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진리를 듣고 지혜의 눈을 뜨라!

2008. 12. 15. 17:1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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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구경(法句經) -03. 다문품(多聞品)
    제18장 맹종시득안 암자종득촉 역도세간인 여목장무목 盲從是得眼 闇者從得燭 亦導世間人 如目將無目 장님도 이것 쫓아 눈을 얻으며 어두운 이 이것 쫓아 촛불 얻는다. 그것은 세상사람 인도하나니 눈 가진 이 눈 없는 이를 붙드는 것 같아라. --------------------------------------------------------------------
  • 참 진리에 대한 믿음은 협박이나 강요 음모에 의해 얻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명상가나 이론가나 수행가라 할지라도 비판할 수 없고 비난할 수 없는 보편타당하고 인류공용의 합리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합당하게 바른 길로 인도 할 수 있는 것 이여야 한다. 그래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장님도 마음에 밝은 지혜의 눈을 얻을 것이며 어리석은 자 어두운 곳에 머무는 이도 이 참 진리를 듣고 촟 불과 같은 광명을 얻을 것이다. 마치 어두운 밤에 달빛을 의지해서 길을 찿아 가듯이 무명 중생들이 참 진리를 듣고 지혜의 눈을 얻어 바른 길을 찿아 궁극에는 해탈국토에 상주할 것을 목표로 삼고 수행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세속의 생멸법으로 궁극의 무생멸 상락아정의 도를 구한다면 그것은 팥을 심어 놓은 밭에서 가을에 메주를 담을 꿈을 구는 것과 같고 모래를 삶아 진찬을 얻겠다고 하는 헛된 소망과 같아 진겁이 지나가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비록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들뜨고 헛된 소망으로 헛된 결과만 남을 뿐이다. 그러면 무명이란 무엇인가? 12연기 오온 사성제 팔정(37조도법)에 대한 무지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무명 즉 어두운 것을 밝힌다는 것은 12연기 오온 사성제 팔정(37조도법)를 궁극에 이르도록 여실히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법을 듣고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상주 불명의 상락아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무심지덕
  • 정신은 우주 밖에서 노닐며 아무런 것도 없는

    자연의 세계에 소요하는 것이다.

     

     

    사군자_난_金正喜_不作蘭圖.jpg

     

     

    성긴 곳은 말도 달릴 수 있고 ,빽빽한 곳은 바람도 통하지않는다
    (疏可走馬,密不通風)는 것은 東洋畵의 가장 큰 妙處라고 할 수 있다

     

     

    사군자_蘭.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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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洋精神의 가장 함축성 있는 表現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흰 종이와 검은 먹이 이루는 담백한 맛이다.
    동양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양정신의 가장 함축성 있는 墨畵를 알아야 한다.
    수묵화(水墨畵)란 회화의 양식은 동양특유의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수묵화에 대한 개념(槪念)이

    매우 모호해지고 있는 경향을 대하게 된다.
    서양의 수채화(水彩畵 Water color painting )와 혼동을 할 때가 많다.
    수묵화를 Chinese ink painting 라고 표기하는 것이 더 가까운 표현이 되겠다.
    그리고 수묵화를 뎃셍이라고 명명하는 경우도 있다.
    서구 미술에 있어서는 특히 유화의 경우 밑그림을 그려놓고 그 위에
    유회구(油繪具)를 발라올리게 되어있기 때문에,
    이 밑그림이 되는 것을 보통 데셍이라고 하여 일종의 가벼운 기초회법인
    가벼운 콘데, 잉크, 연필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수묵화는 이런 의미의 데셍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독립되어

    완성된 작품으로서 서구의 데셍과는 본래  그 개념부터 다르다.
    여기에 동양과 서양의 회화발전의 차이가 있고 문명의 質的인 相違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는 西歐美術에서도 단순히 밑그림으로 그려진 준비단계로 보지 않고
    독립된 完成作으로 볼려고 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그림을 위한 준비단계의 그림이 아니고
    그것 자체로 完成되어 그려질 때가 많다.
    東洋의 水墨이 단순한 데셍이 아닌 완성된 그림이란 점과 상통되고 있다.

     

     

    사군자_野生菊.jpg

    수묵화란 무엇인가?


    수묵화는 묵墨이란 동양고유의 顔料와 종이,

    그리고 붓으로 이룩된 회화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묵墨과 종이를 사용하는 붓의 특성이 수묵화의 양식과

    서구의 諸繪畵와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을 형성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수묵화는 붓과 종이가 이루는 독특한 관계에서만이 형성되어질 수 있었다.

    묵은 한번 종이에 옮겨지면 그것으로 끝난다.
    수묵화란 단숨에 붓을 사용하여 완성하는 그림이다.
    단번에 붓을 사용하여 완성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수묵화의 제작은 노련한 단련이 필요하고 인내(忍耐)가 요구된다.
    이 수묵화의 一回性이야말로 단순화(單純化), 집약화(集約化)를
    달성시킬 수 있는 水墨畵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油畵는 중첩화(重疊畵),다양화(多樣化)할 수 있다.
    동양의 예술을 두고 精神的主觀主義(정신적주관주의)라고 부르고
    서양의 예술을 實證的唯物主義 (실증적 유물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런데 있다.

     

    수묵화의 이와같은 일회성(一回性)의 특성은
    일종의 禪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며,
    자연의 현실적 객관주의(現實的 客觀主義)를 버리고
    이상주의적 관념( 理想主義的) (觀念)의 세계로 빠지게 했다.
    동양화의 전체에서 나타나는 觀念性은 이런 사유에서이기 때문이다.
    수묵화에 대해서는 다음에...

     

     

    사군자_수묵叢菊.jpg 

     

    사군자란 동양회화상(東洋繪畵上)에서 매난국죽(梅蘭菊竹)을 말한다.


    君子란 명칭은 본래 재질과 덕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德이란 美德,德風,志德등을 총칭해서 부르는말로

    春秋戰國時代에 많이 유행하였던 말이다.
    四君子란 말은 본래 회화에서 사용했던 말이 아니고 인물을 가리킨 말이다.
    즉, 춘추전국시대에 孟嘗君(맹산군),平原君(평원군), 春申君(춘신군), 信陵君 등
    뜻이 높은 人物 네 사람을 골라서 그들의 덕망을 높이 받들기 위하여 부른 이름이다.
    회화에 이 말이 쓰이게 된 것은 매 난 국 죽이 고결하고

    지조높은 기개가 있다고 하여 앞서 말한 인물들의 이름을 모방한데서이다.


    식물에 있어 매 란 국 죽 송(梅蘭菊竹松)을 합하여 오우(五友)라고 하는데

    松은 산수화에 많이 이용되고 ,또 그리는 수법이 약간 특출하여 송을 제외한

    네가지 고결한 식물을 일컬어 四君子라 하였다.

     

    사군자를 역사적으로 관찰해 보면 지조 높은 선비와 많은 관계가 있다.
    즉,六朝時代의 玄學者들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있었는데
    이들은 굳은 지조로 속세를 등지고 은거생활을 하면서
    그들과 性格上 유사한 점이 많은 사군자를 그렸다.
    그러나 이 때의 사군자는 어떤 회화적 意義를 가지고 발전 것이 아니고
    대개가 鉤勒(구륵-윤곽선)과 색채를 사용한 볼품없는 寫實的인 그림이었다.

    사군자를 처음한 이는 당唐의 오도자(吳道子)라도 전하는데

    그는 단청화가(丹靑畵家)이면서도 순전한 수묵으로 竹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唐時代  帝王제왕 중에서 玄宗은 墨竹을 잘했다고 전해진다.
    당시대에 묵죽이 시작된 것만은 짐작할 수 있으며
    사군자중에서도 竹이 가장 처음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사군자_李霆_風竹圖.jpg

     

     

    한국에 있어서 문인화의 발달은 이미 고려시대에서 부터라고 보나
    성행을 본 것은 역시 이조중기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조(李朝)에 와서 文人畵가 발달을 보게된 직접적인 배경은

    척불숭유(斥佛崇儒)의 정책이다.
    직접적인 技術은 천대시하여 餘技로서 그리는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王을 중심으로 지배계층(支配階層)인 문인 사대부들의 취미로서

    묵화를 많이 다루게 되고 이 방면의 상당한 감식안(鑑識眼)도 늘어나

    문인사대부 사이에 수요층이 늘어났다는데서
    문인화 발달의 직접적인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화목(畵目)으로서 사군자가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이조 중기이후이며,
    이전까지는 그저 단순히 죽,매,난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역시 한국에 있어서도 사군자는 처음 화죽(畵竹)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이 梅 그림으로 중기엔 상당히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기에 오면서 남종화(南宗畵)
    가 화단의 주류를 이룸으로서
    자연 문인화의 성행이 병행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후기엔 특히 묵란이 유행했는데 秋史(추사 金正喜),大院君 (이하응李是應),
    芸梶 (운미 민영익閔泳翊)은 모두 이시대에 나온 난초의 대가들이다.

     

    사군자_閔泳翊_墨蘭圖.jpg

     

    사군자는 계절별로나누어 볼 수 있다.

     

    "대나무를 그리는 것은 초서를 쓰는 것과 같으니

    속될 것을 염려하지 청초한 것을 염려하지 않네.
    매화를 보는 것은 말을 보는 것과 같으니,

    뼈대로 하는 것이지 생김새로 하는 것이 아니네" -南宋의 강특립-

     

    '아직 매화보(梅花輔)는 보지 않았으나
    손가는 대로 그려내니 스스로 신(神)이 있네.
    뜻대로 안 되면 시험삼아 천만 그루를 보았나니
    동풍(東風)이 불면 곧 봄을 이루리.'        -서위(徐渭)-

     

    앞사람의 예술을 배우는 태도는
    그 마음을 배우는 것이지 자취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을  계승한 기초위에 자기자신의 독창성을 발휘 하여야만 한다.
    그림은 마치 봄바람이 불어오면 꽃이 저절로 피어나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법칙이 이루어져 신운(神韻)이 포함되어야 한다.

     


    난초(蘭)는 여름철(夏節)을 대표한다고 볼 수가 있다.
    난은 옛부터 심산 유곡(深山幽谷)에서 홀로 피어있는 고고한 식물이란 뜻으로
    옛부터 난을 비유하는 말로 유미인(幽美人)
    공곡유향(空谷幽香),군자가패(君子可佩), 왕자지향(王者之香) 등이 있으며
    그 향기는 특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난은 그 종류도 많을 뿐 아니라 재배도 까다롭다.
    대개 동양란과 서양란으로 대별되고 동양란은 다시 소심란(素心蘭),

    보세란(報歲蘭),건란(建蘭),석두란(石두蘭),학정란(鶴정蘭) 등이 유명한데
    특히 풍란(風蘭)은 한국 홍도에 밖에 없는 귀한 것이다.

     

    묵란의 시초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송대(宋代)의 문인인 정사소(鄭思消-所南) 조맹견(趙孟堅)등이

    묵란을 그렸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宋代엔
    상당히 묵란법(墨蘭法)이 성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末의 충신이요.그 시대의 문인이던 정소남(鄭所南)은 

    송나라가 망하고 원(元)나라가 들어서자 자기가 살 땅은 없다고

    개탄(慨歎)하면서 스스로 뿌리가 드러난 蘭을 그리기 시작했다.
    더러운  다른 민족(異族)의 땅(몽고족을 북오랑케라고 함)에

    蘭을 심지 않겠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일종의 반항정신이요.반체제의 예술이다.
    이렇게 해서 노근란(露根蘭)이 사란( 寫蘭)의 한 양식으로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 노근란을 정소남지유의 (鄭所南之遺意)라고 말하고 있다.

     

     

    사군자_楊輝_墨梅圖.jpg

     

     


    梅는 고결한 선비나 정절의 여인을 상징한다.

     

    아직 매화보譜는 보지 않았느나
    손 가는대로 그려내니 스스로 신이 있네.
    뜻대로 안되면 시험삼아 천만 그루를 보았나니
    동풍이 불면 곧 봄을 이루리        - 서위 -         
    徐文長集」,卷12 .「題花梅」.
    從來不見梅花譜, 信手拈目油神. 不信試看千萬樹,東風吹着俓成春.

     

    어떤 화가의 글에 매화의 아름다움이 절실하게 표현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수묵(水墨) 빛깔로 퇴색해버린 장지도배에 스며드는 墨痕처럼
    어렴풋이 한 두개 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이조 후기의 畵員이었던 양기훈(楊基薰)의 월매도(月梅圖)의 題엔
    한글로만.... 


    흰바탕 맑은 향기 기특도 하여
    어가의 낮은 울에 비끼었구려
    눈이냐 얼음이냐 정말 어여뻐
    차 마시는 자리에 가장 알맞네
    달이 밝아 동서의 그림자 뵈고
    봄이오니 남지,북지,분간 못할래
    더구나 밤 길고 서리찬 곳에
    흥그려 붓을 잡고 또 시를 쓰네.

     

    어떤 꽃이고 아름답지 않은게 있을까마는
    유독 매화의 아름다움을 동양인들이 더 높이 본 것은
    백화(百花)가 없는 빙설리(氷雪裏)에서 홀로 고고하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청정(淸淨)하고 무구(無垢)한 품격은 옛부터 高士나 君子로 비유되어
    時俗에 굴하지않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해 왔다.

    매화를 최초로 작품으로서 그린 작가는 唐의 변만(邊灣)이라고 하는 설이 있으나
    문인 묵객간에 모티브로서 유행을 본 것은 역시 송말의 文人畵의 왕성기에 이른다.
    이 후 明대의 왕면(王冕),淸대의 김준명(金俊明),...등과
    한국에 있어선 고려의 정지상(鄭知常),
    이조의 조희룡(趙熙龍),어몽룡(魚夢龍-國朝의 第一이라 불리웠다.)

    조희룡은 정조시대의 화가인데 매화에 얽힌 이야기로는... 
    매화를 특히 즐겨그렸던 그는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치고
    그 안에 누워서 매화백영(梅花百詠)을 짓는데

    벼루는 매화시경연(梅花詩境硯)을 썼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煙)을 써서 시구가 다 되면
    편을 지어 매화백영루(梅花百詠褸)라 하였다 한다.
    그림을 그리다가 목이 마르면 스스로 담근 매화편의 전차(煎茶)를 마셨다 한다.
    시종 매화와의 인연이 없이는 모든 것도 이룰 수 없는 지독한 매화 애찬가였다.

     

     

    '대나무 숲에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며 길게 읊조리는데,
    깊은 숲속에 아는 사람 없고
    밝은 달빛만이 조용히 비추이누나.'   -唐,王維-

     

    竹은 겨울철을 대표한다고 한다.
    사시로 청청 불변하는 상록수로서 그 탈속의 취향을 특히 문인들이 좋아하여
    사군자중의 군자로서 귀함을 받아왔다. 사시로 푸르고 또 곧고 강인한 줄기는
    옛부터 충신열사(忠臣烈士)와 열녀(烈女)의 절개(節介)에 비유하여 왔다.
    옛부터 문인 묵객(文人墨客)들은

    대나무가 가진 이같은 품성(品性)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겨왔다.

    서거정(徐居正)의 사가집(四佳集)에도 대나무는 굽지않고

    그 줄기가 유독 곧고 발라서 가히 천지간에 맑기가 으뜸이라고 말했다.

     

    사군자_鄭燮_蘭石圖.jpg

     

    죽은 언제쯤부터 시작되었는가
    당대(唐代)에 시작되어 송대(宋代)에 크게 유행하고

    원(元)대에 까지 계승된 묵죽은

    특히 원대에 와서 많은 뛰어난 대표적 명가들이 나왔다.
    이는 당시 남의 민족의 지배(外族治下)인 원(元)에 살던

    유목(流牧), 실향(失鄕)의 문인 묵객들이 스스로를 달래던 한 소재로서

    청고경직(淸高勁直)한 품성의 竹을 많이 택했다.
    이 때에 뛰어난 名家들이 많이 나왔었다.
    오중규(吳仲圭-梅花道人)라는 분은

    元末의 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竹을 50년을 그렸다고 한다.
    淸의 정판교(鄭板橋)도 50 여년간 蘭竹만을 그렸다고 한다.
    평생을 두고 대나무만을 그린 셈이 된다.
    특히 元의 대가들은 墨竹을 좋아해서 그 영향이 우리나라에도 미쳐
    李朝初期엔 이정(李霆),유덕장(柳德章)같은 이름난 화가가 나왔다.
    이정은 세종(世宗)의 현손(玄孫)으로 묵죽을 잘그려 동방의 제일 명가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엔 예부터 竹을 잘하는 것을 제일로 치는 관습이 있었으니
    經國大典에서도
    試竹,山水人物花草中  二才,  竹爲一等, 山水二等,人物翎毛  以上等而上之  各加其分」
    즉 죽의 작화를 산수,인물,화초 위에다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추사(秋史) 金正喜의 뢰운 묵죽화(雷雲墨竹畵)에도 「吾東傳工墨竹 畵科品在山水上」
    (우리나라에서는 묵죽을 전공하면 화과의 품등이 산수위에 있게 되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경국대전 속에 있는 말과 같은 것이다.

     

    죽은 일기와 생태에 따라 구분되니 청죽(晴竹)과 앙죽(仰竹),노죽(露竹)과

    수죽(垂竹),우죽(雨竹-垂竹),풍죽(風竹),미풍죽(微風竹), 월죽(月竹),

    월야죽(月夜竹),풍월죽(風月竹) 등으로 불리우는 이름이 그것이다.
    일기와 생태에 따라 그 작화법도 달라지고 있음을 유의해야한다.


     

     

    사군자_家庭菊.jpg

     

     

     

    文人이 그리는 四君子에는 네가지 갖추어야 할 문인화의 가치가 있다.


    이것은 기이한 것이 아니고 문인의 性靈과 感想을 발휘한 것에
    지나지않는다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문인화의 요소 가운데
    첫째는 人品이고, 둘째는 學問이며, 세째는 才情이고 ,네째는 思想인데,
    이 네가지를 다 갖춘다면 가장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사군자_拳石野菊.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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