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11. 17:02ㆍ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內自省) (제 4편 이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아니한 사람을 보면 나 자신을 스스로 살펴야 하느니라."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강독>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쉬운 말씀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잘 안된다. 어진 사람을 보면 흠이 없나 찾으려하고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면 비난하는 마음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배울 스승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공자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볼 만하다.
배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고함이나 오만이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얕보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인간으로서 진보는 어렵지 않을까.
어질지 않은 사람을 보았을 때 비난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쉽지만 잘 보면 그 싫어하는 요소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먼저 자신을 살펴보라(內自省)고 하신 것이다.
자신 안에 그런 요소가 없다면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심정과는 다른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서 용인하라는 이야기와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하고 남이 잘 못하는 것을 보면 내 안에도 그런 요소가 없나 살펴보는 삶이라면 그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길인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도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마음이 없이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사람도 자신의 허물을 고치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18장에 나오는 '은근히 간함(幾諫)'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보편적인 것이라고 보인다.
<대화>
A; 총체적으로 어진 사람이나 모조리 어질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 같네요. 대체로는 한 사람 안에 賢과 不賢이 함께 있지 않나요.
B; 그렇지요. 다만 사람에 따라 어느 쪽이 더 큰가하는 차이는 있다고 생각되네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賢을 키우고 不賢을 없애 가는 것이 아닐까요.
C; 비난하거나 얕보는 심정으로는 다른 사람과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없어요. 먼저 자기 안에서 선(善)을 키우는 것이 순서인 것 같아요. 오직 선(善)한 것이 주위를 선(善)하게 한다는 말이 생각되네요.
D; 지나치게 자기 성찰만을 강조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시시비비는 가려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비겁을 감추려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마저 있는 것 같구요.
E;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이지 않을까요. 실제로 공자는 여러 장면에서 시시비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거든요. 문제는 어떤 사람으로 되어 그렇게 할 것인가라는 테마라고 생각되네요. 이것은 시대를 넘어 오늘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 아닐까요.
F; 동감이에요. 진리나 의(義)를 끝까지 찾아 갈 수 있는 힘도 그렇게 될 때 가능하지 않을까요.
뭔가 자기의 상(像)을 가지고 버티고 있는 한 진리나 의에서는 그만큼 멀어질 것 같아요.
G; 어렸을 때 누가 언니 칭찬을 하면 언니를 배우고 싶은 것 보다는 셈이 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떤가 생각해 보면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언제나 충만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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