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제 2편 위정 爲政)

2007. 11. 11. 16:47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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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제 2편 위정 爲政)

 

⑫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되느니라."
(子曰, 君子 不器)

 

⑭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보편적이되 편벽적이 아니고 소인은 편벽적이되 보편적이 아니다."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단을 행한다면 해로울 뿐이니라."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강독>

위의 장(章)들은 공자의 이상적인 인간상(君子)을 그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무고정(無固定) 무아집(無我執)의 인격으로 보편적이며 중도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을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그릇(器)은 고정되어 있어서 용도가 결정되어 있다. 사람이 어떤 한가지로 고정되어 기물적 인간으로 되고 마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오히려 어떤 그릇도 채울 수 없는 무고정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위정(爲政)과 관련해서 보면 만일 어떤 정치가나 혁명가가 기물적 인간으로 된다면 그 폐해는 엄청날 것이다.
시스템을 경시하거나 실무적 능력을 무시하는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그 완고함이나 고정됨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不器는 周而不比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다.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려는 보통의 경향을 넘어설 때 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있고, 개인의 이익이 높은 가치로 보호되는 현대에서 이러한 인간상을 지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개인의 생명력이 여러 가지로 억압되던 시대에는 그 개인의 생명력을 해방하는 것이 가장 큰 테마로 된다. 따라서 오늘 날의 개인주의는 그런 점에서 인간과 사회의 진화에 필수적인 과정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되면 오히려 생명력을 훼손하는 결과로 되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반(反)하게 된다.
개인주의를 경과하고 있는 현대는 바로 이런 점에서 공자의 시대보다도 훨씬 이 周而不比라는  테마와 직면하고 있다고 본다.
누구하고나 어떤 세력과도 타협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보며 오히려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이익 또는 진리가 어디 있는가를 끝까지 추구하는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구는 결국 중도(中道)와 통한다고 본다.
'異端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극단(極端)이 갖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길게 보면 인류는 중도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짧은 기간을 보면 무수히 많은 극단을 경험해 왔다. 사람에게는 극단으로 흐르기 쉬운 속성이 있는 것 같다.
집단주의의 폐단이 심하면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나오기 쉽다. 물질주의의 폐단이 심하게 나타나면 이번에는 마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에 빠지기 쉽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자연을 해치는 정도가 심각하게 되면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번엔 극단적인 생태주의가 나타난다. 현상만 보면 극단과 극단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잘 보면 거친 방법으로 중도에 이른다.
사회와 물질, 인지(人知)의 발전은 이제 부드럽게 중도에 이르는 것을 가능케 하고 있다.
시대정신은 공자의 시대에 비해 오늘 날이야말로 이 부드럽게 중도에 이르는 길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

A; 보통 ‘큰 그릇이 되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그 말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불기(不器)는 그 보다 더 나간 표현 같아요.

 

B; 나는 사람이 잘 성장하는 것, 보다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생각을 잘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불기는 그런 것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C; 내가 보편적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진짜 ‘보편’일까 하는데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어려워요. 또 과연 보편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어요.

 

D; 확신이 없는 편이 진정한 보편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가볍게 주고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보편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생각되요. 나로서는 보편성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보편성이다’라는 사고방식은 오히려 보편성에서 멀어질 위험이 크다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되는 보편성이란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를 원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자유고 행복인지에 대해서는 그 시대, 그 사회의 환경에 따라서 또 개인의 입장이나 성격?취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그것이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의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E; 보편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어 가는 것 같아요. 정말 보편적인 것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요. 다만 일정한 시기 짧은 기간을 생각하면 그것이  다수에 의해 지지 받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소수가 보편에 가까울 수도 있지요. 길게 봤을 때 결국은 보편성의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고 생각합니다.

 

F; 지금처럼 개인주의가 성행하고 이기적인 상태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과거에 비해 힘든 것 같아요.

 

G; 일견 그렇게도 보이지만 과거의 집단주의적 공통성을 진정한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지금의 다양함이 개인의 벽에 막히지 않고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보편성을 획득해 가는 길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지금의 개인주의는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H; 요즘 이른바 ‘엽기’가 성행(?)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극단으로 치닫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때로는 파멸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도 돼요.

 

I; 나는 파멸로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한 극단(極端)임에는 틀림 없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의 자유 욕구의 극단적 표출이 엽기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아요. 일체의 도덕?윤리?인습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그 속에 있다고 봐요. 그러나 그것이 다른 것들 (어쩌면 더 본질적인 자유)을 침해하거나 훼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자각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자유 욕구’와 모순되면 스스로 부자유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지요. 

 

J; 이단(異端)과 극단(極端)은  다른 것 같은데요.

 

K; 그렇지요. 공자의 시대와 그 이후 오랫 동안 지배적인 사상 체계가 지배적인 힘과 결합되어 다른 생각은 이단으로 취급되었지요. 이런 시대에는 이단이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사조로 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이런 점에서 공자의 사상이 수구반동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원래 의도야 잘 모르겠지만 공자의 사상을 그 결과만 보고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처럼 다양성이 바탕이 되는 세상에서는 공자와 같은 분이 말하려고 했던 뜻이 극단(極端)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