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간할 것 (幾諫) (제 4편 이인)

2007. 11. 11. 17:03사상·철학·종교(당신의 덕분입니다)/유교(儒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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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간할 것 (幾諫) (제 4편 이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를 섬기되 허물이 있거든 은근히 간할 것이니, 간함을 따르지 않더라도 더욱 부모님을 공경하며 수고로워도 원망해서는 안되느니라."
(子曰 事父母 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자유가 말하기를, "군왕을 섬기는데 자주 간하면 오히려 욕이 되고 친구를 사귀는데 자주 충고하면 오히려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가 살아 계시거든 멀리 떠나지 말 것이며, 혹시 먼 곳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곳을 알릴지어다."
(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부모님이 하시던 일을 바꾸지 않아야 가히 효자라 할 수 있느니라."
(子曰 三年 無改於父母之道 可謂孝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의 연세는 늘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편으로는 기쁘고 한 편으로는 두려우니라."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강독>

일견 효에 관한 공자의 말씀을 들으면 현대 사회의 여러 조건이나 현대인의 감각과 맞지 않다고 옛말로 치부해 버리기 쉽지만 잘 생각해보면 동서고금을 통해 실현되어야 할 인간의 도리가 잘 나타나 있다.
현대인의 감각과 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원인을 보면 이런 인간의 도리랄까 지향들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강요되어 현대인들의 자유욕구와 맞지 않게 된 것이 크다고 생각한다. 
인위적인 강요(도덕, 윤리)로 형해화되다 보니 오히려 부모 자식간의 자연스런 인정의 흐름이 방해받는 면이 있다.
이런 점을 떠나서 인간의 도리랄까 인정의 흐름으로 읽으면 어떨까.
기간(幾諫)은 비단 부모에게 대한 태도로서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충고할 때 어떤 심정이 옳은 것일까?
자신의 불평이나 비난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진정으로 그 허물을 고치기를 바란다면 그 심정은 기간(幾諫)하는 심정이라고 생각한다.
'간함을 따르지 않더라도 공경하는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것은 기간(幾諫)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권위에 눌려 있을 때는 그 강요된 권위에 의해 기간(幾諫)의 의미가 오히려 변질된 면이 있다할 것이나 오늘날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에 정말로 음미되어야 하지 않을까?
부모 자식 사이, 형제 사이, 부부 사이에서 먼저 연습해서 모든 관계로 확대해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26장도 읽어 진다.

노이불원(勞而不怨)도 그것이 도덕적 의무로 강요될 때는 심한 부자유감을 가져 오겠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사랑과 헌신의 숭고본능에서 나와 그것을 더욱 신장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인간으로 태어나 부모 자식의 인연을 맺은 것이 큰 축복으로 되지 않을까.
다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지나친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지금 우리들의 실태이기 때문에 합리적 가족관계와 사회보장 등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먼 곳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곳을 알릴지어다'라는 말도 현대인들에게는 대단히 번거롭게 들릴지 모른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부모와 자식 간에 문화 격차가 너무 크고 그 생활 영역이 달라서 이야기를 해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을 위해 이 말씀이 음미되어야 한다.
먼 곳에 간다는 말이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지 않고 생각이나 가치관을 포함해서 읽는다면 어떨까. 뭘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리는 것이다.
다만 부모로서의 도리는 자식을 자기 쪽으로 잡아 끌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부모로서는 자식을 풀어놓고 자식으로서는 부모에게 알리는 그런 관계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부모님이 하시던 일을 바꾸지 않아야 가히 효자라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은  당시의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하던 말이니까 현대에는 실제적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 받는 경우가 적기도 하고 물려 받는 경우라도 이미 자식이 그 경영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해당이 안된다고 생각하기 쉽고 심지어는 요즘 같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시대'에 무슨 케케묵은 이야기인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 있는 인간의 도리라는 점을 보면 시대를 넘어 공통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로부터 자식에 이어지는 자연스런 흐름을 생각해보자.
그 가풍이나 지향이 어떻게 이어지는 모습이 아름다울까.
이것은 비단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만 요구되는 덕목은 아니라고 본다.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서 어떤 이어짐으로 될 때 그 사회가 안정되고 진보할 수 있는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빨리 빨리'로 대표되는 급변하는 시대 속에 우리가 놓쳐 버리기 쉬운 귀중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이 구절을 읽는다면 좋지 않을까.

이렇게 부모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어질 때 부모는 오래 사실수록 좋은 것이 아닐까.
부모가 아직 건강하게 사시는 모습이 기쁘고, 한편 그 아름다운 인연이 다할 날이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대화>

 

A; 기간(幾諫)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제 경우도 다른 사람에게는 조심하면서 오히려 부모님에게는 막 하는 것 같아요.

 

B; 가족 안에서는 서로 참지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적나라한 모습이 나오는 것 같구요. 그러면서도 서로 사랑하니까 풀어지기도 하구요. 그래서 가족이야말로 도(道)를 함양할 가장 좋은 도량(道場)이 아닐까요.

 

C; 무언가 말씀을 드렸는데 들어주시지 않았을 때 어떤 마음이 되는가가 이 쪽이 어떤 심정으로 말씀드

렸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 같아요. 내 뜻에 따라 달라고 하는 심정이 많은 것 같아요.

 

D; 노이불원(勞而不怨)이란 말을 듣고 역으로 '원망하지 않을 정도로 수고해라'라는 말이 생각났어요. 사실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수고하는 것은 어느 편에도 좋을 것 같지 않거든요.
가족관계가 합리적으로 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E; 저는 전에는 부모님께 전화도 자주 안 드렸어요. 전화드리는 것이 뭔가 의무처럼 생각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가 잘 안되더라구요. 요즘은 가볍게 전화드리는데요. 제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 드리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시는 마음이 느껴져와요.

 

F; '3년을 고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3년이라는 기간이야 변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관계라면 뭔가 이어받고 고치는 과정에 순리가 있지 않을까요.
어떤 집단에서 전임자가 바뀌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전임자의 방식을 바꿔버린다면 예의가 아닌 것 아닌가요. 계속 전임자를 부정하는 듯한 이어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도 그런 점에서 생각되는 것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