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어록

2007. 6. 9. 14: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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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을 기억하는 데 사람 모습이 있다. 하등한 동물들이 조상을 기억하던가? 어머니는 천둥 번개만 치면 두려워 늘 이불을 뒤집어 썼다. 아들은 어머니가 죽자 가까운 곳에 무덤을 안장했다. 하지만 천둥 번개가 칠 때면 어김없이 이불을 들고 찾아가 어머니 무덤을 덮어드리고 함께 밤을 지샜다. 이 것이 사람이 하는 짓이다. 절하는 걸 우상숭배로 알지 말라. 만인에게 머리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라.

 

사대는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허공 또한 그런데 다만 네 눈 앞에 뚜렷이 밝고 밝은 형상 없는 것이라야 비로소 법을 설하고 들을줄 안다.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인이며 또한 이 것이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불성이 지금 그대의 마음 가운데 있으니 어찌 부처를 밖에서 구하겠는가? 만일 그대가 그 것을 믿지 못한다면 옛어른들이 도를 깨달아 나간 입도인연을 들어보라.

지금 법문 듣고 있는 마음은 중생이 쓰는 마음이다. 분별망상으로 이뤄진 마음이다. 분별망상 이전 성품이 본래면목이요 본래면목은 모양이 없다.

 

사자교인 한로축괴 사자는 사람을 무는데 개는 흙덩이를 쫓아간다. 사람이 시선을 돌리기 위해 흙덩이를 던지면 사자는 상관없이 사람을 쫓지만 개는 흙덩이를 쫓아간다. 성현은 사자와 같고 중생은 흙덩이 물러가는 개와 같다.

 

무릇 공안을 참구해 나아감에 간절히 생각을 기울여 공부를 하되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 잡듯 굶주린 자가 밥 생각하듯 목마른 이가 물 생각하듯 아기 잃은 어머니가 아이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조사언을 터득하게 된다.

닭이 알을 어떤 때는 품어주고 어떤 때는 안 품어주던가? 그러면 썪는다. 지극한 마음으로 품는다. 참선도 3개월간은 허튼짓 말라는 것이다. 구멍가게를 해도 지극한 마음으로 해라.  

 

참선에는 반드시 3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큰 신심 큰 분심 큰 의심 이다. 만약 그 중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등에 올라타서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지 말고 그 부리를 내어 생명을 걸고 한 번 내려꽃을 때 몸과 부리가 다 들어가는 것이다.

뜻을 세워라.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이치를 알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다. 부처님 인격을 갖출 수 있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라. 모기도 소가죽을 뚫고 피를 빠는 것이다. 그냥 뚫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 하다고? 

 

공부는 마치 악기를 고르는 것과 같아 팽팽하고 느슨함에 알맞아야 하니 부지런히 하면 집착하기 쉽고 게르름을 부리고 잃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되니 항상 한 생각이 깨어 있어야 하고 항상 밝게 깨어 꾸준히 해야 한다.

중생의 세상살이도 줄고르듯 해야 한다. 한결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처음엔 할 것 같이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꼬리를 내린다. 무엇이든 성공하고자 한다면 그냥 해서는 안 된다.

 

공부가 설령 정신의 통일을 가져온 즉 금생에 그 이치를 터득하지 못했다 해도 눈빛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무릇 참선을 하는 사람은 4가지<부모님 나라 스승 동포>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가? 육신은 사대로 이뤄져 있지만 한 생각 지날 때마다 빠르게 쇠하고 썪어가는 줄 아는가? 사람의 모숨이 호흡지간에 있는 것을 아는가? 금생에 태어나 부처님과 조사를 만났는가? 법문을 듣고 희유한 마음을 가졌는가?

무상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종교를 해봐야 모른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100년 처럼 살고 인간은 눈 깜짝할 사이지만 100년을 산다 착각한다. 부처님의 위대한 점은 깨닫고 보니 일체가 부처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 듣고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불전에 와서 절계를 지킬줄 알아야 한다. 시비를 일삼지 말아야 한다. 화두를 듦에 하루 종일 들어졌는가?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도 간단함이 없었는가? 보고 듣고 느낄 때 한 생각을 여실히 이루었는가? 자기의 마음을 잘 살펴서 부처님과 조사의 마음을 붙들었다 생각하는가? 금생에 결정코 부처님과 조사의 지혜로운 뜻을 이어가겠다는 맹세가 되었는가? 일어나고 앉고 걸어도 편안할 때 지금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줄 아는가?

 

이 몸을 받아 세상에 태어났을 때 결정코 윤회를 끊겠다는 확신이 섰는가? 동서남북에서 부딪혀 오는 모든 생각이 일어날 때 마음에 움직임이 있지 않았는가? 이 것은 참선하는 사람이 항상 점검해야 할 도리니 옛어른이 말씀하시길 금생을 향해 이 몸을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

누에는 자기 몸의 실로 집을 짓고 그 속에 든다. 그러나 때가 되어 명주실을 뚫고 나올 때는 나비 되어 나온다. 버러지가 들어간 건데 나비는 자기 전생이 버러지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도 현재는 인간이지만 과거 생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말을 배우는 무리들이 말을 할 때는 깨달은듯 하지만 경계에 이르면 어리석으니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다. 그대는 콩두 자를 쓸줄 아는가? 그는 정성으로 썼다. 그대의 콩두 자는 그러한가? 콩을 갖다 놓고 어느 쪽이 진짜인가? 말에게 주니 말은 콩 두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콩을 먹었다. 문자나 말이란 아무 쓸모없는 것이다. 봐라 사실과 다르지 않는가? 불화 자를 아무리 백 번 외워도 입이 뜨거워지진 않는다. 농사지어 얻은 콩이 더 가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말만 배우려 한다.

 

말을 할 때는 깨달은듯 하나 옛어른이 말씀하시길 자네는 어찌하여 자네의 바른 안목만 주장하고 자신의 행이 옳지 못한 것은 살피지 못하는가? 원컨데 모든 도를 닦는 사람은 깊이 자기 마음을 믿어 심성을 굴욕되게 하지 말며 높이 교만하지도 말라. 어리석은 마음으로 도를 닦으면 어리석음을 더할 뿐이다. 수행해서 요긴한 것은 다만 범속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따로 성현의 말을 구할 것은 없지 않은가?

 

다만 스스로 자성을 오염되지 않게 하라. 바른 법을 구한다는 생각부터 옳지 않은 것이다. 환인즐 알면 곧 여의어라. 방편을 쓸 것이 따로 없다. 환을 버리면 바로 깨달음이니 거기에 깨달아 나가는데 점차가 있겠는가? 이치로 말하면 비록 깨달을 수 있으나 현실에 부딪치면 제하기 어렵다.

 

음한 생각으로 도를 닦는 자는 모래로 밥을 짖는 것이요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도를 닦는 자는 귀를 막고 소리 지르는 것이요 훔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자는 밑없는 항아리에 물을 붙는 것이요 거짓된 것으로 도를 닦는 자는 똥으로 향을 만드는 것과 같으니 임시적으로 볼 때는 깨달은 것 같으나 모두 마구니의 도를 이루는 것이다.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으며 삼업을 지키지 않으며 함부로 놓아 지내어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옳고 그름으로 시비를 일삼는다. 만일 도덕성이 없으면 오히려 여우만도 못한 것이 되거늘 하물며 청정한 보리도를 버릴 수 있겠는가? 걸림없는 청정한 지혜가 다 우리의 고요한 심성 선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고요 속에 살라 고요 속에 길이 있다.

이상 무진장 스님 선사어록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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