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8월 둘째 주로 이번 주 금요일이 무자년 백중기도 회향일입니다. 전번 칠석기도 때,
몇 분 보살님들이 오셨기에 해드렸던 간단한 소참법문을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산신기도다, 용왕기도다, 칠성기도다 하는 기도들은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기 전에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던 자연을 경외하고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순수한 영혼의 심성들이 하늘을 주관하는 칠성과 물을 주관하는 용왕과 대지를
주관하는 산신이라는 하늘과 땅과 물을 지배하는 지배자들로서 숭배했던 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고자 하는 심성의 발로였던 것을 현대 종교에서는
토템이니 애니미즘이니 샤먼이니 하면서 그 나라 민족들의 정체성이나 민속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유식한 외국인들이 자기들의 자연과학식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분류 방법으로 기준을 정해서 무속신앙이다 라고 해댔던 것을 기독교 사관이
이 땅에 수입되고 현대 교육을 받게 된 알량한 지식인들은 그런 말들이 진리인양
우리 것을 무시하고 우리 것은 다 고루하고 퇴보한 것들로 치부하는 어리석음을
지금껏 갖고 있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제 자연환경이 무너지면서
서서히 그 재앙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됬을 때, 이러한 민속신앙이 치성한 상황에서 불교화시켜
포용하는 방법으로 대지를 주관하는 산신과 하늘을 주관하는 칠성과,
물을 주관하는 용왕이라는 하늘과 땅과 물을 주관하는 신령들이라 하여 법당 뒤에
삼성각이라 해서 따로 전각을 세워 모셔두고 그런 토속신앙의 대중들에게
불교를 전하고자 했던 때문에 이러한 삼신신앙이 불교화 됐다고 종교사회과학자들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 위험한 발상입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질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도를 깨치신 후, 7일간의 침묵을 거쳐 삼칠일간 혼자서 우주법계에 대한
진리의 세계를 설하셨던 것이 화엄경이라고 알고들 계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조석으로 칠정례의 예불을 드리면서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 하면서
예경을 드립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석가여래께서 중생을 제도하시고자 시공을 초월해서 천 백억의
화신의 몸을 나타내신다는 대목과 “관세음보살님의 천수천안” 등의 의미를 우리는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교만심을 제도해주고자, 나의 어리석은 집착과 애착을 끊어주고자 남편의
몸을 빌려, 또는 자식의 몸을 빌려 아내를 통해 불보살님들은 화신과 분신과
응신의 모습으로 순경계와 역경계로 우리 곁에 다가와 분노와 배신감과
불타는 갈애로 번뇌하는 내 마음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가족 간의 갈등을
바라보게 되는 지혜를 주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순간부터
마음의 평화와 안락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 백억의 화신과 분신과 응신의 모습을 갖고 계신다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보십시요.
만고불변의 진리 당체를 형상화시킨 청정법신의 비로자나 부처님의 모습과
한량없는 원과 행의 과보로 인해 나타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이자 응신이자
보신이신 노사나 부처님의 모습과, 오취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알맞은
대상의 모습으로 화현하는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을 말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논리로 본다면 관세음 보살님과 문수보살님, 지장보살님 등,
온갖 불보살님들,칠성님과 산신님과 용왕님 등, 모두가 다 중생을 제도해주고자
근기에 맞게 변화되어 나타나신 여래의 화신인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마호멧까지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 볼 정도의
불교 종교관과 불교적 세계관을 이 시대의 불자들은 자신 있게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짱뚱이 뛰니 꼴뚜기도 뛰드라고 일본에서 독도가 지네 땅이라고 해대니
중국애들은 이어도가 지네 영토라고 우기고 있잖습니까?
자기 것은 자기가 지켜야지 왜 우리가 미국에서 우리 것임을 소리쳐달라고
눈치 봐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불자들도 중생을 근기에 맞게 제도하고자 나타나시는 이러한 천백억화신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이자 분신이며 응신이라는 경전 상의 이론으로 무장을 해서
불자들을 선교하려드는 기독교인들을 되려 불자로 만들려는 기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이번 칠성기도 때, 중생들의 현실적인 삶에서 복과 덕을 주관하신다는
일곱 분의 칠성님을 간절히 청해서 발원했던 그 분들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분이 자손들에게 만덕을 주신다는 북두제일의 탐낭성군이십니다.
둘째 분은 중생들에게 다가오는 온갖 장애와 온갖 난을 멀리 하도록 해주신다는 거문성군.
셋째 분이 중생들의 업과 장애를 다 소멸시켜 주신다는 녹존성군이 계시며,
넷째 분은 중생들이 구하는 것,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구해지고
얻어지도록 해주신다는 문곡성군,
다섯째 분은 중생들에게 다가온 백 가지의 장애를 다해서 없애주신다는 염정성군,
여섯째 분으로 중생들의 복덕이 구족해지도록 해주신다는 무곡성군이 계시며,
일곱째 분은 아무리 재물이 많고 명예가 있다해도 건강이 무너지고 말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중생들에게 가장 소중한 수명과 무병장수를 주신다는
파군성군이라는 일곱 분의 화신이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곱 분의 칠원성군님은 지극히 현실적인 중생들의 염원을 구족하게
해주시는 분들이건만 이번 칠성기도 때 동참 하신 분들이 별루여서 그동안
기도들을 많이들 하셔서 더 원하는 게 없나보다 생각했습니다.
백중기도 회향일이 금요일 인지라 백중법문은 그 때 하기로 하고
전번에도 제가 잠시 언급했던 최면을 배우시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그 스님께서 전화가 와서 제게 묻기를 수행을 잘했다던 스님도 죽으면
영가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주착하는 경우도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길, 그동안 스님이 봐오셨듯이 사람들에게 빙의라 하고
접신 들렸다 해서 다른 영가가 씌운 것을 많이 보셨겠지만,
어찌 사람의 혼만 사람에게 붙겠느냐, 재물을 가득히 쌓아두고, 써보지도 못하고
평생을 아끼고만 살던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남겨진 재물에 주착이 되어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다가 사람에게 주착이 되기도 하지만, 평소에 사람을 잘 믿지 못하던
습성이 있어 사람에게 빙의되질 못하고 집안에 터전잡은 쥐나 고양이의 몸에 실려
밤낮으로 들락거리고 눈에 불을 켜고 밤마다 돌아다니게 되고, 심지어 낯선
개의 몸에 주착이 되어 그 집에 굴러 들어와 제 집 마냥 지키고 낯선 사람이 오면
으르렁거리고 하는 게 다 그런 영가들이 축생들에게 주착되어서 그리된다고
옛날 큰스님들께 들었던 바라고 해주었더니 그 스님의 말이 어떤 남자 환자가 왔는데
최면이 깊이 들어가자 어떤 스님의 혼이 나왔는데 제방의 선원에서
안거도 많이 하고 평생을 참선을 했노라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참선공부를 한 스님도 죽어서 그렇게 주착이 될 수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대답은 당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으십시요.
전번에 살아생전에 인과를 짓고도 극락에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한 호흡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에 나무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집중해서
백팔 번을 쉬지 않고 염불하기를 이레동안만 하신다면 극락에 바로 가실 수 있다고
법문해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어려우시다면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으시고 그대로 따라서
수행하신다면 이 목숨이 끊나고 나서 전도 몽상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기도라도 좀 해 볼려고 맘을 내서 틀고 앉아 있으면
불과 몇 분의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평소에는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던 누구와 싸웠던 기억,
불쾌했던 추억, 장보러가서 콩나물집 할매와 다퉜던 일들,
작은 집 동서와 맘 상했던 불쾌한 기억들이 억수로 떠오르기 시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정화되지 않고는 죽은 다음에 우리의 영혼은 지향성에 의해
실 끊어진 연처럼 살아생전에 온갖 것들과 온갖 인연들에 대한 불쾌,
유쾌한 기억들과 앙금이 된 번뇌와 갈애의 기억들이
자기 스스로 살아생전에 만들어 가졌던 불길들이 자신의 영혼을 태우는
지옥 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현실 속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내면에서 겪는
마음 고통들이 금생에 살아생전에 털어내지 못하고 죽게 되면 평소에
전혀 기억도 없던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서 드러나 자신의 영혼을 살아생전에
스스로 만들었던 온갖 번뇌와 갈등으로 만들어 가졌던 증오심과
마음의 불길들이 죽어 영혼을 스스로 만든 지옥불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생전에 마음의 번뇌와 증오와 집착과 애착을 벗어버리지 못한
그런 영혼들에게 이렇게 백중날에 부처님의 무상법문을 들려주어
이생에 대한 애착과 집착과 번뇌의 불길을 다 잠재우고 털어버리고
해제라 벗어나라는 뜻으로 백중기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중생들, 지금 이 자리의 여러분들이나 저나 살아 있는 현재의
우리는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제게 이런 법문을 들으며 스스로를 살아생전에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수행법을 새겨들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듣고도 하지 못함은 자신의 탓입니다.
수도꼭지로 나온 물을 호스를 통해 항아리에 넣을 때, 물이 뱅뱅 돌 때는
항아리 바닥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지만 물을 다 받고
고요히 잠긴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면 바닥이 훤히 보이면서
밑에 잠긴 자갈이나 모래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나 참선을 좀 해볼라치면 평소에 휘돌아 감던 안이비설신의라는
육근이 육경을 대하면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사물과 현상을 정확히 볼 수 없도록 했지만
고요히 의식이 가라앉으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온갖 분별과 기억과 추억과 잠재의식들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때,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잠재의식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 화두일여로
한다고 해서 바닥에 있는 잠재된 기억들이 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답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떠오르는 잠재의식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다시 그 기억에 빠져 든다면 헤어날 길이 없지만,
그러한 모든 잠재의식들이 떠오를 때 마다 서로가 원결이 맺혔던 맺었던 간에
그 대상을 향해 진실로 축원해주고 떠 오른 그 원결이나 잠재의식이
소멸될 때까지 지극하고 간절하게 마음 안에서 한 티끌도 남지 않을 만큼의
지극 간절한 축원을 해주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지옥의 불구덩이도 면할 수 있고 심지어 소멸시켜버릴 수도 있으며
어두움을 향한 지향성을 끊어버리고 인연업보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다겁생래의 온갖 맺힌 인연들을 향해 간절하고 지극하게 축원해줄 수 있는
그렇게 해줄 수 있는 기도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 때마다 제가 강조하는 자비참법기도입니다.
자비참법기도를 꼭 힘들게 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불편해서
마음은 간절해도 못 하신다는 분들은 생각을 바꾸십시요.
왜 금강경이나 법화경은 사경도 잘하고 독경도 잘들 하시면서
자비참법은 소리 내어 독송을 할 생각을 못하십니까?
기도는 쌍촛대 벌려놓고 청정수 떠 놓고 해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려는 내 마음이 간절하고 지극하다면 그걸로 족한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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