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정(無固定)의 삶 (제 4편 이인)

2007. 11. 11. 17:00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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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정(無固定)의 삶 (제 4편 이인)
 

 

⑧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라.”
(子曰 朝聞道夕死可矣)

 

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도 남루한 옷과 나쁜 음식을 수치로 여기는 자라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에 족하지 못하니라.”
(子曰 士志於道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이 세상 모든 일에 꼭 주장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으며 오직 의를 좇아서 의와 함께 살아가느니라.”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⑪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군자는 덕을 생각하지만 소인은 토지를 생각하고, 군자는 형(刑)을 생각하지만 소인은 은혜를 생각하느니라.”
(子曰 君子 懷德 小人 懷土 君子 懷刑 小人 懷惠)

 

⑭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벼슬이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그런 자리에 설 능력을 근심할 것이며,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에게 알려질 수 있는 능력을 구하라.”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강독>

‘아침에 도(道)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도(道)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주자연(宇宙自然)의 理와 그것에 부합한 인간의 삶에 대한 정상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생명체 일반이 그러하듯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가장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이 이 죽음이다. 거의 모든 종교는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궁극적 자유는 그가 임종의 순간에 자유로운 상태인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또는 그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도피에 불과하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이 많지만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피하려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라면 과연 죽는 순간 자유로운 상태일까.
살아서 도를 깨닫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관념을 정상화하는 것이 죽음의 공포와 부자유를 넘어서는 길이다.
관념을 정상화하는 것이란 관념을 우주자연의 리(理)에 맞게 하는 것이다.
우주자연의 리는 일체(一體)의 리(理)라고 생각한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의 리(理)일수도 있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섭리(攝理)하는 하나의 세계일수도 있고,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하나의 생명단위로서의 우주’일 수도 있다.
이 일체(一體)의 리(理)를 깨닫고 그것에 부합한 관념은 무아집(無我執) 무소유(無所有)라고 생각한다.
무아집(無我執)?무소유(無所有)야말로 정상적인 관념이다. 그러나 이 관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체득(體得)하는 것이다. 역(逆)으로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보면 자신이 얼마나 체득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상태가 될 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다.
악의악식(惡衣惡食)을 부끄러워하는 자(者)나 벼슬이 없음이나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 정도라면 더불어 도를 논할 만하지 않은 것이다.
무적(無適) 무막(無莫)은 무아집의 정상적인 관념으로 살아갈 때 나타나는 삶의 특성이다. 무고정(無固定)의 삶인 것이다.
오직 진리(여기서 義라고 한 것)를 좇아서 무타협(無妥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무타협이란 흔히 말하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비타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인 것이다. 자신에게 아집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거나 고집할 필요가 없는 그래서 굳이 타협해야할 필요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도를 실천하는 군자(君子)는 공의(公義;德과 刑)를 좇아 살지만 그렇지 않은 소인(小人)은 사리(私利;土와 惠)에 집착하여 산다.
군자(君子)의 삶이 자유로운 삶인 것이다.
살아서 자유로울 때 죽음도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대화>

 

A;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가 있는 것을 느껴요. 흔히 이것을 '참 나'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이 '참 나'가 온전하게 사는 것이 도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요.
무언가 자신이 객관화되어 보일 때가 있잖아요.

 

B; 흔히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하는데 그래야 실상을 볼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를 그렇게 보는 것 같아요. 아집(我執)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무아집(無我執)이 道라는 말이 수긍이 가네요.

 

C; 아집을 없애는 것이 무언가 지고한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길이기 때문에 원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무아집을 체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무아집을 지향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방향성만은 분명해야 할 것 같네요.

 

D; '꼭 주장(適)하지도 부정(莫)하지도 않는다'는 말에서 생각되는 것은 뭔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말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애매모호하고 그런 사람과 이야기하면 답답해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좋은 일 아닌가요.

 

E;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태도에는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 즉 무지(無知)에서 오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무적(無適)무막(無莫)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F;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말하는 것과 자신의 생각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를 것 같은데요. 오히려 아집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하면 자기 생각을 가볍게 말하기가 힘들지 않을까요. 혹시 상대방이 반대하면 어떻게 하나 등의 생각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참는 경우도 있잖아요? 또 다른 사람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구요.

 

G; 의(義)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주관이 아닌 뭔가 객관화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요. 주관에 사로잡혀 가지고는 의(義)를 발견하고 좇는 것이 안되겠지요.
그 때 그 때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완고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리라고 할까 정의라고 할까 그 의(義)를 찾아가는 모습이 그려지네요.
무고정(無固定)으로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거지요.

 

H; 저는 옷과 음식에 대해 많이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I; 그렇지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나 입자는 말은 아니겠지요. 아무렇게나 먹는 것하고 정갈하고 소박한 밥상은 다른 것 아닌가요.

 

J;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에는 불편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요즘 같은 소비 시대에는 더 그런 것 같아요.

 

K; 빵꾸난 양말을 그대로 신는 것과 기워서 신는 것은 분명히 다르지요. 이쁘게 기워 신으면 얼마나 멋있는데요.(웃음) 예술적 감각까지 나온다니까요.
그냥 신고 다니는 게으름은 부끄러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L; 은혜는 좋은 말인데 왜 은혜를 생각하는 것이 소인(小人)이라고 했을까요.

 

M;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시혜(施惠)를 바라는 뭔가 사리(私利)를 바라고 사리(私利)에 끌리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요. 군자가 형(刑)을 생각하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여기서 형(刑)이란 '바르게 하는 것'이란 뜻으로 쓴 말 같구요.

 

N; 요즘 선거가 생각되네요.  친분이 있거나  하다 못해 악수를 한 번해도 그 쪽에 표를 찍게 되는데 하물며 봉투 같은 것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가 바로 소인(小人)인가 봐요. (웃음)

 

O; 땅(土地)도 생각하고 덕(德)도 생각하고 함께 할 수는 없나요. 나는 그러고 싶은데.(웃음)

 

P; 안되기야 하겠어요. 그러나 땅을 생각하는 마음과 덕을 생각하는 마음의  바탕은 다를 것 같네요.

 

Q; 14장을 보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요즘은 벼슬이나 지위 같은 출세에 집착하기보다는 가족의 행복이나 자신의 행복 같은 것을 더 우선하는 풍조가 넓어지는 것 같아요.  또 윗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갈등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구요.

 

R;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 아닐까요. 그렇지만 아직도 자신의 행복이나 가족의 행복을 돈이나 지위 같은 것에 연결시키는 경우는 여전히 많은 것 같아요. 자신의 천성이나 능력보다는 우선 경제적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는데 급급한 것이 많은 사람들의 실태이기도 하구요.

 

S; 이 시대에 능력이란 어떤 것일까요?  사람마다 능력이나 적성이 다른데 그 능력이나 적성에 맞게 사회 안에서 자리잡아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적재적소(適材適所)라고나할까요.          

 

T; 사회가 정상적이고 관념이 정상적이라면 천성대로 사는 것이 모두가 행복한 길이 아닐까요. 천성이나 능력에는 우열(愚劣)이 없는 데도 그것이 있다는 관념과 그것을 제도화하는 사회야말로 비정상적인 것이지요.

 

U; 성공을 다른 사람과의 경쟁 속에서 자기의 능력을 나타낸 소수의 승자(?)의 것이라고 보는 관념은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인생의 성공은 지위나 명성과 관계없는 것 아닐까요.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어떤 사람이 음악가로써 명성을 날리는 것도 성공일지 모르지만 시골의 촌로(村老)로 늙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우선 그 재능을 즐기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함께 일하는 기쁨을 안겨주는 삶을 살았다면 그 또한 성공적인 삶이 아닐까요.

 

V;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 것 아닌가요?

 

W; 그렇지요.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을 세우고 싶은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평가에 마음을 뺏긴다면 역으로 자주성을 그 만큼 상실하는 것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