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매일 매일이 초파일 하루처럼만 같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일 것입니다.
저희 중생이 다겁생래에 훈습된 습기로 벌어지는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신구의 삼업으로 벌어지는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입으로 만들어내는 네 가지 업, 생각으로 만들어 가지게 되는 세 가지 업들이 밝고 선한 업 쪽으로 가지를 못하고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고 살아가면서 훈습된 오욕과 칠정으로 어둡고 탁한 기운으로 열 가지의 업을 만들고 살아왔기에 이 훈습된 악업을 소멸하고자 한가지 악업마다 참괴하고 소멸시키고자 백일 씩 끊어서 천 삼십일 기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십악 중에 살생업장을 참회하고 소멸하는 첫 번째 백일기도 때는 못했지만, 남의 것을 욕심내고 훔치고 남의 물건을 아껴주지 못하고 쉽게 낭비해버린 업을 소멸하는 두 번째 백일기도인 투도업장소멸 기도 땐 매월 말일에 당일로 자비참법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백일 동안 세 번의 자비참법기도를 하는 셈입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2박 3일로 하는 기도를 우리절에서는 당일치기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참법기도는 5월 31일 오후 4시 경에 시작하여 6월 1일 새벽 4시에 마쳤습니다.
불확실의 미래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자신에게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과 희망이 내 안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당일치기로 밀어부처 해내는 실천수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해보시고 나면 스스로 아! 하길 잘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 것이고, 이런 실천 수행을 십악참회를 하는 기도기간에 해보고서 자신과 가족들 모두의 삶이 달라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악을 참회하기 위해 매월 자비도량참법 기도를 하고 있기에 이 기도의 유래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6월 달은 참회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수행이든 철저한 자기반성이 전제돼야 수행이 제대로 이뤄지는 것이고 그럼으로 온갖 것에 대한 발원도 세울 수 있고 용맹정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독송하는 천수경에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요,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 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라” 했듯이 “죄든 업이든 이것들은 자성이 없습니다.”
다만 헛된 마음이 삼독심을 쫒아 일어나는 망상일 뿐이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쌓아온 죄라도 한 생각(一念)에 없어질 수 있다고 천수경에 있기에 우리는 독송하는 것입니다.
참회수행이 공성품의(空性品) 논리에 입각해 마음을 본래 자기 자리로 되돌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일념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잠시 정신을 집중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시공을 통과하고 삼천대천세계를 꿰뚫어버릴 수 있는 “삼매의 일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삼매는 꼭 참선을 해야만 성취하는 화두삼매만이 아니고 염불삼매를 통해서도 언제든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 선사는 육조단경에서 “영원히 번뇌 망념을 짓지 않고 끊어버리는 것이 참회”라며 무상참회법문을 말씀하시며, 참(懺)이 자기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라면, 회(悔)는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라고 밝히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참회는 자기발원(發願)인 셈인 것입니다.
이 같은 참회수행법은 천태지의 대사가 제시한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의 수행법에 나타나는데, 사참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으로 지은 죄업을 참회하기에 보통 수사분별(隨事分別)참회라 하고, 이참은 이치의 실상을 보고 죄를 멸하는 참회로 관찰실상(觀察實相)참회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참은 제법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자성이 공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사참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업의 제거를 위한 참법인 셈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참회한다’는 것은 이 사참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진정한 참회는 단순한 기복차원의 자기 속죄가 아니라 죄의 실체가 없음을 바로 알아 우리의 자성을 밝히는 것이지만, 참회는 모든 수행의 기본이기에 먼저 사참을 통해 이참의 세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천일기도 중에 계속하게 될 자비참법 기도이기에 이 기도법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유래를 말씀드리자면, 중국의 양 무제가 황후 치씨의 천도를 위해 스님들께 청하여 만든 기도법으로, 치씨가 죽은 후 수개월이 되도록 무제는 슬퍼하여 낮에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나타나 무제를 바라보고 있어 무제는 크게 놀랐으나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뱀이 사람의 말로 임금에게 말하기를. “저는 옛날의 치씨옵니다. 신첩이 살았을 적에 육(六)궁들을 질투하며 성품이 혹독하여 한번 성을 내면 불이 이어나는 듯, 활로 쏘는듯, 물건을 부수고 사람을 해하였더니, 죽은 뒤에 그 과보로 구렁이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폐하께서 총애해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이 누추한 몸으로 폐하의 어전에 나타나 간청하오니 무슨 공덕이든 지어서 제도하여 주시옵소서.”하자, 무제가 듣고 황망함에 흐느껴 울다가 구렁이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고, 이튿날 무제는 이 일을 지공스님께 의론하자 지공스님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참법(懺法)을 정성스럽게 행해야 합니다.”하자, 무제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스님들에게 청하여 여러 불경을 열람해 명호를 기록하고 생각을 펴서 참회문을 지어 독송하자, 그러자 궁전에 향기가 진동하고 점점 주위가 아름다워지면서 용모가 단정한 천인이 나타나 무제에게 말하기를 “저는 구렁이의 후신입니다. 폐하의 공덕을 입어 이미 도리천에 왕생했사오며 이제 본신을 나타내어 영험을 보이나이다.” 하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이 이후부터 무제는 불교를 극진히 옹호하면서 이 참회기도법을 널리 후세에 전하고자 해서 지금껏 존재하고 현재 우리가 실천 수행하는 참회기도법이 된 것입니다.
자비도량참법의 구성을 살펴보면,
제 1권에는 삼보께 귀의하는 귀의삼보, 의심을 끊는 단의, 참회의 힘을 서술한 참회가 이어지고, 제 2권에는 힘써 정진하자는 발보리심, 서원과 깨달음으로 모두 성취케 하기를 바라는 발원과 부처님께 귀의하는 발회향심, 제 3권에는 현세의 과보를 통해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원을 세우고, 제 4권에는 보살도를 실천 행으로 지옥의 고를 면하는 출지옥, 제 5권과 제 6권에는 원결을 풀고 정각을 이루자는 해원석결, 제 7권에는 원결이 없어져서 스스로 기뻐하는 자경의 내용과, 모두가 큰 원을 세우자는 총발대원, 모든 하늘과 신선을 받들자는 봉위천도 예불, 제 8권에는 아수라, 용왕 등 다양한 경계의 신들이 부처님을 신봉하는 발원인 봉위 아수라도 일체 선신예불, 봉위용왕예불, 봉위 마왕예불 봉위 부모예불, 봉위 과거부모예불등이 이어지고 제 9권에는 천상과 수라, 인간과 지옥 아귀 축생의 육도 중생을 위한 예불과 발원, 그리고 마지막 제 10권에는 보살회향법과 부처님과 함께 불국토에 나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발원인 촉루로 끝맺고 있습니다.
참회수행을 통해 참회란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고 다시는 범하지 않으며 새로이 거듭 태어나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진정한 참회”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믿음과 감동을 주고 삶의 새로운 힘을 주며 거듭 태어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줄 수 있는 기도법은 바로 참회인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이참과 사참의 길을 제시해주셨기에,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온갖 뒤안길을 되돌아볼 때, 즐거움 보다는 괴로움이, 행복보다는 어려움이 더 많음을 인과의 도리를 통해 절실히 인정하고 이참과 사참으로 알게 모르게 다겁생래에 지어온 자신의 허물들에 대한 참회발로를 하고서 그런 다음에 말과 몸으로 사죄하고 참회하는 것을 진정한 참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참과 사참이 동시적으로 실천될 때 자기 자신의 삶은 한층 업그레이드 될 것이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도 도덕성을 성취하고 불자로서의 진정한 깨달음도 얻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다 함께 깊이 새겨들어라.
그대들이 의지할 수행법은 주로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닦도록 하여라.
그것은 첫째로 신념처(身念處)로서, 이 육신은 살과 뼈와 피와 고름 등 여러 더러운 것들이 인연 따라 잠시 모인 것이니, 부정(不淨)하다고 관찰하고, 둘째는 수념처(受念處)로서, 중생들이 낙(樂)이라고 여기고 집착하는 재물이나 음행이나 권속이나 권세 등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필경 고통의 결과를 맺는 근원으로 관찰하고, 셋째는 심념처(心念處)로서, 인간의 마음은 잠시도 쉬지않고 항시 전변(轉變)하여 마지않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찰하며, 넷째는 법념처(法念處)로서, 일체 모든 것은 허망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實體)가 없고 자재(自在)로운 것도 아니니, 나(我)라고 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이며, 나의 소유란 아예 없는 무소유(無所有)임을 관찰하도록 하여라” 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소유권이란 없습니다.
모두가 살아 있는 동안 “내 것이다” 하고 살지만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하는 일시 점유권이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과 돈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지만, 사실은 한시도 쉬지 않고 들여 마시는 이 공기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그냥 공짜로 주는 것이고, 그냥 주는 물을 오염시켜가며 스스로 자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존께서 남기신 사념처관을 새겨들어 일상에서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야 할 것이고 “나다, 내 것이다”라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 지셔야 할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