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2007. 6. 9. 14: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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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없었다면 진정한 중국불교<단순히 중국 땅에 있던 불교가 아닌 화학반응된 중국화 된 불교> 선불교가 없었다. 달마는 행적 자체가 신비롭다. 전등록 벽암록 속고승전 무문관 선어록에서 달마의 행적을 알 수 있다. 달마 법명은 Bodhidharma다. 중국 남북조시대 선승. 중국 선종의 시조. 선에 통달한 후 혜가에게 이를 전수했다. 중국 활동시기 516-534년. 문헌 속 묘사된 달마스님 1.전등록-상당히 신앙적인 요소가 강함 2.속고승전-역사적 자료로써 비교적 사실에 가까움. 당시 외국인을 보면 보고했다 한다.   

 

양나라 무제<464-549년> 중국 남조 양나라 초대황제 집권 후반에는 그의 불교신앙이 정치면에도 나타나 불교사상에서는 황금시대가 되었지만 정치는 다소 파국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절 스님 경전을 통해 불사를 많이 지었는데 내 공덕이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공덕이 없다<무공덕>. 이 말에 양무제는 황당했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은 살벌했을 것이다. 무공덕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보상심리에 대한 거부 즉 보상을 바라는 공덕은 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AD520년 전후 중국에 도착했다. AD1C초엽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으니 약 500년의 불교 역사가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불교를 도교와 비슷하다 생각했다<격의불교>. 바울과 달리 달마는 불교가 활성화되는 시점에 중국에 들어갔다. 무공덕은 새로운 불교를 가르치겠다는 소리다. 권력에 봉사하는 불교가 아닌 민중을 위한 불교로 바뀌어야 한다는 소리다. 무공덕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국가불교에 대한 비판 즉 불교를 권력유지와 통치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대한 비판이며 새 불교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다.

 

그렇다면 최상의 성스런 진리가 뭐요? 불교 자체의 본질이 뭐냐고 묻는다. 성스러울 게 없다<무성>. 廓然無聖 텅 비어서 성스러울 게 없습니다. 클 廓자는 크다 넓히다 텅비다 열리다의 뜻으로 공의 뜻이다. 공은 Sunya 비다 부풀어 오르다 넓어진다의 뜻이다. 비었을 때 가장 넓어진다. 텅빈 충만. 비울수록 그만큼 더 채울 수 있다.

 

실상은 고정불변한 요소에 의해 단절 분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만 돌아보고 다른 이들은 안돌아 본다. 구별이 가능해진다. 고정적으로 구분해서 지칭해준다. 이름 개념을 시각화 시킨 것이 문자다. 언어 가지고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해 불립문자다. 양극화된 개념으론 실상을 알 수 없다. 성과 속. 성을 부정하면 속이 되나? 문자중심 불교가 교학불교다.        

 

확연무성에 대한 해석 – 당시 문자와 문구해석으로 이뤄진 교학불교와는 완전히 다른 불교 즉 선불교를 하겠다는 달마스님의 선언이라 볼 수 있다. 달마는 양나라에선 하기 힘들다 보고 낙양 소림사로 가 9년 면벽좌선을 했다.

 

2조 혜가<487-593년> 팔 잘랐다<단비>. 다른 자료에선 깨닫고 난 후 걸식하다 산적에게 팔이 잘렸다 한다. 스스로 치료하고 걸식행위를 했다. 다른 스님도 팔을 잘렸는데 발로 밀어주자 병신 흉내내나? 했다. 한 사람은 고통을 느끼고 또 한 사람은 안심을 느꼈다. 안심이 문제다.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럼 그 마음 좀 가져와 봐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편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마음의 정체는 과연 뭐냐고 묻고 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비유 비무>. 공이다. 공은 양 극단으로 쪼갤 수 없다.

 

산란한 마음을 없애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일어나는 그 마음은 있을 것이다. 무심.        

마음이 있다면 어디 줘봐!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은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렇게 일어나는 그 마음은 있다. 집착분별 허망분별이 제거된 그래서 무심이라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드러난 그 마음은 있다. 오히려 이런 무심이야 말로 진심이며 안심이란 것이다. 무심-진심-안심. 이렇게 해서 안심을 얻었다.

 

이름과 문자 개념에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마음을 바로 직시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그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된다. 바로 내 속에 때를 벗겨내면 깨끗한 살이 드러난다. 무심을 통해 드러나는 진심은 벗겨내서 보면 된다. 그 이유는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벽관. 벽은 넘어서지 못하는 차단 그리고 허망하게 일어나는 분별의 마음이 벽이다. 관벽이 아니다. 벽관은 벽이 나를 보는 것이다. 주객이 무너진다. 결국 벽도 없고 나도 없다. 조화다. 이런 부정은 텅빈 것을 뜻한다. 벽과 내가 다 있다. 자재롭다. 이런 긍정은 충만을 뜻한다. 서양 사람 입장에선 비었으면 빈 것이지 어찌 충만이라 할 수 있나? 하고 이해 못한다. 불이 둘을 부정하면 진짜로 남김없이 다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묘유라. 묘하게 있다는 것이다. 묘유 속에 다 있다. 서양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다 생각하지만 우리 일상 속 시시처처에 그대로 다 있다. 생사가 열반이다. 그래서 추우면 입고 배고프면 먹는다. 일상생활 속에 선이 다 드러난다.

 

서래=여래. 있는 그대로 현실로써 그 것. 경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잣나무면 어떻고 전나무면 어떠냐. 달마스님은 인도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을 결합시켰으며 명상을 통한 해탈과 열반의 인도적인 것을 일상의 현실 그대로 곧 해탈이고 열반이라는 중국적인 것으로 소화한 가장 독창적인 중국불교 선불교를 탄생시켰다.

이상 김종욱 교수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