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과 개화파10-청말의 개혁운동과 불교

2007. 6. 9. 14:4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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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불교는 외형상=팽창기 실제 내용상=쇠퇴기. 명시대 승려만 50만 사찰이 8만을 넘었다. 명시조 주원장은 현각사에서 실제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자신을 명황이라 자처했다. 당시 미륵신앙이 유행했다. 불교연구가 옹정제는 유불선 선불교 정토불교를 합치하고자 했다. 도첩제<승려증명서>가 있어 도첩을 싼 값에 팔았다. 먹고 살기 위해 세금 피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다 보니 승려의 자질이 하락하고 거사불교가 출현했다.    

 

居士불교 – 청대에 승려의 자질이 저하되어 감에 따라 독실한 불법의 추종자들은 출가를 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거사의 길로 나가게 됨. 청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불교는 그 중추적인 역할을 승려보다는 이런 거사들이 했고 이를 거사불교라 한다.

 

태평천국의 난<1850-1864> - 기독교를 신조로 일어난 일종의 종교적 농민반란으로 우상파괴라는 이름 하에 그들이 정복한 지역의 모든 불교유산과 서적을 파괴함으로써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볼 책이 없었다.

 

양문회<1837-1911> - 호는 인산.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불교서적이 초토화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구해온 방대한 불교문헌을 인쇄 보급하고자 했다. 그가 일생 동안 출판보급한 불서는 2천여종 총100만권에 이르며 또한 그의 업적은 청말의 개혁사상가들에게도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양계초의 묘사 – 청말 사상계의 저변에는 불교학이 있었다. 청말의 소위 신학가 중에서 불교와 관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진심으로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대개 양문회에게 귀의하였다. 청말 변법운동의 중심인물들로 서태후의 쿠데타에 의해 강유위와 양계초는 망명을 했으며 담사동은 홀로 남아 개혁엔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며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저서 仁學에서 보인 죽음을 바라보는 불교적 죽음관 – 生을 좋아하고 死를 미워하는 것은 벗어나기 힘든 대혹이다. 이 것은 불생불멸에 어둡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쩔쩔매며 단호한 태도를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담사동>. 불생불멸 생이라도 본래 생이 없고 멸이라도 본래 멸이 없다. 無死畏 죽음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다.

 

변혁의 논리를 불교에서 찾아보자. 불교-1.변혁의 논리<평등> 2.중국적 대항논리<기독교 비판>

의회민주제 인권신장-차별 불평등 없음–평등. 평등은 완벽한 불교 용어다.

 

강유위의 大同사상 – 중국 고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보편화된 이상개념으로 강유위가 평등의 이념을 대동사상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음. 대동은 문자 그대로 크게 같아지는 것 한 몸이 되는 것을 뜻한다.

 

국가 가족 사유재산<공산주의가 아닌 공자의 仁=박애를 말함>을 인정하므로 차별이 나온다. 대동은 차별 불평등이 없는 평등 공평무사 태평시대를 말한다. 君臣民의 의견일치 君民天의 뜻의 합치 자연 元氣의 동화 천인합일을 뜻한다. 和는 대립분별이 없는 완전한 조화를 뜻하므로 불교와 통할 수 있다. 和는 무분별-무집착. 그러나 그는 和-滿漢不分 청조에 대한 집착을 보여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강유위의 평등사상 – 강유위의 대동사상 속에 담긴 평등은 불교와 표면적으로 유사할 뿐 그 내용은 판이했음. 그는 공산주의로 보일 정도로 평등적 혁신사상을 주장함과 동시에 유학을 종교화하고 공자를 교주화하며 청조를 끝까지 보존하려한 수구적 반혁신사상을 주장한 모순된 사상가였다.

 

仁元無 중국식으로 쓰면 무자도 모양이 다 비슷하게 보인다. 2+人이다. 인은 사람과 사람관계 원은 으뜸 근원 무는 차별이 없음.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관계 사이에서 차별 없음이 인간사회의 근원이란 뜻이다. 불교식으로 대입하면 상호의존적 연기이므로 무자성 공임이 삼라만상의 근원이 된다.  무=1.차별이 없는 것<평등> 2.對待가 없는 것<자성적 대립이 없는 것.무자성 공성> 3.생멸이 없는 것<불생불멸>이 된다.

 

평등은 sama samata<같다>를 번역한 불교용어다. 일체법=무자성 공성 일체중생=불성.자비는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평등하다면 민족사상을 갖는 게 옳은가? 아니다. 현실에서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 평등사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주장한다.    

 

담사동의 평등사상 – 담사동은 철저하게 불교사상에 입각해 평등을 주장했다. 그는 눈앞의 불평등을 제거할 때 평등이 되는 것이지 원래 평등하다는 주장만 되뇌이면서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평등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담사동은 뒤집어 엎자는 遂滿復漢을 강유위는 滿漢不分을 주장했지만 담사동은 일찍 죽고 강유위는 천수를 누렸다. 당시 그들은 기독교를 어떻게 보았을까? 강유위는 기독교는 다 죄를 지었다 주장하지만 대동사상의 사랑은 죄나 심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최후엔 불교만 남는다 보았다. 하지만 논리적이지 못했다.

 

수당불교는 중국 철학사상 최고 절정기다. 경학 주자학 이학도 불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양계초 – 우리 중국은 외국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진실로 그 것을 받아들인 이상 반드시 그 장점을 모두 흡수하여 자신의 영향으로 취하고 또 그 본질을 변경하며 그 응용을 신비롭게 하여 또 다른 일종의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명을 조성한다…. 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불교사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도다 중국이여! 외래 학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르되 일단 받아들였으면 반드시 빛을 발휘해 스스로 자신의 특색을 나타내었다. 이런 현상을 나는 불학에서 보았다. 중국의 불학은 곧 중국적 불학이지 순수한 인도의 불학은 아닌 것이다<양계초>.

 

수당대 불교는 지역적 불교가 아닌 용광로에서 용융된 독창적 불교학이다. 불교의 중국화가 개방성이었다면 중국의 불교화는 거꾸로 폐쇄성을 낳았다. 그러나 그는 애국적 견지에서 중국불학을 최고라 한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선 야만인이 믿으면 문명인이 되지만 문명인이 믿으면 야만인이 된다. 게르만 족을 봐라 야만인이 문명인 됐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기독교가 되고부터 문명이 쇠퇴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동양엔 전혀 도움될 것이 없는 종교라 했다. 그는 종교도 다신교<도교>-일신교<기독교>-무신교<불교>의 형태로 진화한다 보았다.

 

근대화=사상.합리화 + 제도.민주화<변법운동> + 기술.산업화<양무운동>

변법운동가들의 불교 선양에 무조건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근대화의 한 축인 서양사상에 대한 냉철한 성찰 없이 불교만의 우월성을 맹목적으로 강변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변법운동과 마찬가지로 그 것 역시 끝내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변법운동가들의 불교옹호를 불교 자체의 체질개선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불교와 서양사상과의 만남과 대화가 필수적이다<김종욱>. 

이상 김종욱 교수 아편전쟁과 개화파10 – 청말의 개혁운동과 불교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