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행적
용성스님(1864 -1740)은 1930년 묘향산 상비로암에서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할 때였다. 강백인 錦峯스님이 용성스님에게 물었다.
- 남전선사가 고양이 목을 자른 말을 하면서 조주선사에게 물었더니, 조주선
사는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남전선사를 돌았다. 남전선사는 "자네가 있었
다면 고양이 목을 베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는데 자네라면 어떠하시오?
: <문 앞에 선 한그루 소나무에 까마귀가 날아가자 까치가 와서 앉았습니다>
라고 대답하니 금봉스님을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서산 천장암에서 혜월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어디로부터 오셨습니까? "
<천장암에서 왔습니다>
혜월스님은 목침을 들어 보이며 "이것이 무었인가요?" 하고 물었다.
<목침입니다>. 혜월스님이 목침을 한쪽으로 밀쳐놓고는 다시 물었다.
"이럴 경우 어떻게 대답하겠소?" <모든 부처님이 광명을 놓은 곳입니다>
범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지만 두 선지식은 경계에 머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공부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1921년 구치소에서 출옥후 불경 한글번역에 열정을 쏟았고, <왕생가>라는
찬불가도 지어 조선의 독립은 교육과 교화를 통해 민족이 깨닫게 했다.
3-1운동 대표로 참여하였고, 1935년 종로 <대각사>에서 윤봉길의사에게
<삼귀의 오계>를 주면서 살신성인을 당부하기도 했으며 독립자금을 마련하
여 광복에 이바지 하였다.
어느날 그동안 여러모로 도와준 최 상궁에게 조선 왕가에 대한 고마움을 전
하면서 "다음 생에 소라도 되어 은혜를 갚겠다"하셨으니 虛名에 집착하는
우리 중생에게 던지는 경책이었다.
1940년 음력 1월 21일 제자 동헌 스님을 찾아서
"이제 절단나 버렸구나. 쇠에서 녹이 슬어 쇠가 상하게 되었구나"하시고
23일에는 "나는 내일 새벽 관음제일에 가련다. 수고 많이 하거라"하시고
다음날 스님은 "제자여 ! 대중이여, 그동안 수고했다"하고 미소지으시며
위의 임종게를 남기시고 원적에 들었다.
학교를 개설하고 어린이 포교와 문서포교에도 앞장 섰다.
九弟라 불리우는 동산 동암 동헌 인곡 운암 혜암 소천 고암 자운 등의
제자를 두었는데 모두 한국 불교의 중흥을 이룬 선지식들이다.
특히 도문스님은 인도의 룸비니에 사찰과 포교로 유훈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