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가까이 있다는데

2007. 6. 9. 14:1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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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리석은 사람이 해가 저물어 밥을 지으려 보니 솥가마에 불씨가 없었다. 등불을 들고 십리 밖 이웃에 불 구하러 갔다. 이웃이 말했다. 들고 있는 등불은 놔두고 어찌 이리 먼길을 왔는가. 화엄경 입법계품엔 세상의 스승들을 찾는 선재의 구도기가 실려있다. 부처 나한 거지 창녀까지 삶의 진실을 구하던 그에게 마침내 진리의 보살이 현신한다. 놀랍게도 그 곳은 자신이 처음 길을 떠났던 바로 그 자리였다. 서양에도 비슷한 모티브가 있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이야기이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길을 떠난 사람이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은 다음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토록 찾던 파랑새가 바로 자기 집 뜰 나뭇가지 위에서 금빛으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불교는 말한다. 진리는 가까이 있다. 너무 가까워 오히려 깨닫기 어렵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의 연기는 소박하다.

1.<동산양개>강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 모습 보고 2.<현사사비>능엄경 보다 3.<임제의현>방망이로 두둘겨 맞고 4.<향엄지한>청소하다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 듣고 5.<영운지근>복사 꽃 한 번 보고 5.<영원유주>경행하다 벗겨진 신발 다시 신다 6.<경수교형>운판치는 소리 듣고  7.<청허휴정>닭 우는 소리 듣고 8.<중봉명본>기둥에 머리 부딪히고 9.<초석범기>성루의 북소리 듣고 대오하셨다.

 

참으로 웃음 나오는 얘기다. 너무도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항상 엄숙하고 신비하며 과장된 형식적 니힐리즘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절로 코믹을 자아내며 지극한 도는 진실로 어렵지 않다는 명제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내가 숨쉬고 사는 삶의 터전이 수행처 법당이라는 발밑을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동산양개<807-869> 게송 - 절대 남에게서 불도를 찾으려 하지 말라. 점점 나와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나는 지금 홀로 가지만 곳곳에서 그를 만난다. 그는 지금 바로 나지만 나는 이제 그가 아니다. 응당히 이렇게 깨달아야 비로소 본래와 여여하게 계합하리라.

동산은 일찍 무안이비설신의 라는 구절에 큰 의심을 냈다. 또 무정설법에 관한 참구를 계속하던 중  운암 선사를 만나게 된다. 스승에게 물었다. 스님 돌아가신 후 스님 초상화 그려 보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운암의 진면목을 물으면 뭐라 답하냐는 물음이다. 도는 무엇이냐고 우회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오직 이 것이 이 것이라고 말해라. 이 것이 이 것이라니? 이 말을 듣고 완전히 의심을 풀지 못했다. 며칠을 두고 동산 머리 속을 맴돌았다. 어느 날 물 건너다 문득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대오했다. 스승의 말뜻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육근이 없다는 것에 의심이 걸려 참구하다 마침내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는 무정설법의 경지를 크게 깨친 것이다. 물을 건너다 지었다 해서 과수게라 한다. 이 것이 이 것이란 무엇인가? 남에게 구하지 말라. 점점 나와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제자들을 교화할 때 언급한 만리무촌초와 직결된다. 동산이 만 리를 가도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가라 법문하자 석상경제가 문만 나서면 바로 풀이라 했고 이에 동산이 그를 크게 칭찬했다. 만리무촌초는 사량분별이 완전히 끊어진 진공무상의 경계로 나를 의식해 분별하면 진여와 나는 별개의 것이 되지만 분별을 끊어버리면 나 자신이 진여와 하나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여와 하나인 내가 곧 나의 본래면목이다. 본래면목을 찾았기 때문에 그는 나여도 나는 그가 아니다. 분별을 뛰어넘은 그 경계가 이 것이 이 것이며 진여의 세계인 것이다.


현사사비<835~908.2.27> 중국 당대 승려. 복건성 민현 출생. 30세 부용산 영훈선사에게 출가. 수행초기 의식을 절제하며 극단적인 고행을 했고 스승인 설봉의존은 그를 비두타라 부르며 지도했다. 설봉을 따라 상골산에 들어가 수행정진 중 능엄경을 읽다 깨달았다. 

능엄경 읽다 마음을 밝히고 밝은 거울 깨졌을 때 어떠한가. 오랫동안 잠자코 있으니 선덕들이여 스스로 못났다 하지 마라. 서 있는 곳에서 바로 살피라. 산 달마를 보는가. 사문의 눈 세계를 잡아 정하니 뼈를 깍듯 진실하게 참구하면 세상을 속이는 선지식의 병통 밝고 밝아 신령함으로 주인공을 삼으면 앎과 모름을 넘어 죽은 뱀을 뒤로 던지니 꿰맴 없는 탑을 세우리. 화로의 넓이가 얼마인가.

어떤 것이 본분의 일인가. 어떤 것이 자기인가. 종문 가운데 일. 남의 스승 됨이 쉽지 않으니 가섭 홀로 법을 들은 뜻은 달을 말함과 달을 가리킴. 4가지 위의 밖 그 무엇으로 종승 가운데 일. 밑없는 통이 있으면 3가지 병자 온다면 약과 약에 꺼릴 것은 내놓고 나로 인해 그대에게 절하니 호랑이가 바로 그대니 삼세를 얻을 수 없으니 입을 틀어막고 어찌 말하리. 저울을 꺽어버리고 오라. 보려 하면 그르치니 쇠배를 몰았는가 3장의 흰 종이를 보냄에 한 법도 보지 않음이 온 세계가 한 알 구슬이니 한 바늘로 크고 작음을 꿰매라. 조산까지 거리 얼마인가. 소리는 어디서 오는가. 시끄러움은 어디로 갔는가. 스승과 제자 서로 화답하니 서로 아는 이가 천하에 가득하니 제자가 묻고 스승은 답해주니 날마다 쓰면서 모르는 일 모두 나의 힘을 입었다. 어느 곳으로 가게 했는가. 세상의 남녀를 속이지 말라. 개울 물소리 속으로 들어가라. 불법은 기특사가 아니니 사미가 돌아가니 바로 보고 바로 들으라 한 법도 취할 것이 없고 버릴 것이 없으니 밖으로 구하지 않아야 들어감이 곧 방편이니 첫 마음은 어디 있는가. 옛 부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거의 서른 해를 중생 맞아 이끄시다 밝은 거울 깨졌을 때 어떠한가.

 

임제의현<?-867> 속성 형씨. 산동성 남화 출신. 초기 교학에 몰두. 후에 교학은 세상 고통을 일시적으로 치료하는 약이요 불법의 근본 자리를 탐구하는 하나의 언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배운 것을 다 버린 뒤 참선 시작. 조주스님과 동향. 당말 격변 시대를 산 동시대인. 같은 산동사람이지만 북방인의 기질 발휘.
오늘날 부처님 법을 배우는 이들은 반드시 바른 안목을 갖도록 해야 한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것이니 하고 싶으면 할 뿐 결코 의심하여 주저하지 말라. 선조 부처님을 알고자 하는가? 바로 그대 즉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이다. 공부하는 이들이 이 것을 안 믿고 그저 밖으로 내달려 구하니 설사 얻는다 해도 모두 번지레한 문자 모습일 뿐 결코 저 생생하게 살아있는 조사 뜻은 아니다.
스님에 의하면 불성은 바로 지금 여기 살아 움직이고 지각 인식하는 우리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제선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듣고 말할 줄 아는 바로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해 부처란 바로 면전에서 법을 듣는 이 사람이고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람을 깨닫는 것이다.

향엄지한<?∼898> 한 번 딱 소리에 알려던 것 다 잊으니 수행의 힘 빌릴 일이 아니었다. 안색 움직여서도 고도를 선양하여 끝내 실의에는 아니 떨어지나니 가는 곳 어디건 자취는 없어 성색의 그 밖에서 이뤄지는 행위로다 그러기에 온 갖 곳 도인들 나타나 모두 다 이르네 최상의 근기라고.

일격은 돌멩이가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다. 향엄은 그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시제가 대에 부딪치는 소리다. 딱하는 소리는 향엄의 분별심이 끊어지는 순간이다. 분별이 끊어진 상황을 무심이라 한다면 무심이 되는 딱하는 순간에 진여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는 수행을 빌릴 일이 아니었다는 말로 이전의 분별없는 구도심을 탓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완성된 수행의 경지가 어디 있는가 여실하게 시사해준다. 진여와 하나 되는 깨달음은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딱하는 소리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듯 털끝만큼의 미진함마저 남지 않는 무심에 있다. 때문에 끝내는 실의에 아니 떨어지나니로 이를 대변한다.

 

영운지근<?∼820?> 삼십 년이나 칼을 찾은 나그네여 몇 번이나 잎이 지고 가지가 돋아났던가. 그러나 복사꽃 한 번 본 뒤론 지금 이르도록 다시 의혹 않나니.

복사꽃에서 무심을 본 것이다. 30년 구도의 허송세월을 영운은 <여씨춘추>의 고사에서 인용하고 있다. 어느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 검을 강물에 빠뜨리고 칼로 뱃전을 파서 훗날 이를 근거로 칼을 찾으려 했다는 무지몽매함이 자신의 구도과정과 다를 바 없다 생각했다. 그 절망감에 몸을 빼 문득 눈을 들어 본 것이 복사꽃이다. 한 번 봄으로 다시 의혹 덩어리가 남지 않는 개안을 얻게 된 것이다.

복사꽃이란 무슨 특별한 복사꽃이 아니다. 평범한 복사꽃이다. 그런데 그런 복사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니 그 내용은 무엇인가. 분별심 없는 의심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은 경계다. 영운이 본 복사꽃은 다른 꽃과 나무와 하늘 등 온갖 현상이 하나인 구별이 끊어진 복사꽃이었고 보는 주체와 대상도 또 시간과 공간마저 뛰어넘은 본래면목을 보여주는 깨침의 순간으로 바로 진여 실상 그 자체다. 영운은 향엄과 마찬가지로 일견 일격으로 미진함이 터럭도 남지 않는 돈오의 세계를 열었다.

 

초석범기<1296-1270> 명주 상산 출신. 성루 북소리 듣고 홀연 땀을 비오듯 흘리더니 깨치고 이제야 경산의 콧뿌리를 손에 잡았다 하고 게송을 지었다. 활활 타는 화로 속 한 점 눈을 버리고 나니 이 것이 황하의 유월 얼음이라.

 

청허휴정<1520-1604> 평안도 안주 출신. 마음은 희지 않는다. 머리털은 희지만 마음은 희지 않는다고 고민들이 일찍이 흘려버렸다. 지금 닭소리 한 번 듣고 대장부 할 일 다 마쳤다.

흔히 말한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늙지 않는 마음을 실증하기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서산 스님은 길을 가다 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한 생각이 돌아왔다. 여러 생을 지고 다니던 천근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토록 초조하고 불안하고 밤잠을 못 이루던 일을 다 마쳤다. 그래서 대장부가 할 일을 능히 마쳤다고 한 것이다.

 

혜능 이후 선종의 다섯 종파

임제종 혈맥 – 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 임제의현 흥화존장 남원도옹 풍혈연소 수산성념 분양선소 자명초원 양기방화 백운수단 오조법연 환오극근 경산종고 선사 등

조동종 혈맥 – 청원행사 석두희천 약산유엄 운암담성 동산양개 조산탐장 운거도옹 선사등

운문종 혈맥 - 임제종의 마조도일 전함. 천왕도오 용담숭신 덕산선감 설봉의존 운문문언 설두중현 천의의회 선사등

위앙종 혈맥 - 운문종의 설봉 선사 전함. 현사사비 지장계침 법안 문익 천태덕소 영명연수 용제소수 남대수안 선사등

법안종 혈맥 – 위산영우 앙산혜적 향엄지한 남탑과용 파초혜정 곽산경통 무착문희 선사등

이상 도문스님 대장장이 춘다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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