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11. 16:57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仁을 좋아하는 것과 不仁을 미워하는 것 (제 4편 이인)
⑥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직까지 진실로 어진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진실로 어질지 않은 것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어진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나, 어질지 않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 어질지 않은 것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몸에 더하도록 하지 않는다. 하루를 능히 어진 것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 나는 아직 그렇게 하는데 힘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런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有能一日 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강독>
仁을 좋아하는 것과 不仁을 미워하는 것을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실태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오신 것 같다. 정말로 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不仁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不仁이 그 자신에게 붙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仁을 진실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남의 不仁을 보고 참지 못하며 그것을 비난하고 또 자신은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고 하는데 결과를 보면 자기가 비난하고 싫어하며 고치려고 한 그 것을 닮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본다.
부모의 성품 가운데 '이것만은 싫어' 하며 닮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 있다던지, 독재에 항거해서 열심히 싸운 사람들 가운데 독재적 성품이 나타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독재를 싫어 한다면 자기 몸에 독재적 성향이 붙지 않아야 진정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싫어' 하고 비난하며 반대하지만 이윤동기는 몸에 붙어 있다면 진정한 것은 아닌 것이다.
목적과 방법이 일관되어야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장은 참으로 음미하고 깊이 새겨야할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를 능히 어진 것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라는 말에서는 어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나는 하루 24 시간이 모자라!'라고 말하는 것이 연상된다.
'하루를 仁을 실천하는데 온전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술회하는 공자의 심정이 시공을 넘어서 느껴진다.
<대화>
A; 不仁한 것을 미워하는 것과 仁을 좋아하는 것이 꼭 같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공자께서도 仁을 좋아하는 것은 더 바랄게 없다고 하시면서 不仁을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건을 붙이고 있는데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지적한 것 같아요.
B; 저 자신의 경우도 仁이나 不仁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은 좀 뭣하지만 뭔가 어떤 사람의 행위나 태도가 거슬릴 때 잘 보면 그 싫어하는 요소가 자기 안에 있을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누구의 어떤 태도를 비난할 때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요소를 성찰하는 것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요.
C;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행위나 태도에 대해서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자기 성찰이 먼저다 하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네요.
서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이야기할 것은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 안에 있는 비슷한 요소도 함께 검토해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D; 저는 폭력을 싫어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폭력적인 사람이나 집단을 보면 어떻게든 때로는 폭력을 써서라도 그것을 중지시키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거든요. 실제로는 힘이 없으니까 못하지만요. (웃음)
E; 仁을 행하는 것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저는 뭔가 옳은 일을 해야한다고 늘 생각을 하지만 그 일을 하는 것이 정말로 즐거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돈 버는 일에 푹 빠진 사람이 '나는 하루 스물 네 시간도 모자라' 하듯이 정말 좋아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카페에 논어이야기 게시판을 보면 마을에서 진행한 강독과 김정필님이 그에 대한 답글로 올린 글 두개가 쌍을 이뤄져 있습니다.
오늘은 김정필님의 글도 함께 보내드립니다.
마을에서 진행한 강독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좋은 나날 되세요.^^
天地不仁 (김정필)
不仁을 보고 비판하고 지적할때 먼저 자신의 성찰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식으로 윗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는 듯 하다. 그 동안 <논어>의 글을 보더라도 공자가 단순히 인격적인 성품과 품성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윗문장은 항상 정확한 기준을 가지고, 보편타당한 원칙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 하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식이 아닌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원칙을 말하는 듯 하다. 그 원칙으로 仁을 사랑하고 不仁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 원칙대로라면 당연히 不仁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와 입장은 모든 매사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칙이 깨지게 된다. 아전인수가 되어서는 안된다.
폭행을 마구 저지르고 남을 괴롭히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폭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윗문장은 폭력을 제지하기 위해 폭력을 쓰는 모순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어쩔수 없이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폭력을 쓰는 저 아이 나빠, 미워"가 아닌 "당하는 사람이 너무 안됐다" "반드시 저지해야 해"라는 의미에서 폭력이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투쟁하고 싸우더라도 미움과 분노, 경멸없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조건 용서하자는 것도 아니다. 포용하자는 것도 아니다. 태양의 빛은 모든 만물을 살리지만 저 음습한 곳의 곰팡이는 죽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 죽임이 天地不仁(천지는 인자하지 않다)이다. 전혀 감정이 없다. 미워서가 아니라 새생명을 죽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다.
물론, 사회가 발전할수록 제지하고 방어하는 수단들이 고도화되고 첨단화되어 폭력적인 방법으로 범죄를 방어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지기는 쉽지 않다고 볼때 감정없는 대응은 매우 중요하다. 이미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다. 법이 바로 그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 감정을 배제하고 원리와 원칙에 의해서 범죄를 단죄한다.
공자시대는 무법천지였을테니 공자가 이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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