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갈림/현각스님

2009. 3. 25. 10:5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어린왕자의들꽃사랑마을야화 

 

삶과 죽음의 갈림


미국의 뉴헤이번 선원에서 법문이 끝난 후였다.

누군가가 “큰스님, 마음이 공함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꼭 생사의 고통을 거쳐야 합니까?”

하고 질문 했다.

큰스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너에게 묻겠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삶에서냐? 죽음에서냐?”

“물론 삶에서 왔지요.”

제자가 대답했다. 숭산 큰스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삶에서? 삶이 뭔데?”

“제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다가 입은 뗐다.

“자아(自我)요”

“자아? 자아가 무엇이냐?”

제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큰스님께서는 컵을 들며 말씀하셨다.


“여기 물 보여? 아마 지금 18도쯤 될 거야,온도를 영하로 낮추면 물은 얼음이 되고

 100도쯤으로 올리면 수증기가 돼. 물인데 온도에 따라 형태가 생기고 없어지고,

 생기고 없어지고 이런다 이거야. 물에서 얼음으로 얼음에서 수증기로 바뀌고, 또 다시

 물로 바뀌어. 이렇게 형태는 변해. 그러나 H2O라는 본질은 없어지거나 생기지 않아.

 형태만 변해. 물, 얼음, 수증기, 다 이름과 모양일 뿐이야.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지만

 H2O는 변하지 않아. 물의 온도를 알 수 있으면 형태도 알 수 있어.

 죽음에 대하여 물었지? 너의 참나가 뭐야? 이건 너의 손이고 발이고 몸뚱이야.

 네 몸뚱이는 나고 죽어. 그러나 참나는 나고 죽지 않아. 넌 ‘내 몸이 나야. 이게 나야’

 라고 생각해. 아니야, 몸뚱이는 모양일 뿐 진정한 ‘나’가 아니라고.

 ‘나’라든지 ‘죽는다’ 라고 생각하면 그건 미친 짓이야. 깨어나!

 


 

 

 물, 어름, 수증기는 모두 H2O야. 그러나 물에 집착하면 물이 얼음으로 바뀔 때

 넌 물이 없어졌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면 ‘죽었다!’ 고 하겠지. 그러나 온도를 높이면

 ‘짜잔!’ 물이 다시 ‘태어났다’ 고 할 거야. 온도를 더 올리면 물은 없어지고 수증기가 돼.

 그렇게 되면 물은 다시  ‘죽게’ 돼.

 ‘물’ 이라는 것에 집착하지 마. 이름과 모양에 불과하다 이 소리야.

 이름과 모양은 본래 텅 비어 있어. 항상 변하고, 변하고, 변하기 마련이야.

 생각이 이름과 모양을 만들어. 물은 ‘나는 물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한 바가 없어.

 태양은 ‘나는 태양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한 바가 없어. 달은 ‘나는 달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한 바가 없어. 인간은 ‘물’ 이라고 말해. 인간은 ‘태양’ 이라고 말하고

 ‘달’ 이라고 말한다고.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름과 모양은 공하다 이거야. 자성이 없어.

 생각이 지어낸 거야, 생사도 마찬가지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면 H2O를 알 수도 없고

 물, 얼음, 수증기를 올바로 사용하지도 못 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는 것은 외형에 집착한다는 소리야.

 금강경에 보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常非常 卽見如來)’ 라고 나와.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런 뜻인데

 다 같은 내용이야. 그러니 모든 생각을 끊어. 모든 생각이 끊어지면 마음이 텅 비어.

 그러면, 일체를 있는 그대로 진리로 보게 돼.

 있는 그대로 보면 물의 올바른 쓰임, 얼음의 올바른 쓰임, 수증기의 올바를 쓰임을

 제대로 알게 돼. 이걸 다른 말로 실용(實用)이라고 해.

 아주 쉬워. 그렇게 되면 너의 ‘참나’ 는 찰나 찰나 중생 구제를 위해 올바르게 살 수 있어.

 그것이 바로 생사의 올바른 기능이야.“


제자는 깊이 머리 숙여 절하였다.

 

 

- 현각스님의 '부처를 쏴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