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현행원품 이야기 >

2007. 6. 15. 09: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728x90

http://cafe.daum.net/mobuddhism
카페 자료실 중 박성배 칼럼

 

                       < 보현행원품 이야기 > 

박성배 교수

 

 

1. 중화사 사건


"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행원은 다함이 없어
  생각 생각 상속하고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


옛날 보현행원품을 열심히 독송할 때 이 대목에 이르면 신이 났었다. 거기서는 항상 새 맛이 우러나왔다. 어려운 말도 아니고 특별한 말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글의 뜻은 글에 있지않고 글 밖에 있는 것일까. 무유피염無有疲厭 즉, "지침도 싫어함도 없이"라는 말은 지친 나를 다시 일으켜주었다. 나의 일생은 한마디로 말해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이렇게 또다시 투쟁을 벌이는 것은 보현행원품을 독송한 공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공자가 늙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좀 쉬시라고 권했단다. 그때 공자의 대답이 내 마음에 든다.
"하늘이 쉰적이 있더냐?"
공자는 투철한 보현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던가 짐작해본다.

1962년 봄, 내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의 간사일을 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대학선원의 원장은 얼마전에 돌아가신 백양사의 서옹스님이었고 입승은 인천용화사의 송담스님이었다. 나는 일요일마다 회원들을 위해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강의하였다. 대학에서 처음 불경 강의라 나는 최선을 다해야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라면 '죽을지경'이었다. 잘했던 못했던 남이야 뭐라고 하든 강의하는 사람은 자신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 때 나는 그러질 못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해도 내 강의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청중에게 미안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처음만나는 화엄의 세계에 나는 그저 황홀하기만 해싸. 그리고 그 황홀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여러해가 지난 뒤에야 깨달은 일이지만, 화엄의 언어는 <몸짓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몸의 언어를 구사할 줄 몰랐던 나는 그것을 억지로 몸짓의 언어로 작살을 내려했으니 될 리가 만무했다.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구멍을 막으려 이각목두원공以角木逗圓孔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당시의 동대총장이 나의 대학선원강의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왜 철학과 출신이 대학의 선원에서 불경을 강의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비판에 개의치않았지만 시간강사가 총장과 시비를 벌였으니 결과는 뻔했다. 나는 그 길로 보따리를 싸짊어지고 절로 들어갔다. 절은 영동의 중화사였다.
나는 중화사에서 아침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하루종일 보현행원품만을 읽었다. 마치 보현행원품과 무슨 원수라도 진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읽었다. 한번 읽는데 약 25분이 걸렸다. 처음엔, 첫문장을 읽을 때는 그 다음 문장이 보이지않았고 둘째문장을 읽을 때는 첫문장이 보이지않았다. 그럼에도 읽고 또 읽기를 근 한 달을 계속했더니 뜻밖의 현상이 일어났다. 첫문장을 읽을때 둘째 세째 문장이 동시에 보이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글의 첫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가 한꺼번에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일종의 여대목전如對目前 현상이었다고나 할까. 읽을 때와 안읽을 때의 차이도 없어지는 것 같았고 내가 바로 화엄경 자체인 듯 느껴졌다. 그러니까 보현행원품의 어느 대목에 눈이 가고있건 그런것에 관계없이 항상 보현행원품 전체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것 같았다. 그것은 전체와 부분이 유기적으로 동시 공존하는 경험이었다. 환희심이 났다. 총장에 대한 불쾌감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고 도대체 남들의 평같은 것엔 신경을 쓰지않게 되었다. 내 속을 드러내는 데도 밖의 눈치를 살피지않게 되었다. 나는 그 때부터 편안하게 '불교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게되었다. 대학선원때의 어려움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중화사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을것이라 생각하니 실패의 소중함이 새삼스러웠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학선원은 나의 보현행각의 시원지가 된 셈이다.

 

2. 삼천배

중화사 사건 이후 얼마 안 있어 나는 대학생 불교연합회 구도부 학생들과 함께 전국의 큰 스님들을 친견하는 구도행각을 떠났다. 1964년 7월 31일, 그 날은 어쩌면 그렇게 더웠는지 모른다. 그 더운날, 그 13명은 경북 문경 김용사 큰 법당에서 삼천배를 하고 있었다. "구도의 마당에 학생이고 지도교수고 무슨 차별이 있을 수 있느냐"는 성철스님의 불호령때문에 나도 또한 학생들과 함께 울며 겨자먹기의 삼천배를 하지않을 수 없었다. 냉방이 안되어있는 법당은 한증막처럼 더웠다.
"한 번 시작한 이상 끝나기 전에는 못나갑니다. 끝내지 않고서 살아서 이 법당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도중엔 한번의 휴식도 없으니 미리 볼 일을 다 보고 오십시오." 감독하는 시자스님의 주의말씀이었다. "끝낸다"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하는 시자스님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 듯 했다. 시작부터가 한치의 운신폭도 주지않는 긴장된 분위기였다.

드디어 시작의 목탁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겨우 백배를 하고 나는 벌써 미칠것 같았다. 바깥열과 속의 열이 합쳐져 몸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숨을 콱콱 막혔다. 그래도 삼백배까지는 그런대로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오백배가 고비였다. 이미 우리들의 옷은 물속에 빠졌다가 기어나온 사람들처럼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우리들은 절을 하는게 아니라 빌딩이 넘어지듯 넘어졌다가 넘어진 몸을 다시 일으키는 동작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진맥진. 몸을 가눌수가 없었다. 무릎은 깨져 피로 얼룩지고 더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자 학생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불교는 자비문중이라고 들었는데, 이게 자비문중에서 하는 것입니까?'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학생이 대신 해주니 마음으론 기뻤지만 그래도 지도교수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 "잔소리 말라! 사람이 한 번 하기로 했으면 하는거야. 자비문중인지 잔인문중인지는 다 하고 난 다음에 따지라." 나중엔 헛소리를 하는 학생도 있었고 벌떡 드러누워 막무가내로 일어나지 않으려는 학생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천배를 넘겼다. 그 다음 또 천배. 특히 마지막 천배는 어떻게 해냈는지 아무생각도 나지않았다. 한번도 쉬지않고 약 13시간만에 우리는 모두 삼천배를 무사히 끝마쳤다.

법당에서 나오는 우리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걸음걸이는 부상병처럼 절뚝거렸고 옷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푹 젖어있었다. 그렇지만 모두들 눈빛은 빛나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또 불호령을 내렸다. 고되다고 앉아서 쉬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절 뒷산 상봉까지 약 2시간 걸리는 거리를 한 번도 쉬지말고 뛰어서 다녀오라는 것이다. 군대훈련에도 이런 법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않았다. 오히려 신바람이 난 듯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나갔다. 그 어려운 삼천배를 해냈다는 자신감에 기가 팔팔 살아있었다. 나와 성철스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 무장해제武裝解除

삼천배를 하고 난 다음 나에게는 몇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장해제의 경험>이었다. 강제로 무장을 해제당한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기를 내버린 기분이었다. 일종의 무장이 필요없는 상태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것 같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중무장을 하고다녔는지 모른다. 속에 무슨 보배를 그리도 지고다녔는지 항상 경계태세를 풀지않고 살아왔었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으면 지킬것도 없고 두려울것도 없을 것이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따지기를 좋아하고 지지않으려고 밤낮 시비만 일삼던 학생들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누가 뭐라해도 남의이야기를 듣는것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지 통 불평을 할 줄 몰랐다. 이것은 멍청해진것과는 달랐다. 그들도 분명히 속에 지니고 다녔던 것들을 모두 버려버린듯 했다. 한 학생이 말했다.
"몇푼어치 안되는 지식을 가지고서 내가 남보다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생각해보면 우습습니다." 제법 무엇인가 깨달은 것 같았다. 이것은 분명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미국에서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실은 총을 가졌기 때문에 불안과 고통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이들에게 무장해제의 편안함을 깨우쳐줄 길은 없을까? 총을 가지고 있지않아도 총가진 사람 이상으로 항상 무엇인가를 경계하면서 긴장을 풀지않고 사는게 현대인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까?

 

4. 중도법문中道法門

삼천배를 마친 그 다음날부터 성철스님은 약 1주일간 불교의 핵심사상에 대해서 자상한 강의를 해주셨다. 육조스님의 법보단경을 비롯하여 선종에서 소중히 여기는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많이 소개해주셨다.

"엣부터 투철하게 깨치신 역대의 큰 스님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중도법문 밖의 딴말씀을 하신적이 없다." 고 말씀하시는 성철스님의 목소리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그 당시 나는 삼십대 초반의 새내기 조교수였다. 성철스님의 중도법문은 내가 그 당시 가지고있었던 <신앙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많은 의문>을 풀어주었다. 특히 학문과 수도가 둘일 수 없고 이론과 실천이 둘일수 없다는 불교의 이치가 분명해진듯했다. 학생들 덕택에 지도교수란 이름으로 뒤따라다닌 구도행각이었는데 행각의 효과는 나 혼자서 다 본듯한 느낌이었다.

그 때 성철스님의 강의가 그렇게도 좋았던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나는 그 첫째의 공을 우리의 <무장해제의 경험>에 돌리고싶다. 무장해제 이전에는 그렇게도 걸리는 것들이 많았었다. 스님의 좋은 법문을 들어도 자기속에 있는 것들과 부딪치는 게 많아서 별로 얻는게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날카로운 것같고 이지적인것 같고 그래서 비판적이고 객관적이어서 제법 학자답게 보였지만 사실은 자기무장이라는 자기속의 장애물 때문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현상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 고약한 것은 자존심이었다. 자존심은 <선비의 긍지>라는 좋은점도 없지않지만 많은경우 교수라는 신분이 주는 제약과 연결되어있었고 그 밑바닥에는 남이 안가지고 있는것을 나는 가지고 있다는 교만이 깔려있었다. 그러니 종래의 자기에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보장이 되어야 받아들이지 그렇지않으면 아무리 좋은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걸리는 것이 많다는 말은 바로 이런 말이다.

그리고 무장해제란 말은 이런 장애물들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에게 말을 잘 해야할 책임이 있듯이 듣는 사람에게도 말을 잘 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것이다. 교육이란 이 두가지가 다 만족되었을때 빛이 난다. 성철스님은 지식을 주기전에 먼저 듣는 사람의 태도를 바로잡아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철스님은 우리들에게 중도中道에 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들을 중도에 가까이 가있게 해주신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도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중도를 이야기하면 백발백중일 수 있을 것이다. 꽃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꽃을 손에 쥐어주라고 하지않던가.

 

5. 눈이 용用에 쏠려있구나

서울로 돌아온 우리들은 뚝섬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대학생활과 수도생활을 겸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우리들은 모두 이상주의자들이었고 또한 야심가들이었다. 이상주의도 야심가도 나쁠것은 없다. 문제는 이상도 야심도 잔인한 현실앞에 모두가 난파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그 원인을 분석해보지않을 수 없다. 가장 큰 잘못은 결과만을 황홀하게 꿈꾸고 있었을 뿐,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까지의 과정을 철저하게 점검해볼 줄 몰랐던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해내려면 그 일을 해낼만한 힘이 어디서 나와야 하는 법인데 그 점이 불분명했었다. 그저 옛날 경전에 씌여진대로 하면된다고 생각했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은 우리들의 다라니였다. 보현행원품을 아침에도 읽고 저녁에도 읽고 한문으로 읽고 한글로 읽고 나중에는 영문번역본으로 읽었다. 오직 믿는게 보현행원품 뿐이었다. 아무리 읽어도 읽을때마다 산났던 대목은 보현보살의 십대행원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을 찬탄하리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님을 공경하리
 내 가진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치리
 잘못한 일은 무엇이나 피눈물로 참회하리..
 항상 중생을 부처님으로 섬기리..."

보현행원품은 아무리 읽어도 싫증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생활과 수도생활을 겸한다는 게 힘에 겨웠다. 두 직장을 가지고 밤낮으로 뛰어다닌다해도 이보다 더 어려우랴 싶었다. 우리는 그 해 겨울방학에 또 김용사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우리의 딱한 사정을 다 듣고나신 성철스님의 진단은 간단했다.
"눈이 용用에 쏠려있구나. 너희에겐 행원품이 원수로다."
뿌리가 안보이니 튼튼히 할 줄 모르고 남들의 눈에 뜨이는 겉만을 꾸미고 다니는 것으로 보현행을 삼으니 어리석지 않느냐는 것이 스님의 말씀이었다. 나는 성철스님의 이 한마디에 '넋을 잃은' 느낌이었다. 오린 고민 끝에 대학생수도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교수직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오직 눈에 안보이는 뿌리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출가할 것을 결심했다.

 

6.  자청한 6만 3천배


1965년 봄, 나는 대학에 나가지않고 또 김용사로 내려갔다. 성철스님께 출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먼저 3천배를 매일 3주동안 계속할 수 있느냐"고 스님은 물으셨다. 자신의 결심을 시험할 겸, 출가의 의지를 다짐할 겸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시험이건 단련이건 그런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스님이 하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21일 동안 모두 합해 6만 3천배를 거뜬히 해냈다. 작년 여름의 3천배보다도 훨씬 수월했다. 날씨가 덥지않은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나의 자세가 달라져있었다. 이번은 <울며 겨자먹기>가 아니었다. 결심 여하에 따라 이렇게 큰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3주간의 기도는 나의 업을 다 녹여내고 씻어준것 같았다. 심신이 상쾌했다.

 

7. 깨달음과 깨침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상쾌했던 심신은 또 고달퍼지기 시작했으며 녹아났다고 느꼈던 업은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모든것이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었다. 다시는 물러서지않는다는 불퇴전의 경지가 새삼 문제되었다. 삼칠일 기도가 끝난다음 성철스님은 나의 사상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셨다. 나는 그당시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돈오점수설을 좋아했었다.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의지하여 평생토록 꾸준히 닦아야한다"는 지눌스님의 말씀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이를 부인했다. 성철스님의 지눌비판은 무서웠다. 돈오점수설은 아직 선이 무엇인지 모르는 화엄학자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요즈음 내가 쓰고있는 언어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을줄 안다.

"깨달음 정도로는 안된다. 깨쳐야 한다. <깨달음>은 머리로 아는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후퇴할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뭔가 좀 알았다해도 힘이 없다. 아는것과 아는대로 실천하는 행동과의 거리는 여전히 크다.
그러나 <깨침>은 '온 몸으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여전히 깨달음일뿐, 아직 깨침이 아니다. 깨달음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깨침이라야 한다. 선종에서 견성을 했다느니 또는 확철대오를 했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궁극적인 불퇴전의 <깨침>을 얻었다는 말이지, 언제 물러설지도 모르는 <�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아니다. 보조국사는 돈오점수설을 선양함으로써 수행자로 하여금 깨달음을 깨침으로 잘못 알게하는 오류를 범했다."

성철스님의 지눌비판은 대강 이런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성철스님을 만나기전에는 <깨달음>과 <깨침>의 차이를 구별할 줄 몰랐다. 성철스님에게 있어서 <깨달음>과 <깨침>은 전혀 별개의 다른 경험이었다. <깨달음>은 중생의 경험이지만 <�침>은 부처님의 경험이다. 중생의 경험인 <�달음>은 아무리 여러번 하고 이를 모두 다 합쳐놓아도 부처님의 <깨침>은 되지않는다. <깨침>은 <깨달음>을 포용하지만 <깨달음>이 바로 <깨침>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천하의 별것을 다 깨닫고 또 골백번을 깨달았다 할 지라도 <깨달음>은 역시 깨달음일뿐, 그 이상으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깨달음 밖에는 얻지 못하는 벽을 우리는 무너뜨려야한다. 이 벽이 바로 <중생성衆生性>이다. 이 중생성을 극복해야한다.

 

8. 몸과 몸짓


몸짓만 바꾸면 뭘하나? 몸이 깨져야지! 
나는 이 말을 성철사상의 핵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나타나는 몸짓이 조금 바뀌는 정도의 <깨달음>을 <깨침>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침>은 몸짓이 바뀌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몸짓이 나오는 <몸> 자체가 깨져버리는 것이다. 몸짓이 중생의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몸짓이 나오는 몸은 중생성이다. 그러므로 중생성을 극복해야한다는 말은 몸이 깨진다는 말이다. 몸이 깨질때 깨침을 이룬다. 깨짐과 깨침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우리말에 <깨진다>는 말과 <깨친다>는 말은 둘 다 똑같은 <깨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유리창을 깬다든가 놀음판을 깬다는 따위의 파괴적인 경우는 <깨짐>의 뜻이 강하고, 잠을 깬다든가 국문을 깬다는 따위의 건설적인 경우는 <깨침>의 뜻이강하다. 불교수행의 경우 중생성 극복인 몸의 <깨짐>과 부처님의 몸이 탄생하는 <깨침>은 동시에 일어난다. 성철스님은 화엄철학에 나오는 쌍서雙庶와 쌍조雙照라는 말과 구름과 햇볕의 비유를 가지고 깨짐과 깨침의 관계를 설명하셨다.


"구름이 걷히면 햇볕나제.
구름 걷히는 것 따로 있고 햇볕나는 것 따로 있는가?

"망상 쉬면 부처님이지.
망상쉬는 것 따로있고 부처되는 것 따로 있는가?"

"부처가 되고싶으면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라.
그것밖에 딴 길은 없다.
적당히 슬슬 해서는 안된다.
오매일여가 되도록 해야한다.
자나깨나 화두드는 것을 한결같이 해야한다.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고 꿈조차 없는 깊은 잠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오매일여의 경지이다.
오매일여의 경지를 거치지않고 깨친 이는 없다.
오매일여가 아니면 미세망념이라는 중생의 근본번뇌가 깨지지않는다.
깨짐이라야 깨침이다.
초보자는 행여나 깨달음을 깨침으로 오해하여 도중하차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야한다."


성철사상의 핵심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풀이할수있을 것이다. 성철스님의 사상을 말하면서 <몸과 몸짓의 논리>를 동원하고 <�달음과 깨침과 구별>을 하는 것은 성철스님을 보는 나의 입장을 드러내놓는 일일런지 모른다.

1968년 2월 나는 해인사를 떠났다. 성철스님을 떠난것은 아니고 중노릇을 그만두고 다시 동국대 불교대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해인사를 떠날때, 나는 대중스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계식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퇴속절차를 밟았다. 이것은 내가 성철스님을 떠난것도 아니고, 불교를 떠난것도 아니고, 수도생활에 자신이 없어 밤중에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절집에서 퇴속은 출가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만큼 짙은 인간관계가 그 속에 있었다.

해인사를 나온뒤 꼭 1년만에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국나이로 37세였으니 유학치고는 좀 늦은 셈이었다. 문제는 영어였다. 언어의 장벽이라는게 그렇게 대단한 것일 줄은 미처 몰랐다. 이왕 가야할 미국유학이었다면 좀 더 일찌기갈 걸 그랬다는 때늦은 후회에 잠기다 혼자서 웃기도 했다. 약 10년 걸려서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원효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별일이 다 많았다. 미국서는 학생들이 여름방학이면 일년 쓸 용돈을 벌겠다고 모두 여름내 막벌이 일자리들을 찾아나선다. 나도 물론 한 몫 끼었다. 별 일을 다 해보았다. 힘들었던 것은 역시 노동판의 일이었다. 보수가 좋았다. 그대신 지독하게 부려먹었다, 보수를 많이 주면 그만큼 뽑아가는 것 같았다. 황소같은 몸짓을 가진 20대의 미국청년들 틈에서 똑같은 양의 노동일을 함께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고대 로마의 노예들도 이렇게 잔인하게 혹사당하지는 않았을거라 생각이 들었다. 미국아이들도 고되다고 도중에 그만두는 노동일을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한여름 내내 했다. 성철스님의 3천배보다는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노동판의 일 뿐만이 아니라 박사학위 과정의 시험보는 일이나 논문쓰는 일을 하면서 힘이 들 때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3천배보다 더 어렵느냐? 이렇게 묻기만해도 어디서 나오는지 새 힘이 솟아나왔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1977년 9월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자 나는 지금 있는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교 종교학과 불교학교수로 취직이 되었다.그리고 한국을 떠나온지 만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1979년 12월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이 주최했던 제1회 국제한국학 심포지움에 참석하기위해 뉴욕의 케네디국제공항을 떠났다. 비행기 속에서 태평양을 내려다 보며 나는 생각했다. 만일 누가 나더러 한국에 가서 <꼭 한군데만 보라>고 말한다면 어디를 택할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여러곳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결국엔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전남 보성의 <고향마을>과 가야산 해인사의 <백련암>, 이 두군데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막상막하라더니 어느 한 곳을 택하기가 곤란했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내가 태어난 고향마을을 택했다. 택해놓고 보니 잘 택한 것 같았다. 내 사상이 내 결정을 재확인해주었다. 이때 나는 결국 속세에서 속인으로밖엔 살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어린이가 걸음마를 배울때는 엉덩방아를 수없이 찧는다. 그러다가 걷기 시작하면 또 앞으로 넘어져서 무릎을 깨기도 한고 팔을 다치기도 한다. <넘어지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고> 이것이 사람의 자라는 모습이다. 부처님 공부에도 이러한 면이 있는것 같다. 나도 부처님 공부를 시작한 이래 걸음마 배우는 어린이처럼 무수히 넘어지고 깨지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출가를 두 번이나 했다. 이 말은 퇴속을 두번이나 했다는 말이다. 절집에서는 퇴속이라하면 무슨 큰 죄나 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정을 알고보면 꼭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닌것 같다. 부처님 당시에도 퇴속한 사람들이 적지않았던 모양이다. 원시불교의 율장에 보면 일곱번까지는 퇴속을 허용한다는 규정이 있다. 일곱이라는 숫자를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여러번 퇴속해도 그것을 죄로 보지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대학에 다니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 일을 돌보기도 하고 또는 방황하고 헤매는 학생들이 있다. 그러다가 다시 복학하여 공부를 계속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도 일종의 현대판 퇴속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을 중퇴한 것을 자랑하고 다닐수 없듯이 절집의 퇴속을 무슨 자랑이라고 떠들고 다닐 수는 없다. 다만 출가와퇴속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실지로 무슨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로는 실패담이 성공담보다 더 유익할 때가 있다.

나의 첫번째 출가는 1055년 여름의 일이었다. 광주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사회불만증에 걸렸다. 대학을 그만두고 해남 대흥사로 들어갔다. 그 당시 대흥사에는 전강스님과 묵언스님이 계셨다.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그 당시의 한국사찰들은 크게 혼란스러웠다. 나라의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라'고 유시를 내리니 대처승은 절을 비구승에게 넘겨주었지만 비구승의 수가 너무 적어 사찰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 바람에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내가 일조에 머리를 깎고 비구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유물론자였다. 유물 변증법적인 사고방식에 물든 사람들에게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그들은 인과율적인 합법칙성에 입각한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자처했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들은 경제적 불평등을 바로잡고 절대 다수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면 이 세상은 곧 유토피아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상주의자였고 또한 낙관론자였다. <혼자만 먹지말고 남들과 함께 나눠먹자. 남들만 부려먹지말고 모두 함께 일하자> 얼마나 좋은 말인가. 나는 그들의 이러한 이론에 반해 버렸다. 그러나 실지사회는 그들의 말과는 달리 자꾸만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좋은 사람들은 거세당하고 나쁜사람들은 득세하고... 그래서 나는 화병에 걸렸던 것 같다. 내가 앓은 사회불만증이란 대강 그러한 것이었다.

대흥사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끝없이 찾아오는 관광객을 상대로 밥장사를 하는 것이 나의 첫 소임이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관광객도 끊어지고 산사는 정적에 쌓인듯 조용해졌다. 발심한 사람 같았으면 <때는 이때다>하고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으련만 그 때에 나는 먹물옷만 걸쳤지 아직 불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때였으므로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어디론가로 돌아다닐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한 번 천하의 선지식을 모두 다 만나 봐야지!'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그 때에 입승을 보시던 묵언스님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못하게 말리셨다. 나에겐 아직 선지식을 알아볼 눈이 없단다. 나는 말 아픈 줄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자칭 <구도의 길>을 떠났다. 그러나 길을 떠나기 전에 나는 묵언스님께 여쭤보았다. "스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가짜중입니다. 다른 절에 가서 가짜임이 발각되면 큰 망신입니다. 진짜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진짜가 되려는 게 아니고 진짜처럼 보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로서는 불문에 들어온 뒤 처음 던져보는 절박한 질문이었다. 우문현답이라고나 할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질문이었는데도 묵언스님의 답변은 아주 자상하였다.

 

가짜중의 구도행각


"진정 발심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코가 땅에 닿도록 정중하게 절을 하라. 나이많은 고승이든 어린 동자이든 가리지말고 똑같이 존중하라. 승속도 가리지말고, 남녀도 가리지 말라. 빈부귀천 모두 버리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정중하게 큰 절을 해야한다." <꼭 그렇게 하리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도 어려울것 같지않았다.
묵언스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둘째, 일은 찾아서 하라. 대중처소에서는 할 일이 많다. 누가 시키기를 기다리면 진짜중이 아니다. 좋은 일, 궂은 일을 가리지 말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힘든일을 자진해서 하면 된다."

조금도 어려울것 같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를 곧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묵언스님의 말씀을 무슨 진언처럼 중얼거리면서 대흥사를 떠났다. <누구에게나 큰 절을 하고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고...>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묵언스님은 불교용어를 하나도 사용하지않고 보살이 걸어야 할 길을 나에게 가르쳐주셨던 것이다. 벽을 향해 앉아만 있으면서도 그리고 묵언을 하면서도 보현행을 하셨던 것이다.

대흥사를 떠난 뒤 나는 어느 절에 가서나 묵언스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가진애를 다 썼다. 그 결과는 정말 놀라웠다. 어느 절에서나 대환영이었고 모두들 함께 살자고 붙들었다. 강화도의 전등사에 들렀을 때에는 주지스님이 교무국장이라는 임명장까지 써주면서 떠나지 말라고 붙들었다. 가는 곳마다 나를 <발심한 수좌>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그 칭찬이 나를 괴롭혔다.

<발심은 커녕 아직 불교도 안믿는 가짜중!> 이렇게 내 양심은 나를 고발하곤 했다. 남들을 속일 수 있어도 자기의 양심은 못속인다는 말이 옳았다. 즐거울줄 알았던 구도행각이 고통의 행각이 되고말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병이났다. 못먹고 못자고... 이러기를 몇달동안 계속하니 몸이 견디지 못하였다. 피로를 풀지못하니 드디어 병이 난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짜중의 구도행각은 한철을 넘기지못하고 일단 막을 내렸다.

 

기도의 공덕


병든 몸을 이끌고 남몰래 전남 보성에 있는 아버지의 산장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나는 근 10일간을 열병환자처럼 누워있었다. 산지기 아주머니가 열심히 간호해준 덕택으로 열이 내렸다. 병이 낫자, 나는 다시 대흥사로 돌아왔다. 모두들 환골탈퇴하여 딴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말했다. 약 3개월의 고행과 설상가상으로 열병을 앓다 돌아왔으니 무척 수척하고 창백해보였던 것 같다. 다시 절로 돌아온 뒤, 나는 화두참선에 주력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수하다가 코만지기보다 쉽다"는 참선이 왜 그렇게도 안되는지 답답했다. 화두를 들었다하면 어디론지 도망가 버리고 하루종일 망상만 피우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싶어 내 고민을 묵언스님께 말씀드렸더니 <나반존자>기도를 한번 해보란다. 옛날 큰 스님들도 나같은 사람은 종종 그렇게 가르쳤단다. 나반기도는 목탁을 치면서 고성으로 나반존자를 두시간 동안 부르는 일종의 염불기도법인데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참선이야 벽을 향해 딱 버티고 앉아있으면 속으로는 망상을 피우고 있을망정 그럴법한 면이 없지않은데 이것은 어쩐지 미신행위같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남이볼까 무서웠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잘 안되는 참선만을 계속 고집할 수도 없는 처지에 기도도 하기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때 나에겐 묵언스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스님이 나를 오도하진 않으리라"는 믿음이 결국 스님 시키는 대로하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졌다.

그 해 대흥사의 겨울은 몹시 추웠다. 대웅전 앞을 흐르는 개울물은 꽁꽁 얼었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개울의 얼음을 깨고 거기서 목욕을 하고 독성각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는것이다. 기도의 목적은 "참선 잘 되도록 번뇌망상 쉬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묵언스님은 그 때 묵언 중이었으므로 공책에 필담으로 여러가지의 주의사항과 기도의 영험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기도는 시작되었다. 남들이 아직 자고있을 이른 새벽에 얼음을 깨고 혼자서 목욕하는 기분은 보통이 아니었다. "정 추우면 목욕탕에서 해도 좋다"는 스님 말씀에 나는 대들었다. "스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그 어려운 길을 저는 가고싶습니다! 어렸을때 읽었던 무사들의 무서운 수련이 연상되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번뇌도 고개를 숙인듯 마음이 아주 조용해지고 제법 성자가 된 듯 거룩한 기분까지 들었다. 스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스님에게 말없는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러나 약 1주일이 지나자 몸에 힘이 떨어지고 게으름이 생기면서 또 그 고질적인 회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목욕하기위해 개울에 나가는 것이 싫어졌다.
처음엔 목탁소리가 나의 번뇌의 대갈통을 두들겨부수는 소리인듯싶어 그렇게 좋더니 나중엔 그런 신선한 맛이 통 나지않았다. 마지막엔 회의와 피로와 게으름이 뒤범벅이 되어 이게 무슨 기도인가 차라리 중단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스님의 약속과 최초의 결심과 주위의 체면때문에 질질끌려 죽을 고생을 하면서 겨우 기도를 끝마쳤다.

내 기분은 참담했다. 내 일생 최초의 기도는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도하면 영험이 있고 기적이 생긴다던데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선도 실패, 기도도 실패...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앞이 캄캄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그 때 기도의 공덕을 그렇게 크게 볼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참선도 그 때 정말 제대로 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 때 참선이 잘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또하나의 도인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다. 그리고 또 만일 기도 끝에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났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경우 역시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기적이라면 부처님이 경험한 기적, 다시 말하면 자기가 버렸던 가비라성으로 다시 돌아온 그러한 기적을 맛보고싶다. 그 밖의 기적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궁극적인 기적은 아닌것 같다. 요즘 내 주변에서 가끔 기적을 맛보았다고 말하는 가람을 본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면 저런 기적은 차라리 맛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눈을 뜬 사람으로서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못보는 그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때로는 미신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사고능력이 마비되어 폐인으로 되는 경우도 보았다. 그럴 때마다 대흥사에서 참선도 실패, 기도도 실패했던 것이 얼마나 잘된일인지 노른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이세상에 이보다 더 큰 기적이 또 어디에 있을까.

 

가짜와 진짜


내가 만난 불교는 '말의 종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입으로 '나는 불교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못할 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어디를 뒤적여보아도 그런 흔적은 추호도 없었는데, 중노릇을 그만두고 다시 의과대학으로 돌아와보니 나는 그동안 내가 많이 변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내 세계관과 인생관의 변화였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유물론인 사고방식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고 누구든지 불교를 믿는다는 말만 들으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어린 대학생이 사회불만증이라는 화병에 걸려 급한김에 멋도 모르고 절로 들어가 톡톡히 망신만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는데, 그 뿐만 아니라 일년동안이나 중노릇을 하고도 불교를 믿지 못하고 돌아왔는데ㅡ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교인이 되어있었던것 같다.

어린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칠때 말로 아무리 잘 가르쳐보았자 물속에 집어넣으면 그동안 말로 배웠던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것을 보고 아예 처음부터 물속에 집어넣으면 물을 먹으면서 물에 익숙해지는 것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아니 불교에는 더 좋은 비유가 있다. 사자의 교육은 천진벼랑에서 내던져버리는 것이라고 하지않는가. 나는 대흥사에 살면서 그런식의 교육을 받은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종교교육을 한다면서 <믿습니까> 하고 묻고 <예, 믿습니다!> 라고 답변하면 <너는 됐다!>라고 인가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저건 불교가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든다. <말의 세계>에서 장난치지 말고 <삶의 바다>속에 집어던져버리는 교육, 그래서 물도 먹고 숨이 끊어질 듯 경을 치면서 결국 물과 하나되게 하는 교육, 나는 이것이 불교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의과대학으로 다시 돌아온 다음, 나는 가까웠던 맑스주의자들에게 말했다.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그게 정녕 너의 소원이라면 먼저 너 자신부터 평화로와져야 한다. 평화가 무엇인줄이나 아는가? 너도 평화롭지 않은데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말도 안된다." 친구들은 나를 중이라고 놀렸다. 꼭 중같은 소리만 하고 앉아있다는 것이다. 나는 또한 그들에게 말했다. "절대 다수의 노동자, 농민, 무산대중을 위한다고? 그게 정말 너희들 소원이라면 먼저 생명가진 모든 중생을 위하는 길을 발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평생 쌈질만 하다가 말것이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눠먹자>는 구호는 부처님의 일체중생과 함께 산다는 진리를 터득하지않고서는 하나의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대흥사에 있었을 때도 스님들과 많은 입씨름을 했다. 묵언스님은 묵언중이라 싸울 수가 없었지만 전강스님에게도 대들었다.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신다고요? 배고픈 사람들이 천진데 그들에게 밥 한그릇도 갖다주지않으면서 말만 그렇게 거창하게 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던 내가 대학돌아와서는 맑스주의자들에게 오히려 불교의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생활을 한참하다가 나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의학을 그만두자. 불교대학으로 들어가 불교공부를 한번 본격적으로 해보자. 그 결과 나는 여러해 뒤에 마침내 불교대학의 교수까지 되었다. 그러나 교수도 그렇게 쉽지않았다. 불교대학 교수생활 7년간 내가 안고살았던 가장 큰 문제는 <깨치지도 못하고 �침의 세계를 말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사표를 내고 해인사로 들어갔다. 진짜 중노릇을 한번 해보고싶었던것이다.

수도자의 목숨을 끊는 독약이 있다면 그것은 교만일 것이다. 남들이 칭찬해주기 전에 자기는 칭찬받을만하다고 자부하는 것이 <교만>이다. 사람이 교만에 빠지면 남들이 칭찬해주어도 양에 차지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는 추태를 벌인다. 얼마나 많은 이른바 진짜들이 이 병을 앓고있는지 모른다. 대흥사 시절의 가짜중노릇과 해인사 시절의 진짜중노릇은 여러가지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대학을 중퇴한 가짜와 교수직을 버리고 들어온 진짜. 겉으로는 누가보아도 후자가 더 바람직해 보일것이다. 그런데 당사자인 나로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진짜는 진짜가 아니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진짜가 되고보니 옛날 가짜때보다도 더 큰 병이 거기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양심의 예리함이라는 측면에서보면 진짜시절은 가짜시절에 족탈불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실은 그 때 나를 무척 괴롭혔다. 남들이 발심했다고 칭찬해주면 그것이 당연한듯 아무렇지도 않은것. 얼마나 추한가.

그때마다 소위 진짜라는 것의 정체가 가짜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가짜였을때는 남들이 칭찬해주면 몸둘바를 몰랐는데 하고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괴로운 가짜와 오만한 진짜. 아무리 가짜라도 부끄러움과 괴로움이 있는 한, 부처님은 미소를 지으시겠지만 아무리 진짜라도 오만함이 있는 한 부처님은 답답해하실것이 분명했다. 화엄경 보형행원품은 여기서 다시 커다란 빛을 발휘했다. 내가 해인사로 재출가한것도 보현행원품 때문이었지만 해인사를 떠나 다시 세속으로 돌아온것도 보현행원품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보현행원품을 읽으려면


이 경의 원래 이름은 <대방광불 화엄경 입부사의 해탈경계 보현행원품>이다. 당나라의 삼장법사 반야스님이 서기 798년에 한역한 것이다. <대장신수 대장경> 제 10권 844-848쪽에 들어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1966년 동국대학교의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운허스님의 <보현행원품>이 아마도 가장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말할 수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 해인총림에서 나온 광덕스님의 <보현행원품>이 가장 널리 보급되어있으며 1984년 불일사에서 출판한 법정스님의 <나누는 기쁨>도 읽기 쉽기로 이름나 있다. 영어번역으로는 1930년 영국 런던의 George Routhege &Sons 출판사에서 나온 DT Suzuki의 Studies in the Lankavatara Sutra (pp. 230-236)을 들 수 있다. 완역이 아니고 십대원만을 뽑아 의역한 것이지만 크게 대의를 그르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 밖에 이 경을 해설한 책들은 무수히 많다. 가장 최근의 우리말 해설서는 1992년 학담스님의 <화엄경 보현행원품>이다.

보현행원품을 제대로 읽으려면 보현의 바다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 첩경이다. 뛰어들어가는 길은 사람따라 다 다를것이다. 묵언스님의 말씀처럼 <누구에게나 무조건 큰 절을 하고 어디서나 몸을 사리지않고 일하는것>도 좋은 방법이고, 지난번에 내가 이야기했던 중화사 사건처럼 독경삼매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보현의 길은 사람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자기를 속이지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넘어지는 것을 무서워말라. 무릎이 깨지고 손목이 부러지고 그러면서 사람은 걸음마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숙제를 하나 내볼까. 보현행원품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예경제불원을 만독하기다. 한문으로 읽어도 좋고 한글로 읽어도 좋다. 문제는 하는거다. 말만으로는 안된다. 다음은 운허스님이 번역한 예경제불원 전문이다.

 

보현보살은 선재동자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한다는 것은
온 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 세계의
아주 작은 티끌만치 작은 수의 모든 부처님들께
보현의 수행과 서원의 힘으로 깊은 믿음을 일으켜
눈앞에 뵈온듯이 받들고 청정한 몸과 말과 뜻으로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니라.
낱낱 부처님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티끌만치 많은 수의 몸을 나타내어
그 한 몸 한 몸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티끌만치 많은 부처님께 두루 절하는 것이니
허공계가 다할 수 없으므로
나의 이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함이 없느니라.
이와같이 중생의 세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야 나의 예배함도 다하려니와
중생계와, 중생의 업과,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이 예배하고 공경함도 다함이 없느니라.
념념히 계속하여 쉬지않건만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은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느니라.


운허스님번역 <보현행원품 보문품 보안장> 동국역경원 1966. 4-5쪽

 

골똘해져야 한다.
우리들이 불경을 읽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도 골똘해져야 한다.
마음이 산란하거나 정신이 흐트러져 있어서는 안된다.

요즘의 학교 교실 분위기에서는 골똘함을 맛볼수 없다. 일요일이면 열리는 각종의 종교집회도 역시 골똘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튼 시간을 정해놓고 몇시부터 몇시까지라는 틀에 갇혀있는 한 사람은 골똘해질 수 없다. 과거도 끊어지고 미래도 끊어지고 아예 시간의 감옥에서 해방되어야한다. 그래야 불교에서 말하는 골똘을 맛볼수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수행자는 집을 떠나 산중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깊은 산속만큼 골똘하게 사람을 만드는 환경은 없다. "한번 산중 맛을 보면 영원히 산을 떠나지 못한다"는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골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골똘을 얘기하기란 쉽지않다. 불교책들에 자주 나오는 '삼매'니 '선정'이니 '용맹정진'이니 하는 말들이 모두 골똘한 상태를 이야기해보려고 애쓰는데서 나온 말이다. 지금 우리들이 공부하고 있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는 골똘의 경지를 독특한 필치로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부처님과 내가 행동적으로 혼연히 한덩어리가 되어있는 상태다.
행원품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법계와 허공계 그리고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아주 작은 티끌 수 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들,
이들 낱낱 부처님이 계시는 곳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아주 작은 티끌 수 만큼 많은 부처님께 두루두루 절을 한다.

부처님도 끝없이 많고 내 몸도 끝없이 많다.
그 어느쪽이 더 많고 어느쪽이 더 적다고 말할 수 없다.
한마디로 똑같이 많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을 하고싶어서 화엄경은 이러한 표현법을 빌려쓰고있는 것일까.

첫째 우리는 여기서 부처님과 내 몸이 둘 다 똑같이 끝없이 다양하며 언제나 어디에나 함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부처님과 내 몸은 둘 다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나 아닌 여럿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라고 말해야 할것이다.
부처님과 내가 하나임을 화엄사상가들은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행원품은 거기서 멈추지않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 나의 그 많은 몸들 가운데 한 몸 한 몸이 모두 그 많은 부처님 가운데 한 분 한 분 모두에게 절을 한다. 한분도 빠짐없이 그리고 한 몸도 빼지않고 두루두루 다 절을 한다. 이처럼 그 많은 몸들이 그 중에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렇게 절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가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절을 받는 부처님과 절을 하는 우리의 몸이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데 정물과 같은 조용한 하나됨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유기적이고 생명체적인 하나됨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지극정성으로 성심성의껏 하는 절이다. 절이란 이런 것이다.

나는 처음 이 대목을 읽다가 현기증이 생겼다. 휘겨스케이팅을 하면서 연출하는 휘겨스케이터들의 묘기가 생각난다. 몸이 팽이처럼 빙빙 돈다. 얼마나 어지러울까! 그러나 그들은 넘어지지않는다. 어지러워 비틀거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다음 동작으로 깨끗하게 넘어간다. 한 치의 착오도 없다. 보는 사람은 어지러운데 오히려 스케이팅을 하는 본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것이다. 스케이터 자신과 구경꾼의 차이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들 두 사이엔 분명 뭔가 다른 것이 있는것 같다.

불경을 읽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생긴다. 모든 부처님 한분 한분께 실지로 절을 하는 사람과 절을 하지않고 구경꾼처럼 그냥 책을 읽는 사람 이들 둘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1960년대 초에 내가 동대 대학선원에서 이 대목을 강의하다가 말문이 막혔다. <황홀>. 나오느니 황홀하단 말 뿐이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잠실에 있는 불광사의 광덕스님은 이 대목을 일러 '오직 한 마음일 뿐'이라고 말했다 한다. 타고날 때부터 총명한 사람들은 광덕스님의 이 한마디에 크게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알았다'는 듯이 미소짓는 총명한 사람들의 미소. 그 미소의 밑바닥이 보이는 듯하여 언짢았다. 기독교인들이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덜컹 주저앉아버리고 내뱉는 말이 '하나님!'이다. 그러한 경우 하나님이 정말 나타나서 주저앉은 사람을 구원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주저앉지 말고 좀 더 힘차게 밀고나갔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하지않았던가. 하나님은 도중하차하는 자에겐 도중하차의 쓴 맛을 톡톡히 보여줄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같은 아쉬움은 불교계에도 있다. 급하면 모두들 피신처가 있다. 그것이 마음이다.

궁즉통이라고 하지않던가. 막혀야 통한다. 막히지도 않았는데 통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통>은 아니다. 정말 꽉 막히지 않고서 툭 터지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던 마음이던 요술방망이가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이란 말이나 마음이란 말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란 말이나 마음이란 말을 그때 그렇게 써서는 안된다는 말도 아니다. 이런말들을 최초로 쓴 사람들은 그래도 진지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말들을 즐겨쓰는 사람들 가운데는 앵무새들이 많은것 같다. 정진하는 도중에 도중하차하는 듯한 분위기가 싫다는 말이다. 도중하차의 유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따져야 한다.


불경을 읽을 때는 철저히 따지면서 읽어야한다. 불경의 깊은 뜻을 알기위해서라기보다는 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따짐>은 흔히 <골똘>의 반대말로 알려져있다. 이것은 겉으로 나타난 양자의 상극적인 면만을 들여다보는데서 생긴 일종의 논리적인 오류다. 우리는 양자가 사실은 속에서 서로 돕는 상생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철저한 의미에서 따짐이 없이는 골똘도 없다. 그리고 골똘이 없는 따짐은 불교의 따짐이 아니다.

우리의 몸엔 가지가지의 기능이 있다.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보고 손은 만지고 발은 걷고...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수시로 때로는 동시에 많은 일을 하면서 산다. 이러한 모든 기능 가운데 가장 탁월한 기능이 <생각하는 기능>이다. 이러한 기능을 하는 놈에 붙이는 이름도 가지가지다. 머리, 의식, 정신, 영, 마음 등등 수없이 많다. 이들에 대한 이름이야 어떻게 붙이든 이들의 그 놀라운 능력 때문에 사람들은 정도 이상의 점수를 이들에게 준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이다.

훌륭한 종인 마음이 건방진 독재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호랑이에게도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우리의 속담을 놓고 생각해보자. 호랑이에게 물려가서 죽는 사람이 무수히 많은데도 속담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정신의 과대평가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마음이 모든것의 주인공'이라느니 '이 모든것은 마음이 다 만들어낸다'는 불교계의 격언도 마찬가지다. 생각하는 기능을 과대평가하는 풍조는 사람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간단하다. '심왕心王' 즉 '마음이 임금'이란 말이 악이용되고 있는 병폐를 바로잡고 싶은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생각은 임금이 아니다. 차라니 '생각은 종'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도 아주 유능한 종, 정말 훌륭한 종이란 말이다. 무엇을 부탁해도 척척 잘 해내는 종을 한 번 연상해보자. 사람의 마음, 사람의 생각은 그러한 종과도 흡사하여 무엇을 시켜도 잘하고, 잘하고서도 자기가 종이기 때문에 잘했다는 건방짐이 없다. 그러나 한 번 이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상적인 혼란에 빠진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부처님의 길이든 하나님의 길이든 길은 만인에 평등하고 공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길에 독재란 있을 수 없다. 좋은 사람이 밟고 지나가든 나쁜 사람이 밟든, 길은 말이 없다. 인종도 따지지않고 귀천도 가리지 않고 빈부귀천, 남녀노소, 선악호오 등등 일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누구든 자기를 밟아가주는 것만이 그저 고마울 뿐이라는 식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임금이라고 부르는데에 반대한다. 차라리 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종이 일시에 독재자로 변신한다면 어떻게 될까. 난리가 난다. 못할 짓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고 결국은 자기도 죽는다. 그것이 난리다. 무서운 일이다. 전율할 노릇이다. 그런데도 요즈음 많은 종교인들이 종을 독재자로 만들어놓고 난리를 자초하는 비극을 연출한다. 이러한 난리로 덕을 보는 자는 누구고 피해를 입은 자는 누구인가를 똑똑히 알아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 같은 것을 본다. 종이 종 노릇만 잘하면 그것은 사는 길이고 종이 독재자로 변신하면 그것은 죽는 길이다. 왜 종이 독재자로 변하는가?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가. 생각이 스스로 그러는가. 아니다. 마음이나 생각이 자기 스스로 그러는게 아니다. 만일 자기 스스로 그런다면 그건 마음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종이 아니었지.

불교에서 말하는 망상이나 탐욕처럼 어디서 생겨나오는지 근원도 불분명하고 소속도 불분명한 정말 엉뚱한 놈이 불쑥 나타나 종의 유능하고 훌륭함을 훔쳐가는 정권쟁탈적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 결과 갑자기 종이 독재자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종이 독재자로 변신할 때, 정말 종인 마음이나 생각은 기가막혀 어안이 벙벙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쑥 나타난 그 엉뚱한 놈에게 악이용당하는 이적행위를 연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능한 종은 한 번도 변신한 적이 없는 것이다. 엉뚱한 놈, 망상이라 할까 탐욕이라 할까, 그 엉뚱한 놈이 유능한 말馬같은 종을 타고 다니면서 별의별 짓을 다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꼭딱스럽게 말한다면 유능한 종, 훌륭한 종이 그 훌륭함과 유능함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도현상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뿌리게 하는 종교계의 가지가지 부패상은 모두 당사자들의 이러한 주객전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전도현상 즉 뒤바뀌고 뒤틀리고 뒤집힘을 바로 잡지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골똘해질 수 없다.
만일 거기에도 골똘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골똘은 불교에서 말하는 골똘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주어야 한다. 고양이도 쥐를 잡으려면 골똘해지고, 도적들도 거사직전엔 골똘해지고, 귀신들린 무당에게서도 모종의 골똘을 볼 수 있다. 골똘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누구의 골똘이냐가 문제다. 어떤 골똘인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래서 나는 따짐없는 골똘은 진정한 골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 다시 말하면 종으로 하여금 영원히 좋은 종노릇하게 하는 작업이 바로 따짐이라고 생각한다. 남전대장경을 보면 부처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떤 제자는 '이젠 잔소리 안듣게 됐다'고 좋아했다 한다. 부처님의 잔소리는 항상 따짐의 성격을 지닌다. 부처님 스스로도 자기자신을 '따지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따짐은 마음의 중요한 기능이며 생각의 기능이 제대로 잘 돌아가게하는 일종의 윤활유다.

 

몸짓의 언어와 몸의 언어


잘 따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맑아야 하고, 정신이 깨끗해야되고, 태도나 자세가 올바로 되어있어야 하고, 아는것이 많아야 하고 등등 구비해야할 조건들이 제법 많다. 나는 오늘 여기서 우리의 언어와 논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불교에서 말하는 언어는 한가지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사람들이 보통 언어라고 말하면 <몸짓>의 언어를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깨친이의 언어를 보면 우리들이 보통 쓰는 몸짓언어와는 다른데가 있다. 이를 나는 <몸의 언어>라고 부른다. 보현행원품의 언어도 <몸짓>의 언어가 아니고 <몸의 언어>라는 사실에 눈을 뜨면 독경에 큰 도움이 된다. 첫째 제대로 골똘해질 수 있고 또한 잘 따질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양자는 어떻게 다른가?

<몸짓>의 언어가 어떤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도구라는 성격을 지닌 것이라면
<몸의 언어>는 가지가지의 구체적인 것들이 모두 함께 여기저기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을 때 이러한 현상을 총체적으로 직관하는 상징성을 지닌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하는 경우, 또는 사랑할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런 경우 몸짓이 언어는 정말 무력하다.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말을 안 해버린다. 침묵이다. 종교계의 성자들은 우리더러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할 수 없는 것이 원순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가. 말이 안된다.

그렇다. 몸짓의 언어로는 말이 안될때 나오는 말이 <몸의 언어>이다.
죽음은 분명 삶이 아니고, 삶은 또한 죽음이 아니며, 깨지고 부서지는 파괴가 곧 깨치고 살아나는 건설은 아닌데, 선사들은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고 깨짐이 깨침이라고 말한다.
<몸짓의 언어>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말도 안된다며 팔짝 뛰겠지만 <몸의 언어>가 무엇인줄 아는 사람들은 그 때 자기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줄을 안다.

부처님의 최초법문으로 알려져있는 <사제법문>을 해석할 때도 우리는 똑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몸짓의 언어밖에 모르면 열반은 항상 저 멀리 있는 남의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열반의 즐거움을 얻기위해서 괴로움을 없애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그렇지만, 몸의 언어에 통달한 사람은 괴로움이 곧 즐거움임을 안다.
소승의 생멸사제生滅四제(컴 한자없음)와 대승의 무생사제無生四제는 이렇게 다르다.
왜 대승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경전을 다시 썼을까?
소승경전등이 모두 <몸짓언어>로 쓰여졌기때문에 융통자재한 <몸의 언어>로 쓰여진 불경이 필요했던 것이다.

보현행원품을 해석할때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은 몸짓의 언어로 해석하려하면 허황한 소리가 되고만다. 나의 몸을 해석할 때도 몸짓의 언어로 풀려하면 이건 사실과 다르지않느냐는 불평이 절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따짐과 골똘을 되풀이 하는 과정에서 사물을 보는 내 눈이 바뀌어지면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니고 내 몸은 몸이 아님을 알게된다.

여기서 <몸짓의 언어가>가 아닌 <몸의 언어>가 탄생한다.
한 번 몸의 언어가 무엇인줄 알게되면 그 때엔 몸짓의 언어를 더 자유자재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몸짓의 언어밖에 따로 몸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의 언어는 몸언어의 구체적인 일합이 된다. 그리고 옛날 몸의 언어에 거부감을 가졌던 시절, 다시 말하면 입을 연 이상 말은 몸짓의 언어라야 말이지, 몸짓언어의 문법과 논리에 어긋나면 말이 아니라고 버티던 시절의 혼란을 극복하게 된다. 앞으로 우리들은 이러한 말을 기회있을 때마다 더 해야할 것이다.

 

부처님의 공덕


보현행원품이 맨먼저 들고나온 문제는 부처님의 공덕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따지는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부처님의 공덕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지전능이라는 말도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다. 부처님의 공덕은 아무리 많은 부처님들이 아무리 오래도록 쉬지않고 설명한다 할 지라도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보현행원품은 잘라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위대한 공덕을 수행자는 모두 직접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커다란 원을 세우면 된다.
보현 보살은 이 커다란 원을 열가지로 설명한다. 이것이 유명한 보현보살의 십대원이다.


1. 부처님께 절하고
2. 부처님을 찬탄하고
3. 널리 공양하고
4. 업장을 참회하고
5. 남이 잘한 일을 자기가 잘한 일처럼 기뻐하고
6. 설법을 청하고
7.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하고
8. 부처님을 본받아 배우고
9. 항상 중생편에 서고
10. 자기가 지은 공덕을 남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상의 열가지 일들이 따로 놀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를 하든 그 하나속에 다른 아홉이 다 녹아들어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첫째의 예경을 할때 그 마음의 찬탄과 공양, 참회등등을 포함하여 마지막의 수순과 회향까지가 다 동시에 성취되어야한다.
이렇게 되려면 경을 읽는 사람의 의식이 바뀌어져아 한다.
경을 읽는 사람의 의식이 흩어져있거나 또는 굳어져 있어서 <사람 따로 경따로>여서는 안된다.
사람의 의식상태가 그러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열가지의 일이 동시에 성취될 수는 없다.
경을 읽는 사람의 의식속에 열 가지가 다 들어와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의식이 어디에 집착해 있지않고 허공처럼 모든것을 포용할 수 있도록 확대되어있어야 한다. 확대된 의식으로 경을 읽는 것과 어디에 집착된 의식으로 경을 읽는 것은 천양지판으로 다르다.

부처님께 절한다,
사람들은 불교의 사원을 가리켜 절이라고 부른다. 왜 절이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가서 절을 하니까! 절이라는 말을 놓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국말 어원사전부터 먼저 찾아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절이란 말이 실지로 언제부터 씌여졌는가를 조사할 것이고 이리하여 나중엔 절이란 말이 옛날 어느 문헌에 처음으로 나낱났다느니 신라때 이두문자로는 뭐라했다느니 등등 말이 많을 것이다
.
그러나 오늘 나의 관심사는 그런것에 있지않다. 오늘날 많은 불교도들이 절에가면 의례 절을 많이 한다는 사실, 그것이 나의 관심사다. 절이라고 하나 예배당이라고 하나 그 이름이야 어떻든 그 내용은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이 나타나면 다른 점을 지적하기에 신바람이 나는 사람들을 이 자리에서 거론할 필요는 없다. 다른 것 속에서도 같은 것을 발견할줄 아는 지혜의 눈을 가져야겠다. 절에서도 예배당에서도 그 속에서 실지로 벌어지는 일이 <절>이라는 사실이 경이롭지않은가.

종교의 세계에서 절은 빼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절은 않고 말만 많이 한다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말을 잘하는 것>보다는 <절을 잘하는것>이 선행돼야할 것같다.
그럼 절을 잘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는 절의 종교적인 의미를 한 번 생각해보자. 사람이 절을 할 때는 대개 절을 받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절에가서 하는 것은 부처님에게 하는 절이요, 예배당에 가서 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절이요,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집에서는 부모님께 등등 모두 대상이 있다. 대상은 다 다르지만 그러나 공통점은 절하는 나를 낮추고 절받는 상대를 높인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만일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절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절이 아니다 선거때마다 보는 풍경이지만 한 표 찍어달라고 굽신거리는 절, 아부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의 절은 종교적인 절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이 공부하려는 보현행원품의 제 1소원인 예경제불원은 종교적인 절의 불교적인 의미를 가르쳐준다.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지금 불교인들은 절에가서 절을 한다.
그러나 보현행원품은 어디서나 절을 하라고 가르치고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티끌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이란 말은 모든것이 다 부처님이란 말이다.
그러한 모든 부처님께 절을 하라는 말은 어디서나 절을 하라는 말과 같다.
우리는 여기서 부처님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옛날 인도 사람들은 우리들이 살고있는 지구를 티끌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요즘 과학자들이 모든것은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비슷한 말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티끌의 수는 무한정 많을 것임에 틀림 없다. 고대 인도인들의 우주관은 아주 방대하여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세계밖에 또 그러한 세계가 있고 또 그 세계 밖에 그러한 세계가 있는 식으로 끝없이 세계는 중중무진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가 모두 티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무한정한 세계의 모든 티끌 하나하나에 모두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문자 그대로 무한정으로 어디에나 계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절은 그러한 부처님께 절은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그것을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느냔 말이다. 과학실증적 사고방식에 물든 사람은 믿기 어려운 노릇이다. 여기서 보현행원품은 믿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원>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그 믿음은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든지 아니면 모르지만 불경에 그렇게 써있으니까 믿는다든지 하는 그러한 믿음이 아니고 내 눈에 확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말도 필요없게 된다. 내 눈 앞에 뚜렷이 드러났는데 믿고자시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믿음은 여대목전이 안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믿는다는 말은 아직 안 드러난 사람에게나 필요한 말이란 말이다.

한 예를 들어 말하자면 가령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한국 사람들이 미국이란 나라가 실지로 지구상에 있느냐는 질문 앞에 여러가지 증거를 대면서 믿는다는 말을 쓸 수 있지만, 일단 미국에 입국하여 미국에 사는 사람은 미국의 존재에 대해서 믿느냐 안믿느냐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대목전'이라는 말은 믿음 이상의 경지임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 절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여대목전>이다.

나랏님도 안볼때는 욕을 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임금님 앞에서는 욕은 커녕 정신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리라. 부처님께 절을 할 때 부처님이 옆에 계신듯 한다는 말은 이러한 예경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한 문학적 형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문학에는 비유문학 이상의 것이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비유가 부서지는 자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상상의 차원이 아닌 실지를 드러내려고 애쓰고있는 대목이다. 그 때에 동원되는 말이 '여대목전'이다.

 

번역의 문제점.


이제까지 나온 화엄경 보현행원품 우리말 번역들이 과연 예경제불원에 나오는 <여대목전>이라는 말을 제대로 처리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여기서 <여대목전>이라는 말은 제 2칭찬 여래원에 나오는 현전지견의 '현전現前'과 마찬가지로 수행자의 어떤 경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대목전>이란 말이 <몸짓 언어>가 아닌 <몸 언어>라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할 것 같다.

운허스님은 그것을 보현행자가 부처님을 받드는 모습을 수식하는 말로 본듯하다. 그래서 그 번역은 "보현의 수행과 서원의 힘으로 깊은 마음을 일으켜 눈앞에 뵈온 듯이 받들고..."가 되었다.
"받들고"란 말이 본문에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글자를 삽입해서까지 드러내고자 하는 운허스님의 뜻은 오히려 분명하다.

운허스님은 '여대목전'을 하나의 구체적인 몸짓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법정스님도 그의 '나누는 기쁨'에서 운허스님의 번역을 그대로 따르고있다. 그러나 광덕스님은 그이 <보현행원품 강의>에서 그것을 깊은 믿음을 수식하는 말로 보고서 "..내가 보현행원의 원력으로 눈 앞에 대하듯 깊은 믿음을 내어서.."라고 번역하였다.

한 분은 '여대목전'을 보현행자의 예경하는 행위를 수식하는 말로 보았고,
한 분은 보현행자의 신심을 수식하는 말로 보고 있다.

이러나 저러나 결과적으로는 둘 다 똑같이 그 많은 부처님을 눈 앞에 뵌 듯이 예경한다는 뜻을 깔고 있으므로 어느것은 옳고 어느것은 그르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을것 같다. 그러나 <여대목전>이란 말이 원래 안계신 곳 없고 안계신 때 없이 일체가 부처님인 화엄의 세계와 예경하는 나하고가 극적으로 만나는 대목을 상징적으로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말을 번역에 반영해야하지 않을까?
<나와 부처님>이라는 종교적인 체험을 몸짓세계의 한 예인 '여대목전'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는 본문의 핵심메시지를 좀 더 분명히 드러내는 새로운 번역이 나왔으면 좋겠다.

 

비유는 만능이 아니다.


불교문헌엔 비유가 많다. 불전의 비유법은 글쓰는 사람이 독자의 이해를 돕기위해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가장 비근한 예를 가지고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설명하는 문학적인 쟝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유만을 알아들을 뿐 그러한 비유를 통해서 밝히고 싶어하는 글쓴이의 저의를 잡지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번에 우리는 보현행원품 예경제불원에 나오는 '여대목전'이란 말을 가지고 한참동안 논란을 벌였다. 글자만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뭔가를 마치 눈 앞에 대하듯이 그렇게 분명하게'라는 뜻이니 조금도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등장하는 문장 전체의 흐름을 보면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우선 이렇게 물어보자.
무엇이 마치 내 눈 앞에 대하듯 하느냐.
고.

보나 안보나 그것은 부처님이다.
그러나 그 부처님은 화엄적 부처님이지 절간의 불상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부처님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내 눈앞에 뵌듯이 본다"라고 말할때 혹시라도 이를 반화엄적인 부처님으로 바꾸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계해야할 것은 부처님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대상화하면 화엄사상이 아니다.

불경엔 부처님을 대상화하는 장면도 많다. 그러나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여대목전'이란 표현은 일즉일체적 화엄의 연기적 세계가 추호도 의심없는 여법한 현실임을 드러내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제목을 어떤 상상의 세계를 수식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될것이다. "마치..."라는 말로 시작하는 어법을 중국의 한문과는 언어학적 족보가 다른 서구의 영어로 번역할 때 그것은 백발백중 가정법이 되고만다. 우리는 보현행원품의 '여대목전'을 이해할 때 대상화나 가정법의 오류에 오도되지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나도 없어지고 부처도 없어지고 그러면서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닌 화엄의 세계로 녹아들어가는 것을 '여대목전'이라 말한 것이 아닐까.

불경의 목적은 말만을 전달하는 데에 있지 않다. 담겨진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우리들이 처음 이 문제를 가지고 논란을 벌였을때 우리의 잠정적인 결론은 운허스님처럼 부처님을 '받드는 모습'을 수식하는 말로 볼 것인가 아니면 광덕스님처럼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깊이'를 나타내는 말로 볼 것인가로 요약했지만 실지문제는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그 때에 우리가 부딪친 문제는 <부처님이 누구냐>의 문제였고

그것은 동시에 <나는 누구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뭐냐>를 묻는 불교의 근본문제였다.

우리의 질문은 셋으로 나뉘어있지만 그러나 그 답변은 셋으로 나뉘지않고 오직 한 마디, <여대목전>이란 말로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대목전이란 말은 부처님이 누구임을 그림을 그리듯 밝히고 있고 또한 절을 하는 내가 누구임을 밝히고 있으며, 동시에 믿음이 무엇임을 밝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절을 하는 나와 절을 받은 부처님과 그리고 이들 둘을 잇는 믿음,
이 세가지가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있는 구조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여대목전'이다.
부처님을 볼 때, 절하는 나를 보고 절하는 나를 볼때 부처님을 보며 이렇게 둘을 함께 보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셋의 하나됨이 너무나 분명함을 '여대목전'이라 말한 것이다.
보현행원품의 저자는 보현신앙의 어떤 역동적인 장면을 드러내려고 애쓰고 있는것 같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묻고싶다.

<무엇이 마치 내 눈 앞에 대하듯 '여대목전' 하는가>
고.

그에 대한 답변은 바로 <화엄경의 연기적 세계>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계가 여대목전이 되면 '부처님이 옆에 계시듯'이라는 따위의 잠꼬대같은 번역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대목전'을 단순한 형용구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이것이 불경은 몸짓의 언어로만 읽어서는 안되고 몸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의 논리이다.

그러면 영어권에서는 이 대목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잠깐 살펴보자.
1930년에 나온 D.T.Suzuki의 영역은 다음과 같다.
"And because of the virtue of Samantabadra's life of vows a deep faith is awakened in a Bodhisattva's heart, and he will feel as if he were in the presence of all these Buddhas..."

스즈끼는 '여대목전'을 "as if he were in the presence of all these Buddhas..."라 영역했다. 여기서 as if he were로 시작되는 영어구문은 가정법이다. 스즈끼는 '여대목전'을 현실로 보지않았다. 그의 화엄경 번역에 동원된 언어는 몸의 언어가 아니고 전형적인 몸짓의 언어다. 사실 이것은 언어의 한계일지 모른다. 언어는 누구의 언어이든 현실적으로는 몸짓의 언어를 빌려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몸짓의 언어로 몸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불경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종교의 세계에서 경지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스럼게 실감하게 된다. 부처님께 예경을 드리는 것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다. 천지만물이 온통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온 몸의 일함이다.

1982년에 나온 Dharm Realm Buddhist University의 영역은 다음과 같다.
"But because of the power of Universal Worthy Bodhisattva's practice and vows, I have profound faith in those Buddhas and truly believe in them, just as if they were standing right before my eyes..."


법계불교대학의 영역도 스즈끼의 번역과 똑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철두철미 몸짓의 언어로 일관해 있으며 중요한 현전의 소식은 송두리째 다 빠져 나가버렸다.
내가 지금 이렇게 심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의 번역에 나타난 'as if'구문이 못마땅해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번역을 읽고서 중중무애한 화엄연기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에서는 화엄경이 말하고자 하는 부처님도 드러나 있지않고 절하는 자기자신도 드러나 있지않으며 부처님과 자기를 잇는 믿음도 드러나있지않다. 아니 드러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다. 몸짓언어가 몸언어의 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있다.

'여대목전'이란 말은 같은 여如란 글자가 처음에 나오기 때문에 영어로는 가정법으로 처리하기 쉽다. 우리는 보현행원품이 '여대목전'을 하나의 비유로 쓰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하나의 엄연한 현실임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사실이 되어야 의심이 생기고 의심이 생겨야 기가 꽉 막히고, 그래야 마침내 종래의 잘못된 불타관, 인간관, 신앙관 등등이 일시에 부서지는 대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심을 할수가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 반야삼장이 한문으로 번역한 40권 화엄경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것 아니냐고.
응당 나와야 할 질문이다.

나는 이것을 문자화의 한계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당나라 때 불경을 불지르는 성상파괴적 사건들이 일어났던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경을 읽고 또 읽으면 이 점은 스스로 명백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번역은 불경의 메시지가 드러나도록 도와야 하며, 뿐만 아니라 불경의 세계가 그림처럼 현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의심이 생겨야

1962년 내가 동대 대학선원 강사일을 보고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점잖은 거사님이 가끔 선원을 찾아와 종일 참선을 하시곤 했다. 불교계의 원로 지도자로서 모두들 예우가 극진했다. 이 거사님이 어느날 당신이 불교를 처음 만났을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기는 불교를 아무에게서도 배운적이 없는데 처음 금강경을 읽었을때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고 했다. 그 분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고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난 뒤로 나는 그 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깨치면 어느 불경을 읽어도 막힘이 없고, 깨치지 못하면 경을 아무리 오래읽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존경받는 거사님은 분명 당신이 깨친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한가지 원칙이 있다.
�친 경지를 우리의 잣대로 재려고 들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깨친사람과 깨치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려 할 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지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보현행원품을 읽으면 환희심이 난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인것 같다. 그러나 보현행원품은 읽으면 읽을수록 의심이 커져가는 것도 사실이다.

의심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읽고 또 읽으면 풀리는 의심이요,
다른 하나는 읽을수록 더 커져가는 의심이다.
후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일종의 화두같은 것이다.

불경에 <일즉일체 일체즉일 一卽一切  一切卽一> 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며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뜻이다.
신라의 고승, 의상이 지은 법성게의 핵심사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말은 불교의 연기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이런 연기의 도리를 놓고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을 흔히 본다. 분명 환희심이 난 사람들이리라.
이말은 내가 일자一者이면서 동시에 일체자一切者이기 때문에 나의 삶 자체가 일체자다울때 스스로 터득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내가 평소에 하는 것을 돌아다 보면 영 일체자답지 못하다.
내가 왜 그럴까 하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이러한 의심이 수도에 불을 붙인다.
보현행원품 예경제불원에서 부처님도 무한량 많고 내 몸 또한 무한정 많은데 나의 그 많은 몸 가운데 한 몸 한 몸이 그 많은 부처님 가운데 한 분 한 분 나아가 절을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하냔 의심이 없을수 없다.

보현행원품을 독송할 때 일어나는 이런 의심을 우리는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런 의심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의심에는 여우의 의심처럼 방정맞은 것도 있지만, 자기의 근본적인 결함을 고발하고 마침내 그 한계를 극복하는 운동력이 되는 의심이 되는 의심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보현보살의 원력

'여대목전'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따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보현행원력>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화두를 만난다. 보현보살님의 원력이 아니고서는 내 마음에 깊은 믿음도 안 생기고 여대목전도 안되는 것이다.
보현행원력으로 말미암아 믿음도 생기고 여대목전도 된다. 그 때에 우리의 업도 모두 청정해지며 끝없는 예경을 드릴 수 있게 된다.
보현보살의 원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알겠다.

바람願과 믿음信과 절함禮 가운데 바람이 으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바람은 보현보살의 바람인 것이다.
다음에 보현행원품의 해당- 우리의 사상에 맞도록 의역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이 세상에 모든 부처님들
보현보살님의 원력으로
깊은 믿음 생겨
눈 앞에 뵈니
몸과 말과 뜻이 모두 깨끗해져
항상 절을 한다.

보현보살님의 원력이란 뭘까.
이 경은 원래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설법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아이보현행원력고我以普賢行願力故라고 말할 때의 我는 응당 보현보살을 가리킨다.
그런데 또 보현이라는 말이 또 나온다.
이때의 보현은 누군가. 
앞에 我라는 대명사로 받은 보현보살과 동일인인가 아닌가.
앞의 보현은 구체적인 보현이요 뒤의 보현은 보편적인 보현인가 가지가지의 추론이 가능하다.

다만 여기서 적당히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은 <보현행원력>이라는 말이 하나의 화엄학적 전문용어라는 사실이다.
여래의 수승한 공덕과 보현행자가 닦을 십종의 광대행원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처음에 말을 시작할 때에는 <수승한 여래의 공덕을 성취하려면 내가 열가지 광대행원을 닦아야 한다>고 인과법문같은 소리를 했지만 여래의 실지공덕에는 이미 광대행원이 포함되어있다.
그래서 경은 그 첫머리에서 여래의 공덕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아무리 오래도록 계속하여 설명해도 설명못한다고 못박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현행원력을 여래의 공덕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보현행을 실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지만 누군가가 하기어려운 일을 능히 해냈을 때
사람들은 <보현행원의 덕택>이라고 치하한다. 이러한 경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개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남이 치하하는 경우다. 이 때는 그 좋은 일을 성취해 낸 원동력이 실천자 자신에게 있는듯이 들린다.
다른 하나는 남의 치하를 겸양하는 경우인데 그 때는 공덕의 주인공이 자기가 아니고 보현보살이라고 공을 보현보살에게 돌리는 것처럼 들린다. 여기서 공덕이 나로 말미암는가 아니면 보현보살 덕택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옛날부터 불교학자들은 성불의 원동력을 자력으로 보는가 아니면 타력으로 보는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논란을 거듭해왔다. 지금 우리도 그와 비슷한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보현공덕은 자력인가 타력인가.
불교의 교리 안에서 정답을 끄집어내려고 애쓰지말고 솔직히 느낀대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보현행원품을 열심히 읽었더니 일이 이렇게 잘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 부처님은 이마를 찌뿌리실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모두가 보현보살님 덕택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부처님은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이제 여러말 말고 보현행원품을 독송하자.
아래에 언제 읽어도 신심나는 예경제불원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 번 적어본다.


허공계가 다하면
나으 예경도 다하겠지만
허공계는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이 예경도 다함이 없다.
이와같이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으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이 예경도 다하겠지만
중생계, 중생의 업,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이 예경도 다함이 없다.
생각 생각 상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

 

보현행원품은 원래 독송하는 글이다. 독송을 계속하면 새 맛이 끝없이 우러나온다.
특히 노래의 후렴같은 위에 적은 마지막 대목은 열가지 행원의 하나 하나마다 그 마지막에 꼭 나온다.

요즘에는 신앙이나 기도라는 말을 듣기조차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기도라는 말이 잘 못 이해되고 있는것같다. 비단 '기도'라는 말 뿐이 아니라, '성'스럽다든지 또는 종교적이라는 말 자체도 듣기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두가지가 생각킨다.

첫째는 종교를 내세움으로써 세속적인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의 횡포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풍조에 식상한 것 같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던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잿밥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기업이 되어있으며 그러한 기업의 성공을 위해서 하는 짓은 가위 무소불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심각성이 위험수위를 넘은 것 같다.

둘째는 종교적인 전문용어에 대한 국민 공통의 통일적인 이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좋은 불교용어 사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훌륭한 불교서적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문제는 돈의 위력이 옛날의 독재자를 방불케하는 지구촌 시대가 등장하면서 세상은 지금 커다란 혼란에 빠져있다는 데에 있다. 종래의 가치와 신념의 체계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있는것은 오직 돈의 가치와 돈에 대한 신념 뿐인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좋은 사전이 나오고 훌륭한 책이 나온다 할 지라도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 이를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교인들의 말에 귀 기울인 다음에는 반드시 이를 불교인들의 행위와 비교해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침을 뱉고 돌아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을 선지식의 방망이로 알고 우리들 자신을 반성하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지금 천하를 풍미하는 이러한 병폐에 대한 좋은 약방문이 바로 보현행원사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보현행원 사상이 좀 더 널리 보급됐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보현사상의 보급이란 좋은 말을 앞세우기 보다는 자신부터 보현행을 실천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들이 지금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사실은 보현행을 실천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밝히기 위해서다.
이제 보현행원품 제 1장 예경제불원을 마치면서 그 결론을 한 마디로 말하라한다면,
나는 그것을 모두에게 '절'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옛날 내가 어렸을 때는 부모존경이 대단했던것 같다. 출타를 할 때도 절은 했고 돌아와서도 먼저 부모님께 절을 했다.
그러한 공경스러운 절을 일체 중생에게 하자는 것이 보현사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일체중생이 부처님이란 말이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똑같은 사상을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남은 남이 아니란 말이다.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 많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것이 세상사람들의 실지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위해서 불철주야 가진 애를 다 쓰면서 살고 있다.

꿈 속에서도 자기자신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는게 사람아닌가.
여기서 보현보살의 말씀이 들려온다. 남들이라고 해서 나와 동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너 자신이라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너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남들이 얼마나 소중한 자신인가. 그렇게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절을 하는 것이다.
고개만 꾸뻑 수그리는 절이 아니다. 온 몸을 땅바닥에 내던져 엎드린다고 그것이 절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남들은 나 자신 소중히 여기듯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이 절이다. 아주 멋진 현대판 인간존중 사상이다.

 

....마치며.
글쓴이의 마음을 조용히 따라가면서 적어본 것입니다. 가르침 주신 박성배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곰곰히 내용을 돌이켜 보며, 모든 분들의 성불을 기원합니다.... 
보원합장 2006.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