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의 달마어록2

2007. 6. 9. 16:0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달마혈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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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탁! 이 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또한 마음이 없다면 또한 어떻게 이 소리 탁!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자성이 없다면 본성품이 없다면 말이죠. 그렇죠? 묻는 것 그 것이 네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다겁생래 이래로 네가 무었을 했건 어디에 있었건 그 것이 바로 너의 진정한 마음 바로 부처이니라.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다겁생래 이래로도 부처 불성이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도 얻을 수 없습니다. 본성품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부처이며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세에 여러분이 불법을 만나기 전 몇몇 분들은 최근에 불교를 접했을 수도 있고요. 저는 겨우 20년전에 불법을 만났습니다만 21년전 제가 불법을 만나기 전 조차도 이미 불성을 갖추고 있었고 여러분이 불성을 만나기 전에도 이미 불성이 있었습니다. 이는 불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죠. 다겁생래 Kalpa란 말은 엄청나게 긴 시간을 의미하는데 이 유수한 세월 동안 여러분이 무엇을 했건 좋은 일을 했건 나쁜 일을 저질렀건 테레사 수녀님이나 간디 달라이 라마처럼 수 많은 중생을 구제하셨건 혹은 연쇄살인과 같이 끔찍하게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우리의 불성은 이와는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작도 없는 다겁생래 이래로 무었을 했건 어디에 있었건 지옥이든 천당이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완전한 무기력한 상태라 할지라도 어디에 있었건 무엇을 했건 그 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다.    그 것이 바로 너의 본성품이다. 그 것이 바로 너의 진정한 부처이다. 부처<불성>은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더 많은 불성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남들보다 더 부처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부처가 된다는 것 이 건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물론 부처보다 모자란 부처가 될 수도 없고요. 친구나 가족이나 여러분이 속한 아무리 나쁜 일을 많이 저질러도 불성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이 마음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부처를 만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대단한 가르침이죠. 만약 마음 밖에서 열반이나 깨달음을 구하고자 한다면 굳이 이와 같은 불교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원이라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이나 신이라고 말해도 되고요. 아무튼 마음 밖에서는 신이나 천국을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 것 자체로 이미 실수인 것입니다. 마음 밖에서는 결코 부처를 찾을 수 없다. 결단코 마음 밖에서 구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존재도 만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천국은 마음 속에 있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럴진대 어떻게 밖에서 구하는 것이 어떻게 바깥의 어떤 다른 대상을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파격적인 진리를 펼치셨기 때문에 오래 사시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천국이나 구원 신성 그리고 구원 등의 이 모든 것을 마음 밖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단 한 번도 말입니다. Never!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인 것이죠.

 

영국의 시인 죤 밀턴의 1666년 작인 대서사시 실락원의 한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마음이란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서 천국에서 지옥을 만들기도 하고 지옥에서 천국을 만들기도 한다. 마음이만든다. 어느 누구도 아니고 또한 상황도 아닌! 바로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천국 속에서도 지옥을 만들고 즉 행복한 곳에서도 불행을 느끼게 하고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천국처럼 평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 일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 뿐!

 

그러니 망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정말 대단한 가르침이죠? 자 다시 한 번 마음 밖에서는 결코 부처를 찾을 수 없다. 깨달음 열반 구원 천국 그 무엇이 되었건 마음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할 수 없다고요! 마음 밖에서 그 자리를 찾은 이는 여태껏 아무도 없습니다. 성품의 세계 자성의 세계 인과를 초월한 세계가 곧 이 마음인 것이다. 이해가 되시죠? 마음 곧 성품은 인과를 초월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인과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인과가 나타나기 이 전의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생각 이 전의 마음이 곧 우리의 자성입니다.

 

어떤 다른 곳도 아닌 생각 이 전의 자리. 생각이 일어나면 철학 신학 종교 사회 정치가 생기고 그리고 고통이 따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고 나면 말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본성품 자리입니다. 아주 간명합니다. 마음 밖에서 깨달음이나 부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마음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나 부처를 찾으려는 것은 마치 허공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부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절실히 구합니다 하면서 말이죠.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마리아님을! 하지만 이런 식으로 구하려는 것은 모두 빈 허공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허공은 단지 이름입니다. 허공 공간 스페이스라고 부릅니다. 예 단지 이름일 뿐이죠. 하지만 모양이 없습니다. 공간에 어떤 모양이 없잖습니까? 사각형도 삼각형도 원형도 아닙니다. 그냥 스페이스라고 이름 붙여서 그렇게 부르지만 모양이 없잖습니까? 부처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만 본성품 참나 진아 참사람 참정신과 같이 그냥 그렇게 이름 지어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모를 뿐 Don’t know 우리가 이런 이름을 짓고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야훼 여호와 알라 이렇게 다른 이름을 붙일 뿐이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모양이 없을 뿐더러 본래는 이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어떻게 이러이러 하다고 정의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 건 저 것이 아니라고 진짜 신은 이 것이고 저 것은 진짜 신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는 허공은 이러이러 해야만 해! 저 것은 허공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그러나 허공은 다 같은 허공일 뿐입니다. 누군가 뉴저지나 뉴욕에서 허공을 잡는다면 그들은 이를 스페이스라고 말합니다. 누군가 한국에서 허공을 잡았다고 해도 같은 허공입니다.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무엇이라 부르고 생각을 지으면 이미 실수입니다. 무엇을 믿던지 간에 부처도 신도 이와 같습니다. 거기다 이름 붙이고 그 이름에 집착하면 이미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부처와 깨달음을 찾으려는 것은 빈 허공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일 뿐이지 그 모양은 없다. 이는 집어 올리거나 내려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확연하게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들 어떤 영적으로 굉장한 충동을 가진 분들 많이 보셨죠? 일종의 영적인 경험을 추구하려고 완전히 결심한 사람들 즉 어떤 특별한 영적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사실 이런 자들은 결국 스스로를 다치게 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영적 경험을 구하려 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만드니까요. 우리 중생들은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고자 합니다. 신성함 어떤 신 어떤 영적인 힘을 밖에서 구하려 하는데 마음 밖에서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것이 달마대사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떠나서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인데 왜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려 하는가? 기도 많이들 하시죠? 마음자리를 보고자 기도하는 마음 이미 그 마음이 우리의 본성품입니다. 절에서 부르는 찬불가의 우리도 부처님 같이 라는 가사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와 같습니다. 자 그럼 다음 문단 보실까요?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는 이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마음이 부처고 부처가 곧 마음이다. 이 마음을 떠나면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를 떠나면 곧 그 마음도 없다. 마음 밖의 부처도 없고 부처 밖의 마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처와 마음이 하나란 말입니다. 이름이 둘일 뿐 의미는 하나입니다. 스페이스 공간 한국 말로 공간 맞지요? 아마 요즘은 한국말로도 그냥 스페이스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어로는 Space 순 한국말로는 스페이스 라고 말이죠. 이름이야 다르지만 부처 마음 본성품 자성 각기 이름은 다르지만 본체는 모두 같습니다. 텅빈 허공과 같이 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은 마음 밖에 설하신 게 없다. 마음이 즉 부처이고 부처 즉 마음이다. 부처를 떠나면 마음도 없고 마음을 떠나면 부처도 없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여긴다면 도대체 부처가 어디 있는가?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있나요?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마음 밖에 하나님이 있다면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나요?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은 마음 속에 있다 라고 하신 겁니다.

 

이는 오늘날로서도 굉장히 급진적인 가르침입니다. 상당히 위험천만하고 파격적이죠. 너무나 위험한 발언이지요. 왜냐 하면 내 안에 이미 신과 동격인 본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우리에겐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는 의미이죠. 특정한 종교형태도 필요없고 이미 내 속에 다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부처께서는 오직 이 마음에 대해서만 언급하셨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바로 이 마음이다. 기독교인에겐 마음이 신이고 신이 곧 마음이다. 아주 쉽습니다. 오직 말이고 언어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저렇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지 좋은 쪽으로 표현할 뿐 둘 다 같은 겁니다.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고 또한 부처 밖에도 마음이 없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부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는데 왜 부처의 형상을 그려내는가? 왜 마음 밖의 형상을 그려내는가?

 

자신을 속이면 본성품을 알 수 없다. 즉 종교의 한계에 걸려서 자신을 속이면 본성품을 드러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형상에 현혹되어 집착한다면 대자유를 성취할 수 없다. 저기 있는 불상은 부처이고 나는 아니다. 저 불상은 신성하고 나는 비천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달마께서 말씀하십니다. 생명이 없는 형상에 집착하면 자유롭지 못하다. 이 걸 믿지 않고 자신을 속이는 것은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이 것은 부처의 과오가 아니다. 사람들이 현혹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밖에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할 수 있으리. 우리 중생들이 미혹하여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이를 알고 있다면 밖에서 구하거나 보려고 하지 않겠죠?

 

여러분의 성품과 저의 성품은 같습니다. 어떤 특정 종교로부터 더 얻을 수 없고 더 나은 어떤 상태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더 완전한 어떤 것을 취할 수 없습니다. 공간처럼요. 공간은 절대로 뭔가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공간에 더 많은 공간을 더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 있는 공간을 저기 공간에 더할 수 있습니까? 공간에 공간을 더 더한다고 더 공간다워 집니까? 이미 있는 그대로 완전합니다. 선업이던 악업이던 공간은 이미 완전합니다. 이 방에 선한 사람이 들어오던 나쁜 사람이 들어오던 상관없이 공간은 똑 같습니다.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부처가 또 다른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대단하지 않아요? 다른 많은 종교들은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안달이죠? 내가 당신을 구해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는 다른 부처를 구해줄 수 없습니다. 법문 마치면 어떤 분들이 법문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도 스승님의 법문이 끝나면 가르침 정말 감사드립니다. 본성에 대한 가르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 예 예 하셨습니다.

 

갑자기 큰 환희심과 함께 부자가 된 듯하고 이 진리를 알게 된 것에 참 감사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스승님께서는 원래 당신한테 있었던 것이고 그 모습 그대로 당신입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은행통장에 잔고가 10억이나 쌓아놓은 가난뱅이와 같습니다. 아직 사용하는 법을 몰랐을 뿐입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반드시 자신을 구해줘야 한다고 믿는 거죠. 그러나 부처는 다른 부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부처는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 부처를 보고자 마음을 낸다면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금강경에도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누구든 부처의 형상이나 음성을 쫓는 자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아주 잘 알려진 금강경의 한 구절입니다. 부처님!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어떤 정형화된 형태로 부처를 구하는 자 또는 음성으로 부처를 쫓는 자는 결코 부처를 구할 수 없다는 얘기겠죠? 가끔 여기 뒷산에서도 자주 이런 소리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 또 어떻게 하죠?  주여 구원해 주소서!!! 어쨌든 불교든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지 간에 마음을 내서 밖에서 찾고자 한다면 이 모두가 실수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부처를 구한다면 네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미 완전하고 신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를 숭배하기 위해 또 다른 부처를 이용하지 마라. 이렇게 바꿔도 되겠습니다. 신을 숭배하기 위해 신을 이용하지 마라. 왜 신성을 모시기 위해 신성을 이용하는가? 이미 부처이고 완전한데 말입니다. 부처를 깨우기 위해 마음을 내지 마라. 부처님! 이리 와서 저 좀 도와주세요. 관세음보살님!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문수보살님!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저에게 주세요. 부처님!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부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부처를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떠한 종교를 막론하고 말입니다.

 

부처는 경전을 읊지 않는다. 부처는 계를 지키지 않는다. 부처는 또한 계를 범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어떤 것도 지키거나 범하지 않는다. 부처는 선행도 악행도 하지 않는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의 성품은 이미 부처입니다. 이미 부처이기 때문에 도와달라고 부처를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처는 부처를 찾지 않습니다. 맞죠? 부처는 계를 지키지도 범하지도 않습니다. 아무 것도 지키거나 범하질 않습니다. 부처는 선행도 악행도 저지르지 않습니다. 선행 악행을 부처가 실천할 수 없어요. 이는 불가능합니다. 빈 허공은 선행을 실천하지도 빈 허공은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습니다. 빈 허공은 그냥 빈 허공일 뿐입니다. 우리의 성품도 이와 같습니다.

 

왜 뭔가를 더하려 하고 더 얻고 가져오려고 합니다.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우리의 빈 성품은 있는 그대로 제 역할을 할 뿐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이어집니다. 부처를 찾기 위해서는 본성품을 봐야 한다. 부처를 보고자 한다면 우리의 성품자리를 먼저 봐야 한다. 이 것뿐입니다. 저기 밖도 아니고 여기도 아닙니다. 통도사 해인사 화계사 수덕사도 아닙니다. 부처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가끔 많은 분들이 시간내기 어려워 절에서 수행하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께 지금 그 자리 바로 거기가 당신의 절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있는 현재의 바로 이 자리 이 자리 말입니다. 여기가 바로 수행할 수 있는 도량입니다. 부처님은 절에 계신다고 믿는 것 이 것은 착각입니다. 이 몸 이 것이 바로 법당입니다. 부처를 찾으려면 성품자리를 먼저 봐야 한다. 이 것뿐입니다.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부처를 찾으려거든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누구든 본성품을 본 자 그가 곧 부처이다. 본성품을 보지 못하고서는 부처를 아무리 외쳐 불러도 제 아무리 많은 사경을 해도 보시를 해도 계를 잘 지키는 것도 다 헛 짓거리다. 이 모든 것이 다 소용없습니다. 본성품을 보지 못하면 이 모든 수행이 다 시간 낭비라는 뜻입니다. 부처나 관세음보살을 구하려거든 먼저 네 본성품을 보아야 한다. 누구든 자기의 본성품을 본 자 그가 곧 부처이다. 본 성품을 보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부처를 불러도 사경을 해도 많은 보시를 해도 계를 잘 지키는 것도 다 소용없다. 본성품을 보지 못하고는 다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삼천 배가 끝나면 모든 분들이 나와 관세음보살이 둘이 아닌 도리를 조금이라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매달하는 삼천 배 정진은 아주 중요한 수행입니다. 성철 큰 스님을 뵙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면담하기 전에 무조건 삼천 배를 마쳐야 큰 스님을 알현할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삼천 배를 경험해 보기 전 아주 어린 승려일 때 큰 스님의 한 제자 스님께 물었는데요. 왜 면담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삼천 배를 맞춰야 뵐 수 있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힘든 일을 시킵니까? 그 스님의 기억이 참 기억에 남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성이나 마음 또는 자성에 대해 물으러 찾아옵니다. 찾아온 분들은 뭔가를 귀로 직접 듣고 싶어 합니다. 성철 큰 스님께서는 일단 삼천 배를 하고 나면 복잡다단한 망상들이 점점 사그라지며 동시에 본성품 자리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우리 스스로 체득한다는 것을 알고계셨던 겁니다. 그러고 나면 질문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죠.                  

       

이미 본성품과 계합하는 맛을 봤기 때문입니다. 또는 본성품의 음성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죠. 삼천 배를 마치고 나면 많은 분들이 질문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됩니다. 본성품을 보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부처를 불러도 사경을 해도 많은 보시를 해도 계를 잘 지키는 것도 다 소용없다. 부처를 부르거나 염불하는 것은 좋은 업의 결과를 낳고 사경이나 독송 즉 경전을 많이 읽으면 기억력이 좋아지며 계를 잘 지키면 좋은 곳 좋은 상황으로 다시 태어날 뿐 여러분이 계를 잘 지키면 좋은 곳에 태어난답니다. 부처님이나 절이나 스님들께 보시 즉 공양을 올리면 미래에 대해 복을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는 아니올시다.

 

참 흥미롭네요.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좋은 일이 닥치고 좋은 결과물을 얻고 즐거운 일이 생기겠죠. 중국의 무황제처럼 말이죠. 어떤 인기나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뭔가를 얻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부처는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말이죠. 자원봉사 같은 일? 좋지요. 사람을 돕는 일이니까요. 일부 사회복지운동? 아주 훌륭합니다. 사회를 돕는 일이잖아요. 마음도 흐뭇해지고 보람도 느낄 수 있고요.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불법은 그런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달마대사께서 이미 언급하신 바와 같이 그런 것들을 얻고자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복 짓고자 하는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유감이지만 복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불법은 공에 관한 것입니다. 청정한 허공과 같이 텅 빈 그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 것이 부처입니다. 만약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생사 끝까지 가서라도 스승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스승이 본성품을 보지 못한 자라면 이미 그런 자는 스승될 자격이 없다. 비록 십이연기설을 달달 외운다 해도 그는 결코 생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대 자유에 대한 가망도 없이 삼계 속에서 오직 고통 받을 뿐.

 

마음 자리 보는 것이 혼자 힘으로 버겁다면 스승을 찾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스승은 반드시 성품 자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맛을 본 분이어야 합니다. 반드시요!

경전을 이해하고 학문적으로 연구를 한 분이 아니라 그 자리를 본 분이어야 됩니다. 결재<안거>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도 상관이 없고 어떤 절 어떤 선방에서 안거를 마쳤는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재 횟수나 그 스승의 스승이 누군가도 의미가 없습니다. 실재 자신의 본성품 자리를 봤는가? 이 것이 관건입니다.

 

본성품을 보지 못한 자는 스승될 자격이 없다.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앞으로 뒤로 달달 외운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얘기이죠. 12연기법을 암송한다 해도 생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삼계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삼계 더 나아가 욕계 색계 무색계 속에서 고통 받을 뿐. 오래 전 신성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본성품을 보지 못했기에 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모든 경전 팔만대장경을 속속들이 다 꿰고 있어도 성품 자리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지 못했다면 생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말씀입니다.

 

신성스님도 이와 같은데 오늘날 경전에 나오는 구절 몇 소절 외웠다고 이 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참으로 어리석도다. 그대 스스로 마음을 보지 않고서는 제 아무리 많은 경전을 외워도 소용없는 노릇이다. 부처를 찾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우리의 성품을 보는 것뿐이오. 이 것뿐입니다. 자신의 성품 자리를 보는 것 이 것뿐입니다.

 

많은 분들 파리에 가보셨죠? 또 뉴욕도 가보셨죠? LA도 가보셨을테고 타이타닉 메트릭스 괴물이란 영화도 많이 보셨을테고 또 살면서 친구들도 많이 만나셨을테죠. 그러나 우리의 성품 자리를 보신 분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어디 성품 보신 분 게십니까?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요!

 

부처를 찾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우리의 성품을 보는 것뿐. 네 성품이 부처이고 부처는 곧 대자유인이며 모든 계획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다. 성품을 보지 못하고 천지사방으로 한루 왠 종일 돌아다녀봐도 이 절 저 절 이 스님 저 스님 이 곳 저 곳 이 강의 저 강의 왠 종일 돌아다녀봐도 절대로 부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인 즉 찾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천지사방으로 헤매고 다녀야 할 부처가 없단 말입니다.

 

금강경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했다면 즉 무상정등정각을 득했다면 내가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뭔가를 취했는가? 그러자 수보리 존자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한 물건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옳지! 옳지! 내가 뭔가를 얻었다면 그 것은 진정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를 찾고 부처를 성취하는 것은 즉 우주 법계가 본래 텅 비어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냈다는 의미입니다. 이 것뿐입니다. 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에요. 한 번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공연히 생사에 대해 고통스러워 마라. 우리는 매일 고통 속에 살죠?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고요. 맞죠?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삶을 그렇게 고통들로 낭비해서야 되겠습니까? 무기력하게 말입니다. 고통스러울 때 누가 도대체 고통을 받는지 의심을 하는지 이 것이 나란 도대체 무엇인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참구하지 않는다면 친구나 가족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또는 신문을 통해 어떤 이의 참사를 접했을 때 이렇게 내면을 관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결국 그렇게 끝날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말씀하신 바가 바로 이 것입니다. 생사는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 공연히 고통을 자아내지 마라. 자신을 속여 봤자 아무 것도 득 될 것이 없다. 자신에게 속지 말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네가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 만큼 많은 하인을 거느렸다고 해도 눈을 뜨면 볼 수 있지만 만약 눈을 감게 된다면 과연 어떻느냐? 그러니 네가 보는 일체의 모든 것은 다 허깨비일뿐인 것이니라.

 

우리가 가진 좋고 훌륭한 모든 것들은 눈앞에서 보면 좋지만 느끼면 기쁘지만 그러나 두 눈이 감기면 모든 가치는 사라져버리겠죠. 여러분이 죽는 그 순간 이 모든 것들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에 걱정하고 근심하십니까? 만약 빨리 스승을 찾지 못한다면 공연히 인생을 허비할 것이오. 불성이 있는 건 사실이오. 명백한 사실이오. 예 이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대로 완전합니다. 그 것은 사실이에요.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승의 도움 없이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

 

오직 백 만명중 한 사람만이 스승의 도움 없이 스스로 깨칠 수 있다. 백 만명 중 한 사람요. 부처님이나 경허스님 또는 육조 혜능대사와 같은 수승한 분들 오직 백 만명 중 한 사람만이 스스로 자성을 깨친다는 겁니다. 스승의 도움없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인연이 숙성하여 즉 인연법에 따라 부처의 의미를 아는 자는 스승이 필요하지 않는 법. 여러분이 스스로 자성을 성취하게 되면 스승이 필요 없습니다. 참 흥미로운 사실이죠? 스승을 모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본성품을 일단 보게 되면 스승은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떠한 가르침 보다도 뛰어난 각성을 타고난 사람이다.

 

만약 네가 그렇게 걸출한 사람이 아니라면 열심히 수행정진 해야만 한다네.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 그러면 스승 밑에서 얻는 가르침으로도 공부가 익을 것이야. 이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수행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흑백을 가릴줄 모르는 미혹된 자들과 다르지 않지요. ! 나는 이미 불성이 있다고 법문으로 들었어! 불교 TV에서도 봤는데. 나는 이미 불성이 있데! 불교 TV에서 우리는 이미 불성이 있다고 했어. 여러분이 직접 찾아야만 합니다. 불교TV는 이야기만 전달할 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직접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인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좋은 소식은 그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거죠. 대신 아주 조금 애쓰시면 되요. 아주 조금만요.

 

며칠 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단기간의 3일 용맹정진을 실시했었습니다. 마지막 날 결재를 마치면서 저는 숭산 큰 스님께서 옛날에 해주셨던 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렸답니다. 그날 우리는 모두 스승님의 법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굉장히 이채로운 말씀을 하셔서 개인적으로 참 좋아했습니다만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 때 저를 크게 사로 잡았던 법문이었죠. 여러분! 모두 90일 결재를 원만하게 회향하셨습니다. 90일간 속 시끄럽게 오간 생각들 속에서 들끓던 감정들은 사실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짜 것이 아닙니다. 이번 결재를 통해 배운 것 누군가 여러분한테 건네준 말 여러분을 확신시킨 것 책으로 읽었던 내용들은 진정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90일간의 참선수행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그 청정한 마음 바로 그 것이 진정으로 여러분의 것이란 말이지! 부처가 주는 것도 아니고 조사가 주는 것도 불교가 주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부모님도 줄 수 없는 오직 여러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진정한 자아란 말씀입니다. 오직 여러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진정한 자아란 말씀입니다. 정말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 것이 여러분의 하나뿐인 살림살이에요.

 

불교TV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직접 조금만 정진하시면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한테 있는 그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어떠한 가르침도 어떠한 경전도 어떤 큰 스님 말씀도 어떤 불교 종파도 모두 하나뿐인 여러분의 한 물건을 가리키고자 할 뿐인 것입니다. 마치 부산을 가리키는 이정표 같다고나 할까요?

 

부산 앞으로 400Km.. 그 이정표는 부산을 향해 가리키고 있을 뿐입니다. ! 부산이 400Km 구나! 이제야 부산을 알겠네. 부산은 저 쪽에 있어 나는 부산을 알아 라고 말한다면 그 건 바보입니다. 부산이 여기서 400Km라는 걸 이해하는 것. 부산이 가까이 있네. 좋아! 이제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어. 부산이 저기 있으니까. 그 건 부산에 가서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은 아니죠? ! 부산! 좀 시끄럽네. 그런데 바다 내음은 참 좋다. 그래야만 진짜 부산을 경험하는 겁니다.

 

책을 보고 이 것이 나의 본성품이야 라고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수행해서 그 것을 성취하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흑백을 가릴 줄 모르는 미혹된 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런 자들은 불법을 엉터리라고 말하고 부처를 모독하고 불법을 뒤집어 엎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비를 자유자재로 불러올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요. 하지만 그런 설법은 부처의 설법이 아니라 마구니의 이야기다. 마구니요. 조심하세요! 그들의 스승은 마구니의 왕이다. 그 제자들은 마구니의 앞잡이들이다. 그런 가르침을 따르는 미혹된 자들은 저도 모르게 생사의 바다에 더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조심하세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성품을 보지 않는 한  어떻게 스스로를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마구니의 세계로 이끄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이 성품을 보지 않는 한 제 아무리 십이연기법을 설한다 해도 그 것은 단지 마구니의 꼬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라에게 복종하는 것이지 부처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흑백을 구별할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생사를 해탈할 수 있겠는가?

 

달마대사의 전체 가르침은 상당히 명백합니다. 복잡하지도 않고요. 학문적으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문적으로 쉽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어떤 학문적 측면이 아니라 바로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불성에 대한 가리킴그냥 가리킬 뿐그러나 많은 분들이 그냥 듣고 이해하는 단계에 머물거나 안주합니다. ! 알겠어! 저런 것이 불교구먼! 이제 이해가 되네! 이미 내 안에 불성이 있고 저 사람도 불성이 있고 이젠 걱정할 것이 없네. 그러니 대충 행동해도 문제될 것이 없잖아! 일체가 공하니 문제 없어. 그러나 그 건 오산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품이 이미 부처라는 것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실제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수행정진해야 합니다. 달마대사께서는 법문을 공부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바 없습니다. 법문을 듣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이죠. 이 것은 단지 밖으로 치닫는 우리의 마음을 내면으로 가리키고 있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어디 멀리까지 볼 필요 없습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할 필요도 없고요. 그렇다고 오래 오래도록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부지하세월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또 수도 없이 많은 결재를 성만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수 천 수 만번의 절 수행을 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요. 한량없는 시간 동안 참선을 해야만 하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달마대사의 가르침이 명백히 보여주잖습니까?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자리를 알아차리면 됩니다. 저 멀리 어딘가 다른 곳에서 생기는 일이 아니랍니다. 그래요. 달마대사께서 가리키신 것은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 어디 책 속에서 찾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 건 진정한 부처가 아닙니다. 특정 종교나 특정 장소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공연한 시간 낭비이고 목적 없이 허송 세월만 할 뿐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오직 수행정진 뿐입니다. 하루에 10분간이라도. 아침에 잠깐 10분간만 이라도 조용히 자리하여 내면을 성찰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의심을 일으키기만 하면 여러분의 생각은 밖으로 치달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의심을 일으키는 이 지점. 일체 중생의 본성품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그 자리를 놓치고 맙니다. 오 잘 모르겠어. 이 게 맞나? 도대체 이 게 뭐하는 짓이지? 불교는 너무 난해해! 이런 식으로 생각을 일으키게 되면 본 성품자리에서 십만팔천리나 멀어집니다. 그러나 듣는 순간 탁! 우리 모두는 이 소리와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듣는 순간 말입니다. 저 밖에 매미소리를 듣는 순간 그 게 우리의 성품입니다. 그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상 현각스님의 달마어록2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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