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一以貫之) (제 4편 이인)

2007. 11. 11. 17:01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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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一以貫之) (제 4편 이인)

 

⑫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으니라."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예(禮)와 양(讓)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그러나 예와 양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예제(禮制;제도와 문물)는 무엇에 쓰겠는가?)
(子曰 能而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而禮讓 爲國 如禮何)

 

 

⑮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예, 그러하옵니다."
공자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의 제자들이 묻기를,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욕에 밝다."
(子曰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강독>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인간도 생명체 일반이 갖는 자기중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선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자기중심성을 갖는 사람들이 모여서 인간 사회를 이룰 때, 이익끼리 충돌하면 결코 행복한 사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약육강식(弱肉强食)·적자생존(適者生存)의 대립과 쟁탈의 사회 속에서는 누구도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이것을 자각하고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이 인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우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도록 제도와 규범을 발전시켜 왔다.(사회제도의 진화)
또 물질을 풍부하게 해서 부족한 물자를 둘러싸고 쟁탈이 일어날 소지를 줄여 왔다.(생산력의 발전)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진화하는 것이다. 동물계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진화라고 생각한다.
사회제도가 진보하고 물질이 풍부해 졌지만 이익을 넘어서는 마음의 세계에서는 과거에 비해 그다지 나아가지 않은 오늘의 현실을 보며  공자의 말씀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공자는 실제적으로 접근하신다. 이익에 따른 행동의 불이익을 지적함으로써 이익을 넘어서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말씀으로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는 말씀이 읽힌다.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원망을 받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원망 속에서는 진정한 자유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군자와 소인을 구별해서 말한 것도 이런 점에서 인간이 진화해야할 방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군자라는 이상형을 지나치게 미화했다거나 보통 사람을 소인으로 폄하했다고 읽기 보다는 이익에 충실한 사람으로부터 이익을 넘어서는 사람으로 진화하는 것이 인간이 진화해야할 방향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런 진화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적 공기(空氣)가 필요한데 13장에서 예(禮)와 양(讓)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이것을 지적하신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도록 제도와 규범을 마련하는 것이 예(禮)라면 서로 양보하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되는 것이 양(讓)이 아닐까.
이 둘이 조화될 때 예(禮)와 양(讓)이 다 살려지는 것으로 될 것이다.
서로 침범하는 사회 속에서는 양보하는 마음이 생기기 어렵고, 이익을 넘어 양보하려는 마음이 자라지 않고는 아무리 제도와 규범을 잘 갖춘다해도 그 바른 실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의 도(道)는 일관되어 있다'라는 말에서 요즘 특히 생각되는 것은 목적과 방법의 일관됨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원하면서도(목적으로 하면서도)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이 대립 투쟁의 길이라면 뭔가 일관됨이 아니라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억압과 수탈, 차별과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투쟁이 불가피할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도 일관됨이 있어야한다. 사회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이 상당히 진전된 민주주의 제도에서 공자 이래 꿈꿔 왔던 이 일관됨이 현실적인 테마로 다가온다.
요즘 상생과 화해라는 말이 시대의 화두로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상생과 화해는 목적일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에서 일관되게 구현되어야할 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될 때 일관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는 말에서 충(忠)과 서(恕)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감히 피력해 본다면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충(忠)은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흔히 군주나 국가에 대해서 충(忠)이라는 말을 써 왔지만 그것은 한 면(가장 중요하게 여긴 관계 속에 구현된)일 뿐이다. 어떤 관계· 어떤 사람·어떤 일에 있어서도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은 경쟁이나 대립에서 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은 경쟁을 통해야 자기의 최고를 발휘하게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그것은 충(忠)과는 다르다고 본다. 충은 절대적 세계이지 않을까.
서(恕)는 자기와 다른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자기와의 다름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많은 진보가 있어 왔는데 이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자신이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충(忠)과 서(恕)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고로부터 자유스러운 상태라면 충과 서는 일관되는 것이고 일관될 때 진실한 것이다.
그 일관됨이 자신에게 향하면 충(忠)이고 다른 사람에게 향하면 서(恕)가 아닐까.

 

 

<대화>

 

A; 요즘 콩을 구입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농협을 통해 구입하는 것보다 생산자로부터 직접 구입하는 것이 지역 순환농업에도 일조하고 서로 이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뻔히 잘 알고 있는 생산자라서 그 콩의 상태가 아주 나쁠 때는 '이런 콩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어요. 손해도 손해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 같아 참 조심스러워요.

 

B; 눈 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세태 속에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양보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절대양보(絶對讓步)'를 하나의 지침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상당한 내공(內功)이 필요한 것 같아요. 원망하는 마음이나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용하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등이 일어나요.

 

C; 역시 절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내공인 것 같아요.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충(忠)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해요.

 

D; 절대양보도 좋지만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힘든 것 같아요. 역시 서로의 이익이 침범되지 않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직접 거래가 서로의 관계를 좋게 하지 않는다면 농협을 사이에 두고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예(禮)와 양(讓)의 조화점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E; '상대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니까 나도 내 이익을 먼저 생각 안 할 수 없다'는 악순환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그것이 모두의 행복의 길인데요.

 

F; 자본주의는 여기서 말하는 소인(小人)들의 세계가 아닌가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1차적 동기(動機)로 해서 성립되고 발전(?)하는 사회 같은데요.

 

G;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자본주의가 만일 이익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왔다면 벌써 망했을 거에요.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아서 지금 세계의 보편적 시스템으로 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서로의 이익이 충돌할 때 그것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시스템이나 약자의 이익을 위한 법적 제도적 노력들이 상당히 진척되어 왔기도 하구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기적인 것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것에는 이기적인 것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자신의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 오롯이 쓰고 싶어하는(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빼앗기거나 간섭받지 않고) 욕구가 지금의 제도와 부합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H; 요즘 양극화의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태를 보면 심각하더라구요. 지금의 제도 아래에서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공자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야 할 것 같아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결국 자신에게 더 큰 불이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 같아요.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빈곤층이 많아지면 국내 수요가 줄어들고 사회가 불안해지잖아요. 그런 속에서는 자기 만의 행복이나 자기 집단 만의 이익이란 있을 수 없지 않겠어요.

 

I; '약자(弱子)의 이익이 정의(正義)'라는 말이 있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옳은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요. 지금까지 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져 온 것도 사실이구요. 지금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이익은 어디까지나 이익이다라는 생각도 들어요. 약자의 이익이 정말로 의(義)로 될려면 그 욕구의 질(質)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의 사회변혁운동을 통해 이런 점들을 깊게 성찰해야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J; 현실적인 인간이나 사회의 실태를 보면 의(義)만 추구하는 사람이나 집단이라던가 이(利)만 추구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거의 없는 것 아닌가요. 개인이든 사회든 의(義)와 이(利)의 조화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자기 안에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함께 있지 않나요. 다만 그 조화점을 보다 의(義) 쪽에 가깝게 잡아가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자각이 절실하다는 생각은 들어요.

 

K; 얼마 전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요. '네 몸 네가 챙겨라. 네가 아프면 남편은 돌보지 않는다. 특히 한국 남편은.'라는 내용이었어요. 상당히 충격을 받았어요.

 

L; 특수한 경험을 너무 일반화하는 것 아닌가요. 나도 한국 남편의 한 사람으로써 좀 듣기 거북하네요. (웃음)
가정 안에서 특히 부부 관계에서 충(忠)과 서(恕)는 어떤 것일까요.

 

M; 우선 자신이 진실하게 되는 것이 충(忠)이 아닐까 생각해요.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이 꽉 차는 것이라고 할까요.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충(忠)이 아닐까요. 서(恕)란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 같구요. 부부 사이니까 쉬운 것 같지만 오히려 지난(至難)한 면이 있어요.

 

N; 동감이에요. 부부 사이니까 허물이 없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잘 들어나는 것 같아요.  상대에게 자신이 그리는 상(像)을 자기 생각대로 투여해서 그대로 안되면 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요. 오래 살면 살수록 서로가 더 잘 조화되면 좋은데 그 반대로 가면 끝장이지요. 서로 상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함정이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자기를 검토해서 자신의 진실성을 먼저 세우는 것이 충(忠)이고  상대에 대해서는 자기 식으로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는 자기 식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서(恕)라는 생각이 드네요.

 

O;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잘 안되는 것 아닌가요. 사랑의 표현 방식이야 세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마음이 서로 통해야 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겠지요. 그런 점에서 충(忠)과 서(恕)의 바탕이 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