으니 가린제와 원앙은 여름에 물이 불으면 높은 곳을 가려 새끼를 두고 기르며 그런 뒤 편안히 노니 여래도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여 정법에 머물게 함은 저 원앙이나 가린제가 높은 곳을 가려 새끼를 두는 것 같으니 중생들로 하여금 할 일을 마치고는 대반열반에 들어간다. 이 것을 이름하여 다른 법은 괴롭고 다른 법은 즐거움이라 한다. 모든 행은 괴로움이요 열반은 즐거움이니 제일 미묘하여 모든 행을 무너뜨리는 까닭이다.


어떤 것이 방일이요 아닌가요? 범부는 방일하니 항상 죽는 법이요 성인은 방일하지 않아 늙고 죽음이 없다. 왜냐 하면 항상하고 즐거운 열반에 드는 까닭이니 이런 이치로 다른 법이 고요 락이며 다른 법이 아고 무아라 하였다. 새가 날아간 자리를 볼 수 없듯이 중생도 천안이 없고 번뇌 속에 있어 자성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무아의 비밀을 말했다. 왜냐 하면 천안이 없는 자는 진아를 알지 못하여 제멋대로 나라는 것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번뇌로 인해 짓는 함이 있는 것은 무상하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법은 항상되고 항상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정진하는 날쌘 사람 산꼭대기 있게 되면 평지나 들에 있는 범부들을 항상 보게 되리. 위 없이 훌륭한 지혜 궁전 올라가면 제 근심 소멸하고 중생 근심도 마냥 보리.

여래는 번뇌 끊고 지혜 산 있으면서 중생들 번뇌 속에 항상 있는 것을 본다. 지혜 궁전은 열반이요 범부는 근심하지만 여래는 근심이 없다. 수미산 꼭대기는 정각을 말함이요 정진은 수미산이 흔들림 없음에 비유하고 평지는 함이 있는 행이니 모든 범부들이 머물러 모든 행을 짓는다. 지혜란 정각을 말함이니 유를 여의고 항상 머물기 때문에 여래라 한다. 여래는 중생들이 항상 모든 유의 독한 살에 맞았음을 불쌍히 여긴다. 그러므로 여래는 근심이 있다 한다.


모두 인연이 있어 교화를 받을 만한 중생이 있는 곳을 따라 그 가운데 여래가 나는 것이며 비록 태어 나더라도 실은 나는 일이 없이 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어서 가린제나 원앙 새와 같다 한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하면 업이 녹는다고? 그러면 거기 사는 고기들은 모두 성불했겠네? 세간법으로 말하자니 수미산을 여래라 비유할 뿐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시비심이다. 분별 시비하지 않는 이가 보살이다. 나무는 쪼개고 쪼개도 꽃은 안 나온다. 그렇다고 그 나무에 꽃이 없다고 얘기할 수 없다. 마음도 그와 같다. 여래는 물과 같다. 그렇다고 여래가 물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그릇에 가도 담긴다. 우는 데 가선 같이 울어줘라. 다이아가 아무리 작아도 눈 속에 넣을 수는 없다.        

 

이상 정우스님 열반경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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